살면서 여러 갈래의 길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길을 선택함에는 늘 희비가 엇갈렸다. 어릴 적엔 논밭두렁 멋대로 구부러진 길을 놀이터 삼아 자랐다. 고모댁에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시내의 길과 집들은 모두 낯설지만, 신기했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내 부모님은 왜 힘든 농사일만 하고 시내에 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최숙인
살면서 여러 갈래의 길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길을 선택함에는 늘 희비가 엇갈렸다. 어릴 적엔 논밭두렁 멋대로 구부러진 길을 놀이터 삼아 자랐다. 고모댁에서 중학교 다닐 때부터 익숙한 환경을 벗어나 적응하느라 힘들었다. 시내의 길과 집들은 모두 낯설지만, 신기했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내 부모님은 왜 힘든 농사일만 하고 시내에 살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은퇴 선물로 자전거 선물을 받았다. 나는 자전거를 제대로 탈 줄 몰랐다. 남편은 장안공원이나 수원종합운동장 주차장 주변에서 자전거 강사가 되어 잡아주고 밀어주곤 했다. 내가 조금씩 자전거를 타게 되자 함박웃음으로 좋아했다. 아이들이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흐뭇해하던 젊은 날의 내 모습을 보는 듯했다. 환갑이 넘은 부부의 자전거 연습은 한 달이 가기 전에 혼
어머니는 늘 쉼 없이 움직이셨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무얼 그리 하시는지 그 모습을 하나하나 뚜렷이 떠올릴 수 있으며, 특히 웃음 짓는 표정에서 눈물 글썽이던 모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들을 아련하게나마 되새길 수 있다. 그중에서도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깊은 밤 목욕재계하고 하얀 대접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두
호주제가 폐지된 지도 한참 세월이 흘렀다. 당시에 이 사안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본다. 나는 아직도 이에 해당하는 문제에 연루된 게 없어 잘, 잘못 되어 가는지에 민감하지 못하다.예부터 우리나라는 불교와 유교 문화를 이어 오면서 남존여비 사상으로 씨족이 형성되어 이어져 왔다. 성(姓)을 하사받고 시조(始祖)가 정해지면 그 성씨를 중심으로 가계(家系)
따뜻한 녹차를 숨 깊숙이 들이마신다.한 모금, 두 모금, 세 모금…. 몸으로 들어가자 더위도 식고 몸이 열린다. 장마가 끝나고 습한 더위로 가마솥처럼 달궈졌던 나는, 더위가 먼 과거의 일이었던 것처럼 마냥 편하게 하릴없이 부드럽고 따듯한 차를 즐겼다.절 주인은 꽃처럼 지긋한 미소와 꽉 찬 정성으로 차를 만들어 찻잔이 비면 따라주기를 반복한다. 나는 차를 한
단체여행객들 팀에 낀 문우와 나는 짧은 베트남 여행을 마쳤다. 비록 처음 방문한 낯선 땅이고 주마간산 격이었지만 우린 그런대로 흡족해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마지막 여행지인 이웃 나라 캄보디아로 날아가 첫 목적지인 시장을 둘러본 것은 오후 다섯 시쯤이나 되었을 게다.가이드가 우리 여행객을 안내한 곳은 서울 남대문이나 동대문 시장처럼 번화하진 않되 꽤 큰
나는 철원 들녘에 사는 두루미입니다.“사람들은 저마다 이름이 있어. 우리도 각자 이름을 짓는 게 어때?”길라잡이 두루미가 이런 말을 하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도 이름이 없었습니다.“그것 참 좋은 생각이야. 난 재학이라고 할래.”“재학이? 그게 무슨 뜻이야?”내게 늘 곁을 주던 친구가 물었습니다.“우리 두루미를 사람들은 학이라고도 부른대. 잿빛 두루미라는 뜻이
교문을 나선 윤구는 집이 아닌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공원은 숲속 도서관과 나무숲이 있어 체험학습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고, 공원 근동의 아파트 주민들이 너나없이 즐겨 찾는 곳으로, 바로 옆 학교 학생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이제, 아름답게 단풍졌던 공원의 숲은 썰렁했고 을씨년스러웠다. 쓸쓸해 보이는 공원의 벤치를 찾아 웅크리고 앉은 윤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
등장인물_ 서연|민준|지훈|예진|형사|후드티 외 무대에는 탁자와 의자 4개가 있다. 서연 (나오며)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투명인간으로 지냈습니다. 있으나 없으나 한 사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 모르겠어요. 돈 없으면 죄인처럼 고개가 숙여져요. 아뇨, 돈 없으면 죄인이죠. 예진, 선생님, 엄마,
1. 읽기의 근거가. 젊은 세대식민지 절정기인 1940년대 소설 이근영의 「고향 사람들」(1940)과 곽하신의 「신작로」(1940)까지만 해도 마을에는 사의 세계를 떠올리는 상여집 또는 신당 하나쯤은 마을 입구 또는 외진 곳에 있었다. 북해도 탄광 노동자로 가기로 한 젊은 농민들은 송별연을 마치고 풍물패를 앞세워 춤을 추면서 성황당 앞에서 “그저 대판을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