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을 돌아보면 나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계기가 있다.하나는 중학교 2학년, 열네 살의 일기장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10 년 후, 시골의 중학교에 입학한 여자아이는 몇 명 안되었다. 대부분 초등학교 1∼2학년 다니다가 중퇴하고 집안일을 돕거나 도시의 아이보개로 돈벌이를 떠났다. 나라 전체가 가난하던 때인지라면 소재지에 있는 시골 중
- 이혜선
지난날을 돌아보면 나의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두 가지 계기가 있다.하나는 중학교 2학년, 열네 살의 일기장이다. 6·25전쟁이 끝난 지 10 년 후, 시골의 중학교에 입학한 여자아이는 몇 명 안되었다. 대부분 초등학교 1∼2학년 다니다가 중퇴하고 집안일을 돕거나 도시의 아이보개로 돈벌이를 떠났다. 나라 전체가 가난하던 때인지라면 소재지에 있는 시골 중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늦게 입학한 대학에서 원하던 공부의 깊이에 몰입해 가던 즈음 나는 늦은 나이임에도 결혼에는 관 심이 없었다. 한길만 보고 나가는 나를 그이는(지금의 남편) 졸업 후 대만에 유학 가서 같이 공부하자는 계획으로 솔깃하게 했다(그때는 중국과 수교 이전이어서 대만과만 교류가 가능했다).어느 날 명륜동을 지나가다가 발견했는데,
플라타너스 나뭇가지가 떨어뜨리는 가을의 잎새들이 툭툭 여기 하나 저기 하나 보도블록 위에 슬픔처럼 내려앉는다. 어른 손 바닥 크기보다 큰 누렇게 마른 잎을 마주하는데 바스스 누군가의 발끝에 밟히는 조락의 슬픔을 들을 수 있었다. 그토록 작열하던 2024년의 여름이 비로소 고개를 숙였다는 증거이다. 급격히 계절의 틈을 비집고 들어선 변혁의 웅비를 꿈꾸는 개척
시우는 만 네 살 한국 나이로 다섯 살인 남자아이예요. 직장 맘인 엄마 대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돌봐줘요.“싫어! 오늘 유치원 안 갈 거야.”가끔 유치원에 도착해서 들어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기도 해요.“어휴, 저 떼쟁이!”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합니다.어느 날부터 시우가 말끝에 꼭 ‘요’자를 붙여요.“할아버지 공원 가자요.”“할머니 나
초인종 소리가 길고 짧게 들립니다. 소꿉놀이에 한창 떠들썩 했던 민이와 수는 후닥닥 일어납니다. 앞치마를 두르고 엄마 노릇을 하던 민이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아빠 흉내를 내며 놀던 수는 장난감을 버리고 출입문으로 달려갑니다.“누구세요?”“엄마다!”“야, 신난다.”둘이는 서로 달라붙어 먼저 문을 열려고 한동안 승강이를 벌입니다. 문이 열렸습니다.“엄마,
오늘 아침에말씨 한 알 심었어 ‘엄마 사랑해요’ 큰소리로심었더니 금세엄마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어 너도 한 번 심어 봐
얼음장 같은땅 뚫고 나온 새싹저도 작가가 되고 싶었나 봐 새싹 샤프심으로 쏙쏙 뽑아 올려땅속에서 읽고 온 이야기들 줄줄 써내려 동시집 엮어 땅속 소식 궁금해 하는아이들에게 읽어 주려나 봐.
4∼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자신보다도 덩치가 큰 아들을 업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속리산을 오르는 장년 남성을 한 공중파 방송이 방영하고 있었다.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감이, 이들을 따라 가며 촬영하는 기사의 거친 숨소리와 중첩되며 긴장감을 증폭시켜갔다.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놀라운 장면에 아연해하며 길을 터주었다. 업혀 있는 아들은 첫눈에 보아
4∼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자신보다도 덩치가 큰 아들을 업고 비 오듯 땀을 흘리며 속리산을 오르는 장년 남성을 한 공중파 방송이 방영하고 있었다.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감이, 이들을 따라 가며 촬영하는 기사의 거친 숨소리와 중첩되며 긴장감을 증폭시켜갔다. 지나치는 등산객들이 놀라운 장면에 아연해하며 길을 터주었다. 업혀 있는 아들은 첫눈에 보아
매년 새 학기 초가 되면 학교에는 교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아 떠나기도 하고 신입 교사가 부임하는 등의 작은 이동이 있곤 한다.짧지 않은 기간 동안 서로 마음을 열고 친밀하게 지냈던 동료가 자신이 나고 자랐던 고향 근처의 학교로 근무지를 옮기게 되었다. 급작스럽게 이별을 하게 되어 기억에 남을 만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무엇으로 할지 이런저런 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