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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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9년 경남 함양군 소재 마천초등학교 6학년 국어 교과서에 나와 있는 노산 이은상 시조 「앉은뱅이」에 어린이로서 감동을 크게 받았다.
중·고·대학 시절에도 국어 교재에 수록된 시와 시조에 심취했다. 대학 1학년 때 1958년 부산 문우들과 부산날개문학회를 조직하고 문학 활동에 힘을 쏟았다. 대학 졸업 후 입대한 진해 해병 근무 중에 시 창작을 하고 제대 후에 중·고교 교편을 잡으면서도 꾸준히 습작에 각고의 피와 땀을 쏟았다.
대신고교 재직 시 이태극 박사의 서문 지도를 받으며 『짚신사랑』 첫 시집을 냈다. 시조단에 등단되어 어느새 문단 이력이 반세기를 넘었다. 대학에도 출강하며 문학 개론을 강의했다. 문단 제자를 길러내며 1999년 제80회 3·1절 날 3·1 정신, 한글 정신, 짚신 정신을 문학 정신으로 삼으며 짚신문학회를 창립하여 꾸준히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부르고 있다.
『짚신문학』 발간 시 낭송 행사를 하며 우리 말 우리 글 우리 얼 사랑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문인이 되고자 문학 활동을 하던 1950년∼60년대는 시인이 되려면 3회 추천을 받아 시단에 올랐다. 길게는 5년까지도 걸렸다. 문단 인구도 빈약했다. 오늘날은 전국적으로 문예지가 많아 비교적 쉽게 등단된 문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2025년 한국문인협회 발행 문인 주소록에는 2024년 12월 18일 현재로 전체 문인이 15,893명에 이른다.
문인은 그 시대의 등불이요, 나라의 선구자로 존경받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나는 글을 쓰는 선비 문인들이 먼저 겸손하게 철학자 독일 니체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가슴에서 샘솟는 피로 생명 같은 명작을 창작해 주면 좋겠다. 작품은 반드시 각고의 고뇌를 거쳐 창작해야 감명 깊은 미적 작품이 된다. 릴케가 시는 체험이라 했으니 가치 있는 자기 체험이 잘 시로 승화되어야 한다.
청록파 시인의 하나인 조지훈 시인이 1939년 일제강점기 『문장』에 추천받은 「승무」 작품은 3년의 사고와 관찰의 피와 땀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오로지 시작 생활만 하신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대표작 「해」가 있다. 중·고교 국어 교과서에 「소나기」 「학」이라는 단편을 게재한 황순원 작가는 소설만 쓰셨다. 두 분 다 문단 벼슬, 사회 벼슬을 다 거절한 학자 시인 작가로 겸손한 문단의 스승이었다.
오늘날 자기 자만에 빠진 문인들은 자기 주제 파악을 잘하고 글과 사람이 하나 되게 겸손하게 글을 써야 할 것이다. 지난해는 연세대 국문과 89학번 한강 작가가 우리나라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여 우리 한글 한국어를 세계에 해와 같이 빛냈다. 「채식주의자」 소설로 2016년에 노벨상에 해당하는 영국의 맨부커상을 먼저 받았다. 소설로 받은 2024년 노벨문학상은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이 두 작품이 “역사적 상처에 직면하고 인간 삶의 취약성을 노출시키는 한강 작품의 시적 산문”이라고 스웨덴 엔더스 올슨 심사위원이 평가했다. 한강은 아시아에서는 여성으로 첫 노벨상 수상자이고, 세계적으로 121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서는 18번째로 알려졌다. 한강은 연세의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국문과의 외솔 최현배, 한결 김윤경 교수의 국학 정신을 잘 이어받고, 연세 출신의 시인 윤동주의 순국시 정신도 이어받은 한국 문단 한글 문화를 세계에 크게 빛낸 그 감격적인 공적이 우리 한국 문인들의 긍지를 높게 심어 주었다.
약 1만 6천 명의 우리 한국 문인들은 제2, 제3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길 기대하며 남북 8천만 겨레의 스승이요 순국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가 작사한 애국가를 4절까지 다 불러 애국가 정신이 투철한 한국 문인들이 되길 바란다.
도산은 가난한 농부의 셋째 아들로 1878년 11월 8일 평남 강서에서 태어났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엄한 유학자 할아버지와 서당에서 어려서 한문 공부를 했다. 신학문을 배우러 서울로 갈 때 평양의 거리에서 청일전쟁이 일어난 것을 개탄하며 서당에서 사귄 선배 필대은과 토론하며 이것은 나라의 힘이 없어 일어난 일이니 나라가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울에 와서 구세학당, 일명 언더우드 학당에 입학하여 언더우드 선교사 제자가 되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언더우드 스승의 조교로 일하다가 평양 고향에 가니 서당 훈장 이석관의 13세 딸 이혜련과 약혼이 되어 있었다. 서울 정신여고로 진학시켜 6년 만에 졸업하자 제중원(현 세브란스병원)에서 밀러 목사 주례로 혼례를 치르고 바로 교육학 전공차 미국으로 떠났다.
도착한 샌프란시스코 교포들이 무지하여 주거 환경을 개선하게 가르치며 공립협회 조직, 공립신문(뒤에 신한민보)을 발간하며 교포 지도를 잘했다. 나라의 독립 일꾼을 교육으로 양성하려고 노동판에 뛰어들어 귤 하나를 따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라 했다. 미국 온 지 5년 만에 을사오적이 을사늑약을 체결, 통감부가 설치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어 고종이 퇴위 압박을 받는 조국의 위기를 느낀 도산은 1907년 2월 20일 제물포항으로 귀국하여 애국 비밀 단체 신민회부터 만들었다. 전덕기, 양기탁, 이승훈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정세 파악차 3월 초에 들른 선천 예배당에서 찬미가 소리를 듣고 영감을 얻어 그 길로 평양에 올라가 이틀 금식 기도하고 4계절을 배경 삼아 기승전결법 구성으로 “동해물과 백두산이∼” 애국가를 4절까지 창작해 선천 예배당에 보냈다. 영국 민요 <올드 랭 사인> 곡에 얹어 부르는 애국가는 선천 일대 애창곡이 되었다.
이 애국가 기사는 당시 대한매일신보 3월 20일 자 기사에 미국에서 온 안창호가 국기 배례하고 서서 만리현 의무균명학교 학생들과 애국가를 합창했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도산은 1908년 자기가 세운 평양 대성학교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열심히 부르게 했다. 일제가 억지로 꾸민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가 1912년에 해체되자 도산은 거국가를 남기고 미국으로 갔다.
대한인국민회를 통해 교포들이 단결하게 지도했다. 그리고 교육입국 실천을 위하여 1913년 5월 13일 흥사단을 조직했다. 무실, 역행, 충의, 용감 4대 정신과, 덕육, 체육, 지육 3육 교육으로 조국 광복 일꾼을 양성했다. 서울대 총장을 지낸 장리욱 박사와 로키산맥을 타며 산정이나 음식점에서 애국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상해 임시정부 내무총장으로 일할 때도 조회 때 애국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도산은 애국가 내용에 성삼문의 독야청청 사상, 포은 정몽주의 일편단심 사상을 담았다.
광복 후 미 대사관에서 애국가 작사자를 알려 달라는 요청이 와서 문교부는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 작곡자 안익태로 통보하려다가 이 사실을 언론에 흘렸다. 친일 거두로 알려진 윤치호 가문이 반대했다. 이미 작고한 윤치호는 흥사단 애국가 작사자 규명위원회가 연구해 본 결과 신빙성 있는 근거가 없었다. 정부는 애국가 작사설이 있는 안창호, 윤치호, 최병헌, 김인식, 민영환 5명만 밝혀 두고 정부의 애국가 작사자의 공식 발표는 현재 작자 미상이다. 애국가 작사자로 근거가 확실한 도산 안창호로 정부가 속히 공인해야 할 것이다. 작곡자 저작권은 2005년 한국에 온 안익태 부인 롤리타 안이 우리 정부에 기증했다. 도산은 2013년 스승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연세대 명예 졸업 증서를 받고 언더우드 학당 입학 118년 만에 연세 동문이 된 것이다. 김동길 명예 교수는 장차 남북 통일이 되면 도산이 초대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어느 강연에서 가정하여 말씀했다.
1938년 3월 10일 경성제대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순국한 도산의 87회 추도식이 도산공원 점진홀에서 있었다. 독립협회를 만든 서재필 박사는 도산을 한국의 링컨 대통령으로 높이 평가했다. 나는 위대한 독립운동가 도산 안창호가 지은 우리 애국가는 한국 문인은 물론 남북 8천만 겨레가 다 4절까지 불러 속히 조국 평화 통일이 이뤄지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