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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11 - 불평등 한미동맹 70년, 미 국익 추구 과정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한미동맹은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을 지키고 오늘날과 같은

번영과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인가?

아니면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극동전략의 추진 과정에서

한국전쟁 참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이 이뤄진 것인가?

한미동맹이라는 하나의 현상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나 설명은 제 나름대로의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사실관계에 입각한

객관적 분석을 통해 그 핵심을 살피면

한미동맹은 미 국익 추진 과정이었고

오늘날도 현재 진행형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 일각에서 ‘미국 구세주’라는 식의

칭송을 하는 것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 추진 과정에서 파생된

‘떡고물’에 감지덕지 하거나

분단기생에서 챙긴 이익에 취해 토해내는

가짜뉴스라 하겠다.

미국은 한반도 지역이나 그 주민에 대한

‘사랑’ ‘애정’을 최우선한 적이 없다는 것은

지난 150 여 년 간의 한미역사에서 확인된다.

특히 한미상호방위조약에서 특히 미국의 민낯이

적나라하게 들어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20세기 최악의

불평등 조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조약은 미국이

한반도 뿐 아니라 동북아에서

심대한 군사적 이익을 챙길 수 있게 만들어졌다.

조약은 모두 6개 조항으로, 이 가운데

▲자동 군사개입 여부 ▲대상 지역

▲주한미군 주둔 근거 ▲유효 기간

▲적용 범위 등이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내용이다.

이 조약은 1953년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미국의 아시아 패권주의 강화 목적이

담긴 내용으로 체결됐다.

이승만은 이 조약과 정전협정을 맞바꾸는 식의 정치를 했다.

그는 정전협정 체결에 극력 반대했는데

그 이유는 황당했다.

만약 정전협정이 맺어지면

한국이 중국과 북한에 의해

패망한다는 논리를 앞세웠다.

협정체결 당시 한국군은

전체 유엔군 932,964 명 가운데

절반이상인 590,911 명이었고 미군은 302,483 명이었다.

미국은 정전협정 대가로

파격적인 경제 원조 등을

한국에 약속한 상태여서

국군은 상당한 정도의 방어력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반공포로를

국제법에 반하는 식으로 석방하거나

미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개인 서신을 보내 반대한다고 외쳤다.

이승만이 당시 정상적인 시각으로

현실을 판단했으면

아마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아쉬운 일이다.

이승만은 국제정치의 상식,

국가관계의 기본원칙도 깡그리

배제한 멍청이 정치꾼이었다.

그는 공포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정전협정에 동의하는 대신

군사적 식민지를 초래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는 것으로

미국과 합의했다.

이승만이 국가 군사주권을 송두리 채

미국에 퍼주기 한 조약이었다.

일제의 식민지침략으로 국권을 강탈당한

아픔을 겪고 독립한 신생 정부의 군사적 주권을

이승만이 미국에 넘긴 것은 주권국가로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국제적 수치의 역사를 남긴 것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우선 미국의 군사력 배치가

권리로 규정되어 있어

군사력 외부 도입을 규제한

정전협정에 위배되고

90년대 남북기본합의서와도

배치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 조약은 평화협정을 저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었고 미국은 국익을

극대화 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은 자국 군대를

일방적으로 한국 어느 곳에나

배치하도록 되어 있으며(조약 4조),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해

일방적으로 판단하도록 되어 있다(2조).

이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고 되어 있어(6조)

미국이 우월한 위치에서 미군의 무기한 주둔이 가능하다.

이 조약을 바탕으로 주한미군사령관은

한미연합사령관, 유엔군사령관 등 3개의 모자를 쓰고

한반도 및 동북아군사전략을

다각도로 추진할 수 있는 기초적 여건을 제공한다.

이 조약에 따라 한국의 영토 내와 그 주변에서

무력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국은 국제연합의 토의와 결정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개입할 수 있으며

사후에 보고할 의무를 지지 않는다.

이 조약에 의해 미국은 70 여 년 동안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상대로 미 본토 수호를 위한 세계전략을 수행하면서

미국 법으로 그 공개를 금지하고

한국 정부도 그에 따르게 만들고 있다.

대신 한미 두 정부는 주한미군이

단지 대북 방어용이라고

합창을 하는 식으로 70년이 넘도록

국민을 속이고 있다.

국회, 언론도 침묵한다.

이 조약에 의한 주한미군 ‘비밀’과 ‘기만’은

한국의 민주주의 공간을 좁히고 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수 있게

남북한을 관리하는 묘기(?) 대행진을 벌이고 있다.

남한에서는 주한미군이 치외법권적 특혜를 누리면서

슈퍼갑으로 한국군위에 군림하고

주한미군 사령관이 점령군 사령관처럼

행세하며 한국 정부와 맞장 뜨게 만들고 있다.

한국의 역대 정권은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이 조약을 근간으로 한 한미동맹 준수, 강화를

합창하고 있다.

미국은 이 조약을 통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이 가능한

조건을 만드는데 주력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중국과 소련, 러시아 군사전략은

미 본토 수호를 위해

엄청난 기여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대북 선제타격전략,

한반도 전면전을 대비한

다양한 군사전략을 만들어놓고

정기적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통해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압박하면서

정교하게 가다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분단 유지책을 강화한다.

남북교류협력에도 개입해 강약을 조절하고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주한미군의 이익을 더 챙긴다.

미국이 가끔 주한미군 감축 등을 말하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 작전을

합리적 수준으로 조정할 필요성 때문이다.

미국의 북한에 대한 관리는

한반도 군사적 긴장상태를

유지해 한국내 검은 머리 미국인들을 겁박해

주한미군 주둔 비를 더 받아내고

미국 무기를 더 사도록 만드는 효과도 크다.

이 조약은 주한미군의

아시아 태평양지역 작전을 가능케 한

전략적 유연성의 길을 터주면서

미중 군사적 충돌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방위라는 이름의 이 조약은 미국 본토 방위를

제 1순위로 실천하면서 한반도 분단을 고착시키고

평화통일의 기반 조성에 역행한다.

동북아에서 신냉전이 등장하는 촉매제가 되면서

한국의 군사적 자주권을

점점 더 깊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만든다.

이 조약은 더 이상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

남북교류협력 활성화 등 남북관계의 변화,

80년대 이래 남북한 재래식 군사력의 역전현상,

미국의 중국 포외 압박 정책 강화 추세 등으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미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

교묘하게 짜여 진 한미동맹의 핵심요인이다.

정상적인 국가 간 동맹으로 만들어야

한반도 평화통일, 동북아 평화와 안전이 가능하다.

왜 그런지 꼼꼼히 살펴보기로 하자.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 권리(Right)라는

단어 하나가 있다.

"미합중국의 육군, 해군과 공군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대한민국은 이를 허여(Grant)하고

미합중국은 이를 수락(Accept)한다."

권리는 법률적으로 자기 의사대로

어떤 일을 행하거나

타인에 대하여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힘이나 자격이다.

Grant는 무상으로 준다는 뜻이고

Accept는 무상으로 받는다는 의미다.

‘한국은 허여하고 미국은 수락한다.’

이것이 동맹의 이름으로 포장된

주종 관계의 언어다.

20세기 세계 어느 조약도 외국군이

타국에서 ‘권리’를 행사하는 내용은 없다.

유엔 회원국간에 맺은

지구촌 유일의 예속적 조약이다.

이 4조에 의해 미국은 원하는 무기를

언제든 주한미군에 배치할 수 있다.

핵무기가, 사드, 탄저균이 들어왔고

무인 폭격기가 들어온다.

전략적 유연성에 의해 사드와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이란 전쟁에 차출된다.

미국은 한국의 눈치를 전혀 볼 필요가 없다.

권리만 행사하면 되는 것이다.

전작권을 한국군이 행사한다?

이는 한미연합군에만 해당될 뿐

주한미군은 여전히 조약 4조의 적용을 받고

미 대통령의 통수권 지휘아래

독자적으로 작전하게 된다.

미 정부 기구인 유엔사도

유엔 깃발을 휘날리며

유엔기구인 양 거짓 연기를 하면서

미 국익을 위해 한국 정부의 대북 교류협력 등에

간섭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한국 영토 안에서 두 개의 군사적 주권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는

비극적 희곡이 왜 문제인가를

외국의 경우를 통해 살펴보자.

미일 안보조약은 한미의 그것과 다르다

미국이 일본과 맺은 미일안보조약 6조를 보자.

"미합중국은 일본에 있는

육해공군 시설이나 지역을

활용할 수 있도록 양허를 받는다."

양허.

그것은 허락을 받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권리다.

일본에서는 양허다.

같은 미국, 엇비슷한 동맹인데

그러나 다른 단어다.

미일 두 국가가 동등한 위치에서 조약을 집행한다.

한미 조약과 다른 점이 더 있다.

일본 조약에는 두 나라간 수시 협의 조항이 있다.

일본의 안보나 동북아에서의 평화가 위협받을 경우

양국이 수시로 협의한다.

한미조약에는 그런 조항이 없다.

미국이 혼자 판단한다.

미국이 혼자 결정한다.

한국이 그것을 물어볼 조항이 없다.

일본 조약의 유효기간은 10년.

10년마다 갱신하거나 폐기할 수 있다.

재협상의 기회가 있다.

한미조약의 유효기간은 무기한.

폐기하려면 통고 후 1년.

그러나 여기에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1년이란 긴 시간 동안 강자는 약자에게

공식, 비공식적으로 엄청난 카드를 내밀며

흥정하거나 겁박, 강요할 수 있다.

한미간에 맺어놓은 수많은 협정 등을 꺼내

트럼프가 하듯 깡패, 망나니 식으로

밀어부치는 협박공갈이 가능하다.

그래서 한국 관리들은 말한다.

“미국은 막강해서 말 꺼내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

자칫 한국 안보가 위태로울 수 있다.”

“한국의 경제 기적은 한미동맹 덕택 아닌가?

미국은 남한의 공산화를 막은 은인 아닌가?”

과연 그럴까?

미국이 주한미군을 유지하는 목적 1번이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주한미군은 지난 70 여 년간 미본토를

중국과 소련, 시아의 미사일 공격 등으로부터

조기에 포착해서 대응책을 강구하는

최전선 부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냉전기부터

중국의 목을 겨눈 비수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국 정치인, 군인들은 가짜뉴스에

중독된 세뇌 상태가 심각하다.

미군에 의해 안보보장, 경제발전이 가능했는

대미 찬사를 주문 외듯 중얼거리면서

미국 없이 한국의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의 포로가 되어 있다.

지피지기를 할 때다.

사회과학, 정치경제학적 시각으로 종합적으로

살피고 분석해야 한다.

한국의 경제와 기적은

한국국민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는

점이 가장 중요하고

국제 환경요인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한국이 경제와 군사력 선진국이 되고

K-문화가 세계인을 열광케 한다.

그게 다 미국 덕택인가?

일부 골빈 인사는 K-팝이

미국 덕분이라고 워싱턴에서 외치기도 했다.

과공은 비례다.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면서도

기본은 지켜야 한다.

이제 주체의식을 갖고 살피는 안목을 갖춰야 한다.

미국과 지구촌 룰에 따라

흥정할 논리와 배짱이 필요하다.

한국 정치인 중에 트럼프와

맞장 뜰 인물을 찾아야 한다.

여의도에서, 우물안 개구리들처럼

당권, 집권, 국정 장악이

정치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지 않는

정치머슴을 찾아야 한다.

통 큰 인물이 나와 동맹의 문제와

평화통일의 문제를 확 풀어야 한다.

이런 것이 불가능하다고?

그럼 필리핀의 경우를 더 보자.

필리핀과 미국의 동맹은

한미의 경우와 너무 다르다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1898년부터 1946년까지 48년을 지배당했다.

그러나 필리핀 의회가 1992년 결정했다.

클라크 미군기지 연장 불허.

핵무기 반입 금지.

미국이 거절했지만 필리핀이 밀어붙였다.

미군이 철수했다.

한국의 경우와 어떻게 다른가.

필리핀은 주권을 행사했다.

클라크 미군 기지를 문 닫게 만들었다.

국제 관계는 합법적으로 하면 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필리핀 경우를 더 보자.

2014년 두 나라는 상호필요에 의해

방위협력강화협정(ECDA)을 맺었다.

필리핀은 중국의 해군력에 위협을 느끼고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고 싶어 했다.

두 목적을 향한 협정 내용은

주권국가의 위상 속에 만들어졌다.

미국은 필리핀에 영구적인 군 주재를 할 수 없고

방문 군 형식으로만 머물 수 있다.

미군은 필리핀에 영구적 군사기지를 만들 수 없고

핵무기를 들여올 수 없다.

미군은 필리핀 정부의 초청을 받고

필리핀군이 통제하는

지역만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미군이 지은 시설물은 철수할 때 필리핀 것이 된다.

유사시 두 나라 외무장관이 협의한다.

유엔 안보리에 즉각 보고한다.

협정 유효기간은 10년.

이것이 필리핀의 동맹이다.

이것이 주권이 있는 나라의 동맹이다.

한미의 것과 하늘과 땅 차이다.

한국도 정부와 국민이 맘 만 먹으면

주권국가의 면모를 회복할 수 있다.

촛불혁명, 빛의 혁명으로

두 대통령을

탄핵하면서

민주주의 후퇴를 막은 저력이 있다.

자주를 향한 촛불이 등장하는 그 날이

언제 올까?

당신 스스로에게 물어볼 일이다.

다시 한미 동맹을 살피자.

세계 주둔군 역사에서 유일한 시스템이 있다.

주한미군 사령관의 책상 위에

사령관 모자가 세 개 있다.

세 개의 모자를 쓴 주둔군 사령관.

21세기 지구상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군사적 주권 상실의 상징으로 세계사에

기록될 것이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한국 군사상황의

현재와 미래에 발생할 모든 경우를

통제할 장치를 세 개의 모자를 통해

확보하고 있다.

그가 DMZ 관할권 등으로

한국 정부와 맞장 뜨고

한국 국방부 장관도 그 앞에서 별로

존재감이 없는 이유는 멀리 있지 않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팔이 두 개지만

세 가지의 군사적 통제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치하 일본군 조선 점령군 사령관도 부러워할 권력이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첫 번째 모자는 주한미군사령관 상징이다.

그는 미국 군통수권자인 미국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의해

한국 땅에서 미국이 원하는 군사력을

마음대로 배치하고 운용한다.

그가 지휘하는 주한미군은 치외법권적 지위 속에

한국 공권력을 원천 배제한 채

미 국익을 위해 복무한다.

지난 70 여 년간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상대로

미 본토 수호를 위한 세계전략 SIOP, OPLAAN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민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미국 법이 주한미군의 기지, 활동 등을 비밀로 정하고

한국 정부가 SOFA 3, 28조에 의해

미국 결정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는 한미동맹 차원에서

할 일을 한다고 해왔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헌법적 권익을 외면한다는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다.

외세를 위해 자국 민주주의를

정부가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 정부를 향해 눈을 부라리는

해괴한 일이 해괴하지 않게

반복되고 있다.

한국 젊은이는 많은 분야에서 세계최고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데

만약 한국 정부의 세계 유일한 국치의 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한국 정치는 호미를 막을 일을 방치해

가래로 막아야 하는

사태를 전혀 걱정하지 않는 태도다.

두 번째 주한미군 사령관 모자는

유엔군사령관의 모자다.

그의 모자에는 유엔의 깃발 모양의 장식품이 달려 있다.

그러나 유엔과 무관하다.

단지 유엔 깃발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유엔사무총장이 두 번이나 확인했다.

“유엔사는 유엔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유엔사의 상위 기구는 미국 정부다.

미국 대통령의 지휘를 받는다.

그 유엔사가 비무장지대를 통제한다.

그 유엔사가 남한의 대북 교류협력을 통제한다.

남쪽에서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가는

길을 누가 열고 닫았는가.

유엔사다.

미국이다.

2026년 6월 현재 유엔사 사무실은

평택 미군기지내에 있고 그 직원은 2백 명이 안 된다.

한 줌도 안 되는 병력이다.

이게 다일까?

보이고 들리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유엔사의 하부 기구인

유엔사 후방기지가 일본에 7개가 있다.

이곳으로 유엔사는 매년

한국의 정치인, 언론인을 초청해

현장답사를 하도록 해준다.

이들 7개 기지는

미국이 치외법권적 지위를 누리는 것으로

일본과 협정을 맺고 있다.

미일안보조약과 별도다.

왜 그럴까?

거기에 공공연한 비밀이 있다.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유엔사 후방기지는

정전협정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미국은 동북아 냉전시절부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한국, 일본을 묶어 미국이 주도하는

실질적인 군사동맹체제를 만든 것이다.

요즘 미국이 전략적 유연성 어쩌구 하는데

이는 지난 70년 동안의

미군동북아 전략구도를 비밀의 장막에서 해방시키고

공공연한 사실로 만들면서 더 강화한다는 의미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한국 정부, 언론은 모두 이에 대해 침묵한다.

정부는 한미동맹에 묶여 입을 못 연다고 해도

언론마저 정부와 같이

보조를 취하는 것은 괴이하다.

언론은 정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정부가 국민의 헌법적 권익을

외세를 이유로 축소, 훼손한다면

이를 보도해서 정상화가 이뤄지도록 하는 것이

제 4부라 하는 언론의 책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다.

너무 심각한 언론이다.

이렇게 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미국이 한국 언론, 학계, 정계를

미국 유학, 장학금 등으로 공들여

친미적으로 만들어놓은 결과다.

하지만 만약 전략적 유연성으로

미중간 무력 충돌이 벌어져

오산, 군산, 성주가 불바다가 되는

참극이 발생한다면

한국 정치, 언론인들 자신은 물론 그 가족친지는?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는 강심장이라서

한국 정치,언론 종사자들은

미국의 비밀주의에 동조하고 몰빵하는가?

아니면 머리 구조가 잘못돼서?

알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2026년 5월 6.3 선거 한 달 앞서

서울 광화문에 참전용사 기념 시설물이

웅장하게 들어선 것은 우연일까?

주한미군이 한국에 은혜를 베풀었고

전략적 유연성 등도 앞으로 찬양받아야 한다는

고도의 심리전적 의지의 결과물일 가능성은 없는 것인가?

선거 기간 동안 장동혁, 전 아무개 강사 등이

미국을 부지런히 찾아가고

미국 극우인사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광화문 시위 등에 성조기가 등장하는 현실

미국이 지난 70년간 한국 민을 상대로 얼마나 치밀하게

선무공작, 대민활동을 해 왔는 지를 짐작케 한다.

선무공작은 병사들의 사기 진작, 군 복무의 자긍심 고취,

국민의 국방 이해도 향상,

적에 대한 적대감 강화 등을 펴는 것이 목적이다.

선무공작은 군대나 정부 기관에서

대내외적으로 특정 정책, 군대 등의 사기,

목적을 홍보하고 설득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이다.

몇 년 전부터 해외 6.25 참전용사에 대한

극진한 고마움을 표하는 캠페인이나 기사에는

당시 유엔군의 선무공작 영상이 곁들여지는데

선무공작 차원의 활동 의미를 잘 파악하는 것이

향후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등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의 세 번째 모자는

한미연합사령관 최고 지휘관 모자다.

한국군의 전시작전권을 가진다.

전쟁이 나면 한국 군대를 미군 장성이 지휘한다.

이 구조의 문제점 첫 번 째는 주한미군사령관이

인사권을 쥔 미국 대통령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구조로

'한반도 방어'라는 원칙과

'미국 글로벌 전략'이 충돌할 경우,

후자가 우선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주한미군사령관은 미군 군령권(군사명령권) 계통상

미국 대통령과 국방장관, 합참의장으로 이어지는

지휘를 받기 때문에, 미국의 국익이나

전략적 이해관계가 최고의 책무일 수밖에 없다

미국의 군사전략 중 가장 중시하는 것은

미 본토의 안보이고 그 다음이 전역, 지역 순이다.

주한미군이 정전협정이후

중국, 소련과 러시아를 상대로 군사행동을

비밀리에 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업무로 지정되어 있는 이유다.

심지어 한국의 민주주의를 축소하고

흠집 내는 부작용이 있는데도 강행되고 있다.

미국의 해외 파병원칙은 미 국익 증진이기 때문에

한반도 방어용 무기 구입에서도

미국 방산 업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미 연합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강조되는 것은

효율적인 공동 작전을 위한

상호운용의 개념이다.

“미군과 한국군의 무기, 통신 네트워크, 탄약 등이

서로 완벽하게 호환되어야

연합 작전이 가능하다.”

이를 위해 미국산 무기 선택이 절대 필요하게 된다.

주한미군이 권리 차원에서 주둔해 있는

한미동맹의 취지에

맞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호운용성을 충족하기 가장 쉬운 방법은

한국군이 미국산 무기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다.

70 여 년간 한미동맹에 의해

두 군대의 작전 지휘 구조가 일원화되면서

한국 군 당국은 미국산 무기를 구입하는

관행이 굳어져 있다.

미국산 무기 체계를 대규모로 도입하면서

발생하는 장기적인 예속 효과는 크게 두 가지다.

미국 정부가 보증하는

대외군사판매(FMS) 방식으로 무기를 사오면,

핵심 부품의 공급망과 성능 개량 권한을

미국이 쥐게 된다.

무기를 구입한 이후에도 수십 년간

정비와 부품 조달을 위해

미국에 막대한 예산을 지속적으로 지출해야한다.

그 결과는 군사 기술 및 경제적 종속 심화다.

동시에 한국형 무기 개발의 제약 요인이 된다.

한국이 독자적인 무기 체계를 개발하려 할 때,

미국의 핵심 기술 이전 거부 등이

걸림돌로 작용했던 사례들이 존재한다.

이는 미국 방산기업의 이익을 지키고

한국군의 독자적인 국방 역량 확보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한미 국가간 무기 체계의 종속성은,

미 본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주한미군사령관에 의해

큰 영향을 70 여 년간 받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의 부속협정으로 만들어진

SOFA는 한국이 시설과 부지를 무상으로

미국에 제공하고 주한미군 주둔비 일부를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원래 주한미군 주둔비는 미국이 부담하는 것이었지만

한미는 1991년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을 만들어

미국이 부담해야 할 주한미군 유지비용의

일부를 한국이 부담토록 해왔다.

SMA 6, 7조는 한미가 문제를 협의하면서

서면합의로 개정, 수정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어

미국에 매우 유리하게 되어 있다.

이에 따라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도

거의 매년 증액하는 형식으로

천문학적인 액수로 한국이 부담하고 있다.

한국은 방위비 분담금일부를 부담하면서도

그 돈이 미군에 의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한국 국회가 세금 사용에 대한 감사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주한미군이 권리로 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2026년 현재 주한미국이

쓰지 않고 남긴 돈 2조원이 있다.

그 중 9,700억 원이 미국 은행에 현금으로 들어있다.

한국 정부가 그것을 돌려달라고 하지 못한다.

돌려받을 근거가 없다.

SMA 6, 7조가 미국에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기반으로

한국과 미국은 1966년

환경 관련 규정이 전무한 SOFA을 맺은 뒤

지금껏 명확한 환경오염 정화 기준을 마련하지 못했고

주한미군은 단 한 차례도 기지 안 오염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치유에 나선 적이 없다.

SOFA의 양해각서인 환경조항에는

'주한미군은 한국정부의 환경법령 및 기준을

존중한다'고만 돼 있어

주한미군에 오염 문제 해결을

강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그로 인해 파생된

문제는 너무 심각하다.

다시 이승만 이야기를 해보면

그는 항일투쟁도 했고 정부 수립 후

일본에 대해 각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에 군사적 주권을 넘겼다.

미국이 건국이후 앞에원 국가 이기주의를

이승만은 미국에서 오래 살았으니

잘 알았을 것이다.

미국의 주류들이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집단 캠프’에 가둬놓고

어떻게 파괴했는지,

흑인 노예로 경제적 착취와

경제발전을 기했다는 것 등등을.

그런 미국에게 군사주권은 넘겨준다?

당시 이승만 정도의 국제감각이면

미국이 왜 6.25에 참전했는지,

그리고 동서 두 진영이

한반도를 국제적 냉전에서

완충지대로 남겨놓으려 했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전쟁 승리만을 외친 맥아더를 해임하는 것의

의미를 몰랐 리 없다.

미국이 동북아 전략에 의해

한반도를 어떻게 챙길 것인지를.

그러면 군사적 주권을 넘기지 않아도

한미 군사동맹을 미일, 미국과 필리핀 동맹의

것처럼 할 수 있었을 텐데

조약, 협정처럼 한번 국가에 도장찍어버리면

후세 대대로 고생한다는 것을 알았어야 할텐데.

생각할수록 아쉽고 분통터지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한번 엎질러진 물을 어찌 할 것인가?

후손을 생각할 때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하나?

확 바꿔야 한다.

필리핀, 일본이 미국과 맺은

군사동맹을 참고하면 정답은 뻔하다.

미국이 기득권을 쉽게 놓지 않을 것인데

어찌하나?

미국이 쿠바의 관타나마를 놓지 않는 것처럼

그래도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조약을 폐기하지 않고 개정한다면

권리(Right)를 양허(Grant)로 바꿔야 한다.

수시 협의 조항을 넣어야 한다.

유효기간을 10년으로 정해야 한다.

유엔 안보리 보고 의무를 담아야 한다.

SOFA를 개정해야 한다.

방위비 불용액을 돌려받아야 한다.

환경오염 책임 조항을 넣어야 한다.

당연히 이 조약에 의해 저지된

평화협정을 신속히 만들어야 한다.

세계 경제력 10위, 세계 군사력 6위,

세계 무기 수입 최다 국가가

정상적인 자주 국가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 위아래에는 같은 민족이 살고 있다.

남쪽에 5000만.

북쪽에 2500만.

이념과 체제만 다르다.

그러나 같은 언어를 쓴다.

같은 역사를 가졌다.

같은 조상의 피가 흐른다.

사상과 이념?

이건 영속적이지 않은 시한부 생명력을 지녔을 뿐이다.

그런데 남북은 이념이

민족에 앞선다고 난리를 친다.

북의 두 국가론이 지닌 문제도

민족이라는 개념을 앞세우면 설 자리를 잃는다.

1천 만 이산가족이 70년 넘게

부모와 자식, 형제를 만나지 못했다.

그 만남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장애가 남쪽에도 있다.

유엔사가 비무장지대를 통제한다.

한미동맹이 남북 교류를 틀어막는다.

국가보안법이 평화통일을 처벌한다.

이념은 유한하지만 민족은 영원하다.

100년 후의 자손들이

오늘의 선택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무한 책임감을 가지고 떨쳐 일어나

모순을 타파하자.

정의와 진실을 실천하자.

그렇게 해야 한반도, 동북아,

지구촌의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215 2026.07.15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S -핵의 그림자와 한반도의 운명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핵은 인류에게

공포를 가르쳤지만,

그 공포는 또한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분단은 우리에게

상처를 남겼지만,

상처는 화해의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 쓰이고 있다.

오늘 우리의 선택이

내일의 행복을 만들고,

오늘 우리의 말이

미래의 평화를 만든다.

부디 한반도가

강대국의 전장이 아니라,

문명을 잇는 다리가 되기를.

증오의 최전선이 아니라,

화해의 첫걸음이 되기를.

핵의 그림자가 아무리 짙어도

새벽 동쪽 하늘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

전쟁의 시대를 넘어

평화는 언젠가 반드시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다시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은

아직 어둠이 짙다.

21세기 우크라이나의 들판에서

포성이 울리고,

중동의 사막에서도

미사일이 날아오를 때,

세계는 한 가지 사실을

다시 배우기 시작했다.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의 전쟁에서

핵무기가 동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핵 강대국들은 상대를 향해

수천 기의 드론과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핵미사일 단추를 누르지 못하고 끙끙댄다.

왜 그럴까?

핵무기를 앞세워 승리할 경우

동시에 자신의 멸망이 오기 때문이다.

핵은 너무 강해서

사용할 수 없는 무기가 되었다.

아직까지는....

너무 강력하기에 쓸 수 없는 무기가 존재한 것은

인류역사상 최초다.

과거 전쟁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자가 승리했다.

그것이 전쟁의 역사였다.

평화는 전쟁을 준비하는

기간에 불과하다 했다.

전쟁에서 이기는 자가 평화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그런 정설이 깨지는 역설 속에서

인류는 불안한 평화를

오늘도 이어간다.

북한 역시 긴 세월 끝에

스스로를 핵보유국이라 선언하며

동북아의 바람을

새롭게 흔들기 시작했다.

그것을 공식 인정하는 것과 관계없이

세계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북한을 바라보지 않는다.

중국, 러시아는 북한이 핵무장을 하기 전에

미국과 함께 유엔의 대북제재에 동참했다.

그러나 북한이 핵 보유를 선언하자

유엔 대북제재에 거부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계산도 달라지고 있다.

북한의 ICBM이 미 본토나 하와이를 타격할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염려하고

그것을 방지할 대북 정책을 앞세운다.

남한이 북한과 전쟁을 하면

북한 ICBM이 미 본토로 날아올

가능성을 염려해 한국이 조심하라는

발언을 서슴치 않는다.

분단의 산맥 위로

새로운 시대의 계산법이

천천히 자리 잡고 있다.

북한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 하면서

북한 핵을 전제로 한 한반도 정책이 등장하고 있다.

한반도의 시간은 21세기 핵 시대와 함께

또 다른 역사의 문 앞에 서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모두가 살아남아 같이 행복할 수는 없는가?

그런 미래란 불가능한가?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이후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으니

과거를 돌아보는 일부터 해보자.

거기에 혹시 어떤 해법의 실마리가

보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한반도가 비핵화의 토론장에서

핵무기 사용과 보복의 말 폭탄이 작열하는

각축장이 되기까지의 수십 년 역사를 살펴보자.

70여 년 세월 동안

한반도에서 상호작용한 주체들은

남북한과 미국이 주를 이뤘다.

6.25 전쟁에 많은 나라들이 개입했지만

정전이후 오늘 날까지 남북한과 미국 등

3 개 국이 주역을 담당했다.

냉전 전후 힘의 논리가 가장 첨예한 지배력을 행사한 현장인

한반도에서 최강자인 미국이니

미국을 주목해서 과거와 현재를 짚어보자.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의 권리(Right)로

남한에서 치외법권의 성역을 구축했고,

정전협정이 평화의 문으로 나아가는 길을 봉쇄했다.

동시에 미국은 한미일 3각 군사동맹의 시스템을 만들어

주한미군이 미 본토 수호를 위한

중·러 견제의 세계전략(SIOP, OPLAN 8010)을 최우선 수행토록 하고 있다.

오산과 군산 미군기지의 하늘은 중러에 대한

정찰과 타격태세로 뜨거웠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국법의 장막 뒤에 숨겨진 대륙 작전의 비밀주의와

SOFA 조항의 침묵 조항으로

한국의 자주권과 민주주의는 멍들고,

국민은 주권자가 아닌 개돼지로 전락했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최상의 전략요충지다.

과거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핵강국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지근거리에서 견제하는 것은

미 본토 수호에 더할 나위 없는

전략적 우위를 점한 것을 의미한다.

주한미군의 위협에 대륙 국가들이 군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수백 발의 미사일 등을 오산, 군산을 향해

실전배치해놓은 것에 대해 한국이 침묵하니

미국에게는 금상첨화다.

주한미군은 미국이 대륙의 핵 강국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

남한에 영구 주둔하는 것이

미국에게는 가장 이윤이 많이 나는 선택지다.

영구주둔이 가능한 조건은?

한반도에서 전쟁도, 평화통일이 허용되지 않는

적절한 긴장 상태의 유지다.

주한미군이 계속 한국에서 버티고 있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극대화하는 최적의 상황이어서

미국은 끊임없는 대북 군사작전과

참수작전 훈련으로 북녘을 자극하며

남녘을 미제 무기로 최대한 무장시키는 작전을 취하고 있다.

2018년,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이

국가연합의 서광을 비추었으나,

'분단 유지와 미군 주둔'이라는 미국의 국익 앞에 가로막혀 무산되었다.

미국은 남북교류협력을 희망하는 문재인과

북한 핵에 대응해 자체 핵무장을 언급한 윤석열 시절

한미워킹그룹과 핵 협의기구라는

정교한 통제 장치를 만들어

남녘 정부의 자주적 입지를 좁혔다.

그 결과 한국 정부는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작전에

말 한마디 얹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에 더 강하게 갇혀 지내고 있다.

북녘은 핵과 미사일 개발의 페달을 계속 밟으면서

미국 본토 타격이 가능한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지칭되면서

'적대적 두 국가론'이라는 극단의 칼을 빼 들었다.

다음은 북한이 핵을 만든 이유를

북한을 주목해 살펴보자.

첫 시작은 6.25 때부터다.

전쟁 당시 미국이 핵무기 사용을 검토했지만

세계 3차 대전 등을 우려해 포기한 뒤인

1958년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했다.

최대 950기.

미국은 그 핵무기로 핵보유국인 중국, 소련을 겨냥했지만

겉으로는 대북용이라면서 북한을 위협했다.

당시 핵이 없던 북한에 수백 발의 핵무기를 사용한다?

이는 비용과 결과를 따지는 미국식 합리주의에 맞지 않다.

더욱이 6.25 당시 북한에 핵을 사용하는 것은

산악지대가 많고 인구 밀집지역이 적다는 이유 등으로

합리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하지만 전쟁은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기 때문에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쓸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 배제하지는 않았다.

6.25때 북진했던 만큼은 아니지만

중국이 참전하지 않는 수준에서 북한 점령을 한다는

작전계획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북한은 국력이 수 백 배인 미국의 태도에 겁을 먹고

자신들도 핵무기를 만들려 시도했다.

북한의 핵 개발은 소련의 원자력 지원으로

토대를 구축한 뒤 수십 년의 과정을 거쳤다.

북한은 1950년대부터 소련의 원자력 기술 지원을 받아

영변에 원자력 연구소를 건설하고

1965년에는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가동한 뒤

1970년대부터는 플루토늄 추출 기술을

자체 개발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전후 소련해체이후

북한은 심각한 경제난에 봉착해

수백 만 명이 아사하는 고난의 행군 시기를 지나면서

체제 생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미국은 북한이 자체 붕괴할 것이라며

대북 봉쇄 압박정책을 강화해

마른 수건에서 물을 짜내는 식의 압박을

북한은 이에 맞서기 위해

핵무기를 궁극적 방패로 만들려 시도했다.

1990년대 초, 위성사진이

북한 영변의 핵시설을 포착하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의 핵 야망을 확인했다.

1·2차 북핵 위기와 협상이 실패한 뒤

1993년 북한은 NPT 탈퇴를 선언하며

첫 번째 핵 위기를 촉발했다.

미국이 영변을 폭격하는 것을 클린턴이

검토했지만 멈췄다.

그렇게 할 경우 한반도 전면전이 불가피했지만

한국과 사전에 합의하지 않았다.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에 갔고

1994년 제네바 합의가 나왔다.

클린턴 행정부는 제네바 합의를 통해

경수로 지원과 단계적 비핵화를 약속했으나

합의는 이행되지 못했다.

2002년 부시 행정부가

북한의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지목하며

2차 핵 위기가 발생했다.

중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 회담을 주도해

합의한 내용을 2005년 9·19 공동성명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그 직후 미국이 폭로한 북한 달려 위폐 사건으로

대북 금융 제재에 이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단 1년 만에 합의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2006년 북한은 마침내 첫 핵실험을 강행했고,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는 강화되었으나,

북한의 핵 기술 발전의 가속도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하고

아니면 체제 유지를 위한 포석이었다 했지만

그 경계는 모호했다.

당시 국제 정세는 9·11 테러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 선포로 요동쳤다.

2001년 9·11 테러이후 미국은 국가안보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부시 행정부는 '악의 축'으로

이라크와 이란, 북한을 지목했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은닉했다는 이유로

침공해 사담 후세인을 처형했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이 확인됐다.

미국의 위협 속에 리비아가

핵 프로그램을 포기했고 이어 발생한 리비아 내전에

미국 등이 개입해 카다피는 2011년

길가 하수구 부근에서 죽었다.

세계와 북한이 그 장면들을 보고 확인했다.

“핵이 없으면 우리가 저 꼴이 된다.

핵무기가 없는 국가는 강대국의 군사적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북한은

더욱 더 핵무장에 매진하면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었다며 밝혔다.

“미 본토까지 타격할 수 있다.”

2017년.

트럼프가 김정은에게 협박했다.

"화염과 분노."

2018년 트럼프가 김정은과 악수했다.

싱가포르와 하노이에서 둘은 만났지만 회담은 결렬됐다. .

그리고 2025년.

트럼프가 다시 집권했다.

김정은 러브콜을 멈추지 않는다.

왜인가.

트럼프가 계산했나?

북한 핵은 기정사실이다.

이것을 뒤집으려면 전쟁을 해야 한다.

전쟁을 하면 주한미군이 피해를 입고

북한 ICBM이 미국 영토를 타격할 가능성도 있다.

남한이 불타는 것은 역대 미 정권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미국익을 위해 불가피하다.

하지만 주한미군과 미국 영토에 대한 피격은

미국이 손해고 자칫 트럼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

북한을 실질적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 된다.

법적 구속력이 없다 해도 그렇게 부르면 된다.

동시에 북한 핵이 있으면

주한미군이 있어야 할 명분이 생긴다.

한국이 더 많은 미군 무기를 사야 한다.

방위비를 더 내야 한다.

북한 핵이 주한미군 주둔으로 얻을 수 있는

황금알의 영양분이 될 수 있다.

트럼프의 영악한 사업가적 정치기질은

북한 핵 무장이후의 한반도 전략은

역시 분단 지속이고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을 통해

중러와 북한을 통제하는 것으로 압축되는 것으로 비춰진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또 하나의 교훈을 지구촌에 확인시켰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동서간의 총력전 비슷하게 되면서

21세기 지구촌을 뒤흔들었다.

우크라이나는 1994년 부다페스트 양해각서를 통해

핵무기를 포기한 대가로

안보 보장을 약속받았으나,

그 약속은 무색하게 무너졌다.

러시아는 재래식 무기로 우크라이나와

장기 소모전을 벌이면서도 핵무기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가끔 간접화법으로 그 사용 가능성을 위협한다.

이어 발생한 이란-미국 전쟁에서 핵 강국인

미국도 핵무기 사용 가능성은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최후의 수단이 핵이라는 것을

완전 배제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갈짓자, 횡설수설형 화법에 담긴

극단적인 표현에서 위협을 느끼라는 암시가 담겨 있다.

누구나 최악의 경우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니까.

어쨋든 두 전쟁은 핵보유국과 비핵보유국 간의

21세기 전쟁 특성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이 전쟁은 북한에게 어떤 교훈을 주었을까.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지는 않더라도

그 존재 자체가 잠재적인 절대적 파괴력 또는 억제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한편 박정희도 자체 핵무장을 시도했다 좌절한 것도

북한을 자극했을까?

1970년대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퇴한 것을 본

박정희는 미국 군사력의 한계를 목격하면서

닉슨 독트린이 선언되자,

자체 핵무장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협상해 핵재처리 시설을 도입하고,

캐나다에서 원자로를 수입하며,

비밀리에 플루토늄 추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미국의 첩보망은 이를 포착했고,

워싱턴은 키신저를 앞세워 거센 압박을 가하면서

카터 대통령이 핵연료봉을 회수하려 하자

박정희는 결국 굴복했다.

이는 미국이 남한의 자체 핵무장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였다.

한국은 핵무장의 꿈을 접었으나,

그 열망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사회 깊은 곳에

불씨로 남아 북한의 핵보유 선언 이후

윤석열 정부 시절 모습을 들어냈다가

미국의 핵우산 제공 강화 조치에

일단 지하로 잠복했다. .

내일의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까?

북한은 비핵화 절대 불가, 남한도 핵세례 대상이라고 공언하고

한미는 북한 핵무기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최고수준으로 높여

중러와 같은 수준에서 대처하기로 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한반도에서 재래식 전면전 또는

핵무기가 사용될 가능성은 낮지만

남북은 여의도의 이전투구처럼 지배 의지의

무한경쟁장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양쪽 무력 차이는 심하다.

미국이 핵무기와 국력에서 북한보다 수백 배,

남한은 재래식 무기에서 북한보다 월등히 강해서

북한이 먼저 도발할 개연성은 낮아 보이고

미국도 북한보다 핵무기가 훨씬 많은

중국, 러시아가 더 큰 적이기 때문에

북한을 상대로 선제타격 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한반도에서는 분단 지속이라는 상한선 속에

두 진영의 대치가 심화되면

강대국들의 담합성 입질이 쉬워지는 측면이 있다.

동북아 역사가 보듯 강대국들은

대국의 이기주의 계산법을 가지고 있어

약소국가는 희생양으로 삼는 일이 반복된다.

과거에 그랬고 앞으로 더 그럴 것이다.

남북은 의도하든 안하든 간에 각각

미·중·러 강대국의 이기주의 계산법 속에 갇혀 있다.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이 우크라 전쟁, 이란 전쟁 등에서

강대국간 이해관계를 챙기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한반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 양상은 북한 핵 보유 이전, 이후가 다르다.

중·러의 유엔 대북제재 공조가 흐려지면서

북한이 경제는 중국, 무기는 러시아와의

공조를 강화할 태세다.

남한은 자주회복을 말하면서도

한미동맹 강화를 외치는 형식으로

미국의 심기만을 살피는 소심한 정치로

과거 정권과 유사한 태도를 보이면서

주한미군과 유엔사의 거대한 벽 앞에 입을 닫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통해

여전히 한반도를 자신의 전략적 이익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중국과 러시아는 그에 맞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려 한다.

이러한 강대국의 각축 속에서

한반도 주민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궁극적 질문이다.

분단의 장벽을 넘어 평화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핵의 그림자 아래서 계속 갈등을 키울 것인가.

분단의 오랜 상흔 위에

북녘의 핵보유는 이제 거스를 수 없는

기정사실로 굳어지면서

동북아의 거대한 군사 구도가 변하고 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와 이란의 포성에서

21세기 핵과 재래식 전쟁의 한 형태가 확인되고 있다.

그렇다면 향후 한반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를 두 가지 방식으로 설명해 보자.

먼저 불행한 미래다.

예를 들어

향후 10년, 중국이 G1으로 부상하고

북중 경제 협력과 북러 군사 협력이 현실화되면,

미국은 이에 맞서 한미일 군사동맹을 더욱 강화할 것 같다.

그 과정에서

한국이 오늘날과 같은 대미 예속성을 탈피하지 못한다면,

남북 관계의 개선은 요원하고,

한반도는 강대국 간 대결의 최전선이 되면서

북한의 핵무기는 더욱 고도화되고,

미국의 전략 자산은 한반도에 더 자주 전개되며,

우발적 충돌의 위험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한반도가 전쟁에 휩쓸릴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만약 핵무기가 실전에 사용되는

미래는 어떨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생략키 어렵다.

북한과 한미가 서로 상대방에 대해

핵무기 사용을 삼가치 않겠다고 공언하는 상황이고

미국의 경우 자국이익, 즉 미 본토 수호를 위해

한반도를 희생양으로 삼을 가능성을

완전 배제할 수 없다는 점도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다.

과거에 핵보유국 간에는

전면 핵전쟁이 나면 모두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며

상호확증파괴라는 말이 흔히 거론되었다.

핵전쟁은 피아 모두 괴멸적 파괴와

수천 발의 탄두가 뿜어낸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리는

핵겨울을 초래해

기근과 방사능, 문명의 완전한 붕괴를 피할 수 없어

군사적 승패를 가리기는커녕

인간의 종말을 피할 수 없다는 논리다.

만약 ICBM과 SLBM이 대륙과 대양을 건너

무차별적 불소나기를 퍼붓는다면

수도와 산업단지, 대도시는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승자 없는 인류절멸의 상황이 도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어느 학자는 자멸의 직행 코스인

전면 핵전쟁이 나면

승자 없이

사용한 나라, 맞은 나라와 함께

지구가 죽는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재한 핵전쟁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80년간 지켜온 '핵 금기(Nuclear Taboo)'의 금기를 깬

핵무기 선 사용은 자살적 선택으로

대규모 핵 보복과 재래식 타격의 이중주 속에

사용국의 영토는 초토화되고

가장 가까운 동맹마저 등을 돌리고

국제사회의 '악마'로 고립된다.

설령 가해국이 살아남는다 해도

지구촌 차원의 전면적 무역 금지와

금융 차단, 자산 동결의 경제적 파탄 속에서 사멸한다.

법적·도덕적 심판도 심각하다.

핵 선제 사용은 국제법의 정면 위반으로 규탄 받고,

인류 역사에 영원히 각인될

중차대한 전쟁 범죄자의 오명을 피하지 못한다.

환경적 재앙과 내부 붕괴라는 재앙이다.

핵 선제 사용으로 인한 국경을 가리지 않는

방사능 낙진과 핵겨울 속에,

자국민의 통곡은 정권의 퇴진과

내전의 도화선이 된다.

한반도 미래에 대한 두 번째 상상은

평화의 새로운 물결이 넘치는 낙관적 시나리오다.

긍정적 전망이다.

그것은

남북이 군사력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평화 공존과 국가연합의 당위성을

아래와 같이 실천할 경우다.

첫째, 한국은 기울어진 운동장인 한미동맹을 정상화하여

주한미군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백지화하고,

진정한 주권 국가의 위상을 확보한다.

둘째, 남북한의 정치체제가

분단 기생 또는 그 수호세력이 청산되고

7천만 민족이 형제자매라는

근원적인 논리가 통합적으로

반영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담보되는

한반도 포함 전 세계 비핵화 관리 체계를 구축한다.

셋째,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완충지대로 삼으려는 옛날의 틀을 깨고

동북아 다자 안보 협력 체제를 구축한다.

이런 미래라면 한반도는 평화의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조건이 충족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어렵다 해도 시작이 반이라 했다.

현실을 살피고 지혜를 짜내야 한다.

우선 핵무기의 존재는

전쟁을 끝냈고 또 방지하는 역설적 역할을 하고 있으나,

핵에 기반한 질서는 유리잔처럼 위태롭다.

미국, 러시아의 경우 최고 지도자가

핵 가방을 쥐고 있는 현실에서

한 사람의 오판이나 한 줄의 잘못된 정보로

한 발의 오발이면 단 몇 분 동안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이

재가 되고 지구는 무생물 지대가 된다.

핵무기 존재 속 평화는 얇은 얼음판 위를 걷는 듯

불안정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한반도에서 무력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깨달음을 확인하고

강대국들의 완충지대 압박을 이겨내면서

평화 공존과 국가연합의 당위성을 스스로 움켜쥐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한반도는 핵의 공포와

예속의 사슬을 벗겨내고,

자주와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써 내려 갈 수 있을 것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186 2026.07.11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10- 세계 최장 '정전'의 잔혹한 비망록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총성이 멎은 지 칠십 여 년,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의 사슬에 묶여있다.

정전(停戰)은 했으나, 평화(平和)는 오지 않았고,

서명된 종이는 철벽이 되어 남과 북을 갈라 놓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제 159차 휴전 회담장

펜 촉 끝에서 멈춘 것은

전쟁이 아니라 단지 방아쇠였다

중국이 발을 빼고

W.K. 해리슨과 남일이

세 통의 협정서에 서명을 한 순간,

3년 1개월 2일 동안 흐르던 피는 간신히 멈추었다.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고 앞뒤로 2km 간격으로

군사 분계선이 그어졌다.

철조망이 세워져 한반도의 허리를 끊었다.

그날 이후 한반도는 평화가 아닌

정지된 폭발 속에 살아야 했다

그것은 완전한 종전이 아닌 전쟁의 잠정 중단,

전투의 총성만을 유예한

위태로운 불완전한 평화였다.

군사정전위원회가 꾸려지고 중립국감시위원단이

더 이상의 군비 증강과

무력 행동을 감시하려 했으나,

휴전의 서약은 태생부터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 이었다.

협정서 제 60항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3개월 이내에 정치적 회담을 열어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첫 회의가 열린 뒤

이듬해 봄까지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대륙과 해양의 동상이몽 속에

합의가 없었다.

결국 정전협정은 70 여 년 동안

차가운 화약고 위에 방치된 채

세계 최장의 기록을 매일 갈아 치우고 있다.

왜인가.

미국이 원치 않았다.

미은 자국의 국익이 손상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이 있어야 할 명분이 약해지고

주한미군이 없어지면

중국의 목을 겨누는 칼이 사라진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한반도는

분단 상태가 지속돼야 했다.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전쟁이 나는 것도 미국은 원치 않는다.

그것은 한반도가 다시 국제전이 되어

6.25 전쟁처럼 승패가 가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까지 가지 않는 긴장상태의 지속을 위해

미국은 지난 세월 동안 남북을 관리했다.

남한에 대해서는 1954년 20세기 최악의 불평등 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효시켰다.

이 조약은 미국도 원했고 이승만이 원한 한미합작품이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 체결의 대가로

미국이 침략을 받으면 즉각 개입한다는

조항을 요구했다..

그러나 관철하지 못했다.

대신 얻은 것은.

주한미군의 남한 배치를 '권리'로 인정.

미군기지와 시설 무상으로 제공.

그리고 미국이 원하는 무기는

언제든 반입할 수 있는 권리

이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미국 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미국이 국익을 위해 원하던 최상의 조약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남한 보호를 빙자한

미국 군대 배치의 권리장전이었다.

미국 군대는 치외법권적 특권 속에

영구 주둔이 가능해졌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세 개의 사령부의 모자를 쓰고 군림했다.

유엔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이라는 기괴한 겸직 체제.

일제 조선주둔군 총사령관이 물러난 뒤

새로운 형태의 점령군 대장이었다.

한국에서 발생할 모든 군사적 돌발 사태의 통제권은

워싱턴 정부의 명령을 받는

미군 사령부에게 있었다.

미국이 원하면 이 땅의 어디든 군사기지로 내어주어야 했고,

부지와 시설, 천문학적인 주둔 비용까지 퍼주는

불평등한 예속의 이정표가 동맹의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한국의 지역개발에서 미군기지의 권익이 최우선이었다.

이승만은 한국군의 작전권도 미국에 넘기면서

군사적 자주권을 송두리 채 미국에 바쳤다.

군사적 식민지를 자청한 것이다.

한국군이 주한미군을 상전으로 모시는

예속적 현상 속에서

정치군인들이 날뛰고

5.16쿠데타, 광주학살 속에 정권 찬탈이 자행되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방위조약으로 묶고

일본의 일곱 개 항구에 가동 중인 유엔사 후방기지를 엮어

동북아 3각 군사동맹 체제를 만들어

동북아 전략 구도를 완성했다.

이 거대한 삼각의 군사 구조 속에서

한국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자주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미국의 군사 허브를 떠받치는 주춧돌 하나로 전락했다.

유엔사 후방기지는 제2의 한국전쟁이 터지면

다국적군을 실어 나를 중간기지 시스템으로 예비 되어 있다.

그곳은 지공해상에서 북한 선박을 감시하는

외국 군함들의 기착지다.

지구촌 시각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식민지에 불과했다.

한국 정부는 한미군사관계에 대해

국민에게 거짓말을 일삼았다.

“한미는 피로 맺어진 동맹이다.”

독재정부는 한미동맹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국보법을 적용해 이적행위, 반국가행위로 처벌했다.

수십 년 동안 그랬다.

그 결과 한미동맹은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고

한국 사회의 미맹은 치유불가능의 상태로 심각하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앞세워

한국의 군사적 주권을 장악한 채

미국익을 챙기는 것을 한국 국민 거의 모두가 모른다.

주한미군은 대북 방어용일 뿐 이라고 70 여 년간 합창한

한미 두 정부의 대 국민 심리전이

지대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미국이 중국, 소련과 러시아 핵보유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북아에 박아 놓은 최전선 부대라는 점을

한미 두 정부는 철저히 숨기고 있다.

한미동맹이 국보법과 함께 한국의 민주주의 공간을

심각하게 좁히고 있는 것도 방치되고 있다.

한국의 진정한 민주주의, 평화통일을 막고 있는

두 개의 쇠말뚝이 한미동맹, 국보법이라는 사실을

일부만이 말할 뿐이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주적이고

이들의 핵무기로 부터 본토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을 주한미군 등을 통해

2차 대전이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미 대통령 등 미 정부의 책무다.

그들은 법치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동북아 방어 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남한 보호, 북한 방어는 미국 법에 의해

신경 써야 할 책무가 없다.

미국의 외교국방 정책 제 1순위는 미 국익이고

평화와 정의 등 고상한 가치는 그 이후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 동북아 전략을 수행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 분단을 이용하고 있다.

분단이 지속되어야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수 있고

가까운 거리에서 중국,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은 분단 유지를 위해

남북한을 관리하고 있다.

전쟁이 나지 않을 정도의 긴장이 유지가 되는 것이

주한미군 주둔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 된다.

우선 미국의 남한 관리부터 살펴보자.

미국의 남한 관리는 1945년 미군정 때부터 시작됐다.

미국이 남한을 미국의 51번째 주 정도의

친미 공동체로 만들려 시도한 것이다.

미국은 이승만과 친일세력을

친미권력집단으로 만들어

한미동맹을 철저히 이행토록 하고

국보법 등으로 미국 비판 등을

봉쇄하게 만드는 것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반도 분단체제에는

일본의 전쟁 범죄를 심판, 청산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조약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한국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의 조약은 평화의 선언이 아니라

일본을 미국의 동북아 기지로 만들기 위한

미일 야합 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일본에 의해 가장 오랫동안 식민지 침탈을 당한

한반도는 조약 심의 과정에서부터 배제되고

조약 서명국에서도 제외됐다.

미국은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배상액의 수배가 되는 경제적 혜택을 남겼다는 식의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일본을 도왔고

오늘날 뉴 라이트들의 식민지기여론의 주문이 되었다.

그 뿐 아니었다.

독도는 분쟁의 씨앗이 되었고,

일본의 경제 기적을 위한 디딤돌은,

조선인들의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강제 노역과 성노예 위에 놓였다.

이승만은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북진통일’에 꽂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거대한 밀실 속에서 미일이 속닥일 때

일제 최대의 피해자인 남과 북의 자리는 없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썩은 유령이 다시 살아나

성노예의 눈물도, 강제징용의 사슬도 배상 없이 지워졌고,

홀로 남은 독도는 한일의 분쟁지로 버려져 미래의 전쟁을 잉태했다.

이승만은 정전협정 타결 저지에 사력을 다하면서 .

샌프란시스코의 평화협정은 외면했다

그가 일반상식을 가지고 미일 야합의 현장인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 여론전을 폈다면

오늘날 반도의 운명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수구의 무리들은 그를 '국부'라 칭송하며 가짜뉴스를 만들지만,

그가 남긴 것은 일제의 전방위적 수탈에 대한

배상권을 통째로 날려버린

외교적 대참사이자,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과오일 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약이 체결될 때,

가장 큰 피해자인 이 땅의 민족은 초대받지 못했다.

프란시스코, 1951년 9월 태평양의 서쪽 끝에서

한국전쟁이 한창 불꽃을 튀길 때

52개국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였다.

패전국 일본을 용서하는 자리였다.

아니, 그저 용서가 아니라 거래였다.

미국이 설계한 거래는

일본이 다시 강해져 소련을 막는 방패가 되는 것으로

그 거래의 내용은 이러했다.

“천황제를 유지한다.

전범처벌을 최소화한다.

배상 책임을 가볍게 한다.

피해국과 일본이 일대일로 협상하게 한다.”

베르사이유 조약처럼

패전국을 응징하는 방식은 없다.

일본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한국은 조약 서명식 참석 52개국 중에 없었다.

협의 과정에서도 없었고 서명국 명단에도 없었다.

36년간 식민지였던 나라.

일제에 의해 가장 많이 수탈당한 나라.

위안부가 있었던 나라.

강제징용이 있었던 나라.

그 나라가 없었다.

미국이 배제했고

일본도 배제에 동의했다.

이승만은 침묵했다.

북진통일에 쏟았던 그 열정의

몇 십분의 일도 여기에 쏟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늘까지 이어진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강제징용 배상이 거부되는 이유.

독도 분쟁이 계속되는 이유.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씨앗이었다.

미국이 심은 씨앗.

이승만이 물을 주지 않은 씨앗.

그 씨앗이 자라 오늘의 가시덤불이 됐다.

미국은 전쟁을 방지해서

한반도 분단을 유지하는 방법도 써먹었다.

거기에는 남북 교류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은 남북이 교류협력을 시도하자

분단 유지가 지속되는 것을 전제로 관리했다.

미국은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한미동맹을 앞세워

남한의 군비증강과 대북 공격태세 강화조치를 취했다.

미국 무기를 엄청 사도록 만들었다.

강력한 안보에서 평화가 보장된다면서

그렇게 했다.

남북 불가침선언, 6.15선언, 10.4선언 등이 이어지고

북한이 휴전선 부근인 개성, 금강산 두 지역을

남한 주민들에게 개방했다.

남한의 한 정치인이 휴전선 155마일을

개성공단처럼 만들어 남북 경제공동체로 가자는

공약을 내놓았다.

그 정치인은 DMZ관할권이

유엔사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딴 소리를 했을까?

아니면 미국 정부가 상전인 유엔사가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 해서 그렇게 했을까?

유엔사는 정전이후 평화 확대를 위한

조치가 아닌 분단 유지만을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유엔사는 인도적 물품의

DMZ통과도 불허하기도 했다.

결국 이명박, 박근혜 당시 금강산, 개성의 문이 닫혔다.

2018년 다시 기회가 오는 듯 했다.

문재인이 방북해 평양시민에게 육성으로 연설하고

남북 정상회담 3회, 백두산 남북정상 동반 등정도 했다.

남북국가연합이 가능할 정도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뒤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미국은 문재인이 남북합의를

거의 이행치 못하게 만들었다.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폼을 잡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김정은이 2국가론을 선포하며 남측과 각을 세웠다.

북한은 핵을 탑재한 ICBM을 만들었다고 선언하고

한반도 비핵화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이 분단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북한 관리는 어떻게 행해졌을까?

미국이 맨 먼저

한 짓은 정전협정 유지였다.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은

협정문에 적혀 있었으나

그 문장을 70 여 년 동안 미완으로 머물게 만든 것이다

정전협정을 먼저 저버린 쪽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1956년 새로운 무기의 반입을 금지한

정전협정 제13항에 칼을 꽂았다.

북한이 먼저 13항을 위반했다는 핑계를 댔으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1957년 판문점에서 미국이 선언했다.

"더 이상 13항에 얽매이지 않겠다."

1958년 새해의 한파 속에서

미국의 단거리 핵미사일과 280mm 핵 발사 대포가

이 땅에 배치되었다.

이듬해에는 중국과 소련의 심장을 겨눈

크루즈 핵미사일까지

주한미군은 최고 1천기의 전술 핵무기가

대북용이라고 했다.

북한은 핵이 없는 나라인데 그렇게 했다.

그러나 진실은 따로 있었다.

주한미군 핵무기는 당시

핵무기를 보유한 중국과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다.

주한미군은 당시 미 본토를 수호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 SIOP를 몰래 수행하고 있었다.

베이징과 블라디보스톡은 700~800km 거리였다.

수원과 군산 미공군기지에서 폭격기가

24시간 대기하며 폭격태세를 유지했다.

미국은 그러나 공개적으로 주한미군 핵무기는

북한 남침 대비용이라고만 말했다.

한국은 침묵으로 그에 동의했다.

미국은 자국 법으로 주한미군에 대한 모든 것을

비밀로 분류하고 SOFA 3, 26조를 만들어

한국 정부도 따르게 만들었다.

한미 두 정부의 ‘심리전’ 속에 한국 국민은

까맣게 몰랐다.

주한미군 핵무기에 의해 강대국간 핵전쟁이

한반도에서도 벌어질 가능성을.

민족 전멸의 위기가 현실이었지만 한국 국회도

침묵했다. 언론, 학계 등도 마찬가지였다.

남한의 잘 나가는 정치인과 부자들은 미국 국적을

자신은 물론 자식도 취득했다.

한반도가 불바다가 되면 자기 가족은

미국으로 도망가 잘 살겠다고 그랬을까?

한국이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발전을 하자

한국 정치, 언론 등은 다 미국 덕택이라 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미국의 민낯은 그게 아닌데 왜 저러지?

바보인가, 정신병자인가?

삼척동자에게 물어보라.

누가 정전협정을 지속시켜 분단의 벽을 높게 만들고

핵전쟁의 위기가 24시간, 365일 일상이 되게 했는가.

북한을 손가락질하며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지근거리에서

목에 겨눈 비수처럼 위협해 국익을 챙긴 게 누구인가.

그런데도 정전협정 70 여년이 지난 후

해외 참전용사를

한국 언론과 정부가 찾아다니며 절을 한다.

‘감사합니다.’

참전용사들은 자기 국가의 명령에 의해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싸웠으니 그들은 자기 국가에 충성한 것이다.

한국이 찾아가서 허리를 굽히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과공은 비례’라는 말이 떠오른다.

지구촌의 눈에 한국 주류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경제와 군사력 세계 상위권, K-문화선진국의

청소년이

미국의 정체, 한미관계의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광화문에 참전용사를 칭송하는

받들어 총 시설물이 거대하게 들어서고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을 강화해

대만에서 일이 생기면 참전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중 전쟁이 나면 한국도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는 것을

공개리에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언론, 학계 등 주류는 그저

한미동맹 강화만을 합창하고 있다.

21세기의 한반도의 위험지수가 높아지게 만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SOFA의

독소조항을 미국은 꼴리는 대로 휘두르며

이 좁은 반도를 냉전기 동안 동북아에서

가장 위험한 핵 화약고로 만들었다.

정전협정은 껍데기만 남았다.

훗날 남쪽을 놀라게 한 전방의 땅굴들은

미국의 핵 공격 대비용이라 했다.

1963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요청했다.

“핵무기 개발을 도와달라.”

두 나라가 거절했다.

그때부터 북한이 혼자 핵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1975년 유엔 총회는 유엔사를 해체하고

평화협정을 맺으라 결의했으나,

미국은 한미연합사라는 또 다른 꼼수의

겉옷을 만들어 주한미군 주둔을 지속하려했다.

미국은 핵 위협의 수위를 높이면서

매년 팀 스피리트 훈련으로

반도의 하늘과 바다를 핵전쟁 연습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미국의 선제공격의 가능성 앞에

북한은 계속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

핵이 없던 카다피, 후세인이 미국 침략으로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북한은 혼자 미 본토까지 닿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었다고 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말했다.

북한의 핵 개발은

한국전쟁의 공습 경험과

전후 미국의 핵 위협에서 시작됐다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세계가 긴장하고

중국이 중재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이 시작된 뒤

2005년 9월 19일 합의가 이루어지고

9·19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북한이 핵을 파기하고 NPT와 IAEA로 복귀한다.

한반도 평화협정을 추진한다.

북미 간 신뢰를 구축한다.”

세계가 박수갈채를 보냈고 한반도 평화가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2005년 10월 단 한 달 만에

그 푸른 꿈은 산산조각 났다.

미국이 터뜨린 방코델타아시아(BDA) 위폐 사건.

미국이 발표했다.

“북한이 달러 위폐를 만들고 있다.”

달러 위폐는 전쟁 선포와 같은 중대 범죄라고 했다.

소리는 컸으나 미국은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6자회담이 중단되면서

비핵화 합의가 백지화되고 평화의 문이 닫혔다.

증거 없는 주장이 평화를 막았다.

미국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북한 비핵화 검증에 대해서도 미국은 손사래를 쳤다.

“북한이 핵을 숨기면 찾아내기 어렵다.”

현대 과학의 눈은 우주에서 모래알도 식별하고,

미국과 러시아는 위성과 현지 사찰 등을 통해

전략핵 감축을 검토하는데,

왜 북한의 비핵화 검증 앞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칼날만 들이대는가.

불신을 발명하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자,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분단 유지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땅의 평화를 가로막는 것은

외세의 사슬만이 아니다.

세계가 규탄하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한다.

북한은 우리와 함께 유엔에 동시 가입한

엄연한 주권국가이건만,

국내법의 현미경으로 보면

상상하거나 접촉조차 죄가 되는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 악법은 수십 년 동안

평화통일을 외치는 양심들을 처벌하고

입을 막는 재갈이 되었다.

수구보수 정권은 정국이 흔들릴 때마다

간첩단을 조작했고,

공안정국의 핏빛 광풍을 일으켜

민중의 염원을 탄압했다.

평화를 말하면 친북이 되고,

자주, 주권을 말하면 반미로 몰던 야만의 시대,

그 최전선에 섰던 정보기관들은

민주화의 새벽이 온 뒤에도

자신들이 지은 죄를 반성하거나

청산하지 않은 채 유령처럼 살아 숨 쉰다.

탄압은 집단 기만을 노리는

가짜뉴스 유포가 병행했다.

사드가 들어올 때도, 패트리어트가

전방에 깔릴 때도

정치권과 언론은 우리가 반대할

권한이라도 있는 양 허상을 유포했다.

실상은 조약에 묶여 미국이 결정하면

군소리 없이 수용하고

우리는 그저 기지와 비용만 지불하는

군사 주권의 진공 상태.

그 서글픈 진실을 가린 채

오늘도 반공의 확성기는

청소년들의 눈을 가린다.

주한미군은 지난 70 여년 동안

북한을 막는 방패가 아니었다.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상대로

정찰, 감시, 선제타격하는 세계전략의

최 전방기지 역할을 해해왔다.

미국은 이를 비밀로 하고 한국 정부도

그에 따랐다.

강대국간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한국은 전화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전쟁의 논리다.

그런데 한국 국민은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아니다. 일부 지배층은 알고 있었다.

혼자만의 비밀로 하고

일가족의 미국 국적을 챙겼다.

이중국적으로 여차 하면 미국 정부의

자국민 철수 대열에 합류하려 한 자구책이었다.

추악한 이기주의 속에 나라는 병들어 가면서

자살율과 출산율이 세계를 놀라게 할 수준이 되어버렸다.

헬 조선이라 불리면서.

외국군의 비밀 군사작전은

한국의 법치 대상이 아니다.

한국 행정부, 국회의 민주적 통제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공간을 축소, 박탈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제 국민들에 대한

헌법적 보호 조치를 외면한 결과다.

정부의 제일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

한국 정부는 이런 책무를 외면하는 직무유기를

70여 년 동안 저지르고 있다.

한미동맹만 중시했지 제 국민의 안위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

미·중 패권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주한미군은 중국의 목덜미를 겨누는

가장 예리한 비수이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미국의 대중 전략에

주한미군이 동원될 때,

대륙의 군사적 타격은

고스란히 이 땅으로 쏟아진다.

주한미군 기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화를 피할 수 없다.

미국이 한국에서 중국, 러시아를 향한

군사행동을 하는 것은

국제법위반이다.

이재명 정부도 주권정부라 하면서

주한미군의 ‘비밀’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전작권이 외국군 손에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군대를 부릴 수 없는 국가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전작권의

한국 환수에 한미가 합의했다.

2012년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를 거치면서

그 시기가 미뤄졌다.

2015년.

2020년.

그것도 조건부였다.

동북아 안보환경까지 따지는 조건은 밑 빠진 독.

시간이 가도 채워지지 않았고

채워지면 새 조건이 나온다.

미국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전작권을 넘긴 뒤에도

미국 대통령의 통수권 속에서

주한미군, 유엔사 지휘권을 행사하게 된다.

전작권 전환이후 한국 땅에서

두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독자적으로 발동되는 체제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경우는 없다.

미국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안위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다는 식의 논리를 들고 나올 법하다.

한국도 동일한 논리로

맞장을 떠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

수십 년 동안 미국에 끌려 다녔고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모습만이 보이기 때뿐이다.

제대로 말하는 한국 정치인, 아니 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외세에 끌려 다닐 것인가.

미국 대통령들이 외쳐온 대북 선제타격의 호언장담은

한반도 전면전쟁 발생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었다.

전면전이면 한민족 전멸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한국 정부는 그런데도 침묵한다.

전쟁이 나면 정치인도 죽는 것인데

왜 저런 기이한 짓을 하는 것인가?

그런 와중에 평택에 세계 최대 해외 미군기지가 생겼다.

한국이 땅을 마련해 시설 지어주고

미국이 쓴다.

주한미군은 평택과 오산에 우주전쟁 기지도 만들겠단다.

한국 정부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국민은 속이 터지는데도 침묵, 침묵, 침묵.

미국이 자국 이익을 챙기는 것에

한국 정부가 침묵하는 것을

전 세계가 손가락질하며 비아냥거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70년 동안 얼어붙은 세계 최장의 정전협정은

미국이 저지르는 위선의 증서다.

이 껍데기를 찢고 실효적인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화약고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외세의 예속을 끊어내고, 군사적 자주의 발판을 다져

유엔 회원국에 걸맞은 온전한

주권국가로 우뚝 서야 할 시간이다.

세계 선진국 수준의 경제, 군사력과 세계가 찬탄하는

k-팝 문화의 주인공다운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이 땅의 주인들이

자주의 깃발을 높이 들때,

겨울은 가고 진정한 평화의 봄이 찾아오리라.

모두가 떨쳐 일어나야 세상이 좋아진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군사주권 회복하고

국가보안법 폐기해야 한다.

남북이 만나 평화통일을 실천할 수 있게 해야한다.

그것이 70년 정전의 덫을 벗어나는 길이다.

덫은 스스로 끊어야 한다.

다른 누가 끊어주지 않는다.

미국이 끊어주지 않는다.

중국이 끊어주지 않는다.

당사자 스스로 끊어야 한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268 2026.07.08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S -당권투쟁과 국보법, 한미동맹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한국 시민이 두 번 탄핵했다.

박근혜, 윤석열.

시민들이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고

비, 추위를 무릎 쓰고 원한 것은 무엇인가.

주권이었다.

민주주의, 자신들이 주인인 나라였다.

그러나 시민들은 두 가지를 외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과 한미동맹이다.

국보법은 악법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국보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국보법이 두렵기 때문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불평등 조약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조약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반미 =종북’이라는 소리가 두렵기 때문이다.

두 번 탄핵한 용기가 있는 시민들은

이재명 정부가 집권한 뒤

4.19 혁명, 87년 6월 혁명,

2017년 촛불혁명 이후 그랬던 것처럼

현실 정치는 기존 정당이 도맡아서 하면서

구경꾼으로 전락했던 모습을 반복했다.

혁명의 주체이면서 국민들이 강제 퇴거시킨

정치권력의 빈자리는 기존 정당들 몫이 되었던

관행이 또 다시 반복된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거리에서 투쟁해

윤석열 탄핵을 성사시킨

빛의 혁명 주역 어느 누구도

장차관을 시키지 않았고

시민들은 잘 하겠거니

박수치고 지켜보는 역할을 하는

과거를 되풀이 했다.

그런데 괴이했다.

내란이 분명한데, 국내외에서

TV로 내란 현장이 생중계되었는데

불법계엄이 불가피했다느니

윤 어게인이라고 외치는

거대 야당 국회의원 등의

목소리는 작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현행 정당법, 선거법, 정당지원법 등이

거대 2개 정당의 존립을 보장해주면서

회전문식으로 정권교체를 하는 일이

반복되게 만들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권 거대 여당은 실수하기 마련이고

그러면 거대 야당의 집권이 가능한 구조가

국민을 개돼지로 만드는

정치공학만이 난무하게 만들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확증편향을 강화하는

유튜브 방송을 앞 다퉈 찾아가고

법사, 도사와 함께 여론조작 전문가,

선동선전 모리배가 현실정치와

공생공사를 거듭하는 기현상이 지속된다.

거대 여야당의 관심은 오직 권력 장악 뿐

선거에서 득표에 도움 되는

작은 일만 챙기고

국민이 주권자를 위한 큰 정치를 외면한 채

두 대통령을 탄핵케 만든 정치구조 속에서

계속 다투고 헐뜯는 일이 반복되면서

총성 없는 추한 전쟁만이 악취를 풍긴다.

그러면서 이재명 정부 집권

1년이 지난 2026년 6월

지방선거가 끝나자 거대 여야당은

일제히 당권경쟁, 당내 권력투쟁을

시작했다.

그것은 민생과는 관련이 없는

정당과 진영 내부의 우물 안

개구리 싸움과 흡사했다.

대통령도 나서서 한 몫을 하는

치열한 집안싸움이 가열되면서

이재명 정부조차 국민 지지율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여론조사는 정권교체가

재집권보다 더 높게 나오고

거대 야당 일각에서는 다음 총선과

대선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외친다.

내란 동조 당으로 낙인찍힌

거대 야당이 기사회생의

기회가 왔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여의도 정치판은 당권 쟁탈전의

진흙탕 싸움으로 날밤을 샌다.

왜 저럴까?

여권의 증축, 재건축, 재개발 논란이나

‘문조털래유', '수박’ 시비 때문인가.

야권의 윤어게인과 반대파의

당 주도권을 다투는 힘겨루기 때문인가?

밖에서 보면 눈살 찌푸리게 하는 집안싸움,

도토리 키 재기 식의 권력 다툼인데

우물 안 개구리들은 생사를 건

대회전인 양 온통 난리 법석이다.

두 대통령이 탄핵당한 사회구조가 유지되면서

구역질나는 여의도의 패거리 정치가

되풀이 되고 있는 현실은

또 다른 대통령 탄핵을 잉태하고 있다는

사실에 모두 무관심하고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정치를 아무도 개혁하려 하지 않는다.

보라, 거듭된 혁명 속에서 현실정치는

지난 수십년간 반복된 구태를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거대 정당만이 배 터지는 특권을 누리는

선거법, 정당법, 정당지원법이 여전하고

헌법기관 국회의원위에 군림하는

제왕적 당대표 관행이 굳건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민주권 정부를 앞세우면서도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보법에 침묵하고

한미동맹 강화를 강조하는

비민주적 공간속에서 과거 정부와 흡사한

정상배 정치가 반복되고 있다.

정치권이 국민의 헌법적 기본권을

원천 봉쇄하는

국보법과 불평등 한미동맹에 침묵하면서

70 여 년간 겹겹이 쌓인 비민주적 구조의

모순이 화급히 폭발 점으로 치닫고 있다.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가?

이 나라 국민은 지난 70 여 년 동안

헌법적 주권자의 권리가 봉쇄된

두 개의 감옥에 갇혀있다.

국가보안법과 한미동맹이라는

두 감옥 안에서 5천만 명이 살고

언론이 쓰고 정치인이 말하고

학자가 연구한다.

두 감옥의 벽을 넘으면

종북, 반미가 되거나

빨갱이가 된다.

두 감옥에서 탈피할 열쇠가 무엇인가.

첫 번째 열쇠는 국가보안법 개폐,

혹은 최소한 제7조 개정이다.

두 번째 열쇠는 한미상호방위조약 6조 발동으로

대등한 주권국가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 정치권, 언론과 학계는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두 열쇠를 외면하고 침묵한다.

그것을 말하고 사용하면 후폭풍이 온다는

계산과 공포에 짓눌린 탓이다.

국민이 두 개의 감옥에 갇혀

좁아진 민주주의 공간에서

신음하는데도 거짓말을 한다.

“이 나라 국민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어 불편하지 않다.

국보법은 북한 때문에 필요하고

한미동맹도 한국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미래에도 역시 북한 때문에 불가피하다.

국민은 두 감옥에서 지내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럴까? 그것이 진실일까?

그렇다면 따져보자.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를 얽어매는 그 법

북녘 동포 전체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며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의 소통마저 차단하는

반인륜적 악법, 그것이 국보법이다.

산천이 일곱 번이나 변할 시간이 흘렀건만

이 법은 여전히 한반도의 공기처럼 존재하며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독가스로

정보강국 코리아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는다.

"반미는 친북이다"라는 단순무식한 공식

그 속에서 북한은 오직 절대적 악(惡)일 뿐

미국의 그늘은 항상 정의로운 편이 되라며

정치권은 한미동맹 강화를 외치고 있다.

언론은 국보법이라는 칼날 아래서

스스로의 혀를 깨무는 자기검열에 능숙하다.

북한 보도할 때면 정해진 공식에 따라

도발, 위협, 비난이라는 프레임 기사를 반복한다.

미국의 대북 정책은 무비판적으로 보도하지만

북한의 입장이나 구조적 원인은 철저히 배제한다.

21세기 인공지능 시대에 역행하는 이 검열은

진실을 왜곡하고 확증편향을 강화하고 있다.

만약 국보법이 사라진다면

언론이 360도 전 방위를 짚어보는 기사를 쓴다면

북한 핵문제, 미국 핵우산 문제 등에 대한

다양한 해법이 자유롭게 개진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창조적 결론이 모아질 텐데

지난 70 여 년간 언론은 외면하고 정치권은 침묵한다.

국가보안법 제7조는 찬양·고무·동조에 관한 것으로

머릿속 상상, 사상을 처벌하는 장치다.

북한을 이롭게 하는 표현,

북한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

북한 주민의 인간적 측면을 말하는 것 등등등

그것이 죄가 될 수 있다.

친미와 반미 사이에 수많은 대안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분법의 늪에 갇혀 헤매고 있다.

군사 주권을 되찾는 일이 반미가 아니라

진정한 국익을 위한 성숙한 외교의 시작이다.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제7조를 지적했다.

“폐지하거나 개정하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가 말했다.

“국제 기준에 맞지 않는다.”

수십 년째 반복된 권고.

한국 정부는 수십 년째 외면했다.

그 조항이 하는 일을 보라.

북한 핵을 분석할 때

미국의 대북정책의 역할도 함께 봐야 한다.

그러나 그 분석을 하다가

자칫 친북으로 몰릴 수 있다.

정치와 언론은 안전한 방향만 말한다.

북한은 악이고 미국은 정의라고.

자기검열이 전 국민에게 일상화 되고 있다.

그것이 국보법의 진짜 기능이다.

철창 없는 감옥의 기술이다.

국보법에 의해 남한 정치, 언론이 만든

기이한 방정식이 있다.

미국 비판 = 반미, 반미 = 친북,

친북 = 이적행위, 이적행위 = 국보법 적용.

그러므로 미국을 비판하면 국보법에 걸릴 수 있다.

이 방정식이 맞는지 검증해 보자.

미국이 한국 정부를 도감청하고

윤석열 정부가 문제없다고 했다.

용산 미군기지가 기준치 36배로 오염됐지만

한국 정부가 15cm 흙을 덮고

공원으로 만들어 어린이, 일반시민에게 개방했다.

주한미군 방위비 불용액 2조 원이 미국 은행에 있는데

그 돈을 낸 한국 정부는 돌려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반미라서 그런가

한국 사회가 조용하다.

반미이면 친북이고 친북이면 국보법인가.

이 방정식이 진실인가, 아니면 지배의 도구인가.

국보법이 지배하는 남한에서

매일 뉴스가 나온다.

북한이 미사일을 쐈다.

도발이며 위협이다.

미국이 전략핵폭격기를 보냈다.

대북 억제력이고 안보다.

그 뉴스를 매일 보는 국민이 생각을 굳힌다.

북한은 절대 악.

미국은 절대 선.

한미동맹은 신성불가침.

이의를 제기하면 종북.

이것이 확증편향이다.

매일, 365일, 70년 넘게 반복된 확증편향.

그 편향 속에서 평화를 고민하고

남북이 공존할 가능성을 상상하는 공간이,

한미동맹의 문제점을 말하는 공간이 사라진다.

그 공간이 없으면

대안이 나올 수 없다.

대안이 없으면

전쟁 아니면 현상유지뿐이다.

남한의 언론사 기자가 기사를 쓴다.

북한 핵을 다루는 기사인데

미국의 대북정책을 비판적으로 써야 하나.

그러면 반미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반미 소리를 들으면 친북으로 몰리고

국보법으로 처벌될 수 있다.

그래서 기자는 안전한 방향을 선택한다.

북한은 악이고 항상 도발한다고.

미국은 언제나 옳고 정의롭고

한미동맹은 필수라고 기사에 쓴다.

이것이 자기검열이다.

강제가 아니고 스스로 알아서 한다.

국보법의 진짜 무기는 그것이다.

처벌하지 않아도 된다.

두려움만으로 충분하다.

두려움이 언론을 가둔다.

언론이 국민을 가둔다.

국민이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게 만든다.

세계 10위 경제강국, 세계 6위 군사력,

K팝이 세계를 누비는 나라의 언론이

자기검열로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2018년 3 번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려

장문의 합의가 나왔다.

군사분계선에서 적대행위 중단하고

비무장지대를 평화지대로 만들고

철도와 도로를 연결하며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하자.

평화통일의 꽃이 피는 것 같았지만

미국 트럼프가 제동을 걸었다.

미국은 주한미군을 통해

중국,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데

남북화해가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다.

비핵화 진전 없이 남북교류 없다.

그것이 미국의 답이었다.

유엔사가 군사분계선 통과를 막았다.

유엔사는 미국의 정부기구다.

문재인 정부는 미국에 공식적 항의 없이 임기를 마쳤고

언론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같이 침묵,

북한은 극도의 불신과 적대감을 보이면서

두 국가론의 적대적 대치를 부르는

비극의 서곡이 되었다.

한미동맹의 상징인 주한미군은

북한 방어를 위해 필수라는데

미국에게 주한미군은 미 본토 수호를 위해

중국, 소련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최전방부대라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미 대통령은 동북아에서 방어 전략을

강화하기 위해 한미상호방위조약과 미일방어조약 등을 묶어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를 만들어

70 여 년째 가동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핵보유 강대국 두 나라가 포진한

대륙을 향해 1950년대 말부터

핵무기를 다량 한국에 배치했는데

겉으로는 이들 핵무기가 대북용이라고 발표했다.

주한미군의 이런 작전에 대해 미국은

미국법에 의해 비밀로 분류하고

한국 정부도 입을 다물도록 SOFA 규정을 만들었다.

한국정부는 70 여 년 동안 한미동맹을 이유로

주한미군의 대륙을 향한

작전을 국민에게 전혀 알리지 않고

국회도 침묵했다.

이는 한국 정부가 국민에 대한 헌법적 책무를 방기한

직무유기라 할 수 있고

이는 한국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해치는 요인으로, 이재명 정부도 마찬가지 태도다.

동시에 강대국간 전쟁 가능성에

국민을 방치한 심각한 문제도 한국 정치는 모르쇠하고 있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은

비밀리에 수행하던 중러작전을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고

이는 국제법적으로 한국이 만약의 불상사에

책임을 저야 하는 문제가 있다.

중러가 합동군사훈련을 한반도 주변에서 강화하고

주한미군과 중국공군기가

서해상에서 대치한 것 등에 대해

정부는 국민에게 설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책무가 있다.

주한미군과 유엔사가 한일 두 나라를

군사적으로 연결시키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도 심각하다.

미국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이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를 가동하는데

필수적 요인으로 보고 한반도를 관리하고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서 전쟁, 평화통일

여건이 조성되지 않고

적절한 군사적 긴장상태가 유지되도록

남북한을 통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남한에 대해서는

군비증강을 추동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5024, 5027, 참수작전 등과 같은

대북작전계획을 지속적으로 공개해 북한을 자극했다.

그 결과 2026년 6월 현재 남북한은

서로 핵으로 상대를 전멸시키겠다는

수준의 대치상태를 보이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핵보유도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트럼프는 김정은에게

계속 러브콜을 보내려 하고 있다.

미국은 주한미군 사령관이

사령관 모자 3개를 쓰고

남한에서 한미군사관계를 통제하는

권한을 부여했는데 이는

세계 주둔군 역사에서 초유의 일이다.

미국식 합리주의가 주한미군의 지속 주둔을

보장할 조건을 만들기 위해 만든 치밀한 조치다.

이뿐 아니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마치 점령군같은

권한으로 주둔하게 만든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주한미군은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면서

그 기지 시설은 한국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데

이는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에 의해 가능하다.

이 4조는 주한미군에게 특수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미국은 미군사력을 대한민국의 영토 내와

그 부근에 배치하는 권리를

한국은 허여하고 미국은 수용한다."

권리?

이 단어 하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미국이 원하면 핵무기, 사드가 들어온다.

미국이 원하면 탄저균 실험실이 들어온다.

미국이 원하면 무인폭격기가 들어온다.

한국이 미국의 권리를 허여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은 대북 선제타격, 참수작전을

한국과 사전 협의 의무가 없다.

미국이 북한을 때리기로 결정하면.

서울이 불타는 동안.

한국은 통보를 기다릴 뿐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2조는 말한다.

‘위협 판단을 미국이 단독으로 한다.

무력 강화 수단도 미국이 단독으로 결정한다.’

이것이 동맹인가, 아니면 예속인가.

한미군사관계가 어떤 수준인지는

미국이 필리핀, 일본, 나토 회원국 등과 맺은

군사관계에서 확인된다.

필리핀은 1992년 의회가 결정했다.

클라크 미군기지 연장 불허, 미국이 나가라.

핵무기는 들여오지 마라.

미군이 지은 시설은 우리 것이다.

우리 법을 따라라.

한국과는 너무 다르다.

미국이 군사력을 배치하는 것은 권리이고

한국 법을 존중하되 따르지 않아도 된다.

미군 시설을 한국이 짓고 준다.

방위비까지 우리가 낸다.

같은 미국과의 동맹.

이렇게 다를 수 있는가.

필리핀은 주권을 행사하지만

한국은 국보법과 친미라는 틀 안에 갇혀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6조을 보자.

"본 조약은 무기한으로 유효하다.

어느 한 당사국이 상대 당사국에게

미리 폐기 통고한 후 1년 후에

본 조약을 종식시킬 수 있다."

이 조항에 따르면 조약을 폐기하거나

개정 협상을 요구할 수 있다.

조약을 수정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에

수정을 하려면 이 조항을 발동해야 한다.

"우리는 이 조약을 종식하겠다."

이 말을 누가 할 수 있는가.

국보법이 두렵고 친미라는 틀에 갇혀서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아무도 그 말을 잊고 산다.

한국군 전시작전통제권도 문제가 심각하다.

현재 전쟁이 나면 한국군을 누가 지휘하는가.

미군 사령관이다.

그 미군 사령관은 미국 대통령의 명령을 받는다.

미국 대통령은 미국 국익을 위해 결정한다.

그 사령관이 한국군 60만을 지휘한다.

한미는 전작권을 2012년에 환수하기로 했다가

2015년으로 미루고 2014년에 다시 무기한 연기했다.

조건을 만들었다.

한국군 능력을 미군이 테스트해서 합격해야 한다.

세계 6위 군사력을 가진 나라가.

자국 군대의 지휘권을 되찾으려면.

외국 군대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정상인가.

독일과 일본은 어떻게 하는가.

독일은 자국군을 자국이 지휘한다.

나토와 협력하되 지휘 계통은 분리된다.

일본은 자위대를 스스로 지휘한다.

미군과 협력하되 복속되지 않는다.

한국만 다르다.

한국만 전쟁이 나면.

한국 대통령이 한국군을 지휘하지 못한다.

이것이 혈맹인가.

이것이 동맹인가.

이것이 예속이 아닌가.

다시 물어보자.

국보법과 한미동맹 감옥 안에 있으면 안전한가.

감옥 안에 있으면 전쟁이 오지 않는가.

감옥 안에 있으면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는가.

아니다.

감옥 안에서

핵 위협이 점점 커지고 있다.

감옥 안에서

남북이 서로에게 멸절을 선언하고 있다.

감옥 안에서

1000만 이산가족이 죽어가고 있다.

감옥의 문을 여는 것.

그것이 무서운 일인가.

아니면 감옥 안에서 핵전쟁을 기다리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인가.

평화는 거저 오지 않는다.

평화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온다.

두 감옥의 문을 여는 용기.

그것이 평화의 시작이다.

이제는 침묵을 깨고

주권의 광장으로 매진할 시간,

동맹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똑바로 세워야 한다.

친미와 반미라는 흑백 논리를 걷어치우고

건강한 공론화로 집단 지성의 힘을 발휘하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제6조를 미국에 통고하자.

"미리 폐기 통고한 후 1년 뒤 종식할 수 있다"

주권의 깃발을 하늘 높이 들어,

불평등한 예속의 어둠을 걷어내고

미국과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맺자.

남북이 공존하고 평화통일로 가는

로드맵을 다시금 굳건히 세우고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나아가자.

이 땅의 후손들에게 전쟁의 공포가 없는,

진리와 정의가 넘쳐나는

풍요롭고 빛나는 통일 한반도의

미래를 당당히 물려주자!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330 2026.07.02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9-불의 비, 핵과 세균전 그림자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개시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자,

중국은 1950년 10월 19일 팽덕회가 지휘하는

'중국인민지원군' 20여만 명을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투입해 전쟁에 본격 개입했다.

중공군은 10월 25일 1차 공세를 개시하며

유엔군 후방을 위협했고,

기만전술로 유엔군을 유인한 뒤 자취를 감췄다.

맥아더 사령관이 중공군의 개입 규모를

과소평가한 채 '크리스마스 공세'를 명령하자,

중공군은 11월 25일 2차 대공세를 펼쳤다.

동부전선에서는 11월 27일부터

장진호 전투가 벌어져,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제9병단 7개 사단의 포위 속에서

2주간 혹독한 추위 속에 격전을 벌였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 1사단은

중공군의 포위를 뚫고

흥남 지역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했으나,

유엔군은 동부전선에서 대대적인 후퇴를 피할 수 없었다.

중공군의 공세로 전황이 급변하자,

유엔군과 국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38선 이남으로 대규모 철수를 단행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서울을 재점령했지만,

유엔군은 곧바로 반격에 나서

1951년 3월 서울을 재수복했다.

이후 양측은 38선 부근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며

진격과 후퇴를 반복했다.

결국 1951년 6월경부터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졌다.

전쟁은 기동전에서 참호전과

고지전 중심의 소모전으로 바뀌었다.

같은 해 7월부터 휴전 회담이 시작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기에 이르렀다.

한민족 최대의 비극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연을 낳았다.

숫자가 있다.

63만 5천 톤.

그것이 1950년 6월부터 3년 동안

압록강에서 낙동강까지

미 공군의 B-29가 뿌린 불의 기록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폭탄의 무게다.

이 숫자는

2차 대전 때 일본에 퍼부은 16만 톤의

거의 4배였다.

2차 대전 당시 유럽에 떨어진 것은

106만 톤.

일본에 떨어진 것은 50만 톤.

그러나 유럽은 6500만 명의 땅이었고

일본은 7200만 명의 땅이었다.

북한은 970만 명의 땅이었다.

숫자를 나누면

진실이 드러난다.

한 명이 감당한 폭탄의 무게

한반도가 세계 어느 전쟁보다

무거웠다.

북한의 22개 도시는

60%에서 95%까지 사라졌다.

한 종군기자가 적었다.

“압록강과 평양 사이는 철저히 파괴되어

도회지는 보이지 않았다.

빨래판처럼 판판했다.

사람이 살았던 곳은 굴뚝만 남아 있어

마치 달나라를 여행하는 것 같았다.”

도시와 마을의 밤은

한 번이 아니라 수없이 불탔고,

평양, 강계와 신의주와

이름 없는 마을들까지

불길은 경계를 모르고 번졌다.

네이팜은 살을 삼켰고

소이탄은 집과 기억과 숨결을 함께 태웠다.

네이팜은 단순한 폭탄이 아니다.

강력한 폭약으로 먼저 건물을 부순다.

그 다음 네이팜이 불을 붙인다.

소이탄이 그 불을 살린다.

단 20분 만에

도시 전체가 1500도에서 2000도의

화재폭풍에 휩싸인다.

연기가 산소를 빼앗는다.

생명체는 타거나 질식한다.

사람들은 강물 속으로 몸을 던졌으며

얼어붙은 겨울 강 위에

붉은 화염이 떠다녔다.

1950년대 북한 도시의 모습이었다.

2차 대전 당시 유럽에서

이 방법이 비도덕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미국도 인정했다.

그래서 정밀폭격 원칙을 세웠다.

그러나 중공군이 참전하자

그 원칙은 폐기됐다.

1950년 11월 5일 B-29 폭격기 22대가

강계로 날아가 75%를 파괴했다.

단 하루에.

맥아더가 지시한 작전이었다.

강계, 신의주, 그리고 수 개의 작은 도회지를

화염 공격하는 명령이 내려졌다.

북한의 모든 도시와 부락.

공장.

건물.

통신 시설.

모두 파괴하라.

전쟁이 끝났을 때

미 공군이 스스로 평가했다.

“북한의 22개 주요 도시

목표물 파괴율 85%.”

그러나 그 ‘목표물’ 속에는

할머니, 젖먹이를 안은 어머니가 있었다.

북한의 인구는 당시 970만 명.

그중 99만 5천 명이 죽었다.

최대 150만 명이라는 추정도 있다.

비교해보라.

2차 대전, 독일의 민간인 사망자는 40~60만 명.

일본의 민간인 사망자는 33~90만 명.

한반도는 더 작았지만

더 많은 죽음을 삼켰다.

전쟁의 이름 아래 도시는 불타고

강물은 시체를 떠내려 보냈으며

밤하늘은 끝없는 화장터가 되었다.

정전협정 논의가 시작되자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미군 폭격기들이 댐을 공격했다.

독산, 자산댐, 구원가, 남시댐.

물이 터져 농지가 잠기고 작물이 사라졌다.

수백만 명이 굶주렸다.

협상 카드였다.

주민들의 굶주림이

협상 테이블 위의 카드였다.

폭격이 계속되어

마침내 목표물이 사라졌을 때

미군 폭격기들은

개천에 놓인 작은 다리를 폭격했다.

아니면 그냥 바다에 폭탄을 버렸다.

할당량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2026년 트럼프가

이란의 비군사시설을 파괴하며

지옥문이 열릴 것이라고 외치는 모습은

1950년대와 닮았다.

중국 참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맥아더가 요구했다.

“만주와 압록강 주변에 34개의 핵폭탄을 투하하라.

최소 60년 동안 북한의 남침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

34개와 60년 그 숫자 속에

얼마나 많은 목숨이 들어있는지

그는 계산하지 않았다.

한반도와 만주가

인간이 살 수 없는 폐허가 될 뻔했다.

트루먼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가 물었다.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고 있는가.

트루먼이 대답했다.

"핵무기 사용은 미 야전 사령관의 판단에 의해

결정될 수 있는 통상적 고려 사항이다."

세계가 얼어붙었다.

영국 수상이 비행기를 탔다.

프랑스 수상도 달려왔다.

워싱턴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영국과 프랑스가 말했다.

미국이 중국과 싸우는 동안

소련이 서유럽을 공격할 수 있다.

핵전쟁이 유럽으로 번질 수 있다.

그것이 핵사용을 막은 이유였다.

유럽의 안전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루먼이 비밀리에 명령했다.

전술핵무기 9발을

B-29 폭격기 부대로 옮겨라.

중국과 북한을 겨냥한 것이었다.

카데나와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미군이 핵폭탄을 조립했다.

마지막 부품만 빼고.

그것은 실제 투하 직전에 넣는 부품이었다.

모의 훈련도 실시했다.

B-29가 오키나와를 날아

북한 지역으로 비행했다.

모의 핵폭탄과 재래식 폭탄을 투하했다.

실전 투하의 모든 과정을 연습했다.

그러나 핵폭탄은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소련이 핵으로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

유럽이 불안해할 가능성.

미래의 전례가 될 가능성.

그리고 한반도 지형적 특성으로 인한

전술적 효율성 문제.

북한, 중공군이 한 곳에 밀집하지 않아

분산된 적에게 핵폭탄은 비효율적이었다.

맥아더가 그래도 계속 핵 투하를 고집했고

트루먼은 하극상을 이유로 맥아더를 경질했다.

그러나 핵폭탄 대신

또 다른 무기가 의심받았다.

세균전 의혹이었다.

보이지 않는 죽음의 폭탄.

바람을 타고 내려온다는 병균,

곤충과 깃털 속에 숨었다는 죽음,

탄저균.

보툴리눔 독소.

한탄 바이러스.

세균전 의혹은 미국이 자초했다.

일본 항복 직후 자행된

반인륜적인 암거래 때문이었다.

일본 731부대가 만주에서

살아 있는 인간을 생체실험 해 만든

피비린내 나는 악의 자료를

미국이 면죄부를 주고 손에 넣은 것이다.

731부대에서 죽어간 3천 여 명의 희생자중

조선인이 중국인 다음으로 많았다.

그들은 실험실과 영하의 벌판에서 살해당했다.

마루타라 불렸다.

통나무.

사람이 아니라 통나무였다.

미국이 종전 직후 악마의 실험을 한 자들과 직거래했다.

맥아더 휘하의 미군 정보 대장 윌러비가

731부대총책임자 이시이 시로와 만났다.

거래의 내용은 단순했다.

자료를 주면 면죄부를 준다.

이시이는 살았다.

1959년 자연사할 때까지.

그의 부하들도 살았다.

전후 일본 의학계 유명인사로.

면죄와 거래 속에

전범들의 기록은 살아남았고

조선인과 중국인의 절규 위에

피로 적힌 자료들은

새로운 강대국,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의 세균전 연구소로.

그 흉악무도한 암거래의 그림자는

한국전쟁의 하늘에도 드리워졌다.

중국과 북한이 주장했다.

“미국이 세균전을 펼치고 있다.”

미국은 부인했다.

소련이 조사 기구를 만들어 사실이라고 했다.

미군 조종사들이 포로가 됐다.

세균전에 참여했다고 증언했지만

귀국 후 번복했다.

그들의 입이 어떻게 닫혔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진실은 지금도 안개 속에 있다.

의혹은 사실인지 아닌지

끝내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731부대를 계승한 미국의 세균전에 대한 의지는

정전협정으로 굳어진 한반도에서

그 행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2015년 서울 용산미군기지에

살아있는 탄저균이 반입됐다.

주피터 프로젝트라 했다.

2013년부터 시작된 생물 대응 실험.

1g으로 100만 명을 몰살할 수 있는 보툴리눔.

탄저균.

한국 정부도 모르는 사이에.

SOFA가 통관 절차를 면제했기 때문에.

아무도 검사하지 못했다.

세계 25곳의 미군 생물무기 연구소가

자료를 한국으로 보낸다.

분석하기 위해.

왜 한국인가.

북한과 가까워서인가.

SOFA 덕분에 통제가 없어서인가.

한국 시민단체들이 외쳤다.

중단하라.

미국은 답하지 않았다.

SOFA가 있으니까.

특권이 있으니까.

용산과 오산의 주한미군 기지에서

오늘날에도 생물무기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가.

한반도의 전쟁은

국가가 어디까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승리라는 말이 어디까지 잔혹할 수 있는지,

핵과 세균과 공습이

국제적 법규와 윤리의 벽을

얼마나 쉽게 파괴할 수 있는지

확인해야 하는 잔혹한 물음표였다.

그런데도 전쟁 뒤의 세계는

묻지 않았다.

누가 파괴했는지,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누가 사과해야 하는지,

누가 조사해야 하는지.

2차 대전 이후 미국은 전쟁이 끝난 뒤

독일에는 1천 명의 조사단을 보내

화염공습 피해를 정밀 조사하고 배상했다.

북한에는?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았다.

물론 배상도 없었다.

독일은 서방의 동맹이 될 나라였다.

북한은?

조사할 필요가 없는 나라였다.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말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강행된 북한에 대한 공습은

미국이 타 민족에게 가한

가장 극단적인 폭력의 하나이면서

미국인들이 그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

왜 모르는가?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 자신들의 신화를 부수기 때문이다.

‘자유를 수호한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신화를.

미국인들은 모른다하고

한국인도 말하지 않는다.

역사가 반복될 수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몇 년 전

미국 국빈 방문에서 말했다.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대한민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은 감사의 표시였다.

그러나 감사는 진실을 가릴 수 없다.

미국은 왜 한국전에 참전했는가?

남한 주민을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였는가?

1890년대 조선과 수교한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일관되었다.

국익 추구였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의 한반도 강탈을 간접 승인하고

36년간의 독립운동을 외면했다.

일본 항복 후,

미국의 남한 점령은 소련 견제가 목적으로

친일파를 군과 경찰에 그대로 재활용했다.

미국의 동북아 전략용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강행했고

제주 4.3이 반대하자 주민 1/10을 죽였다.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일본의 공산화가 두려워 개입했다.

이것이 미국의 ‘희생’의 실체다.

물론 그 결과 한국이 혜택을 본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혜택은

미국의 선의가 아닌,

미국의 전략적 필요의 부산물이었다.

총성이 멎은 지 70년이 넘었다.

그러나 평화협정은 없다.

정전협정이 있을 뿐이다.

주한미군이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견제하게 위해

계속 주둔하기 위해서

한반도 분단은 필수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휴전.

그 동안 핵폭탄이 남한에 배치됐다.

중국과 소련 위협용이었지만

동시에 북한을 자극했고

결국 북한도 핵을 만들었다.

2026년 한반도에는 진화된 형태의 위협이 있다.

핵우산은 보호라 불리고

전략자산은 억제라 불리며

새로운 공포는 기이한 언어로 포장된다.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이란 날개를 달고

대만 유사시 참전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겠단다.

강대국간 전쟁은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한국도 전쟁터가 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국제법에 저촉되기도 한다.

한국이 주한미군 기지를 통해 제3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허용하는 경우

국제법상 의무와 책임이 따른다.

유엔 헌장, 국제관습법, 국가책임법 원칙이다.

유엔 헌장 제2조 제4항(무력 사용 금지), 제51조(자위권)는

국가의 무력행사와 다른 국가에 대한

지원의 적법성을 판단하는 기본적인 국제법규이다.

국제관습법은 ‘국가는 자국 영토가

다른 국가에 대한 불법적인 무력공격에

이용되지 않도록 상당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원칙’이다.

국제법위원회의 국가책임 초안제16조는

다른 국가의 국제위법행위를 알면서

원조하거나 지원한 국가의

책임에 관한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2026년 이란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사우디, 오만 등에 있는

미군 기지와 함께 해당 국가시설도 공격하는 경우,

중국이 성주 사드에 대한 보복을

한국에 10년째 하고 있는

배후 요인이 무엇인지 한국 정부, 언론은 입을 열지 않는다.

최근 주한미공군기와 중국공군기가

서해상에서 대치했는데

한국 정부는 뒤늦게 알았다며 항의하자

주한미군사령관이 ‘무슨 소리냐?’며 맞받았다.

한미동맹에 의해 허용된

주한미군의 군사행동이라 했다.

전략적 유연성의 숨은 뜻에 대해

한국 정부는 국민에게 설명치 않았다.

적절한 것인가?

한국정부가 SOFA에 묶였다며

침묵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 행복할 권리에 역행한다.

그것은 반헌법적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미국 대통령의 선제공격 발언에도

한국 정부는 침묵하는 것이 관행이다.

선제공격 후에는 한반도 전면전이 불가피하다.

한반도 남북이 다 죽을 수 있다.

침묵하는 정치, 언론, 학계도 무사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도 침묵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나?

바보라서 그런가? 벙어리인가?

북한핵에 대한 공포와 대처가

미국의 핵우산과 미국의

한반도 전략만으로 해소되는 것인가?

오래전부터 동서해 하늘에서

중국러시아가 합동군사훈련하고 있다.

오산, 군산의 활주로에는

전략폭격기의 그림자가 24시간 대기하고 있다.

오늘도 미군기지 어딘 가에서는

탄저균 실험이 계속되고 있을지 모른다.

자살률 세계 최고, 출산율 세계 최저의

헬지옥 현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핵은 평화의 도구가 아니고

세균전은 결코 방어가 아니다.

국제법은 강자의 장식품이 아니라

약자의 마지막 방패여야 한다.

그래서 한국은 미국 대통령에게 강하게

말해야 한다.

" 이 땅에서 미 국익을 위한

전쟁은 절대 안 된다.”

지난 70 여 년간의 한미동맹을 돌아볼 때

한국의 자주권 회복이 급선무다.

미국이 하자는 대로 따라하다가

정전협정은 지속되고

주한미군의 치외법권적 지위는 더욱 강해진다.

그 결과 한국 민주주의도 쪼그라들고 있다.

평화는 망각과 의존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평화는 진실 위에만 세워진다.

언젠가 155마일 휴전선의

철조망 위에 진달래가 피고

판문점의 콘크리트 위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흐르는 날,

그날 비로소

이 땅은

미국의 전략기지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242 2026.06.28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8-38선의 밤, 6.25의 비극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칠십육 년 전 그 새벽,

포성이 강산을 뒤흔들고

한반도의 산과 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전쟁은 멈추었으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총성이 침묵한 자리에는 철조망과 지뢰밭이 뿌리내렸고,

휴전선은 세월보다 길게 민족의 가슴을 갈라 놓았다.

남과 북은 서로를 경계한 채 군사분계선의 긴 침묵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묻는다.

언젠가 철조망이 걷히고,끊어진 철길이 다시 이어지며,

백두에서 한라까지 하나의 노래가

울려 퍼질 날이 오지 않겠느냐고.

칠십육 년,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나

평화를 꿈꾸는 마음 또한끝나지 않았다.

분단의 세월보다 더 긴 희망이

오늘도 이 땅의 새벽을 밝히며,

우리는 다시 내일을 향해 조용히 걸어가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조선의 하늘에는 해방과 독립의 깃발 대신

두 강대국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북위 삼십팔도선,

백두에서 한라까지 이어진 산맥의 핏줄 위에

그어진 경계는 형제를 적으로 만들고

마을의 논두렁을 세계전쟁의

최전선 예비지역으로 바꿨다.

미국은 유엔의 이름으로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고,

반대하는 이들의 외침은

총성과 화염 속에 묻혀 갔다.

친일의 잔재는 새 주인을 맞았다.

워싱턴의 지도 위에서

한반도는 미국의 대소 전진 기지가 되었고

일본은 태평양의 성채가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는

모택동의 붉은 군대가 강물처럼 흘러넘쳐

장개석의 군대는 무너져 갔다.

남북에 만들어진 두 개의 정부는

하나가 되자는 의지가 전혀 없었고

삼팔선의 밤은 자꾸 뜨거워지고 있었다.

남북한 정부 수립 이후

공존이나 평화적 통합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양측 지도자가 모두 한반도의

유일한 정통정부를 자처하며

무력 또는 체제 우위를 통한 통일을 추구했다.

동시에 냉전이라는 국제질서가

타협의 공간을 크게 제한했다.

두 정부의 상대에 대한 적대적 태도 속에서

남과 북의 병사들은

안개 낀 능선과 개울가에서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눴다.

수색대의 총성이 터지면서

개성과 춘천, 옹진의 들판에는

젊은 병사들의 피가 스며들었다.

1949년 6개월 동안 사백 번 넘는

남북 군사적 충돌.

총알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남한군은 삼팔선 북쪽에

방어진지를 세우려 했고

북한군은 포화로 응답했다.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쳤다.

“우리는 북으로 가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 정부에

중무기를 허락하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을 자극하는

불길이 한반도에서 시작돼

세계대전으로 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1950년 1월 12일 워싱턴 내셔널 클럽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연단에 섰다.

"미국은 한국과 대만을 제외한

극동지역의 독립을 보호하기 위해

유엔헌장에 입각해

전체 문명세계와 함께 싸울 것이다."

애치슨은 의회에서 말했다.

"남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는

북한의 침공을 격퇴하기는 어렵다.

미국도 그런 침략을 군사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전면 남침은

순식간에 전선을 무너뜨렸고,

서울은 곧 불안과 피난의 도시가 되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한은 지킬 수 없다"고 했던

미국의 태도가 돌변했다.

트루먼은 미국이 한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북한 공격을 방치하면 일본이 위험하고,

동북아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소령과 중국의 독무대가 될 것이다.”

미국이 즉각 유엔 안보리 소집을 요구했고

결의안 82호(25일), 83호(27일)에 이어

84호(7월 7일)가 통과되었다.

82호와 83호는 북한의 적대행위 중단과

회원국들의 한국 지원을 촉구했고,

84호는 미국의 연합지휘 아래

군사적 지원 체계를 열어주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소련이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한반도 역사의 흐름은 바뀌었을 것이다.

그 자리가 비어있지 않았다면

유엔군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일성의 계산이 맞아떨어졌을 것이다.

안보리 회의장에 거부권을 쥔

소련이 자리를 비운 것은

세계사의 미스터리다.

스탈린의 계산에 의한 불참이었다고

역사가들이 추측했다.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소모전을 벌이면

소련이 어부지리를 얻고 동유럽을 장악할 수 있다는....’

소련의 빈자리가 역사를 바꿨다.

소련이 안보리를 비운 사이

결의안은 통과되었고 유엔군이 탄생했다.

21개국이 참여한 병력의 90%는 미군이었다.

그리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기묘한

'유엔군사령부'가 탄생했다.

유엔의 깃발을 들고 있으나,

미국 정부의 명령만을 받는 백악관의 군대,

그러나 미군의 총구 위에

유엔의 푸른 깃발이 휘날렸다.

유엔군은 유엔과 무관한 미 정부 부대였다.

유엔사는 유엔의 깃발을 사용하는

미국이 지휘하는 다국적군이었다.

워싱턴은 유엔의 깃발을 들고 한반도로 향했다.

맥아더는 미국 정부의 명령을 받으며

유엔군 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세계사의 역설이 시작된다.

유엔의 깃발아래 출전한 전쟁,

그러나 실질적 지휘는 미국의 손에 있는 전쟁.

깃발은 국제였고,

명령은 미국이 했고 지금도 그렇다.

유엔 헌장에 의한 결정이었지만

군대의 지휘는 한 국가, 미국의 손안에서 행해졌다.

개전 초기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빠르게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까지 진격했다.

전쟁의 역사를 보면 누가 더

강력한 무기로 무장했느냐가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의 하나다.

전쟁 직전 남북한은 자체적으로

전차, 전투기, 대포와 같은

무기를 직접 생산할 수 없었고

외부의 지원, 제공 등에 의존하는 상태였다.

미국은 남한이 북진 통일을 시도할 가능성을 우려해

전차, 중포, 전투기 같은

공격형 무기 제공에 소극적이었고

남한 군대를 주로 내부 치안 유지와

방어용 군대로 육성했다.

반면 소련은 북한군을 현대적인 정규군으로 육성했고,

전차·항공기·포병을 대규모 지원했다.

소련은 해방 직후 북한의 군사조직 육성 과정에서

관동군과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무기를 일부 제공했다.

6·25 전쟁 직전 조선인민군의 주력 무기는

소련이 직접 공급한 최신 소련제 무기였다.

북한군의 전차부대와 기계화 부대는

당시 동아시아 최고 수준이었다.

전쟁 초기 국군은 북한 전차를 상대할

전차나 대전차포가 거의 없었고

제공권은 사실상 북한이 장악했다.

병력 수 자체는 북한이 다소 많았지만,

결정적 차이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켰을까?

소련과 중국의 동의 아래

전쟁 계획이 추진되었다고 사가들은 말한다.

김일성은 6·25 전쟁 수 개 월 전인

3~5월 사이 소련과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지도부는 전쟁이 개시되면

남한에서 전국적 규모의 혁명이나

봉기가 일어나

수주 또는 수개월 안에

승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이 장기화되고

혁명이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엔안보리에서 결의안

82호와 83호가 통과되는 사이

서울이 위험해지자 27일 밤 정부 당국의

대국민 라디오 방송이 나왔다.

"정부는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니

국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일자리를 지키라."

그러나 이승만은 이날 새벽 2시

서울을 탈출한 뒤였다.

정부만 도망가고 국민을 속인 것이다.

한강다리가 끊어졌다.

피란민들이 한강다리를 건너고 있을 때

한국군이 다리를 폭파했다.

아이들의 울음이 강물에 떨어졌고

부서진 철교 아래로

사람들의 절규가 가라앉았다.

정부 수뇌부가 먼저 남하했고,

이어 한강교가 폭파되어

많은 시민과 국군이 고립되었다.

서울에 남아 있던 미군사고문단도

이승만과의 약속을 믿었다.

폭발 시점을 사전에 협의하기로 했던 약속을.

그 약속이 아무 통고 없이 깨지면서

그들도 서울을 탈출하는데 엄청 애를 먹었다.

그 와중에 퇴각하는 군경은

사상 전향을 서약했던

보도연맹원 등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터진 지 이틀째 되는 날

이승만이 명령을 내렸다.

“보도연맹원과 남로당원들을 처형하라.”

28일 강원도 횡성군에서 첫 처형이 집행됐다.

보도연맹은 전향한 좌익분자들을

관리하던 조직으로

그 구성원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가입했던

일반 농민과 순박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군경의 총구 앞에

이름 없는 골짜기에서

낙엽처럼 쓰러져 사법학살의 제물이 되었다.

전쟁 후 벌어진 수많은 학살은

전쟁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람을 분류해 죽였다는 기록을 남겼다.

법의 이름은 있었으나

법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질서는 있었으나

정의는 없었다.

전쟁은 단지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아니라

이념이 인간을 죽이는

거대한 학살로 변해갔다

전쟁 직후의 공포와 고통 속에서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오히려 국민을 의심하고 제거했다.

그것은 외부의 전쟁과 내부의 전쟁이

한 몸처럼 겹쳐진 참극이었다.

9월의 인천, 아침 안개를 뚫고

유엔군 상륙함이 진격할 때

일본인 항해사들이 조류를 읽고

배의 키를 잡아 안내했다.

폐허가 된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 속에서

다시 살아나 병참기지가 됐다.

전후 복구의 기회를 잡았다.

패전국이 재건국이 됐다.

침략한 자가 회복하고

침략당한 자가 다시 전장이 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은 성공했다.

북한군의 보급로가 끊기고 퇴각이 시작됐다.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은 물러갔다.

맥아더는 압록강까지 올라가면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국경선 너머에는

또 다른 거대한 그림자가 버티고 있었다.

중국군이었다.

겨울 산맥을 넘어온 중공군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고

유엔군은 남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서울은 또 한 번 함락되었다.

산과 들에는 얼어붙은 시신들이 누웠고

폭격기는 북녘 하늘을 불바다로 만들었다.

맥아더는 중국 만주 폭격과

핵무기 사용까지 제안했으나

미 대통령은 제3차 대전을 두려워 거부했다.

제한전쟁이 원칙이었다.

맥아더는 고집을 피우다 경질됐다.

.그러나 미국의 공격은 북한 지역에 집중되어

세계 전사에서 가장 많은 폭탄이

북녘 산하에 투하됐다.

도시, 마을, 사람이 사라졌다.

2년 동안의 소모전 끝에 정전협정이 시작됐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을 반대하며 외쳤다.

“무력으로 통일하자. 전쟁을 계속하자.”

그는 정전 협상을 방해하기 위해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미국이 분노했고 덜레스 국무장관이 서신을 보냈다.

"한국이 휴전을 위태롭게 할 권리가 없다."

미국 행정부가 에버레디 작전이라는

비밀계획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북진 명령을 내리거나

돌출행동을 할 경우

이승만을 제거한다는 계획이었다.

동맹을 제거하는 계획을 세우는 것

그것이 미국이 말하는 동맹의 실체였다.

결국 타협이 이뤄졌다.

이승만이 조건을 내걸었다.

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제원조와

한국군 20개 사단 무장할 군사적 지원 등이었다.

미국이 받아들였다.

정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 체결됐다.

이승만은 지독한 벼랑 끝 전술 끝에

상호방위조약과 군사 지원을 얻어냈으나,

이승만이 국치스런 조약의 대가로 미국에

군사적 주권을 퍼준 대가는 엄청났다.

미국이 맘먹은 대로 군사력을

한국에 배치할 치외법권적 특권을 인정하고

미국이 주한미군을 통해 중국, 소련을 향해

미 본토 수호를 위한 군사전략 SIOP를

비밀리에 수행토록 만들었다.

이 땅의 젊은이들을 지휘할

작전통제권도 미국의 손에 저당 잡혔다.

일본이 물러간 뒤 미국을

실질적 점령군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승만 그 후로도 권력을 탐하면서 민주주의 파괴했다.

평화통일을 외쳤다는 죄목으로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단두대에 세운 사법살인을 저질렀다.

이승만은 1959년 10월에도 미국에게 말했다.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무력뿐이다."

사사오입과 부정선거로 얼룩진

노독재자의 말로는

결국 4·19 혁명의 거대한 함성 속에

하야로 끝을 맺었다.

한국전쟁은 승자와 패자도 가리지 못하고

끝나지도 않은 채 멈추었다.

1953년 휴전이 되었지만

그것은 평화가 아니었고,

정전선은 국경이 아니었으며,

분단은 잠시 멈춘 전쟁의 다른 이름이었다.

총성만 멎었을 뿐

삼팔선은 철조망이 되었고

민족 내부의 불신과 적대감이 커지면서

남북 간 분단의 벽이 더욱 높고 견고해졌다.

전쟁 피해는 엄청났다.

3년 3개월간 지속된 전쟁에 21개국이 참전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결장이 되었으며,

대략 6백여 만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국가마다 집계가 서로 달라 혼란스런 가운데

남한 230 만여 명, 북한 292 만여 명의

인적 손실이 추정됐다.

또한 1천 만 명의 결핵환자,

1천 만 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인적 피해는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때보다 피해가 더 컸다.

모든 도회지는 거의 파괴되었고

양측의 학살과 고문 기아로 인한

사망 등이 속출했다.

참전국 군대의 인적 손실은

정확히 집계된 적이 없지만

한국군 75만 명 사상,

북한군 50만 명 사상,

유엔군 18만 명 사상,

중공군 95만 명 사상으로 추정된다.

남북한 전역이 초토화되고

주요시설 파괴는 52%에 달했다.

남한 민간인 피해는 모두 99만968명으로

이 가운데 37.7%인 37만3599명이 사망했다.

북한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는 150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북한 당국은

사망자를 별도로 밝힌 바가 없다.

남북한 전 지역에서 학교·교회·사찰·병원 및

민가를 비롯해 공장·도로·교량 등이

무수히 파괴되었다.

포성이 멈춘 뒤에도 한반도 땅의 사람들은

무장한 평화를 살았고,

무장한 침묵 속에서

세대를 이어 불안과 증오를 배우고 있다.

그리고 유엔사는 오늘날에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이름은 유엔이지만

실질은 미국 주도라는 점,

그리고 해체의 열쇠조차

유엔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적 결단에

걸려 있다는 점은

국제법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엔군사령부가 유엔의 이름을 쓰고

유엔의 깃발을 드는 것에 대해

1975년 유엔총회가 결의했다.

“유엔사를 해체하라.”

키신저가 약속했다.

“1976년 1월 1일부터 해체하겠다.”

그러나 지켜지지 않았다.

1994년 유엔사무총장 부트로스 갈리가

북한 외무장관에게 편지를 썼다.

"유엔안보리는 연합군을

하부조직으로 결성하지 않고

단지 그 지휘권을 미국이 행사하도록 하는

것을 추천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연합군의 해체는 유엔에 있지 않고

미국 정부의 권한 문제일 뿐이다."

코피 아난 총장이 거듭 확인했다.

“유엔사는 유엔과 무관한 조직이다.”

디칼로 유엔사무부총장도

2018년 같은 내용을 확인했다.

2019년 5월 캠프 험프리의 미군기지에서

유엔사 부사령관 웨인 에어가 기자들에게 말했다.

"유엔사는 유엔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고

단지 유엔사는 유엔 깃발을 사용하고

매년 미국 정부를 통해

유엔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다."

유엔의 깃발을 사용하면서도 유엔이 아닌

해괴한 미국의 군사조직은

여전히 한국에서 버티고 있다.

무장지대 DMZ의 통제권과 관할권은

여전히 미국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

지금도 유엔사 깃발은

평택의 기지와 판문점에서

비무장지대에서 펄럭이며

소리 없이 말한다.

“이것은 유엔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유엔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유엔의 군대는 아니라는 논란 속에서

그 조직은 지금도

비무장지대와 정전협정을 관리하고 있다.

유엔사 사령관이 주한미군사령관,

연합사령관 모자를 쓰고

한국 정부를 향해

떵떵 큰소리를 치며 위세를 부린다.

그 모습은 점령군 대장과 너무 닮아 있다.

미국을 포함한 주변 강대국들이

분단된 한반도를

자신들의 최상의 적정선으로 여기는 오늘날,

유엔사의 깃발을 다시 키워

미군의 군사적 특권을 유지, 확대하려는

미국의 동북아 정책은 나날이 진화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수많은 대통령과 장군들이 사라졌어도

한반도는 아직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

그날 삼팔선에서 시작된 총성은

형제의 가슴 속에서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는 자유를 위해 싸웠고

누군가는 혁명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이름 없는 민중은

살아남기 위해 울부짖었다.

폭격 속에서 아이를 업고 달리던 어머니,

끊어진 다리 앞에서 강물을 바라보던 아버지,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기다리던 노모의 눈물이

이 전쟁의 진짜 역사였다.

강대국들은 전략을 말했고

정치인들은 통일을 외쳤지만

폐허 속 민중은 평화를 원했다.

오늘도 비무장지대의 철책 위로

바람은 지나간다.

그 바람은 묻는다.

누가 이 땅을 둘로 갈랐는가.

누가 형제를 적으로 만들었는가.

누가 전쟁으로 권력을 얻었고

누가 이름 없이 죽어갔는가.

그리고 또 묻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이 전쟁을

과연 누가 끝낼 것인가.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219 2026.06.24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7- 여순사건과 6.25 전후 학살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한라산이 거대한 무덤이 되어 갈 때

송요찬의 서슬 퍼런 포고령이 나왔다.

"제주 해안선 오 킬로미터 밖의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

제주의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던

1948년 10월 19일 밤 .

바다 건너 여수항의 병사들에게 명령서가 왔다.

“제주로 가라.

제주 형제들을 총으로 쏴라.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자들을 진압하라.”

지창수를 비롯한 하사관등 제14연대는

분노하며 거부하고 총을 잡았다

“동족을 죽이러 갈 수 없다.

조선의 아들이 조선의 아들을 겨눌 수 없다.”

그 거부는 봉기가 되었고

그 봉기는 곧 이름 싸움이 되었다

누군가는 반란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항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름이 달라져도

그날 피어난 것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무엇이 나라인가

무엇이 군대인가

무엇이 양심인가

출동 거부의 함성은 새벽어둠을 찢는

횃불이 되어 남녘땅을 흔들었다.

여수 시민들이 곧 상황을 이해하고 환호했다

경찰서는 점령되고,

여수의 밤은 혁명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20일 새벽이 밝자 14연대는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 한다.”

그들의 요구 또한 명료했다.

“동족상잔 반대, 미군 철수.

토지개혁과 친일파 숙청.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여수 시민 수천 명이 모인 인민대회가

결의문을 발표했다.

“친일파를 몰아내라.

민족반역자를 청산하라.

토지를 농민에게.

식량을 굶주린 자에게.”

창고가 열려 쌀이 시민들에게 배급됐다.

인민위원회가 다시 서고

여수는 거대한 항쟁의 바다가 되었다.

순천 시내도 순식간에 봉기군의 손에 넘어가

세관과 우체국, 모든 관공서가 점령되었다.

봉기의 불길은 여순에 이어 벌교, 광양으로 번져갔다.

10월 20일 오전.

서울의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가 모여

봉기는 신속히 진압되어야 한다고 결의할 때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 진압하라”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미국의 냉전 논리에는

최소한의 양식도 없었고

미군 장교들은 진압작전에 직접 동행했다.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설치될 때

그 자리에는

미국인 고문들이 함께했고

한국 진압군에 합류했다.

대전, 전주, 부산, 대구에서 한국군 11개 대대가

박격포, 장갑차와 함께 왔다.

경비정과 경비행기까지 왔다.

육군과 해군과 공군의 합동작전.

군 역사상 최초였다.

10월 22일까지 전라남도 37개 시·군이

봉기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제14연대는 세 개의 편대로 재편되어

서쪽 벌교, 북쪽 학구, 동쪽 광양으로 진출했다.

초기 진압에 밀리자 정부는

10월 25일 여순지역 계엄령을 통과시켰다.

대통령령 제13호

그러나 계엄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법 없이 선포된 계엄, 그것이 바로 폭력의 본질

계엄 아래에서 군은

‘즉결처분권’을 행사했다.

그것은 어떤 법적 근거도 없는

권력이었으나

군인들은 그것을 학살의 면죄부로 삼았다.

이승만이 담화를 발표했다.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어떠한 법령이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

그 말은 담화가 아니라

수많은 죽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백운산과 지리산, 웅석봉으로

반군들이 퇴각하고

진압군이 휩쓸고 간 여수와 순천에서

군과 경찰은 모든 시민을

학교 운동장으로 오게 했다.

남녀노소 불문, 갓난아기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어야 했다.

운동장 한쪽에는 참수대가 설치되었다

도끼와 칼, 그리고 나무 블록

법정도 없고 판사도 없고

오직 증오와 공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반군 색출이 시작됐다.

기준이 있었다.

손바닥에 총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

흰 지까다비를 신은 자.

군용 속옷을 입은 자.

흰 고무신을 신은 자.

흰 고무신은

인민위원회가 배급한 것으로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이 죽음의 표식이 됐다.

손가락질 한 번 또한

'손가락 총'이 되고

학살자에게 즉결심판 판결문이 되었다.

우익청년단원과 밀고자들이

군경에게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판이 없었다.

변호가 없었다.

증거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결정했다.

죄가 없어도 지목되면 죽음이었다.

그것이 1948년의 정의였다.

그것이 미군사고문단이 지원한

진압작전의 정의였다.

부역자 색출은 1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한 달 반 동안 운동장은

매일 인간도살장이 되었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모였고

저녁에는 시체들은 수레에 실려 나갔다.

군법회의는 광주와 대전에서 열려

수천 명의 혐의자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처리’되었다.

변호인은 없었고

증인은 없었고

진실은 없었고

오직 유죄 판결만 있었다.

여순과 주변 지역의 땅은 시체로 숲을 이루고,

바다는 핏물이 되었다.

정부 조사관이 파견되어

여수, 순천,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1949년 1월 10일까지의 피해를 조사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인명 피해 총 5,530명

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

가옥 피해 8,554호

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

재산 피해 추정액 99억 1763만 395원

그 시대에 그 액수는 천문학적이었다.

구호가 필요한 사람 6만 7332명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숫자일 뿐

진실은 훨씬 더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들이

땅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다.

여순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자

이승만은 군대를 청소했다.

숙군이라 불렀고

4,749명이 축출됐다.

전군의 5%.

광복군 출신들과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 사라졌다.

양심 있는 장교들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박정희.

여순사건과 연루됐지만

숙군 작업에 적극 협조했다.

살아남아 18년간 한국을 지배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윤석열 등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여순사건이 끝난 지 두 달 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반민특위가 구성된 지 두 달 만이었다.

친일파를 처벌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지자마자

친일파를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

11만 8천 명에게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여순사건이 그 법의 자궁이었다.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는 법.

동족을 적으로 만드는 법.

70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국보법은 온 나라의 입과 귀를 막는

거대한 사상적 감옥을 완성했다.

"한 하늘 아래 두고는 같이 살 수 없는 짐승들."

언론과 문인들은

제주, 여순 봉기군과 그 조력자들을

'귀축(鬼畜)'이라 부르며

인간의 범주에서 지웠고,

이 잔혹한 '절대 악'의 프레임은

곧 국가적 반공 체제의 주춧돌이 되었다.

제주와 여순 등에서 시작된

동족 학살의 광기는 남녘산하를

무차별의 초토화 지옥으로 만들었다.

정치권력은 이념을 민족에 우선하는

반역사적 냉혈한이 되어버린

비참한 역사는

더 거대한 비극으로 흘러갔다.

1980년 5월 광주에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소속 군인 아무도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시민들이 죽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여수의 병사들은 거부했다.

제주 형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1948년 10월의 14연대는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했다.

거부는 그냥 반란이 아니었다.

거부가 인간이었다.

그날의 여수와 순천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기쁨이 찢기고

냉전의 칼날이 한반도에 꽂힌

비명 중 하나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누가 총을 들었는가?

누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가?

두 질문은 얼마나 더 오래 남아야 하는가?

여수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순천의 새벽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사이를 떠도는 이름 없는 영혼들이

오늘도 바람 속에서 묻고 있다

나라란 무엇인가?

양심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사람으로 남는가?

이승만과 미국에 의해 자행된

즉결심판과 학살의 피 바닥 위에

또 다른 시대가 세워졌다

전쟁이 왔고 반공의 깃발이 더 높이 올랐고

의심은 법이, 법은 폭력이 되었고

폭력은 다시 질서라는 옷을 입었다

보도연맹과 거창의 이름 아래

6.25 전쟁 속에서 같은 종류의 비극이 번져갔다

학살은 단발이 아니었다.

학살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한 번의 명령이 다음 명령을 낳고

한 번의 침묵이 다음 침묵을 낳았다

죽은 자는 이름을 빼앗겼고

살아남은 자는 고통 속에 침묵했다.

빨갱이의 자식

반란자의 집안

그런 말들이

무덤과 함께 오래 남아

피해자들의 삶을 두 번 죽였다

그러나 산과 바다는 기억하고

무덤 없는 죽음들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흙은 입을 열었고

바람은 결국 기록이 되었다

묻힌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회는 뒤늦게 이름을 불렀고

국가는 뒤늦게 사과의 문턱 앞에 섰으며

희생자들은

겨우 사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어

여순사건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2021년 6월 29일

21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여순사건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의 진실을

밝힐 첫 계단이 만들어졌다.

사건 발생 73년 만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침묵중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289 2026.06.22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6- 제주4·3, 한라산은 통곡한다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해방

일장기가 내려졌다.

그러나 미군이 남한에 들어와서

점령군의 이름으로 말했다.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방은 다시 점령이 됐다.

제주에도 친일 경찰이 돌아왔다

어제까지 일장기를 달고 조선인을 잡던 자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자들.

제 민족의 살을 뜯던 자들.

그들이 돌아왔다.

이번엔 성조기 아래에서.

미군정이 그들을 불렀다.

해방된 조국에서

제주 사람들의 꿈은 다시 짓밟혔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제주 북초등학교 앞마당.

사람들이 모이면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이 아이를 쳤다.

아이가 피를 흘렸다.

분노한 군중이 경찰서까지 쫓아갔고

경찰은 이를 습격으로 오인하여 발포했다

6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찰의 잘못이지만 정당방위였다.”

그들의 결론이 도화선이 되었다.

아이의 울음에서 시작된 것을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만들었다.

죽인 자가 피해자가 됐다.

맞은 자가 가해자가 됐다.

민심은 들끓었고

남로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전단지 부착, 사상자 구호금 모금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

23개 기관, 105개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제주 직장인 95%인 4만여 명이 참여

경찰의 20%도 파업에 동참했다

섬 전체가 울부짖었다.

미군정이 조사단을 파견했다.

카스티어 대령의 보고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

조병옥 경무부장 발언 : “90%가 좌익 색채”

27만 명의 섬 주민이 탄압의 대상이 됐다.

육지에서 건너온 잔인한

서북청년단과 421명의 응원경찰이

섬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일 년 동안 2천5백 명이 잡혀가

좁은 유치장에서 앉지도 못한 채

생지옥의 고통을 당했다.

대립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1948년 미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남한 전역에서 터져 나왔다

그 중심의 하나가 제주도였다

4월 3일 새벽 두 시

한라산 자락 오름마다 핏빛 봉화가

눈부시게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의 무장대

24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급습했다

그들이 외쳤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조국의 통일독립."

"단독선거 반대."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을 지목해 살해했다

5·10선거를 전후로는 선거 관련자를 집중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까지 학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4월 17일 미군정 딘 군정장관이

경비대 제9연대에 진압작전을 명령했다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복을 유도하라”

김익렬 제9연대장이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4월 22일 전단지를 살포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동족상잔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 악수를 원한다.”

4월 28일,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만나

평화협상이 성사됐다.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진적 무장 해제.

주모자 신변 보장.

평화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5월 1일, 동족상잔을 멈추자던

사흘간의 평화는 대낮에 오라리 마을이 불타면서 깨져버렸다.

경찰은 “폭도의 소행”이라 주장했으나

김익렬은 현장조사 끝에 진범을 밝혀냈다

우익청년단원들이 민가에 방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군 방첩대(CIC)는 김익렬의 보고를 묵살했다

CIC는 "폭도의 소행"으로 조작했고,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무성 영화를 만들었다

마치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편집된 가짜 영화였다

미군은 지상과 상공에서 불타는 오라리 동영상을

‘제주 폭동’의 소재로 악용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열었다.

조병옥은 “계획된 공산폭동”이라며 강경작전 주장.

김익렬은 “경찰의 실책, 무력위압과 선무공작 병행”을 주장하며

조병옥과 몸싸움까지 벌였다

결론은 강경 진압이었다.

5‧10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온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됐다.

평화를 말한 자가 쫓겨났다.

학살을 선택한 자들이 남았다.

후임에 박진경 중령이 임명됐다.

미국 정부와 서울의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 등)이

가짜뉴스까지 만들어내며

강경 진압에 목을 맸던 이유는?

냉전을 주도하려는 미국의 조바심이었다.

당시 미국은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려 했다.

남한단독 정부 추진으로

동북아에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남한은 미국의 대소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만들고 싶었다.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미국 극동 아시아 정책의

성패가 걸린 최대 과제였다.

만약 제주도에서의 저항 때문에

5·10 선거가 실패한다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체면을 구기게 되고

냉전 주도권을 소련에 빼앗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거가 임박하면서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유혈 사태가 남한 전역에서 줄을 이어 발생했다.

좌파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 김규식 등 우익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까지 선거에 반대했다.

특히 제주도에서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한

무장봉기가 벌어지자 미국 정부는 크게 긴장했다.

미국은 제주4·3에 대해 소련 공산당의 사주라며

가짜뉴스를 앞세웠다

“소련 잠수함이 제주 연안에 출몰했다.”

남한 언론과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언론은 제주도 토벌의 당위성을

부채질하는 도구가 되었다.

서울의 미군정이 제주도를 '소련의 전초기지'로

둔갑시킨 가짜뉴스들은

제주도민들을 '잔혹한 빨갱이'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묘사했고,

군경의 잔인한 초토화 작전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진압으로 미화했다.

이 조작극은 제주도의 참상을 외면하고,

증오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3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초토화 작전에

잔인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전국의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선거를 외면해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2개 선거구에 대해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재선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재선거마저 무기한 연기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하게 된

브라운은 호언장담했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2주일이면 평정된다.”

그는 초강력 작전을 지시했다

“경찰은 해안 4km까지 치안 확보하라.

경비대는 서쪽부터 동쪽까지

빗자루로 쓸 듯 휩쓸어버려라.

해안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하라.”

작전이 시작돼 6주 동안 4천 명이 체포됐다.

미군 보고서는 성공적 작전이라 평가하면서

제주에 부임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그러나 1948년 6월 18일 새벽

박진경 연대장이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부하의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후 제주도의 비극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깊은 광기와 초토화가 자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여수 14연대가 제주 출동 명령을 받자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고

선언하고 반기를 들었다.

이 항쟁마저 미군 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의 포화 속에 진압되고

3천4백 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된 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정부의 최고 지령'을 받들어

제주도에 포고령을 내렸다.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에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도로 인정해 총살하겠다."

11월 17일 계엄령 선포 뒤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되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눈 쌓인 겨울 한라산으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무장대에게

협조한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학살극의 대상이 되었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기록했다

“제9연대가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제9연대 점령 기간 동안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마을 수백 개가 한꺼번에 불타 연기가 하늘을 가렸고,

할아버지와 손자, 어머니와 젖먹이가

한자리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서귀포경찰서장 김호겸은

제주도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자들에 대해 증언했다.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후 보고서에

현장 답사 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 불응,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다.”

“서청 출신의 삼양지서 주임은 입버릇처럼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했다.”

“제9연대 정보과장은 마약 중독자였다.”

토벌대의 총구를 피해 눈 덮인

한라산 깊은 숲으로 도망친 도민들,

늙은 시부모의 손을 잡고

어린 자식을 품에 안은 부인들은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 얼어 죽고

굶어 죽어 한라산의 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일본군 준위 출신 함병선이 이끄는

제2연대와 서북청년회로만 구성된 대대 병력은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사살하는

가혹한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1948영 11월 15일 가시리

군인들이 마구 총을 쏜 뒤 소개령을 내리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표선리 표선국민학교에 수용해

‘도피자 가족’ 76명을 한 달 뒤 버들못에서 학살했다.

12월 18일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제9연대 제2대대가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쳤다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시켰다

희생자 11명 중에는 50대 여성도 있었고

아홉 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1992년,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취재반이

다랑쉬굴을 발견하고 현장조사해

언론 보도 이후 유족과 도민들이 건의했다.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자.”

그러나 행정·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불에 태워져 바다에 뿌려졌다

다랑쉬굴은 시멘트로 봉쇄되었고

주변에는 철조망이 쳐졌다

1949년 1월 북촌리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 기습으로 사망하자

대대 병력이 출동해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틀 동안 300명 이상 희생돼

젊은 남자가 대부분 사라졌다.

한동안 북촌리는 ‘무남촌’이라 불렸다.

3월, 유재흥 대령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부임해

소위 ‘선무공작’을 폈다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

흰 옷을 매단 백기를 들고

1만여 명의 피난민이 한라산에서 내려왔다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유재흥이 제주를 떠난 후

제2연대장 함병선은 하산민들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법의 최소한의 절차도 없는 불법적인 군법회의는

젊은 남자들은 사형·무기·15년형 등 중형,

여성들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죄,

결국 1,660명의 주민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거나

전국 각지 형무소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194명이

군인들에 의해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희생자 중 한림지역 62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1956년 3월 몰래 수습되어

한림면 ‘만벵디 공동장지’에 묻혔다

나머지 132명의 시신은

1956년 5월 유족들의 청원을 당국이 받아들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곳에 세워진 위령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백 명의 할아버지에게 한 명의 손자뿐이라는 뜻

그러나 5·16 이후 위령비는 파괴되었다

학살 현장에서는 총기류, 실탄, 뼛조각이 발굴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전국의 좌익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을 지시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예비검속법’은 해방 후인 1945년 10월 9일

미군정법령 제11호로 폐지되었지만

정부는 이를 불법적으로 부활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시했다.

“예비검속을 공표하지 말라.”

붙잡힌 사람들은 각자 안보에 미치는 위해 요인에 따라

A, B, C, D 등급으로 분류되고

8월 30일, 한국 해군 정보장교는

제주 경찰에 전문을 보냈다

“9월 6일 이전에 C, D 그룹을 전원 총살하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들은 바다에 수장되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어 암매장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다

서귀포·성산포경찰서의 예비검속자들은

어디서 희생되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 불법적인 군법회의로 전국 각지 형무소에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1950년 7월경 집단 학살당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전세가 역전될 때까지

학살극은 멈추지 않았다

제주4·3은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무장대원 체포, 한라산 입산금지 해제

공식적인 전체 사망자 14,032명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이것은 공식 숫자다.

실제는 더 많다고 역사는 말한다.

제주 인구 27만 중 3만이 희생됐다.

어떤 이름은 기록됐다.

어떤 이름은 바다에 뿌려졌다.

어떤 이름은 섯알오름 흙 속에 묻혔다.

어떤 이름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실은 갇혔다

미군은 학살 현장을 기록했지만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 50년간

제주도민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의 고통은 짓눌린 채 견뎌야만 했다

외부 세계의 어느 누구도

미국이 주도한 테러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이 비극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관심조차 없었다

대량 학살 책임자를 가려내려 하지 않았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물론

시민권 회복 노력, 거짓 주장으로

피해자를 욕되게 만든 허물을 벗겨주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 제주4·3특별법 제정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출범

그제야 진실규명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2018년, 제주4·3 70주년

10만인 서명 운동

“미국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라”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 서 외쳤다.

그들의 요구

첫째, 미국은 제주4·3학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라

둘째,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법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하라

셋째,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책임에 상응하는 피해회복 조치를 시행하라

이미 수많은 자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제주 학살은 미군정 시절,

미군이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후도 역시 미군이 지휘했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과 하지 사령관 사이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체결되어

임시군사고문단 설치되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의 임무는 무엇 이었는가.

대한군사원조 집행, 미군장비 및 무기 이양과

한국군 편성 및 훈련지도

그뿐 아니라 한국치안대(육군·해안경비대·경찰)

조직, 관리, 무장, 훈련

38도선 방어, 불순세력 제거와 게릴라 침투방지,

해안질서 유지 자문.

국가기록원이 확인했다.

“미군사고문단이 제주4·3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제주4·3학살 책임을 공식적으로 가리는 작업,

그 심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최근 일각에서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자고 나오는 모습

친일파를 옹호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군을 점령군에 준하는 특권을 준 독재자에게

기념관을 세우려는 그들

그것은 대단히 역겨운 일이다

제주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미국은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도 완전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친일의 죄를 묻자는 외침은

“빨갱이”라는 낙인 아래 짓밟혔다.

민족정기를 세우려는 사람들은 끌려갔고,

해방의 꿈을 말하던 청년들은 총살되었으며,

정의와 통일을 말하던 목소리는 침묵 당했다.

친일은 친미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은 일제를 섬기던 모습 그대로

새로운 상전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자신들의 권력과 안위를 위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다.

세월이 흐르자

폐허 위에 세워진 경제성장의

빌딩들을 가리키며 노래한다.

“모든 것이 미국 덕분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겠다 다짐한다.

번영의 그림자 아래에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시민들의 신음이 묻혀 있었다.

제주 한라산의 검은 숲에서는

아직도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

일본이 물러가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예속의 사슬을 끊지 못한 통한의 70여 년,

독립운동가의 무덤 위에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우려는 역겨운 몸부림이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비극의 나라가 되었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친일에서 친미로 이어진 세력이

여전히 역사를 지배하는 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있는 한.

미국의 비밀문서가 여전히 봉인되는 한.

3만의 이름이

모두 불릴 때까지.

미국이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한라산이 울음을 멈출 때까지.

제주 4.3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276 2026.06.18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5- 미군정과 친일파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독일이 항복하고 석 달이

지난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폭탄이

약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해

도시 인구의 약 39%를 소멸시켰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주저하자

사흘 뒤인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이 투하되어

약 7만 명이 즉시 사망했다.

같은 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160만 보병, 2만 7천 문의 대포

5,600대의 탱크, 3,700대의 전투기를 이끌고

만주벌로 진군했다

관동군 100만은 그 적수가 되지 못하고

종이호랑이처럼 무너져 내렸다

일본군의 탱크 400대는 소련의 철갑 앞에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소련의 군대가 움직인 그 날

트루먼은 일기에 썼다

"스탈린이 마침내 움직였다.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탄이 투하되면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항복을 주저한 일본을 향한 최후통첩인가.

나치 군을 궤멸시킨 세계 최강

소련을 향한 무언의 견제인가.

강대국들이 앞 다퉈 연구하던

원자탄을 미국이 개발한 것에

세계열강은 주목했다.

일본, 독일도 다 이 무기를 만들면 세계를

지배할 거라면 열을 냈지만

미국이 과실을 맨 먼저 딴 것이다.

무력이 국력이고 그것이 승패를 가리는 세계는

미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자폭탄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면서

국가 간의 관계도 이전과 달라졌다.

미국은 원자탄을 인류 최초로 발명해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소련은 절대적 군사력을 과시한

미국의 요구에 순응했다.

8월 10일, 소련은 미국이 제시한

‘북위38도선’제안을

두 말 없이 받아드렸다.

원자탄이 동북아에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일본 진격을 막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민족의 동의도 없이 강대국 둘이

조선의 허리를 단칼에 잘라낸 것이다.

서울과 남쪽의 1,600만 영혼은

자본주의 장막 안으로,

평양과 북쪽의 900만 삶은

사회주의 깃발 아래로.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이념국가들에게 장악됐다.

1945년 8월 9일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소련군은 웅기·나진·청진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8월 21일 원산을 점령한 뒤 8월 26일 평양에 입성했다."

평양에 들어선 소련군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인민위원회였다

소련군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1945년 10월 3일 공식 출범한 소비에트 민정청은

이듬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될 때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전면에 조선인 행정 기구를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배후에서 북한 지역을 통제하는

간접군정 체제를 구축했다.

9월 19일, 원산항에 한 배가 들어왔다

66명의 조선인 붉은군대 장교와 함께

젊은 게릴라 지휘관이 내렸다

그의 이름은 김일성

소련군은 그를 영웅으로 소개했다

"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점령군으로 상륙했다

성조기를 앞세운 존 하지 중장은

일제의 마지막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는 미 정부의 지시를 집행했다

"조선인의 어떤 자치기구도 인정하지 말라"

"일본인 관리와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을 고용하라"

하지 중장의 첫 번째 과제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 40만 일본인의 송환

그리고 1천 명의 일본인 기술자를

미군정에 잔류시키는 일 이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일본인 관리들은 그 자리를 지켰다

조선인은 여전히 2등이었고

일제의 잔재는 미군정하에서 현실 이었다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파가 득세했다

조선인들은 분노했다

"일본의 앞잡이가 다시 권력을 잡다니"

"해방이 이렇게 무색할 수 있나"

그러나 미군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정의 편의를 위해, 반공의 보루를 위해

친일파는 용서받았고, 되레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민족정기는 짓밟혔고, 정의는 빛을 잃었다

한반도 남북에 진주한 두 국가의 정책은 달랐다.

소련은 조선인의 자생적 기구를 인정했다

조만식의 인민위원회와 함께 일하는 형식을 취했고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실행했다

미국은 조선인의 자치기구를 불허했다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를 복귀시켰고

민족정기를 짓밟았다

북에서는 사회주의 식 혁명이 진행되었고

남에서는 반공국가가 세워졌다.

김일성은 항일영웅으로 호명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 속에 권력을 세웠다.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체제로 갈라졌다.

한쪽은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한쪽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러나 그 두 이름 아래

공통으로 흐르던 것은

외세의 전략과 냉전의 공포였다.

남한에 온 미 군정은 1945년 11월

미군사고문단(KMAG)을 만들었다.

40보병사단 미군 장교 18명이 차출돼

남한 각 도에 조선인 치안경찰대를 조직했다.

조선인 경찰대 인력을 선발하는

기준이 있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을 우대한다.

광복군, 독립군 출신은 근대적 기준에 미달한다.”

그 기준을 만든 자들은 미국인이었다.

그 기준을 집행한 자들은

일본군 장교 출신 이종찬, 백선엽 등이었다.

미군정이 만든 군사영어학교가 열렸다.

조선인을 미국식 군대로 양성하는 곳이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간 자들은 영어 회화가 가능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이종찬, 백선엽, 그리고 수많은 친일파

일본 육사 출신이 특혜를 받았다.

영어학교 학생 선발을 시작했을 때

광복군 출신은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광복군 출신은 미국식 규율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충성도, 즉 친미 성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 주인이 된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꼬리를 흔들었지만

광복군 출신은 그렇지 않았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자들이

미군에게서 권력의 완장을 받았다.

군사영어학교는 친일의 온실이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사냥하던 자들이

해방된 나라의 군복을 입었다.

노덕술, 하판락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악질 친일파들이

해방 후 미 군정의 배려로 경찰복을 입고

민중 앞에 나타났다

조선인을 짓밟던 일제의 개들은

해방정국의 공무원으로 변신했다.

미군정은 이들을 비호했다.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한 경찰 간부를 파면했다.

1946년 대구 사건이 터지고

일제 경찰 청산 목소리가 높아져도

미군정은 수용을 거부했다.

미 군정청 조선인 2만 5천 명의 경찰.

그 중 일제경찰 출신이 5천 명.

전체의 20%.

그리고 광복군 출신은 몇 명이었는가.

달랑 열다섯 명.

열다섯.

567명의 광복군 유공자 중에서

단 15명만이 경찰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2018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한다.

해방된 나라의 경찰이

누구의 나라를 지키는 경찰인지를.

왜 미국은 일본의 식민통치 잔재를 부활시켰을까

미국은 왜 미군정을 통해 독립군 출신을 배제하고

친일파를 우대했을까.

육군 최고사령관 1946년부터 1968년까지

초대 참모총장.

2대 참모총장. 3대. 4대....

18대까지.

모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거나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1946년부터 1968년까지.

22년.

독립군 출신이 한국군을 이끈 적이 없었다.

만주 벌판에서 총을 든 자들이

자신의 나라 군대를 지휘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 군 일각에서 말한다.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라고.

미군 주둔을 통한 군사적 의존이 안보라고.

이것은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의식화된 결과다.

22년 동안 군 최고사령관 옆에 앉아

자문하고 조언하고 지휘한 자들의 유산이다.

1945년 11월, 미군정은 국방사령부를 세웠다

그 아래 경무국과 군무국

그리고 미군사고문단(KMAG)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미군 장교 2명, 사병 4명

형식은 "자문", 내용은 "지휘"

고문단은 군사영어학교 입학생이나

조선인 경찰의 선발을 지휘했다.

해방정국에서 남한의 지배계급을 만들었다.

군사고문단은 조선인 국방경비대 5만 명 구성을 지휘했다.

조선인 병력 3개 여단 사령부 창설은 물론

서울, 대전, 부산 등에서 현지 부대를 관리했다

미군사고문단의 지위는 특별했다

외교관 면책 특권, 치외법권

그들은 한국의 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은 그들을 제재하거나 심판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 미군은 점령군과 다를 바 없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그 자리를 채웠다.

KMAG의 초대 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

그는 한국군과의 관계에 대해 확고한 원칙을 가졌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라"

"매일의 업무를 공유하라"

"부대원을 함께 점검하라"

로버츠는 자신의 별도 사무실을 제외하고

모든 고문관들을 한국군 지휘관 옆에 배치했다

그 결과, 미군 장교는 한국군의 모든 작전을 지켜보았다

모든 결정에 개입했고, 모든 현장에 함께했다

제주 4.3의 현장에도

여순의 산골짜기에도

대전교도소의 비극에도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국방부 장관 옆에 앉았다.

참모총장 옆에 앉았다.

대대장 옆에 앉았다.

별도의 사무실이 없었다.

한국군 지휘관이 가는 곳에 항상 동행했다.

그것이 로버트 장군의 원칙이었다.

무기를 공급하는 자가 갑이었다.

무기를 받는 자가 을이었다.

이것이 한미관계의 본질이었다.

그 갑이 을과 함께 간 곳이 있었다.

제주도였다.

여순이었다.

대전이었다.

제주 4·3이 터질 때

미군 대위가 현지 경찰의 책임자였다.

두 대의 정찰기와 소해정 두 척이 있었다.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이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학살 현장의 사진을.

미국 정부에 보낼 보고용이었다.

1945년에서 1949년까지

2만에서 3만 명이 제주에서 죽었다.

미국은 '반란군과 동조자들이 살해됐다'고 보고했다.

1948년 내 작전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여순에서 민간인 2천 명이 죽었을 때

한국군 각 부대 옆에 미군사고문단이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이동에 동원됐다.

미국은 말했다.

우리는 기록했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를 준 자가 책임이 없는가.

지휘관 옆에서 자문한 자가 책임이 없는가.

갑이 을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갑의 면죄부가 되는가.

1948년 4월 3일, 제주도는 피에 물들었다

미군 대위가 책임자로 있던 부대가

남한 경찰을 통해 진압을 지휘했다

미군은 정찰기 2대, 소해정 2대를 동원했다

산악지대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미군은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4·3의 피로 물들었다.

미군 로버츠 준장이 작전을 지휘하고

미군사고문단은 현장 사진을 찍었다.

여순에서도, 대전교도소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과 함께했다

"자문"이라는 이름의 지휘, "갑"과 "을"의 관계

치외법권의 외교관들이 한국의 군경을 쥐락펴락했다.

제주 4.3의 학살 현장에

여순의 피 묻은 골짜기에

대전교도소의 어둠 속에

KMAG의 장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미소 짓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민간인의 시신 사이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미국 국방부 기록실에

대학 도서관 아카이브에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에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았다"

"단지 지켜보고 보고했을 뿐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말한다

"제주 4.3 사태는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했다"

"1948년 8월까지 미군 대위가 치안대 책임자였다"

"미군정과 KMAG의 책임이다"

그러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미국 정부는 침묵한다

한국 정부도 침묵한다

가해자는 기억하지 않고

피해자만 기억한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순천

반란 진압 과정에서 2천여 명의 민간인 사망

한국군 부대마다 미군 장교가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다

"자문"이 아니라 "참전"이었다

미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미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군은 민간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로버츠 준장이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그의 사진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소 짓는 미군 장교들 사이로

제주도민의 시신이 보인다

마틴 하트-란즈버그는 기록했다

"미군은 진압 전 과정을 통제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미국은 입을 다물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가 출범한 뒤

미군 7만 명의 철수가 시작되어

1949년 6월 철수 완료했다.

그러나 500명의 KMAG가 남아

미군 지배는 계속되었다

미군 철수 후, KMAG의 행정감독권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무초 주한미국대사에게 있었다

맥아더 장군조차 KMAG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그러나 로버츠 장군은 있었다

한국군 참모총장이 가는 곳마다 로버츠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였고, 그림자는 주인이었다

6·25 전쟁 후 KMAG 인력은 대폭 증원되었다.

1951년 12월 800명에서 1,800명으로 늘어났고,

그런 과정에서 한국군은 1953년

20개 사단, 60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이

권리(right)로 규정된 후,

KMAG는 합동군사고문단(JUSMAG-K) 체제로 개편되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사령관이 장악한

한미 연합 지휘 체제의 틀 안에서,

한국군은 주한미군에 예속된 상태로

70 여년을 지내고 있다.

KMAG이 미국익을 위해 맹활약을 하면서

한국군 지휘부의 영혼과 기백은 USA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 초대부터 18대까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거나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이응준, 손원일, 정일권, 백선엽

그들의 과거는 일제의 장교였고

그들의 현재는 미군의 협력자였다

오늘날 한국군 일각에서 들리는 주장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다"

그것은 KMAG가 심어준 의식의 결과였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슬은 여전히 채워져 있었다

이승만은 집권 초 예속적인 한미동맹과

분단을 고착시키는 국가보안법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이승만은 일제 잔재 청산을 차단하는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집권 2개월 후인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민중의 함성

그러나 그 함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완강히 반대했다

"국가가 분열된다"는 이유로

그는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경찰은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했다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 프락치로 체포됐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

안두희의 총탄이 그 가슴을 뚫었다.

안두희는 주한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이었다.

미국의 어둠 속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특위는 업무 개시 8개월 만에 무너졌다.

1951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됐다.

친일파를 처벌할 법이 사라졌다.

반민특위 구성 두 달 만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립운동을 처벌하던 법의 후예가

이제 통일을 처벌했다.

단죄받아야 할 친일세력이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했다.

국보법이 그들의 보호막이 됐다.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이

멸공전선의 제1인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2016년, 뉴스타파가 폭로했다

친일 인사 222명이 해방 후 440여 건의 훈장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은 친일파 48명이

대한민국에서 다시 훈장을 받았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까지

그의 가슴에는 대한민국의 훈장이 빛나고 있었다

해방은 그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두 번째 맞이한 영광이었다.

일본의 지배는 끝났지만

친일파의 지배는 여전했다

그들은 미군정의 보호 아래

더 강력해졌고, 더 교묘해졌다

그들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빨갱이 사냥"을 외치며

민중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감췄다

일본에게 받은 훈장을 감추고

대한민국에게 새 훈장을 받았다

그들의 가슴은 훈장으로 가득했지만

그들의 양심은 텅 비어 있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강이 흘러 오늘까지 이어진다.

1945년 8월의 결정이

2026년에도 살아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만든 군대의 문화가

자주국방보다 동맹을 우선시하는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국보법은 아직 살아있다.

78년의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통일을 처벌하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나라.

친일파가 훈장을 받은 나라.

독립군 출신이 열다섯 명만 경찰이 된 나라.

그 나라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 구조 위에 한미동맹이 올라앉아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바꾸는 자의 것이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 구조의 이름은

친일과 미군정이 합작해 만든

분단 체제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이 함께 지탱하는

주권 반쪽짜리 나라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쓰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진정한 해방의 시작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536 2026.06.15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4- 6.25와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왔다.

“무조건 항복.”

태평양의 포성이 멎자마자,

승리의 북소리 뒤편에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서냉전은

총과 탱크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보와 공작,

신문 기사와 침묵 속에서도

역사는 방향을 바꾸었다.

총성이 아니라 이념의 칼날로,

지구촌의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공포로

동북아를 공산주의 저지선으로

삼기 위한 군사전략을 강행한다.

패배한 일본을 다시 일으켜

동북아의 성채로 만들고,

남한을 소련과 중국을 막는 전진기지로 삼겠다.

소련은 유럽에 다수의 위성국가를

만들며 세력을 확장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트루먼은 명령을 내렸다.

“미 해병 5만 명을 중국 북부로 보내라.

7함대를 황해로 진입시켜라.

장개석이 일본군 점령지역을 확보하도록 지원하라.”

트루먼은 표면적 이유로 일본인·한국인 60만 명의

송환과 자국민 보호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장개석 군을 앞세워

모택동 공산 세력을 저지하려는 노림수였다.

중국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의 내전이 격화됐다.

트루먼은 일본과 한반도 점령통치를 지시하며 외쳤다.

“냉전이 시작됐다.

소련을 막아라.

사회주의가 번지지 않게 하라.”

맥아더는 동경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사령관이 되어

본국 정부의 지령에 따라

일본 점령 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을 동북아 대소 기지로 만들기 위해.

선글라스와 파이프가 그의 상징이었다.

그는 트럼프의 지휘 속에서

황제처럼 굴었다.

영국도, 소련도, 중국도

자문만 할 수 있었다.

맥아더가 장악한 SCAP가 전범 재판을 열었다.

5,700명이 체포, 4,300명이 기소됐다.

984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920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짜 책임자는 살아남았다.

히로히토.

맥아더는 진술서를 변조했다.

천왕이 전쟁범죄와 무관하다는 방향으로.

이는 훗날 문서로 밝혀졌다.

왜였는가.

“천왕을 기소하면 일본인들이 반발한다.

반발이 커지면 소령과 공산주의가 파고든다.

천왕 한 명의 죄를 덮는 것이

동북아 전략에 더 유리하다.”

그것이 미국이 만든 냉전의 계산법이었다.

서울의 하지도 남한을 대소 초소로 만들라는

본국 정부 지시를

맥아더를 통해 전달받았다.

미국의 대남한 정책은

조선인의 독립 열망을 철저히 깔아뭉개고

'소련 견제'라는 대일본 점령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집행된다.

1945년 10월 중국에서 작전하던 미군은

모택동의 공산군과 수차례 무력 충돌한다.

미국은 장개석·모택동 간의

평화 조약을 중재하려다 실패했다.

미국은 맥아더를 앞잡이 삼아 일본에서

친미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왕을 감싸고, 전범 재판 지휘하며,

일제에 복무하던 관리들을 미군정에 참여시킨다.

미국은 반인륜적인 범죄 집단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를

부대원 전원 면책해주는 대가로 손에 넣었다.

미국에 의해 인간 백정인

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은

살인마에서 정보 제공자로 둔갑해

전후 유력인사의 삶을 누렸다.

인간 악마들과 거래한 미국의 민낯이었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 인간 괴물들을 사면하고

선혈이 낭자한 데이터를 챙겼다.

인류에 대한 범죄 기록이

미국의 군사 자산이 됐다.

나치 로켓 기술자를 풀어준 것처럼.

악마와의 거래는 냉전의 규범이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핵심 의료진은

'인체실험 데이터 및 생화학 무기 연구 자료'를

미국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면책 특권을 받았다.

미국은 이 귀중한(?) 데이터를

소련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 죄를 묻지 않았다.

731부대 생체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이 주도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 중 하나다.

생화학 무기 개발과

인간의 신체 한계를 측정하기 위해

최소 수천 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반인륜적 실험을 자행했다.

731부대원들은 실험 대상자들을

인간이 아닌 '마루타(통나무)'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다.

피해자들은 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및

정계 인사, 중국인 항일군인 및 민간인,

러시아인, 몽골인 등이었다.

실험 대상이 된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임산부, 영유아, 소년 소녀도 예외 없이

실험 대상에 포함되었다

731부대 출신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전후 일본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학장, 유명 제약회사 임원,

국립보건원 간부 등 일본 의학계의

주류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인간을 통나무로 여기며 학살했던 이들이 전후

' 의학 박사'이자 '사회 지도층'으로 대접받았다.

731부대의 만행은 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적인 지탄을 받았으며,

과학과 의학이 도덕성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민중은 해방을 외쳤지만

미군정은 질서를 먼저 말했다.

독립보다 반공,

자치보다 통제,

공작을 통한 대중조작

그것이 점령의 언어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과정에서

협상 테이블 위에 한반도의 운명이 놓였다.

미국이 제안했다. 10년 신탁통치.

소련이 반박했다. 즉시 독립.

타협안이 나왔다. 5년 신탁통치.

진실은 그랬다.

그런데 같은 날 서울의 한 통신사가

긴급뉴스를 신문사에 전달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뒤바뀐 뉴스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민중일보, 신조선보가 실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처럼 인쇄됐다.

남한이 들끓었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니.

소련이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니.”

소련의 타스통신이 반박했다.

"신탁통치는 미국이 주장한 것이었다.

국무부가 1942년부터 입안했다."

뉴욕타임즈 1945년 12월 28일자는

진실을 정확히 보도했다.

그러나 서울의 신문들은 계속 가짜뉴스를 실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실제로 장기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한 쪽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미군정의 검열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남한 내 반소·반탁 감정이 극에 달해

좌우 대립 격화된다.

거리에서 반탁운동이 터졌다.

반소 감정이 폭발했다.

좌우 대립이 극으로 치달았다.

당시 남한 언론을 검열하던 미군정은

이 가짜뉴스를 왜 방치했는가.

맥아더 밑의 정보책임자 윌러비의 언론검열과

보도지침에 충실히 따랐던 남한 언론.

그 언론은 미 정보기관의 정치공작으로

남한의 반소 감정을 부풀리기 위해 동원됐다.

미국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여론 조작 목적이었다.

거짓 보도는 남한의 하늘에 반소의 불길을 퍼뜨렸다.

좌와 우는 갈라졌고

형제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겨울 이후

분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자라났다.

1946년 ~ 1947년 냉전의 심화와 미·소의 대립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의 열기도 뜨거워진다.

중국 대륙에서 내전의 불길이 타오르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공전한다.

미국은 한반도와 일본을 소련·중국 견제할

최전방 전진기지 만들 작업에 속도를 낸다.

1946년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미국의 장개석 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시행된다.

60개 사단 무장이 가능한 4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를 제공받은 장개석 군이 대공세를 펼친다.

위기에 몰린 모택동은 미국이 내전을 부추겨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1946년 3월 ~ 5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본회의가 열렸으나,

신탁통치 논의를 둘러싼 미·소의 입장 차이로

진전 없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미군정은 남한 내 독립 요구 시위와

총파업을 좌파 공작이라며

좌파 탄압과 언론 통제를 강행한다.

하지 중장은 좌파 신문을 조선노동당의 하부 기구로 몰아

언론사를 폐쇄하고 언론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1947년 5월 ~ 8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양측의 의견 대립을 좁히지 못하고

8월 12일 최종 결렬된다.

1947년 9월 23일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 상정

유엔 감시 하 남북한 총선거 후 정부수립을 제의했다

소련은 반대하며 미소 동시 철군과

남북 대표 참여를 주장했다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치열한 논쟁

소련의 반대결의안은 부결되고

미국의 안이 채택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본회의

미국 안을 40대 0(기권 6)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

모스크바 5개년 신탁통치 안은 묵살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발족

9개국 대표로 구성되었으나

소련과 우크라이나는 불참

“조선인 대표 없는 위원단에 참가할 수 없다”

1948년 1월 위원단 서울에서 임무 착수

북한 지역에 대해 소련군정이 출입을 거부하고

위원단은 활동을 계속 했다.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 과업을 계속하라”

그렇게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미국은 한반도 옆 중국 대륙에서

소련 저지를 위해 진력했다.

1947년 10월 미국은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단을 만들고

수억 달러를 추가지원 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전세가 뒤집히고 있었다.

1948년 모택동의 군대는

만주를 장악했고

국민당의 무기와 도시를 차례로 삼켰다.

부패한 국민당은 무너졌고

미국은 장개석에게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난징이 함락되자

미국 외교관들은 철수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한반도에서

'선거 가능 지역' 총선을 결정했다.

소련의 거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지 못하자,

유엔 소총회는 미국의 안에 따라 '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다.

1948년 5월 ~ 9월 한반도에서

남북 분단정부가 각각 출범했다.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1948년 9월 모택동 군이

만주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장개석 군의 탄약을 무더기로 노획했다.

장개석 군 내부의 자멸적인 부정부패를 목격한

미국은 추가 지원 거부를 검토했다.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는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4월 ~ 5월 공산군에 의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된다.

미국은 공관원을 철수시키면서도 대사에게

대만으로 도망치는 장개석을 따르지 말고

난징에 남아 모택동 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한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민족통합 주장하면서 5·10 총선거 거부한

김구 선생을 총으로 쏜 범인 안두희는

당시 주한미군 방첩대(CIC) 소속이었다.

안두희는 다음해 6.25 전행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고

육군 포병 장교로 원대 복귀해

소령까지 진급했다.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동경에 있던

맥아더 휘하의 정보기구 G-2의 지휘를 받았다.

G-2는 윌러비가 대장으로

극동 전역은 물론 한반도의

모든 군사 정보 활동을 총괄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제971 방첩대는

주한 CIC의 핵심이었다.

안두희의 백범 암살은 CIC와 무관한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영원한 분단으로 가는 길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1947년 말 유엔(UN)이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결의하자

김구 선생은 1948년 2월

성명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선언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 선생은 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는 등

민족통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남한 지역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김구 선생과 그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은

선거를 전면 거부했다.

"분단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결국 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석 달 뒤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선거 거부 이후 김구 선생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통일 운동과 반이승만 정권의

상징적인 인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독립운동가

지도자들은 엄청 많았다.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설산 장덕수선생 등을 비롯해

이분들과 함께 활동하던 중간 간부급 및

청년 단체 지도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됐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유는 장개석 군이

부정부패로 패퇴했으며

남한 역시 부정부패가 자심해

희망이 없다는 판단한 결과로 알려졌다.

미국은 중국 내전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쏟아 부었다.

국민당 수뇌부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이 보낸 원조 물자와 자금이

국민당 고위 관리들의

주머니나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국이 준 무기가 모택동군에게

밀매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사석에서

극도의 배신감을 토로했다.

"우리가 장개석에게 지원한 돈 중 수억 달러가

뉴욕의 부동산 투기나 은행 계좌로 들어갔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보고,

타이완으로 쫓겨 간 장개석 정권을 포기했다.

당시 남한 상황도 타이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정기와 남한 정부 수립 이후

막대한 원조가 제공되었으나,

정권 비호 세력에게 불하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정경유착과 부패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분별하게 화폐를 발행하면서

물가가 폭등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 선포 직전인 1950년 1월초

이승만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부패를 척결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중단 하겠다"

'애치슨 라인' 선포 소식을

스탈린, 중국, 김일성이 들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물러선다.

미국이 한국을 지키지 않는다.”

5개월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탱크가 38선을 넘었다.

오판이었는가.

아니면 유도였는가.

역사는 아직도 논쟁한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해,

산천이 핏물로 물들고 포화가 가득할 때,

패전국 일본은 축배를 들었다.

일본은 미군의 거대한 병참기지가 되어

막대한 특수를 누리고 경제를 재건했다.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나면

선거에서 패배할까 두려워하는데

맥아더는 압록강, 두만강까지

북진하려 했고

그 곁에서 정보책임자 윌러비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그러나 겨울 산맥 너머에서

중공군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장진호의 눈보라 속에서

수많은 미군병사들이 얼어 죽자

맥아더는 만주를 핵공격하자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를 파면하고

전쟁은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9월 8일

미국의 동북아 전략 수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됐다.

쉰 두 나라가 협상대표로 모였건만,

중공과 대만, 남북한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이 사실상 혼자 설계한 조약으로

일본에게 파격적 특혜를 줬다.

전쟁 배상 의무를 최소화하고

일본의 전쟁범죄 부인 근거를 줬다.

독도 문제는 조약에서 빠졌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씨앗이

그 빠진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성노예, 강제징용 등 역사의 상처도 방치됐다.

1905년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그 밀약의 20세기 판이었다.

미국은 이 조약으로 일본의 전쟁범죄 처벌을 최소화하고

전후 배상 부담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미국이 주도한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극동전략기지가 되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파격적인 특혜를 주어

주권을 회복시키는 대신,

일본을 대소 전초기지로 삼는

전후 동북아 대립 구도를 완성했다.

미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고통 받은 한반도를

강화조약 배상 대상에서 제외할 때

이승만은

그가 당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한다는 친서를

미 대통령에게 수차례 보낸 것과 너무 달랐다.

이승만은 대일 강화조약이

미국의 극동 전략 수립에서

핵심 사항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침묵한 것이다.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 몰빵에 몰두한 사례의 하나다.

이승만은 정전 후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과 체결했다.

동시에 미군의 한국 주둔을

치외법권적 특권인 ‘권리’로

인정해주면서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의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은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 유엔사 후방기지 협정으로

동북아 전략의 기본 틀을 완성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최종 보루로 만드는 작업을 마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전범 처벌을 흐지부지하고,

한국에서 친일세력을 복권시켰으며,

막후 정보 공작(CIC, CIA)을 통해

한국과 일본 내의 사회주의 세력을 철저히 척결했다.

미국 정보기구 G-2 부장인 윌러비 소장은

맥아더의 눈이자 귀이자 손이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였다.

그는 악명 높은 특고경찰을 중용했다.

일제강점기 사상범을 탄압하던 비밀경찰이었고

독립 운동가를 잡아 고문하던 자들이었다.

윌러비는 그들을 비밀리에 공직에 복직시켰다.

낡은 술을 새 병에 담았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군을 잡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 휘하에서 다시 총을 들었다.

이번엔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이는 남한에서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세력이

권력기구로 복귀하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1952년 미국의 일본 미군정 종식을 앞두고

일본 극우 세력이

미군 정보기구 G-2의 묵인·개입 하에

일본의 재무장을 노린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발각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일본 내 좌파 세력의 집권을 막고

일본을 아시아 반공의 거점으로 묶어두기 위해

자민당 정권과 온건 야당 분열 공작에

수백만 달러의 비밀 자금을 지원했다.

1955년 이래 2021년까지 단 두 번의 예외뿐,

자민당의 집권, 미국의 그림자 아래 이어졌다.

CIA가 만든 정당, 미국이 유지한 정권.

일본 민주주의의 이면이다.

미국의 태평양전쟁 종전 후 정책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소련과 사회주의, 동북아에서 저지하라"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한반도는 분단의 상처를 안았으며,

일본의 전쟁범죄가 경감되고 미국 기지가 되었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1952년 미군은 오키나와에 남았다.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3각 군사협력 체제가 만들어졌다.

일본은 후방기지, 한국은 전방기지이고

유엔사와 그 후방기지가 둘을 연결한다.

미국은 동북아를 하나의 군사작전 공간으로 재편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워싱턴이 있다.

이 모든 일이 소련을 막는다는

하나의 명분 아래 만들어졌다.

진짜 목적은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거였다.

동북아를 지배하고

태평양을 미국의 호수로 만들어

한반도를 그 패권의 최전방기지로 삼는다.

그 설계는 1945년 이후 7년 만에 완성됐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설계 위에서 한반도가 살고 있다.

2026년 미국은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으로

중국과 인도, 태평양까지

작전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3각 군사협력체제가 더욱 강고해진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자주와

전작권 환수를 강조하고 있는데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와

어떤 관련 속에 이뤄지는지

국회, 언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70 여 년간 지속되고 있는

미맹에 모두 취해 있는 것인가.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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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1 2026.0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