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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정원 — 광주는 우리의 매일이다

오월이었다.

남도의 하늘은 그 어느 해보다 파랗고

라일락은 그 어느 해보다 향기로웠다.

광주의 거리에는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시민들은 일어섰다.

"계엄 해제하라!"

그 함성은 전두환의 귀에 이르렀고

그 귀는 워싱턴으로 직통이었다.

광주 미공군기지.

남한 최대의 전술핵 저장소.

핵무기들이 그곳에서 엎드려 있었다.

중국을 향해, 소련을 향해

언제든 날아오를 준비를 한 채.

정보 당국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광주의 소요가 핵무기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핵무기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핵기지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아니, 핵무기가 안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핵무기가 먼저다.

미 국익을 수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다.

카터 대통령 긴급 안보회의 소집했다.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미국의 전략가들이 둘러앉았다.

광주의 인권? 중요하지 않았다.

광주의 민주주의?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오가는 질문은 미국익 안전뿐이었다:

광주 핵무기는 안전한가?

한미동맹의 핵심 기지는 안전한가?

백악관의 결정이 내려졌다.

카터는 광주시민을 도륙내는 학살명령을 승인했다.

그 허락이 떨어진 순간

광주 시민의 목숨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백악관 마루 바닥위로 나뒹굴었다.

금남로에 탱크가 왔다.

총성이 울렸다.

오월의 광주는

민주주의의 순교지가 되었다.

미국은 눈감고 귀 막고 침묵했다.

냉전이 끝났다고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했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동유럽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38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단은 미국의 이익이기 때문에

김대중이 평양으로 갔다.

6·15가 선언되었다.

남과 북이 손을 잡는 순간,

온 겨레의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미국은 무기를 더 사라고 요구했다.

한미동맹 유지를 위해 무기를 사야했다.

평화를 구걸하는 나라가 되었다.

노무현은 10. 4선언을 위해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

문재인이 평양을 3차례, 백두산도 동반 방문했다.

남북이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트럼프는 전화를 걸어 합의를 무효화했다.

참수부대가 창설되었고

무기는 계속 팔렸다.

북한은 결국 두 국가론을 선언했다.

"당신들은 미국의 식민지다."

남쪽은 전과 동일했다.

3차례 남북정상회담을 다녀온 문재인의 표정은?

전과 같았다. 남북합의 백지 된 이유?

침묵했다. 미국의 명령으로 못했다는 설명도 없었다.

향후10년 이상 남북정상회담이 불가능해진 현실?

그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책방에서 열심히 일한다.

그러는 사이 전작권은 미국의 손에 있고,

군대는 미국의 지휘를 받으며,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의 날개를 더 크게 만든다.

극동 전방기지를 넘어 인도태평양까지 참전 가능하다.

한미일 3각군사협력도 강화된다.

광주여.

너는 1980년 5월에 시작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의 배신에서 시작되었고,

미국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온 그날부터

제주 4.3에 이어 너는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 학살을 명령한 한미동맹 구조는 여전해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아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겨울은 길고 어둠은 깊다.

분단위에 걸터앉은 미국은 여전히

중국, 러시아를 상대로 미본토 수호를 위한

비밀작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 정부도 그 비밀을 70여 년 동안 지키고 있어

한국민은 강대국 전쟁으로 언제 재앙을 맞을지

까맣게 모르고 살고 있다.

주한미군은 북한 방어용이라는 한미 정부의 합창만을 믿으면서

한국 민주주의는 한미동맹 속에 좁아지고

국가보안법으로 그 사실조차 발설하지 못한다.

미국에 대한 절대지지가 미맹 속에 남한을 지배하고

냉전의 잔재는 여전히 독기를 뿜고 있다.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광주는 우리의 매일이다.

그 매일 속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침묵할 것인가, 증언할 것인가.

가짜를 지킬 것인가, 허물 것인가.

망설이고 눈치 보면 후손이 괴롭다.

K-팝 세계 아이콘의 주인공들에게

살만한 미래를 넘겨주어야 하지 않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으자.

그러면 반드시 온다.

그 날은 올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 날을 위해

오늘 모두 힘차게 궐기하자.

진실을 밝히자.

카터의 결정을,

광주 체로키 파일의 먹칠한 미국 비밀을.

국보법을 폐지하자.

동맹과 분단이 더 이상

우리의 입을 막는 칼이 되지 않게 하자.

진실을 증언하자.

가짜를 허물어가자.

그 날을 만들어 가자.

그날이 바로

광주의 서사가 완성되는 날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피는 날이다.

평화통일의 광장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날이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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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2026.05.16
창작정원 AI시대의 인문학과 문학

문학은 예술의 한 종류이지만, 표현하는 도구가 언어라는 점에서 시각적·감각적 매체를 사용하는 다른 예술 분야들과는 명확히 분리된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문학을 비롯한 예술 창작 분야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인간의 고유 성역이라 믿었던 창의성에 AI가 도전하고 있어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예술의 본질이 훼손되고 인간 작가의 입지가 좁아질 것에 대한 불안감와 윤리적 비판과 함께 AI가 예술가의 영감을 확장하고 실현해 주는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인간은 신비한 존재 - 인문학의 기초가 돼야

AI는 향후 계속 진화할 가능성이 커서 그럴 경우 인간을 압도하고 지배할 것 아니냐 하는 전망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살필 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잠재력은 인문학적으로 볼 때 신비하다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미래의 예술은 기술적 완성도가 아닌, 그 작품 뒤에 숨겨진 인간적 맥락과 철학에 의해 가치가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AI가 완벽한 문장이나 그림, 음악을 창작할 수는 있어도, 그 작품을 쓰기까지 작가가 겪은 삶의 고통과 시대적 아픔까지 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 예술의 가치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작가 고유의 삶의 맥락과 설명되지 않는 인간적 여백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AI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발명품이라는 점을 미래로 연결시킬 경우 인간이 여전히 AI가 흉내 내기 어려운 영역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류고고학이나 유사이래의 문화, 문명에 의해 추정이 가능하다.

5대양6대주에서 활약한 인간의 다양한 유전적 잠재력은 인문학의 기초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학의 첫 출발은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고고학과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현존 70억 인류는 15 - 20만 년 전 아프리카 한 여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런 연구를 토대로 할 때 유사이래의 5대양 6대주의 문화, 문명은 한 어머니로부터 기원한 DNA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의 잠재력이 환경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발달한 뒤 특정 스포츠, 예능 분야의 불모지에서 세계적 스타가 탄생하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DNA가 발현하는 것으로 이런 사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 음악가가 세계최고로 우뚝 서거나 흑인 노예 후손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런 사례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밖에 건축, 의상,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한없이 다양한 제작기법 등이 꽃핀 것도 중요하다.

인문학은 위에 소개한 인간의 생물학적 및 환경적 측면에 대한 지식의 총집합이어야 하는데 지구촌의 인문학은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크고 그것이 오늘날 지구촌의 여러 비극적 상황의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지구촌 전체 차원에서 인간과 사회를 관찰, 분석하는 관점이 매우 중요한데 이런 점이 생략되고 서양문명 과 여타 지역 문명이 우열의 차이가 있다거나 특정 인종, 국가가 선도적 위치에 있다는 식으로 우열을 가리고 선진, 후진으로 분류하는 것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점령과 자원 약탈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인문학이 동원된 결과가 오늘날의 지구촌의 약육강식, 적자생존 논리를 정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가 앞장선 인종분리주의나 문화적 우열론적 시각이 지난 18세기 이래 끼친 폐해가 엄청나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인 바 이는 올바른 인문학의 정립을 통해 첫 단추부터 다시 꿰는 시각의 시각 교정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문학의 수단인 인간의 언어 능력 탁월

인간은 언어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제한된 음소 몇 개로 무한한 의미를 만들어 내고, 그 언어로 다시 세계를 재구성한다. 게다가 언어는 단순히 전달 도구가 아니라 사고 자체를 형성한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세계를 나누는 방식도 달라진다. 언어는 문학의 도구가 되고 있다. 문학작품이 유사 이래 5대양6대주에 넘쳐나고 현재와 미래도 계속 양산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언어 능력과 잠재력이 탁월하기 때문으로 이를 살펴보자.

언어는 전 세계적으로 5천 - 7천 개가 존재한다. 정확한 집계는 언어와 방언간의 차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의사소통 방식으로는 언어 외에 휘파람, 점자, 기호와 같이 시청각을 이용하는 방법이 손꼽힌다. 그 가운데 언어가 가장 심오한 수단이다. 단일한 조상의 후예인 인류가 언어에 대한 능력과 잠재력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한 것인가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언어는 역사를 통해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겪었는데 오늘날의 언어 50-90%는 세계화와 신식민주의 등의 영향으로 2100년 안에 소멸될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제적으로 강력한 언어가 결국 다른 언어를 지배하게 된다. 현재 20개에 달하는 주요 언어는 전체 세계인의 50%가 사용하고 있다. 이들 주요 언어 1개 언어 당 약 5천 만 명이 사용하고 있다.

언어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하다. 언어의 철학과 관련해서 단어나 말이 인간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이래의 주요한 논쟁이 되었다. 장자크 루소는 언어가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반면 이마뉴엘 칸트는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21세기 학자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류는 수많은 언어를 창조하고 그 용도에 대해서도 다각적 해석을 하면서 수많은 문학작품을 쏟아낸 것이다.

한 어머니의 후손인 인류가 환경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채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주목하면 인간의 능력과 잠재력이 무한하며, 인류 미래가 지속적으로 진보할 가능성이 크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현대인 두뇌, 구석기 시대인과 동일

인간의 잠재력이 신비할 정도로 무한하다고 했는데 미래에는 어떨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인간이 AI를 계속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의 근저에는 인간이 신비할 정도의 가공할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에 기반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살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다.

인간 두뇌의 기능은 언제 현재 수준에 도달했는가? 인류의 진화는 이미 멈춘 것인가? 이 질문은 인류학, 신경과학, 진화생물학이 교차하는 핵심 쟁점으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인간 두뇌의 해부학적 구조는 수만 년 전에 이미 현대와 유사한 형태로 정착했으나, 그 기능적 진화와 작동 방식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즉 하드웨어는 변치 않지만 소프트웨어는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3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 당시 두개골 화석과 뇌 용적 분석을 살펴보면, 평균 뇌 크기와 주요 신경 구조는 현대 인류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언어 처리, 추상적 사고, 사회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PFC) 또한 이 시기에 이미 충분히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전두엽은 뇌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뇌의 경영자' 혹은 '관제탑' 역할을 수행한다. 원시시대 동굴 벽화, 장례 의식, 장신구 제작과 같은 상징적 행위는 당시 인류가 고도의 인지 능력과 정서 표현 능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하는 대표적 증거로 제시된다.

3만 년 전 크로마뇽인의 아기를 현대 사회로 데려와 교육한다면 스마트폰을 조작하고 양자역학을 푸는 현대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즉, 우리 뇌라는 ‘생물학적 기계’는 이미 선사시대 야생 환경에 최적화된 설계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문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이 탁월해서 5대양6대주에서 다양한 문화, 문명을 창조하는데 기여했는데 이는 AI시대에도 역시 그럴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소프트웨어의 격변: 문화와 기술이 재구성하는 뇌

인류의 뇌는 그 하드웨어는 축소된 반면 기능적 측면인 소프트웨어는 진화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특 뇌의 용량은 약 1만 년 전 농경 사회 진입 이후 오히려 10~15%가량 줄어들었다는데 현대 과학은 이를 ‘고도의 최적화’ 과정으로 해석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정보가 집단으로 분산됐고, 문자나 디지털 기기 같은 외부 저장 장치가 발달하면서 뇌가 모든 데이터를 내부에 저장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뇌는 크기를 줄이는 대신 신경망 연결 밀도를 높여 에너지를 덜 쓰면서도 복잡한 연산을 수행하도록 ‘다이어트’를 단행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물론 이런 추정은 자연과학적으로 검증되기 힘들기는 하다).

전문가들은, 두뇌의 구조적 진화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두뇌의 '사용 방식'과 조직화된 기능에서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농경의 시작, 도시와 국가의 형성, 종교와 법의 제도화는 인간 두뇌가 작동하는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신경 가소성'이다. 이는 뇌가 경험과 학습에 따라 신경 연결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류 유전자에 원래 '읽기'를 담당하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되고 보편화되자, 뇌는 시각 처리 구역의 일부를 재배치하여 '문자 형상 영역(VWFA)'을 스스로 구축했다. 이는 문화적 필요성이 뇌의 기능적 구조를 바꾼 명백한 사례로 꼽힌다.AI시대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며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의 확산은 주의력, 기억, 감정 처리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마트폰과 검색 엔진은 '기억의 외주화'를 일상화했고, 소셜미디어는 감정 표현과 공감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이런 점은 현대인이 종이책 읽기를 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가 될 법한 데 문학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급자가 변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신비한 점이 무엇?

현존 인류는 5대양 6대주에서 다양한 방식의 문화, 문명을 꽃피웠고 그 위대한 작업은 오늘날에도 진행 중이다. AI시대의 미래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선사시대 이래 유지되고 있는 인간의 고유한 잠재력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사회는 희소한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한 탓인지 정작 인간 자신이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로 인정하는데 인색하다.

인간의 신비는 감정의 영역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감정의 복잡성과 눈물의 다중성이 특이하다. 슬플 때 우는 것은 그렇다 쳐도, 너무 기뻐서 울고, 남의 슬픔을 보고도 울고, 심지어 감동이나 경외감 때문에도 눈물을 흘린다. 이는 감정이 단순한 쾌·불쾌를 넘어서 객관적 의미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이타성과 잔혹성의 공존도 빼놓을 수 없다. 인간은 낯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같은 종 또는 공동의 적이라고 칭한 대상을 가장 잔혹하게 해치기도 한다. 동일인이 집밖에서는 악마가, 집안에서는 선량한 가장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 소방관이 익명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장면과, 전쟁·학살 같은 장면이 같은 종에게서 나온다는 점은 소름 돋는 지점이다.

살인의 경우 개인적인 것은 범죄, 국가의 것은 합법, 전쟁에서는 정의, 충성, 애국심으로 각기 그 의미 부여가 다르다. 그 이중성이 사랑의 다양성에도 나타난다. 부모애, 연애, 동지애, 조국애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움직인다. 심지어 자기를 파괴하는 방향으로도 그러하다. 집착, 질투, 광기 때문에 사랑이 인간을 가장 숭고하게 만들기도 하고, 가장 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인류는 유사 이래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하거나 억누르고 자제할 것을 강조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감정 사회학같은 분야로 특화되고 있다. AI 개발로 감정 연구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신비로운 존재라고 주목받는 다른 핵심적 요인은 의식과 자기 성찰이다. 인간의 자기의 객관적 현실을 살피는데 열심이면서도 자신을 살피는 존재다. 인간은 우주를 관찰하다가 결국 그것을 관찰하는 자신을 다시 관찰하는 존재가 되고, 나는 누구인가를 평생 물어보는 거의 유일한 생명체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신비롭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도 중요하다. 다른 동물도 죽음을 어느 정도 감지하겠지만, 인간은 자기가 죽을 미래 시점을 예상하고, 그걸 철학과 종교 등 다양한 문화로 체계화했다. 그런데 또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일상생활을 한다. 이런 인간의 엇박자인 의식이 문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어느 시인이 ‘문장은 단문이어서는 안 되고 중문, 복문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의식이나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가 변칙적이거나 복합적이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신비롭다. 신, 정의, 사랑, 자유 같은 건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인간은 거기에 목숨까지 건다. 종교적 신앙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는 말도 결국 모두 추상적 상징을 위해 구체적 삶을 내놓는 것이다.

상상력과 가상현실 창조의 능력도 정말 인간만의 특권 같다. 언어, 법, 금융, 국가, 회사는 다 가상의 질서이다.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집단적으로 믿고 따르면서, 그걸 현실을 움직이는 힘으로 만든다. 돈이라는 종이, 국경이라는 경계선, 기업이라는 법인은 전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인데, 그 허구가 다시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이것이 상징적 사고와 이어진다. 깃발 하나, 로고 하나가 곧 정체성과 감정을 압축해서 담는 그 능력이다. 예를 들어, 작은 천 조각에 불과한 국기가 사람을 울리고 죽게 만들기도 한다. 이건 동물 세계에서는 안 보이는 묘한 현상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꽤 허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인데도, 지구를 장악했다. 인간은 유약한 신체와 강력한 도구의 소유자라는 표현이 그걸 잘 말해준다. 발톱, 이빨, 속도 어느 것도 최상급이 아니다. 대신 뇌와 손, 협력 능력으로 게임의 룰을 바꿔 버렸다. 특히 직립보행으로 시야를 얻고, 손을 자유롭게 쓰게 된 것이 문명으로 이어진 점은 정말 기묘한 우연과 필연의 교차처럼 느껴진다.

자유의지의 환상과 실재 문제도 있다. 행동이 유전자와 환경, 뇌의 관계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는 연구가 많은데도, 인간은 여전히 그래도 나는 선택할 수 있다고 느낀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끝없는 긴장관계 자체가 인간의 신비를 잘 보여 준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유전과 환경, 본능과 이성, 파괴성과 창조성, 유한성과 무한 꿈이 한 몸 안에서 싸우는 장이다. 이 복합성이 곧 신비로움이다. 인간에게 미완성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가장 무력하지만, 죽을 때까지 배우고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대를 이어 이어지면서 문화, 문명이 전수되고 발전되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개개인이 삶을 자신에게 국한시키면 죽을 때 인생이 허무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인류 조상이후 지속된 긴 인간 띠의 한 부분을 채운 소중한 존재라고 인식할 경우 전혀 그렇지 않게 된다).

개인과 집합체로서의 인간, 인류는 고정된 완성형이 아니라, 계속 수정되고 재 작성되는 존재이기에 더 예측 불가능하고 신비롭다. 설명되지만 결코 다 설명되지 않는 존재이다. 과학과 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어느 지점엔가는 늘 여백이 남을 것 같다. 아마 그 여백 자체가 인간 신비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이 AI미래 시대에도 건재할 것이다.

인류는 한 지붕 한 가족

인문학은 인간의 유전적 요인, 환경적 적응력 등의 인간학을 토대로 한 관점에서 동서고금, 5대양6대주의 문화와 문명을 총망라하는 관점으로 정립되어야 하고 AI시대의 현재와 미래도 그래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 인문학 관련서가 다수 나왔지만 대부분 인간학이 대전제로 되어 있지 않아 그 개념이 십인십색이다. 미래에 대한 것도 인간학을 바탕으로 탐구되어야 적절한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의 지배적인 인문학 토대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를 합리화시키는 관점에서 만들어졌고 그 결과 인류는 그 뿌리가 다른 백인종, 황인종과 같은 인종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실화 했다. 이는 결국 지역, 민족, 국가간 착취에 따른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낳았고 오늘날에도 그 폐해는 지속되고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새로운 논리의 구성은 80억 인류가 한 지붕 한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AI시대에 대한 타당한 접근 방식이 될 것이다.

인간 두뇌는 유사 이래 완성된 채 정지한 기관이 아니다. 환경과 제도 속에서 끊임없이 최적화 경로를 찾아가는 살아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여전히 진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며, 그 방향은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AI시대를 맞아 인류의 진화는 형식과 내용을 달리해서 계속될 것이다.

문학도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는 것과 같은 정보환경의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십분 고려해야 할 것이다. SNS의 대중화와 정보사회의 발전으로 종이신문이나 잡지 등의 오프라인 매체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국내 많은 문예지들이 자취를 감춘데 이어 최근 샘터가 휴간한 것도 그 영향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TV가 나오면서 라디오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고 종이매체도 인간의 DNA 잠재력을 생각할 때 그 생명력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종이책 문학, 소설도 발상의 전환을 하면서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할 집단지성의 발휘가 필요해 보인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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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5 2026.03.26
창작정원 가짜 전쟁영웅

1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건국 이래 최대의 전쟁영웅으로 자타가 공인해 온 인물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주장이 제기되어서다. 그는 호주에서 생존한 전쟁 영웅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이 나라 최고의 정예특별부대 SAS에서 복무했다.

그는 호주에서 살아있는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2006년 무공훈장, 2011년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데 이어 2012년 우수군인으로 선정되었다. 2013년 제대한 뒤 퀸스랜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2015년 퀸스랜드의 TV 방송사의 부사장으로 취임하고 후 고속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는 세계 1차 대전이래 호주 병사가 보여준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었으며 완전한 병사의 전형이라고 인정받았다. 호주의 한 군사전문가는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거칠면서 활달하고 날카로우며 지적 능력이 탁월해서 어떤 역경에 처한다 해도 목적을 달성하고 귀환할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민이 존경하는 진짜 사나이 군인중의 군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도 분수가 있지 국민적 영웅이 추악한 전쟁범죄자라는 언론보도가 나온 것이다. 그가아프칸 복무중 저지른 전쟁범죄가 폭로되면서 그의 빛나는 이미지는 산산조각 나고 호주 사회를 경악케 했다.

호주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 등 3개 신문은 2018년 로버트 스미스(44살)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해외파병 되어 군 복무하는 동안 아프칸에서 벌어진 여러 작전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해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로버트 스미스 전 상병은 2009-2012년 아프칸에서 근무할 당시 비무장 포로 또는 민간인 6 명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다. 스미스는 수삽을 채운 농부를 10m 절벽 아래로 발로 차 떨어뜨려 이빨을 부러뜨렸고 결국 사망케 해다. 당시 아프칸인은 공포에 질려 나뭇잎처럼 벌벌 떨었다. 스미스는 부상한 아프칸인을 부하를 시켜 머리를 총으로 쏘아 살해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그 상황을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떠벌렸다.

스미스는 기관총을 쏘아 포로로 잡은 아프칸 전사를 살해하고 그가 다리에 끼고 있던 의족을 벗겨 전리품으로 챙겼고 뒤헤 부대원들이 술을 마실 때 잔으로 사용토록 했다. 스미스는 동료군인을 협박하고 못살게 굴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스미스가 하급자에게 ‘ 다음 정찰을 나가서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내 뒷머리에 총알이 박힐 줄 알아’라고 협박한 사실이다.

위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스미스는 제네바 협약에 규정된 전쟁범죄인에 해당했다. 이 협약은 전쟁 중에 야만적 행위는 금지해야 하며 이에 따라 포로에 대한 고문이나 살인 또는 잔혹행위를 금하면서 부상병이나 병든 병사에 대해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호주를 발칵 뒤집어놓은 언론보도에서 전쟁범죄인으로 지목된 주인공인 제대군인 로버트 스미스는 아프카니스탄 전쟁 등에 참여해 빛나는 무공을 세워 수많은 훈장을 받은데 이어 영국 및 영연방 왕국 회원국의 군인에게 수여되는 최고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고 상병으로 제대한 전직군인이었다. 2011년 그는 자신의 부대를 공격한 탈리반 기관총 사수들을 혼자서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m 가까운 장신인 그는 2010년 탈리반 반군의 기관총에 맞아 쓰러진 동료를 단신으로 구한 공로로 국가 최고훈장을 수여해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 훈장은 전쟁 중 적과 맞서 싸우면서 나타낸 뛰어난 용맹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육군, 해군, 공군의 장교, 부사관, 병사 등을 상대로 수여하는데 1856년부터 현재까지 총 1천6 백 여 명이 수여받았을 뿐이다. 그는 17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아프칸에서 전공을 세운 것이 인정받아 자신의 초상화가 호주 전쟁 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다. 스미스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보도가 나온 직후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격렬한 어조로 반박했다.

-나는 전투규정을 항상 준수했다. 언론이 문제를 제기한 민간인 살해는 전투 중에 발생한 것이고 일부는 사실무근이다. 이는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한 군인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다. 이번 사태는 나를 시기한 옛 동료들이 거짓말을 하고 모함하려 내 등 뒤에 총질을 한 것이다.

-나를 모함하는 이 보도는 가짜뉴스다. 언론인들이 낚시의 미끼를 무는 고기처럼 허위사실에 현혹되어 망발을 저지른 것이다. 나는 즉각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며 재판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진실이 규명되도록 노력해 이들 엉터리 언론에 철퇴를 가할 것이다.

스미스는 공언한대로 즉각 소송을 제기했고 법정심리가 시작되면서 호주에서 발생한 금세기 최대의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스미스가 호주 역사상 가장 명예스런 훈장을 받은 살아있는 전직 군인이었고 그가 과연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인물로 전락할지 여부에 관심이 집중됐다. 스미스가 언론을 제소한 뒤 호주가 지난 2001-2021년까지 아프칸에 군대를 파견한 바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참전 군인들이 불미스런 일을 저질렀는지 여부 등에 대한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제기됐다. 하지만 호주 국방부는 스미스 사건에 대해 민사 소송일 뿐이라며 언급을 자제했다.

호주에서 전쟁 범죄에 대한 소송이 공개된 재판에서 심리된 것은 최초였다. 이 사건은 호주 정부가 아프칸에 파병된 호주 특수부대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군인 25 명이 2007-2013년 동안 아프칸 민간인 39 명을 살해하는데 가담한 사실을 확인해 1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한 뒤 3년 만에 발생했다. 소송은 4년이나 지속되었다. 재판 기간 동안 40 명의 증인이 출석했는데 그 가운데는 아프칸 주민, 국방장관, SAS 부대 제대군인 등이 포함돼 스미스의 삶에 대해 세세한 것 까지 밝혀졌다. 재란 과정에서는 베일에 싸여있던 호주 정예부대의 내면에 대한 비밀들이 밝혀졌다. 증언에 나선 전현직 부대원들은 부대내 불미스런 일들이 부대 내의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스미스가 언론사들을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협의로 고소하면서 언론사들은 자신들의 보도가 사실이라는 점을 법정에서 확인받아야 했다. 호주의 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2021년 6월 재판이 시드니의 연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피소된 언론사들은 보도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는데 노력했다. 스미스는 언론보도가 가짜뉴스라고 연일 떠들고 호주 국방부 등이 침묵하면서 호주 언론은 후속 보도를 계속 이어갔다.

그의 부대원이었던 전직 군인은 절벽에서 떠밀려 죽은 아프칸 인에 대해 증언했고 이는 당시 현장에 있던 아프칸 민간인들의 화상 증언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그러나 스미스와 다른 동료 군인들은 그는 탈리반 반군 정찰병이었고 그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스미스의 명예에 금이 가는 새로운 증언들이 제기되었다. 그의 전처는 그가 집 뒤뜰에 군인들이 의족으로 술을 마시는 사진과 군사기밀이 담긴 유에스비를 어린이 점심 도시락에 담아 묻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에 대해 변명했다.

-내가 그 유에스비를 한때 소유했지만 땅에 묻은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가 그가 말을 바꿔다.

-나는 그 유에스비를 휘발유로 태워버렸는데 그것은 증거를 없애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그의 친구가 충격적인 새로운 증언을 제기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스미스는 아프칸 민간인을 살해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이 증언은 전쟁범죄에 대한 것으로 명예훼손이라는 민사의 영역이 아닌 형사 사건에 속했다. 결국 스미스가 범한 전쟁범죄에 대한 사실이 언론에서 보도됐다.

-스미스는 현재 호주 군범죄특별수사대가 수사 중인 호주 특수부대 SAS 군인들의 아프칸 민간인 살해 사건과 관련된 세 명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전쟁범죄 사실이 밝혀지면서 SAS군인 세 사람이 2012년 아프칸 밀 경작지에서 비무장상태인 아프칸인을 사살해 저지른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미국은 호주 특별대가 저지른 많은 전쟁범죄 사실 때문에 이 부대와의 합동작전을 중단할 것을 경고한다고 호주 정부에 통고했다.

2.

스미스는 1978년 11월 호주의 한 법관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95년 고교를 졸업한 뒤 다음해인 1996년 18살이 되자 군에 입대했다. 그는 훈련을 마친 뒤 소총부대에 배속되어 분대장이 되었고 그 1999년 동티모르에 주둔중인 파병부대원이 되었다. 스미스는 1998년 에마를 시드니에서 만나 2003년 결혼했다. 2010년 쌍둥이 딸이 태어났고 2015년 제대하면서 이혼했다.

그는 2004년 피지. 2005-2006년 이라크에 파견되었다가 2006-2007년 아프칸에 배치되었다. 2009년 하사관 교육을 마친 뒤 수색대에 배속되었다. 그 후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한 뒤 2009-2012년 아프칸에 재배치됐다.

2011년 1월 23일 그는 호주 총통가 참가한 시상식에서 빅토리아 십자 무공훈장을 받았다. 당시 SAS 일부 전현직 부대원들은 그가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식의 문제를 제기했었던 것으로 후에 밝혀졌다. 2014년 1월 그는 아프칸에서 50 차례의 위험한 작전에서 소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의 초상화가 그가 입고 있던 군복과 함께 호주 전쟁기념관에 게시됐다. 그는 훈장을 받은 뒤 전방 수색대 지휘관으로 복무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말했다.

-수색대에 배속되면 그것은 호주 최정예부대 SAS의 최강 군인이 되는 것과 같고 그렇게 되면 비로소 사나이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그는 2013년 35살이 되자 하사로 일선부대에서 물러나 2015년까지 예비군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2013년 퀸스랜드 대학에서 그에게 경영학 공부를 할 수 있게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38살이 되던 2016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18살에 입대해서 대학에 가지 못했고 일반사회에 적응할 전문성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제부터 사회에 기여하는 직업을 갖겠다.

그는 2015년 4월 퀸스랜드 TV 그룹의 한 회사에 부 책임자로 취업했고 두 달 뒤 최고 책임자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2017년 호주 군수사당국이 스미스가 포함된 불법적인 전쟁 행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상황이 스미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2006년 아프칸 코라 파스전투에서 한 민간인을 탈리반 소속원이라고 주장하며 살해한 사건에 대해 호주 여러 언론이 일시에 관련기사를 쏟아냈다.

-호주 SAS 부대원 2명이 순찰을 나갔다가 15-18세로 추정되는 아프칸 소년 한 사람이 호주군 초소로 다가왔다가 되돌아가가는 것을 목격했으나 그냥 지나치기로 하고 본부에 보고했다. 그러자 스미스와 다른 부대원 1명이 현장으로 달려와 9mm 권총으로 사살한 뒤 본부에는 적 두 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스미스는 순찰 도중 적을 발견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러나 맨 먼저 보고된 내용은 비무장 소년 한 명이라고 되어 있었던 점이 문제가 되었다. 본부에서 스미스가 보고한 내용을 캐묻자 스미스는 자신이 기억을 잘못했다고 얼버무리면서 일단락 됐다.

이 보도가 나간 뒤 2017년 10월 호주 군 당국이 아프칸에서 SAS 부대원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 군 당국이 해외참전 용사들에 대해 조사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는 국가의 명을 받고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미스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2018년 6월 SAS 부대원들이 2012년 9월 아프칸 다르완 부락을 공격할 때 아프칸 민간인 한 명에게 수갑을 채운 뒤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사망케 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이 보도가 나간 뒤 호주의 언론들이 스미스에게 치명적인 사실들을 보도했다.

-스미스는 2012년 아프칸 다르완 부락 민간인 피살 사건에 연루된 SAS 부대원 가운데 하나로 밝혀졌다. 스미스는 동료 군인들에게 가혹행위를 했으며 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스미스는 그해 8월 동료 부대원에게 이슬람교의 지도자 한 명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그 지도자는 비무장이었고 포로로 잡힌 상태였지만 모스크 성당에서 끌려나와 살해됐다. 이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이들 보도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인했다.

-나는 결코 그런 사실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스미스는 자신이 군부대내에서 동료들을 못살게 군 위선자라고 주장한 옛 동료들의 증언을 언론이 보도하자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것은 나를 흠집 내기 위해 언론이 과장한 것으로 전혀 사실 무근이다. 언론이 재판부에 제출하기 위해 그런 것을 조작한 것은 비열한 행위다. 나를 모함한 옛 동료들은 위선자다. 내가 부하들을 괴롭혔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짓과 같다. 이는 비겁한 행위다. 그들이 그늘에 숨어서 하는 짓은 집단 겁쟁이 짓과 같다. 나는 남을 괴롭히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그것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다.

스미스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는 아프칸 복무 중 전쟁범죄에 대한 혐의로 내사를 받기 시작했고 2018년 11월 연방검찰이 본격 수사를 개시했다. 아프칸 현지인들은 호주 정부의 전쟁범죄 조사에 대해 환영했다.

-호주 정부의 행동은 20여 년간에 걸쳐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 규명의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연합군에 의해 희생되거나 그들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족은 진실이 전면적으로 공개되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들에 의해 초래된 피해에 대해 배상해야 할 것이다.

- 탐사저널리즘이 연합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 언론의 진상 규명 노력으로 진실에 가까이 갈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할 것이다. 호주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사과해야 할 책무가 있다.

스미스가 제소했던 언론사의 한 기자는 스미스가 받은 훈장이 어떻게 처리되어야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 분노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진실 규명을 통해 밝혀진 것은 그가 뻔뻔한 거짓말 장이라는 점이다. 이번을 계기로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 전쟁에 대한 모든 진상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호주 정부도 호주 군지휘부나 의회가 전쟁범죄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도 눈감아 주었는지 등도 규명되어야 한다.

3.

2023년 6월 재판부는 스미스가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11주 동안 증인을 소환하는 방식 등으로 심리를 벌인 끝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호주에서 호주군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범죄에 대해 최초로 내려진 법정 심판으로 기록됐다. 재판부는 스미스가 아프칸 민간인 4 명을 살해하면서 복무규정을 어긴 것이 입증되었다고 판시, 스미스는 패소했다. 당시 판결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아프칸과 같은 복잡한 전쟁터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사고는 어느 것도 명확한 것은 없다. 이는 모든 전쟁도 마찬가지다. 거짓이나 꾸며낸 것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중단할 수는 없다. 언론이 스미스에 대해 보도한 전쟁범죄 혐의에 대한 기사는 충분한 근거에 입각해 진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 스미스는 군복무법과 윤리 규정을 위배했고 그것은 범죄에 해당한다. 이런 행위는 전쟁터에서 민간인과 포로를 보호할 것을 규정한 제네바협약에 위배된다.

- 스미스에게 제기된 네 건의 살해 혐의는 사실로 밝혀졌다. 2009년 4월 위스키 108 작전에서 SAS는 탈리반 부대를 폭격하고 기습해 비밀지하 터널에서 두 명이 잡혔을 때 의족한 사람을 스미스가 살해했다. 스미스는 아프칸인을 엎어놓고 그의 등에 기관총 4-5발을 발사해 살해하고 그의 의족을 벗겨 부대로 가져가 부하들이 술을 마실 때 술잔대신 사용토록 지시했다. 이는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다.

- 2006년 6월 2일 SAS 부대원 2 명은 매복해 있다가 그 소년이 70m 정도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비무장이었다. 그 곳은 탈레반이나 민간인들이 항상 이용하는 언덕길이었다. 두 병사는 후에 그 소년이 부근에 숨어 있던 폭도들에게 협조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두 병사는 자신들이 숨어 있던 장소에서 상당 거리 떨어진 곳을 소년이 걸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소년은 배낭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걸어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부대원들은 당시 소년에게 발사하지 않았다. 그를 사살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감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발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당시 그들의 임무가 잠복해서 주변을 관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미스는 그러나 다른 내용으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두 명의 아프칸 놈팽이가 어두워지기 두 시간 전 어슬렁거리며 우리가 잠복해 있던 관측소로 접근했다. 그래서 나와 다른 SAS 부대원이 두 놈을 사살했다. 그 놈들이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아챘는데도 그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고 현장에서 물러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동료 부대원은 그들을 제거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시체를 처리하고 다시 초소로 돌아왔다. 나는 이런 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스미스가 현장 상황에 대해 다른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지적을 받았을 때 그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스미스가 동일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실을 놓고 왜 총을 발사했는지 등에 대해 말을 바꾼 것은 전투 중 규정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스미스는 과거 동료들이 자신이 무공훈장 등을 받은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많은 전직 부대원들이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매우 주목된다. 이는 SAS 지휘부가 소속 군인들에 대한 감독과 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는 의혹으로 연결되고 있다.

실제 일부 칭송받는 군인들의 전쟁 영웅행위가 일부는 정부나 군 당국이 자신들의 해외파병 결정이 정당했다는 것을 내세위기 위해 부풀려진 결과로 지적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전적을 과대 포장하고 포상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로 지탄 받아야 할 것이다. 스미스가 최고 훈장을 받은 것에 대한 동료 부대원들의 문제제기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부대 지휘관들을 상대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2017-18년 성명 미상의 여인과 6개월간 동거했으며 그녀가 낙태수술을 하려는 것을 사설탐정을 고용해 감시하고 그녀를 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미스는 그것을 부인했지만 거짓인 것이 들통이 났다. 스미스는 2017년 12월 캔바라의 한 호텔에 투숙한 그 여인을 폭행했다. 그 여인이 술에 취해 계단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치자 스미스가 그녀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녀는 법정에 서서 울면서 스미스가 어떻게 자신에게 폭행을 가했는지 증언했다. 스미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 스미스는 그런 사실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그녀의 상처를 얼음찜질하는 등 도왔다고 주장했으나 다 허위로 밝혀졌다.

4.

2023년 7월 스미스는 일심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그의 소속 TV 사가 그에 반대하면서 1백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스미스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벅찬 거금이었고 결국 항소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패소 직후 방송사 사장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재판에서 패소했지만 형사 사건으로 피소되지는 않았다. 호주 형법에 따르면 민사가 형사로 이어지려면 복잡한 입증 절차가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호주 전쟁기념관 위원회는 스미스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인 된 뒤 그에게 호주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한 결정이 문제가 있었으며 추후 유사한 사태가 발생치 않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리반 대변인은 스미스의 재판이 일단락되자 아프칸에서 외국군에 의해 무수한 전쟁범죄의 하나라고 지적하면서도 국제적으로 그것을 규명하는 시도가 취해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전망했다. 스미스 사건으로 호주 군당국이 해외 파병군인의 전쟁범죄 가능성에 대해 전현직 군인 40 여 명을 상대로 조사했지만 단 1명만이 기소됐을 뿐이다. 호주는 2001년 아프간전 발발 이후 20년간 총 3만9천여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ps ; 호주 연방경찰은 2026년 4월 7일 스미스(48)가 2009∼2012년 아프간전 참전 당시 현지 민간인 여러 명의 불법 살해 사건과 관련해 5건의 전쟁범죄에 따른 살인 혐의로 체포, 기소했다. 그는 유죄가 입증될 경우 최대 종신형을 받게 된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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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2026.04.08
창작정원 거짓된 사랑

처음부터 그대는 날 사랑한다 하였지만

그 말이 거짓이었음을

세월의 무게에 알았습니다

사랑의 쇠사슬에 현실의 무게가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짓눌러 올 때

난 숨을 쉴 수 조차 없었습니다

끝없이 주고 주어도

내가 더 이상

내 힘으로도 노력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비참함을 울고싶은 나의 마음을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젠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랑도 현실의 무게도

모든 것을 놓을 때가 된 때를 알기에

뒤돌아 서려합니다

너무 힘든 사랑을 했기에

더 이상 후회는 하지 않겠습니다

세월의 무게에

나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입니다

당신은 나의 눈물을 본 적이 있나요?

나의 괴로움을 아시나요

이 모든 물음을 뒤로 한 채

이젠 "안녕" 이라 고백하고 싶은 밤입니다

이은미
북마크
359 2025.12.01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1- 역사서사시 한미관계 150년

드리는 말씀

연재될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

시작하며

망국, 식민. 분단과 동족상잔 등을 거친

150 여 년의 모진 세월.

우리는 오랜 시간 미국을 ‘혈맹(血盟)’이라 불렀고,

그들이 흘린 젊은 피 위에 세워진

정치적·경제적 기적의 신화를 찬양해 왔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지난 70 여년간 침묵하고 감춰온

진짜 한미관계를 확인하고

미국의 실체를 모른 채 고정관념화 된

미맹(미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한 세기 절반의 진실의 기록, 질문을 시작하려 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신미양요의 그날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한 편의 대 서사시.

그 우여곡절을 살피는 것은

희비극을 넘어

새로운 깨달음의 시작.

우리는 지금,

그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과거,

직시해야 할 현재,

그리고 스스로 써내려가야 할 미래.

기억하는 자가 미래를 산다

우리가 잘 모르거나,

혹은 잘못 알려진

150 여년의 여정을

펼쳐놓고 확인해야 한다.

미국은 혈맹이었습니까?

평등한 동반자였습니까?

미국익을 위한 예속적

이해관계였습니까?

한국이 원조, 은혜 속에 많이 챙겼습니까?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과거를 확인, 청산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것.

그 길 위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번영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1871년 태평양 건너 한 제국의 야욕이

강화도 앞바다를 피로 물들인 신미양요의 그날

조선의 병사들은 낯선 침략군의

전함을 바라보며 칼을 뽑았다.

“물러가라, 서양의 침략자여!”

그 함성은 150 여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 가슴에 메아리친다.

그날의 총성은 단순한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한반도와 미국, 얽히고설킨 운명의 서막이었다.

1905년 동경 밀실에서 맺은

추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은 필리핀을 집어삼키는 대가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하고 축복했다.

그 음험한 독기 속에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도려냈다.

안중근 장군의 대일 선전포고가 작열했으나

1910년 경술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침몰시켰다.

그 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이 하늘을 흔들고 절규가 온 땅을 진동할 때,

서울과 도쿄의 미국 공관으로 내려진 훈령은 냉혹했다.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하거나

지원하는 인상을 절대 주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세계의 정의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미국은 철저히 이익만을 계산했다.

거리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쓰러지는데

열강의 회의장은 침묵했다.

피 묻은 만세 소리는

지구촌 양심의 창문 앞에서 절망 속에 통곡했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 가던

태평양 전쟁의 끝자락이 보일 때,

미국은 원자탄을 터뜨려

소련의 극동 남하를 저지하는 북위 38도선을 그었다.

그들의 한반도 정책은

냉전 대비 극동 미군기지화.

민족의 허리는 두 동강이 나서 갈라졌다.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그 선은

동서 진영의 대치선으로 만들어져

수천만의 삶을 둘로 가르게 된다.

일제 항복과 조선 해방의 날이 왔다.

미군은 남쪽으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북쪽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침내

새로운 나라가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

독립투쟁에서 내려온 이들,

들판에서 태극기를 숨겨왔던 이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외쳤다.

“이제 우리 힘으로 나라를 세우자.”

하지만 해방의 새벽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조선 민중의 독립 투쟁의

역사를 외면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아래,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그저

‘일본의 식민지’로 대하며

패전국 일본과 동일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인민위원회도

민중의 의지도

역사의 갈망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총독부 건물엔 다시 불이 켜졌고

조선총독부의 관리들이 다시 중용되고,

민족을 배반했던 친일 경찰들이

권좌로 복귀했다.

해방된 조선의 민중은

새로 온 점령군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해방은 왔지만

청산은 오지 않았다.

어제의 순사가

오늘의 경찰이 되었다.

누군가는 울부짖었다.

“왜 독립된 나라에서

독립운동가가 쫓겨나고

친일파가 권력을 잡는가.”

그것은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성벽으로 세우고

남한을 거대한 전략의 전초기지로 만들려 했다.

오늘날까지 이 땅을 좀먹는 친일 미 청산의 독극물,

그 원천적 책임은

해방정국의 거대한 설계를 주도한 미국에게 있고

독재자 이승만은 그 속에서

권력을 탐하는 하수인이 되었다.

미국은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해

분단을 고착화하려했다.

미국의 획책에 격렬하게 반대한

제주에서 봉기, 진압 속에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4·3의 산과 마을엔

미국을 추종하는 반민족세력의

총탄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불타는 초가 앞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고

바다는 시신을 떠안은 채 흐느꼈다.

공산주의 배후라는 가짜뉴스 속에

자국 군대와 친일 세력의 총칼에

도민 10분의 1이 학살당했다.

여수순천의 병사들은

양심과 명령 사이에서 외치며 궐기했다.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

미국과 이승만은 어린이까지

빨갱이로 몰아

학살로 흐른 피가 대지를 적셨다.

친일이라 불리던 이름들이

반공이라는 새 이름으로 변신했다.

민족반역자를 잡으러 나선 반민특위에

친일 경찰이 총을 들고 쳐들어갔다.

이승만은 말했다

“내가 지시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자물쇠가

이 나라의 입에 채워졌다.

묻지 말라, 따지지 말라, 기억하지 말라.

그리고 1950년 여름

군사분계선 남북에서 총격전이

꼬리를 물다 38도선이 무너지며

전면전쟁이 터져 산하가 불타올랐다.

애치슨이 그은 방어선 바깥에 있던 땅에서

포성이 울렸을 때 미국이 다시 왔다.

이번엔 유엔의 깃발을 달고 다국적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의 배 위에

일본 청년들도 타고 있었다.

한반도의 전쟁이 일본에게

폐허에서 일어설 발판을 주었다.

중국군이 참전한 뒤

만주와 북한에 핵 공격을 감행하자!

맥아더의 목소리가 커지자

3차 대전을 원치 않았던 트루먼이

그를 갈아 치웠다.

냉전 논리 속에 전선이 교착되자

북녘 하늘은 미군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불타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도시보다 더 참혹하게,

평양의 하늘, 함흥의 골목, 원산의 항구

지상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빨래판처럼 변했다.

1953년 총성이 멎었다.

그리고 휴전.

평화협정은 멀어지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게 분단 상태 유지가 최상의 조건이었다.

주한미군이 동북아의 최전방 부대가 될 수 있었기에.

7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

불평등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쇠사슬,

주한미군사령관은 3개의 모자를 쓰고

적절한 긴장 속 전쟁 방지, 분단지속을 위해

남북을 관리한다.

남북이 손을 맞잡으려 할 때마다

미국은 한미동맹을 앞세워 안보 튼튼을 외치면서

주한미군의 중국, 러시아를 향한 비밀작전을 전개했다.

한국 정부도 그 비밀에 입 다물고

미국에 동조하면서

한국민은 까맣게 모르고

개돼지의 가짜평화를 즐긴다.

미국 국익을 위해

한국헌법과 민주주의는 실종상태.

한미정부는 주한미군이 대북 방어용이라고만 합창하고

한미동맹은 남북교류협력으로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전략과

작계 5015, 5026에 압축된

선제타격, 참수작전 등이 공개된다.

모두를 향한 심리전 차원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미국은 한미동맹 강화를 강조하며

한국의 군사적 대미 종속을 심화시켰다.

남북정상이 평양에서 세 번이나 손을 잡고

남북국가연합도 가능할 수 있게 했던 2018년 열기는

트럼프의 제동과 압박 속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은 그 뒤에 나왔다.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을 강조한다.

동북아에 신냉전의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남쪽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세계 선진국 수준이고

K-팝, 한류는 지구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사적 번영의 그림자 아래

지구촌의 궁금증은 커지고 있다.

왜 그들은 아직도

작전권을 완전히 갖지 못하는가.

왜 평화협정은 오지 않는가.

왜 강대국의 전략 속에서

한반도는 늘 전쟁의 문턱에 서 있는가.

대한민국은 자주의 목소리를 잃은 채

왜 불편해 하지 않는가.

한미관계의 150 여년은

제국과 약소국 사이의 역사이며

동맹과 지배, 통제의 기억이고

희생과 번영이 뒤엉킨 거대한 서사다.

필요한 것은 진실을 확인하는 성찰이다.

감춰진 미국 정부 비밀문서를 읽고

침묵당한 목소리를 듣고

왜곡된 기억을 바로 세우는 일.

다시는 이 땅이

누구의 전략지도 속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 나라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민간인들

제주에서, 여순에서, 대전에서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미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는

"불순세력 제거"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숫자로 처리되었고, 통계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한다

기록되지 않아도, 기억은 살아 있다

어머니의 눈물, 아버지의 한숨

아이들의 울음, 노인의 절규

이 서사시는 그들을 위한 것이다

잊혀진 자들을 위한 추도가

침묵 속에 묻힌 진실을 위한

낮은 목소리의 증언이다

해방정국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했기에

그 날까지 우리는 써 내려갈 것이다

잊혀진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이제 한반도는 폐허 속 약소국을 탈피해

세계의 강물과 무역이 만나는 나라,

혁명을 창출한 촛불과 민주주의의 기억을 가진 나라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전초 기지가 아니라

지주 속에 스스로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강화의 바다에서 시작된 포성 이후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눈물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서 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역사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조망 너머의 바람이

전쟁의 냄새 대신

평화의 풀 향기를 실어오는 날,

제주 바다와 여순, 광주의 혼령들

분단 비극 속에 산화한 단군 후손 전사들도

희생된 수많은 아이들과 부녀자들도

비로소 조용히 말할 것이다.

“이제는,

정말 끝났노라고.”

고승우
북마크
451 2026.06.03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10- 세계 최장 '정전'의 잔혹한 비망록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총성이 멎은 지 칠십 여 년,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의 사슬에 묶여있다.

정전(停戰)은 했으나, 평화(平和)는 오지 않았고,

서명된 종이는 철벽이 되어 남과 북을 갈라 놓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제 159차 휴전 회담장

펜 촉 끝에서 멈춘 것은

전쟁이 아니라 단지 방아쇠였다

중국이 발을 빼고

W.K. 해리슨과 남일이

세 통의 협정서에 서명을 한 순간,

3년 1개월 2일 동안 흐르던 피는 간신히 멈추었다.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지고 앞뒤로 2km 간격으로

군사 분계선이 그어졌다.

철조망이 세워져 한반도의 허리를 끊었다.

그날 이후 한반도는 평화가 아닌

정지된 폭발 속에 살아야 했다

그것은 완전한 종전이 아닌 전쟁의 잠정 중단,

전투의 총성만을 유예한

위태로운 불완전한 평화였다.

군사정전위원회가 꾸려지고 중립국감시위원단이

더 이상의 군비 증강과

무력 행동을 감시하려 했으나,

휴전의 서약은 태생부터 깨지기 쉬운 유리 그릇 이었다.

협정서 제 60항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3개월 이내에 정치적 회담을 열어 평화협정을 맺으라고.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첫 회의가 열린 뒤

이듬해 봄까지 협상이 진행되었으나

대륙과 해양의 동상이몽 속에

합의가 없었다.

결국 정전협정은 70 여 년 동안

차가운 화약고 위에 방치된 채

세계 최장의 기록을 매일 갈아 치우고 있다.

왜인가.

미국이 원치 않았다.

미은 자국의 국익이 손상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주한미군이 있어야 할 명분이 약해지고

주한미군이 없어지면

중국의 목을 겨누는 칼이 사라진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 한반도는

분단 상태가 지속돼야 했다.

정전협정이 유지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전쟁이 나는 것도 미국은 원치 않는다.

그것은 한반도가 다시 국제전이 되어

6.25 전쟁처럼 승패가 가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까지 가지 않는 긴장상태의 지속을 위해

미국은 지난 세월 동안 남북을 관리했다.

남한에 대해서는 1954년 20세기 최악의 불평등 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발효시켰다.

이 조약은 미국도 원했고 이승만이 원한 한미합작품이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 체결의 대가로

미국이 침략을 받으면 즉각 개입한다는

조항을 요구했다..

그러나 관철하지 못했다.

대신 얻은 것은.

주한미군의 남한 배치를 '권리'로 인정.

미군기지와 시설 무상으로 제공.

그리고 미국이 원하는 무기는

언제든 반입할 수 있는 권리

이것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이었다.

미국 쪽으로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미국이 국익을 위해 원하던 최상의 조약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남한 보호를 빙자한

미국 군대 배치의 권리장전이었다.

미국 군대는 치외법권적 특권 속에

영구 주둔이 가능해졌다.

주한미군사령관은 세 개의 사령부의 모자를 쓰고 군림했다.

유엔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이라는 기괴한 겸직 체제.

일제 조선주둔군 총사령관이 물러난 뒤

새로운 형태의 점령군 대장이었다.

한국에서 발생할 모든 군사적 돌발 사태의 통제권은

워싱턴 정부의 명령을 받는

미군 사령부에게 있었다.

미국이 원하면 이 땅의 어디든 군사기지로 내어주어야 했고,

부지와 시설, 천문학적인 주둔 비용까지 퍼주는

불평등한 예속의 이정표가 동맹의 이름으로 포장되었다.

한국의 지역개발에서 미군기지의 권익이 최우선이었다.

이승만은 한국군의 작전권도 미국에 넘기면서

군사적 자주권을 송두리 채 미국에 바쳤다.

군사적 식민지를 자청한 것이다.

한국군이 주한미군을 상전으로 모시는

예속적 현상 속에서

정치군인들이 날뛰고

5.16쿠데타, 광주학살 속에 정권 찬탈이 자행되었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을 방위조약으로 묶고

일본의 일곱 개 항구에 가동 중인 유엔사 후방기지를 엮어

동북아 3각 군사동맹 체제를 만들어

동북아 전략 구도를 완성했다.

이 거대한 삼각의 군사 구조 속에서

한국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자주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미국의 군사 허브를 떠받치는 주춧돌 하나로 전락했다.

유엔사 후방기지는 제2의 한국전쟁이 터지면

다국적군을 실어 나를 중간기지 시스템으로 예비 되어 있다.

그곳은 지공해상에서 북한 선박을 감시하는

외국 군함들의 기착지다.

지구촌 시각에서 보면

한국은 미국의 군사적 식민지에 불과했다.

한국 정부는 한미군사관계에 대해

국민에게 거짓말을 일삼았다.

“한미는 피로 맺어진 동맹이다.”

독재정부는 한미동맹의 문제점을 지적하면

국보법을 적용해 이적행위, 반국가행위로 처벌했다.

수십 년 동안 그랬다.

그 결과 한미동맹은 불가침의 영역이 되었고

한국 사회의 미맹은 치유불가능의 상태로 심각하다.

미국이 주한미군을 앞세워

한국의 군사적 주권을 장악한 채

미국익을 챙기는 것을 한국 국민 거의 모두가 모른다.

주한미군은 대북 방어용일 뿐 이라고 70 여 년간 합창한

한미 두 정부의 대 국민 심리전이

지대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주한미군은 미국이 중국, 소련과 러시아 핵보유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북아에 박아 놓은 최전선 부대라는 점을

한미 두 정부는 철저히 숨기고 있다.

한미동맹이 국보법과 함께 한국의 민주주의 공간을

심각하게 좁히고 있는 것도 방치되고 있다.

한국의 진정한 민주주의, 평화통일을 막고 있는

두 개의 쇠말뚝이 한미동맹, 국보법이라는 사실을

일부만이 말할 뿐이다.

미국은 동북아에서 중국과 러시아가 주적이고

이들의 핵무기로 부터 본토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을 주한미군 등을 통해

2차 대전이후 계속 수행하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미 대통령 등 미 정부의 책무다.

그들은 법치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동북아 방어 전략을 실천하고 있다.

남한 보호, 북한 방어는 미국 법에 의해

신경 써야 할 책무가 없다.

미국의 외교국방 정책 제 1순위는 미 국익이고

평화와 정의 등 고상한 가치는 그 이후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 동북아 전략을 수행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한반도 분단을 이용하고 있다.

분단이 지속되어야 주한미군이

계속 주둔할 수 있고

가까운 거리에서 중국,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게 된다.

미국은 분단 유지를 위해

남북한을 관리하고 있다.

전쟁이 나지 않을 정도의 긴장이 유지가 되는 것이

주한미군 주둔에 가장 유리한 조건이 된다.

우선 미국의 남한 관리부터 살펴보자.

미국의 남한 관리는 1945년 미군정 때부터 시작됐다.

미국이 남한을 미국의 51번째 주 정도의

친미 공동체로 만들려 시도한 것이다.

미국은 이승만과 친일세력을

친미권력집단으로 만들어

한미동맹을 철저히 이행토록 하고

국보법 등으로 미국 비판 등을

봉쇄하게 만드는 것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한반도 분단체제에는

일본의 전쟁 범죄를 심판, 청산하는

샌프란시스코의 조약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한국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의 조약은 평화의 선언이 아니라

일본을 미국의 동북아 기지로 만들기 위한

미일 야합 이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질서 속에서

일본에 의해 가장 오랫동안 식민지 침탈을 당한

한반도는 조약 심의 과정에서부터 배제되고

조약 서명국에서도 제외됐다.

미국은 일제의 한반도 지배가

배상액의 수배가 되는 경제적 혜택을 남겼다는 식의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일본을 도왔고

오늘날 뉴 라이트들의 식민지기여론의 주문이 되었다.

그 뿐 아니었다.

독도는 분쟁의 씨앗이 되었고,

일본의 경제 기적을 위한 디딤돌은,

조선인들의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강제 노역과 성노예 위에 놓였다.

이승만은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북진통일’에 꽂혀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의 거대한 밀실 속에서 미일이 속닥일 때

일제 최대의 피해자인 남과 북의 자리는 없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썩은 유령이 다시 살아나

성노예의 눈물도, 강제징용의 사슬도 배상 없이 지워졌고,

홀로 남은 독도는 한일의 분쟁지로 버려져 미래의 전쟁을 잉태했다.

이승만은 정전협정 타결 저지에 사력을 다하면서 .

샌프란시스코의 평화협정은 외면했다

그가 일반상식을 가지고 미일 야합의 현장인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 여론전을 폈다면

오늘날 반도의 운명은 다른 궤적을 그렸을 것이다.

수구의 무리들은 그를 '국부'라 칭송하며 가짜뉴스를 만들지만,

그가 남긴 것은 일제의 전방위적 수탈에 대한

배상권을 통째로 날려버린

외교적 대참사이자, 지울 수 없는 역사적 과오일 뿐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약이 체결될 때,

가장 큰 피해자인 이 땅의 민족은 초대받지 못했다.

프란시스코, 1951년 9월 태평양의 서쪽 끝에서

한국전쟁이 한창 불꽃을 튀길 때

52개국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였다.

패전국 일본을 용서하는 자리였다.

아니, 그저 용서가 아니라 거래였다.

미국이 설계한 거래는

일본이 다시 강해져 소련을 막는 방패가 되는 것으로

그 거래의 내용은 이러했다.

“천황제를 유지한다.

전범처벌을 최소화한다.

배상 책임을 가볍게 한다.

피해국과 일본이 일대일로 협상하게 한다.”

베르사이유 조약처럼

패전국을 응징하는 방식은 없다.

일본이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한다.

그러나 한국은 조약 서명식 참석 52개국 중에 없었다.

협의 과정에서도 없었고 서명국 명단에도 없었다.

36년간 식민지였던 나라.

일제에 의해 가장 많이 수탈당한 나라.

위안부가 있었던 나라.

강제징용이 있었던 나라.

그 나라가 없었다.

미국이 배제했고

일본도 배제에 동의했다.

이승만은 침묵했다.

북진통일에 쏟았던 그 열정의

몇 십분의 일도 여기에 쏟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늘까지 이어진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유.

강제징용 배상이 거부되는 이유.

독도 분쟁이 계속되는 이유.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씨앗이었다.

미국이 심은 씨앗.

이승만이 물을 주지 않은 씨앗.

그 씨앗이 자라 오늘의 가시덤불이 됐다.

미국은 전쟁을 방지해서

한반도 분단을 유지하는 방법도 써먹었다.

거기에는 남북 교류협력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은 남북이 교류협력을 시도하자

분단 유지가 지속되는 것을 전제로 관리했다.

미국은 남북정상회담을 할 때마다 한미동맹을 앞세워

남한의 군비증강과 대북 공격태세 강화조치를 취했다.

미국 무기를 엄청 사도록 만들었다.

강력한 안보에서 평화가 보장된다면서

그렇게 했다.

남북 불가침선언, 6.15선언, 10.4선언 등이 이어지고

북한이 휴전선 부근인 개성, 금강산 두 지역을

남한 주민들에게 개방했다.

남한의 한 정치인이 휴전선 155마일을

개성공단처럼 만들어 남북 경제공동체로 가자는

공약을 내놓았다.

그 정치인은 DMZ관할권이

유엔사에게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딴 소리를 했을까?

아니면 미국 정부가 상전인 유엔사가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 해서 그렇게 했을까?

유엔사는 정전이후 평화 확대를 위한

조치가 아닌 분단 유지만을 위한 행동을 했을 뿐이다.

유엔사는 인도적 물품의

DMZ통과도 불허하기도 했다.

결국 이명박, 박근혜 당시 금강산, 개성의 문이 닫혔다.

2018년 다시 기회가 오는 듯 했다.

문재인이 방북해 평양시민에게 육성으로 연설하고

남북 정상회담 3회, 백두산 남북정상 동반 등정도 했다.

남북국가연합이 가능할 정도의 합의가 이뤄졌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뒤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미국은 문재인이 남북합의를

거의 이행치 못하게 만들었다.

트럼프가 북미정상회담을 통해 폼을 잡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김정은이 2국가론을 선포하며 남측과 각을 세웠다.

북한은 핵을 탑재한 ICBM을 만들었다고 선언하고

한반도 비핵화는 없다고 못을 박았다.

미국이 분단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취한

북한 관리는 어떻게 행해졌을까?

미국이 맨 먼저

한 짓은 정전협정 유지였다.

정전협정에서 평화협정으로 가는 길은

협정문에 적혀 있었으나

그 문장을 70 여 년 동안 미완으로 머물게 만든 것이다

정전협정을 먼저 저버린 쪽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1956년 새로운 무기의 반입을 금지한

정전협정 제13항에 칼을 꽂았다.

북한이 먼저 13항을 위반했다는 핑계를 댔으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1957년 판문점에서 미국이 선언했다.

"더 이상 13항에 얽매이지 않겠다."

1958년 새해의 한파 속에서

미국의 단거리 핵미사일과 280mm 핵 발사 대포가

이 땅에 배치되었다.

이듬해에는 중국과 소련의 심장을 겨눈

크루즈 핵미사일까지

주한미군은 최고 1천기의 전술 핵무기가

대북용이라고 했다.

북한은 핵이 없는 나라인데 그렇게 했다.

그러나 진실은 따로 있었다.

주한미군 핵무기는 당시

핵무기를 보유한 중국과 소련을 겨냥한 것이었다.

주한미군은 당시 미 본토를 수호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 SIOP를 몰래 수행하고 있었다.

베이징과 블라디보스톡은 700~800km 거리였다.

수원과 군산 미공군기지에서 폭격기가

24시간 대기하며 폭격태세를 유지했다.

미국은 그러나 공개적으로 주한미군 핵무기는

북한 남침 대비용이라고만 말했다.

한국은 침묵으로 그에 동의했다.

미국은 자국 법으로 주한미군에 대한 모든 것을

비밀로 분류하고 SOFA 3, 26조를 만들어

한국 정부도 따르게 만들었다.

한미 두 정부의 ‘심리전’ 속에 한국 국민은

까맣게 몰랐다.

주한미군 핵무기에 의해 강대국간 핵전쟁이

한반도에서도 벌어질 가능성을.

민족 전멸의 위기가 현실이었지만 한국 국회도

침묵했다. 언론, 학계 등도 마찬가지였다.

남한의 잘 나가는 정치인과 부자들은 미국 국적을

자신은 물론 자식도 취득했다.

한반도가 불바다가 되면 자기 가족은

미국으로 도망가 잘 살겠다고 그랬을까?

한국이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발전을 하자

한국 정치, 언론 등은 다 미국 덕택이라 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했다.

미국의 민낯은 그게 아닌데 왜 저러지?

바보인가, 정신병자인가?

삼척동자에게 물어보라.

누가 정전협정을 지속시켜 분단의 벽을 높게 만들고

핵전쟁의 위기가 24시간, 365일 일상이 되게 했는가.

북한을 손가락질하며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지근거리에서

목에 겨눈 비수처럼 위협해 국익을 챙긴 게 누구인가.

그런데도 정전협정 70 여년이 지난 후

해외 참전용사를

한국 언론과 정부가 찾아다니며 절을 한다.

‘감사합니다.’

참전용사들은 자기 국가의 명령에 의해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싸웠으니 그들은 자기 국가에 충성한 것이다.

한국이 찾아가서 허리를 굽히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과공은 비례’라는 말이 떠오른다.

지구촌의 눈에 한국 주류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경제와 군사력 세계 상위권, K-문화선진국의

청소년이

미국의 정체, 한미관계의 진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광화문에 참전용사를 칭송하는

받들어 총 시설물이 거대하게 들어서고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을 강화해

대만에서 일이 생기면 참전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중 전쟁이 나면 한국도 전쟁에 휩쓸리게 된다는 것을

공개리에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정치, 언론, 학계 등 주류는 그저

한미동맹 강화만을 합창하고 있다.

21세기의 한반도의 위험지수가 높아지게 만든

한미상호방위조약과 SOFA의

독소조항을 미국은 꼴리는 대로 휘두르며

이 좁은 반도를 냉전기 동안 동북아에서

가장 위험한 핵 화약고로 만들었다.

정전협정은 껍데기만 남았다.

훗날 남쪽을 놀라게 한 전방의 땅굴들은

미국의 핵 공격 대비용이라 했다.

1963년 북한이 소련과 중국에 요청했다.

“핵무기 개발을 도와달라.”

두 나라가 거절했다.

그때부터 북한이 혼자 핵을 만들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1975년 유엔 총회는 유엔사를 해체하고

평화협정을 맺으라 결의했으나,

미국은 한미연합사라는 또 다른 꼼수의

겉옷을 만들어 주한미군 주둔을 지속하려했다.

미국은 핵 위협의 수위를 높이면서

매년 팀 스피리트 훈련으로

반도의 하늘과 바다를 핵전쟁 연습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미국의 선제공격의 가능성 앞에

북한은 계속 핵무기 개발을 시도했다.

핵이 없던 카다피, 후세인이 미국 침략으로

살해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북한은 혼자 미 본토까지 닿는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만들었다고 했다.

브루스 커밍스가 말했다.

북한의 핵 개발은

한국전쟁의 공습 경험과

전후 미국의 핵 위협에서 시작됐다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세계가 긴장하고

중국이 중재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이 시작된 뒤

2005년 9월 19일 합의가 이루어지고

9·19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북한이 핵을 파기하고 NPT와 IAEA로 복귀한다.

한반도 평화협정을 추진한다.

북미 간 신뢰를 구축한다.”

세계가 박수갈채를 보냈고 한반도 평화가 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2005년 10월 단 한 달 만에

그 푸른 꿈은 산산조각 났다.

미국이 터뜨린 방코델타아시아(BDA) 위폐 사건.

미국이 발표했다.

“북한이 달러 위폐를 만들고 있다.”

달러 위폐는 전쟁 선포와 같은 중대 범죄라고 했다.

소리는 컸으나 미국은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6자회담이 중단되면서

비핵화 합의가 백지화되고 평화의 문이 닫혔다.

증거 없는 주장이 평화를 막았다.

미국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는 비판을 자초했다.

북한 비핵화 검증에 대해서도 미국은 손사래를 쳤다.

“북한이 핵을 숨기면 찾아내기 어렵다.”

현대 과학의 눈은 우주에서 모래알도 식별하고,

미국과 러시아는 위성과 현지 사찰 등을 통해

전략핵 감축을 검토하는데,

왜 북한의 비핵화 검증 앞에서는

'믿을 수 없다'는 칼날만 들이대는가.

불신을 발명하고 현상을 유지하려는 자,

그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분단 유지를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땅의 평화를 가로막는 것은

외세의 사슬만이 아니다.

세계가 규탄하는 국가보안법이 존재한다.

북한은 우리와 함께 유엔에 동시 가입한

엄연한 주권국가이건만,

국내법의 현미경으로 보면

상상하거나 접촉조차 죄가 되는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 악법은 수십 년 동안

평화통일을 외치는 양심들을 처벌하고

입을 막는 재갈이 되었다.

수구보수 정권은 정국이 흔들릴 때마다

간첩단을 조작했고,

공안정국의 핏빛 광풍을 일으켜

민중의 염원을 탄압했다.

평화를 말하면 친북이 되고,

자주, 주권을 말하면 반미로 몰던 야만의 시대,

그 최전선에 섰던 정보기관들은

민주화의 새벽이 온 뒤에도

자신들이 지은 죄를 반성하거나

청산하지 않은 채 유령처럼 살아 숨 쉰다.

탄압은 집단 기만을 노리는

가짜뉴스 유포가 병행했다.

사드가 들어올 때도, 패트리어트가

전방에 깔릴 때도

정치권과 언론은 우리가 반대할

권한이라도 있는 양 허상을 유포했다.

실상은 조약에 묶여 미국이 결정하면

군소리 없이 수용하고

우리는 그저 기지와 비용만 지불하는

군사 주권의 진공 상태.

그 서글픈 진실을 가린 채

오늘도 반공의 확성기는

청소년들의 눈을 가린다.

주한미군은 지난 70 여년 동안

북한을 막는 방패가 아니었다.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상대로

정찰, 감시, 선제타격하는 세계전략의

최 전방기지 역할을 해해왔다.

미국은 이를 비밀로 하고 한국 정부도

그에 따랐다.

강대국간의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주한미군 기지가 있는 한국은 전화를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전쟁의 논리다.

그런데 한국 국민은 그 사실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아니다. 일부 지배층은 알고 있었다.

혼자만의 비밀로 하고

일가족의 미국 국적을 챙겼다.

이중국적으로 여차 하면 미국 정부의

자국민 철수 대열에 합류하려 한 자구책이었다.

추악한 이기주의 속에 나라는 병들어 가면서

자살율과 출산율이 세계를 놀라게 할 수준이 되어버렸다.

헬 조선이라 불리면서.

외국군의 비밀 군사작전은

한국의 법치 대상이 아니다.

한국 행정부, 국회의 민주적 통제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의 민주주의 공간을 축소, 박탈한 것이다.

한국 정부가 제 국민들에 대한

헌법적 보호 조치를 외면한 결과다.

정부의 제일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

한국 정부는 이런 책무를 외면하는 직무유기를

70여 년 동안 저지르고 있다.

한미동맹만 중시했지 제 국민의 안위는

나 몰라라 하고 있다.

미·중 패권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주한미군은 중국의 목덜미를 겨누는

가장 예리한 비수이다.

우리가 원치 않아도 미국의 대중 전략에

주한미군이 동원될 때,

대륙의 군사적 타격은

고스란히 이 땅으로 쏟아진다.

주한미군 기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전화를 피할 수 없다.

미국이 한국에서 중국, 러시아를 향한

군사행동을 하는 것은

국제법위반이다.

이재명 정부도 주권정부라 하면서

주한미군의 ‘비밀’에는 입을 다물고 있다.

전작권이 외국군 손에 있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군대를 부릴 수 없는 국가는

정상적인 국가가 아니다.

노무현 정부 때 전작권의

한국 환수에 한미가 합의했다.

2012년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를 거치면서

그 시기가 미뤄졌다.

2015년.

2020년.

그것도 조건부였다.

동북아 안보환경까지 따지는 조건은 밑 빠진 독.

시간이 가도 채워지지 않았고

채워지면 새 조건이 나온다.

미국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전작권을 넘긴 뒤에도

미국 대통령의 통수권 속에서

주한미군, 유엔사 지휘권을 행사하게 된다.

전작권 전환이후 한국 땅에서

두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독자적으로 발동되는 체제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이런 경우는 없다.

미국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안위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진다는 식의 논리를 들고 나올 법하다.

한국도 동일한 논리로

맞장을 떠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

수십 년 동안 미국에 끌려 다녔고

오늘날에도 변함없는 모습만이 보이기 때뿐이다.

제대로 말하는 한국 정치인, 아니 놈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 외세에 끌려 다닐 것인가.

미국 대통령들이 외쳐온 대북 선제타격의 호언장담은

한반도 전면전쟁 발생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었다.

전면전이면 한민족 전멸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한국 정부는 그런데도 침묵한다.

전쟁이 나면 정치인도 죽는 것인데

왜 저런 기이한 짓을 하는 것인가?

그런 와중에 평택에 세계 최대 해외 미군기지가 생겼다.

한국이 땅을 마련해 시설 지어주고

미국이 쓴다.

주한미군은 평택과 오산에 우주전쟁 기지도 만들겠단다.

한국 정부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국민은 속이 터지는데도 침묵, 침묵, 침묵.

미국이 자국 이익을 챙기는 것에

한국 정부가 침묵하는 것을

전 세계가 손가락질하며 비아냥거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70년 동안 얼어붙은 세계 최장의 정전협정은

미국이 저지르는 위선의 증서다.

이 껍데기를 찢고 실효적인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한반도의 화약고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외세의 예속을 끊어내고, 군사적 자주의 발판을 다져

유엔 회원국에 걸맞은 온전한

주권국가로 우뚝 서야 할 시간이다.

세계 선진국 수준의 경제, 군사력과 세계가 찬탄하는

k-팝 문화의 주인공다운 자존감을 회복해야 한다.

이 땅의 주인들이

자주의 깃발을 높이 들때,

겨울은 가고 진정한 평화의 봄이 찾아오리라.

모두가 떨쳐 일어나야 세상이 좋아진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군사주권 회복하고

국가보안법 폐기해야 한다.

남북이 만나 평화통일을 실천할 수 있게 해야한다.

그것이 70년 정전의 덫을 벗어나는 길이다.

덫은 스스로 끊어야 한다.

다른 누가 끊어주지 않는다.

미국이 끊어주지 않는다.

중국이 끊어주지 않는다.

당사자 스스로 끊어야 한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189 2026.07.08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2 -제국주의 침략과 일제 강점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866년 미국의 철갑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대동강으로 침범해 외쳤다.

“문을 열라”

식민지 진출과 군사적 위협이었다.

평양 사람들이 맞서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배는 불탔고, 미국 선원들은 전멸했다.

미국과 한반도의 첫 만남은

저항의 화염 속에서 기록되었다.

단순한 충돌이 아닌 열강 침략의 시작이었다.

5년 뒤인 1871년, 기함 콜로라도가

군함 다섯 척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포성이 하늘을 찢고

초지진의 돌담에 선혈이 낭자했다.

신미양요다.

미국은 통상을 아니, 정확히는 이익을 원했다.

조선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자신들의 몫을 챙기길 원했다.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조선과 미국이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악수는 조선의 빗장을 여는 열쇠였다.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를 요구했다.

그것은 시작의 시작일 뿐

형태 바꿔 150년 이어졌다.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계기

발생한 청일전쟁 후

1895년 10월 경복궁 옥호루 새벽,

일본 자객들이 난입해

명성황후 황후 칼로 찌르고 시신 불태웠다.

명성황후의 피가

경복궁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불길 속에서 타오른 것은

한 여인의 육신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이었다.

피비린내 진동한 궁궐에

공포 가득 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공관들이 분노해

"고종을 보호하고 조선을 유지하자"

손을 내밀었으나,

미 국무부는 단호히 거절하고

서울 공사에 전문을 보냈다.

"개입하지 말라, 오직 중립의 장막 뒤에 숨어라."

대한제국의 국운이 짓이겨지는 동안

미국은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침묵을 지켰다.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조선의 군주,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자주를 구걸하며

워싱턴으로 편지를 보냈다.

“서구 열강이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도록

미국이 앞장서 달라.”

1899년 매킨리 대통령은 그 편지를 읽고

서울의 공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거부하라.”

1900년 동경에서 조선 공사가

미국 버크 공사를 붙잡고

"서구 열강이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케 앞장서 달라"

눈물로 호소할 때

돌아온 것은 냉담한 침묵.

미국은 관심이 없었다.

조선의 황제가

일본에 무릎 꿇는 것이

미국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 제26대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1901년 일본의 조선 강점을 방조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

루스벨트는 미국의 대기업들을 통해

일본에게 전쟁

자금(7억 엔. 현재 가치로 14조 원)을 빌려줬다.

.일본이 그 돈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어

러시아에게 승리한 뒤

조선 점령을 향한 입지를 확보했다.

분하다. 1905년 7월 두 국가의 밀거래!

가쓰라와 태프트가 맺은 비밀 협약

필리핀을 탐한 미국과

한반도를 삼키려는

일본의 추악한 거래 속에서

조선의 숨통은 산 채로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중재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승인했다.

이익을 나눈 자들의 악수 위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됐다.

조선은 물건처럼 거래됐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일주일 뒤, 미 국무부가

서울 공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영사관을 폐쇄하라.

조선에서 철수하라.

모든 업무는 도쿄에서 처리하라.”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불이 꺼졌다.

워싱턴의 조선 공사관 문도 닫혔다.

그해 12월 16일 조선은

미국의 지도에서 지워졌다.

루스벨트는 러일전쟁 종식을 위한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1910년 8월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경술국치의 치욕 속에

나라가 통째로 삼켜질 때

그해 9월,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총독부의 칼날 아래

언어가 잘리고

역사가 찢기고

농민의 논밭은 빼앗겼다.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모조리 빼앗긴 채

피눈물 흘리던 조선의 백성들,

무단통치에서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민초들의 심장은 계속 분노하고 있었다.

1919년 기미년 삼월

삼천리강산을 뒤흔든 대한독립만세!

무장전쟁을 외친 무오독립선언과

도쿄의 2·8 선언을 거쳐

온 겨레가 붉은 피로 써 내려간

비폭력 혁명이었다.

만세.

대한독립 만세.

골목마다 독립을 절규하는 함성이 터져 올랐다.

학생과 농부, 기생과 승려,

이름 없는 백성들이

맨손으로 제국의 총칼 앞에 섰다.

그들은 믿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한 민족에게도 태양처럼 비칠 것이라고.

그러나 미국의 훈령은 달랐다.

“조선인들이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믿지 않게 하라.”

“일본이 오해하지 않게 하라.”

그 문장은 총칼보다 더 차갑게

독립운동을 외친 민초들의 가슴을 후볐다.

윌슨이 전 세계에 외친

거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게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의 선언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고

강대국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출신 대통령이

1918년 가을, 억압받는 민족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민족자결주의를 세계 앞에 선언했다.

세상의 약자들이 그 말에 귀를 세웠다.

조선도 귀를 세웠다.

만주 지린에서 독립선언 함성이 터져나왔다.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거리에 섰다.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다.

대한독립만세.

윌슨은 그 소리를 들었는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는가.

아니면 정말 들리지 않았는가.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미 국무부가 도쿄의 미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다.

"서울의 미 영사에게 전달하라.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리라는 믿음을

갖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라.

일본 정부가 미국이 조선 독립에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원칙적으로는

‘모든 민족’에게 적용된다는 것이었으나,

1차 대전 패전국(독일, 오스만제국) 식민지와 영토에 적용되고

승전국(영국·프랑스·일본·벨기에 등) 식민지는 배제되었다.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강대국 이기주의 앞에서 정의는 없었다.

윌슨은 위선적인 평화주의자의 연기만을 했을 뿐이다.

조선에서 만세 소리는 총성에 묻혔다.

유관순이 잡혀갔다.

7천 명이 넘게 죽었다.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

수만 명이 투옥됐다.

미국은 침묵했다.

민족자결을 외친 미국 대통령은

조선의 절규를 외면했다.

윌슨은 만세 운동으로 죽어가는

조선의 영혼들을 향해

단 한 마디의 지지나 동정의 언어도

던지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의 화려한 홀에서

약소민족의 절규는 문밖에 멈췄다.

민족자결주의는 강자의 해괴한 논리였고

조선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 1920년과 30년대의

긴 밤 동안

미국은 일제의 포악한 식민 지배를 철저히 외면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세계의 정의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미국, 영국 등은 철저히

악취 나는 이익만을 계산했다.

조선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쓰러지는데

열강의 회의장은 침묵했다.

피 묻은 만세 소리는

지구촌 양심의 창문 앞에서 절망 속에 통곡해야 했다.

세월은 흘러 다시 전쟁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포성이

진주만을 피로 물들인 후

미국은 일본과 싸우기 시작했다.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함대가 불탔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청원서가 워싱턴을 헤매고 다녔다.

조선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

합법적 정부로 승인해 달라.

미국 정부는 외면했다.

접견조차 쉽지 않았다.

자유중국이 조선 임시정부 승인을 제안했으나

미국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며

그 법통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1943년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만났다.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선언이 나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적절한 조치를 통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

오만한 합의 외에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선언 속에도 조선의 운명은 모호했다.

독립시킨다는 적절한 시기가

누구의 시간인지 조선인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연합국의 우두머리들이

또 다른 지배를 준비하고

자국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싸움의 조건들이었다.

한반도라는 먹잇감을 응시하며

기회를 노리는 탐욕의 결과물이었다.

1945년 8월 초

원자폭탄 두 발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도 희생됐다.

일제가 무릎 꿇자

강대국들은 동북아 지도를 놓고

전후 이익을 계산했다.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일본 쪽을 바라보았고

미국은 태평양의 패권을 계산했다.

한반도는 전략 요충지였다.

태평양으로 나아갈,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할 출발점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한반도와 일본 전체를

소련에게 내줄 수는 없었다.

미국의 원자탄 위력에 소련이 주춤했다.

미국의 의사대로 38선이 그어지고

한반도가 두 동강 났다.

미 국무부 문건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참작하면서

조선을 일본과 함께 전리품으로 분류했다.

조선인은 그 문건에 없었다.

조선인의 의견을 묻겠는

절차도 생략되어 있었다.

한반도가 해방되었다면서

38선 남쪽에는 미군이,

그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두 개의 점령군, 두 개 진영의 이익이 우선하면서

한 개의 민족이 두 동강이 났다.

그 선은 동서 진영의 대치 선으로 만들어져

수천만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항복과

조선 해방의 날이 왔다.

미군은 남쪽으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북쪽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침내 새로운 나라가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

독립투쟁에서 내려온 이들,

들판에서 태극기를 숨겨왔던 이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외쳤다.

“이제 우리 힘으로 나라를 세우자.”

하지만 해방의 새벽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의 하나로 분류해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정책과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보면

가스라-테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역사적 사실의 연장선에서 머물러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문건에서 확인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고

그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당했다.

그 후 1910년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 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조선으로 불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총독의 지배를 받도록 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조선 민중의 독립 투쟁의 역사를 외면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아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거리마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인민위원회도

민중의 의지도 역사의 갈망도 인정하지 않았다.

드리는 말씀

연재될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395 2026.06.05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3- 태평양 종전과 미군정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는

도시를 그림자만 남긴 채 태워버렸다.

아이들의 울음은 증발했고

강물에는 불탄 인간의 형상이 떠내려갔다.

그곳에는 일본인만 있지 않았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전쟁에 동원되었고

핵의 불길 속에 버려졌다.

소형차 크기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2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중 5만 명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착취당하던 조선인이었다.

일제 군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날의 태양보다 뜨거운 빛 속에서 산화했다.

해방을 갈망하던 조선인들은

제국의 희생자가 되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 이틀 뒤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 외무상이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를 불러다 말했다.

"내일부터 양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이틀 후, 소련군은 만주 국경을 넘었다.

일본 관동군 100만이 무장해제를 당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탄 '팻 맨'이 두 번째로 떨어졌다.

미국은 소련의 선전포고 다음 날,

소련에 대한 사전 통보 없이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더 이상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압박용 메시지였다."

미국은 스탈린을 굴복시킨,

막강한 소련을 두려워했다.

소련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동북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다.

미국은 일본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해

소련을 압박하려 했다는

추정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의 핵 공격을 받은

두 도시의 피해는 엄청났다.

현장 사망 23 만 명, 부상 및 후유증 피해 51 만 명.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조선인 5만 명은 즉사하고

5만 명이 살아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생존 조선인 가운데는 원폭 투하 후에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귀국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미국은 일본 원폭 투하 후 피폭자에 대한

보도와 정보 유출을 매우 강력하게 통제했다.

1945년 9월, 연합국 최고사령관(GHQ/SCAP)은

일본 전역에 엄격한 언론 규제를 시행했다.

원폭 관련해서 특히 심했다.

원폭은 일시에 한 도시를 파괴하고

인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생존한 피폭자들의 고통이 심했다.

갖가지 형태로 부상을 당했지만

치료받을 수 없었고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어

고통 속에 죽어갔다.

병원과 같은 구호시설과 식수와 식량 수급 시스템이,

교통과 통신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이

완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폭 피해를 압축한 문장이 생겨났다.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했다.”

미국은 피폭 현장 취재부터 철저히 봉쇄하고

피폭 영상 자료는 압류하고 기밀로 분류했다

미군이 촬영한 뉴스릴이나

일본 영상팀이 촬영한 필름은 모두 압수했다.

필름 일부는 약 40년이 지나서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피폭의 생물학적 피해는

일본 국민에게조차 철저히 차단되었다.

일본 과학자들의 의학 연구 결과물까지도

발표가 금지되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도 검열 대상이었다.

검열 통제는 점령이 종료된 1952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원폭 투하의 참혹함을 감추고

전쟁을 끝낸 인류애적 무기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미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집중 보도토록 하면서

미국의 반인륜적인 원폭의

참혹한 파괴력을 철저히 감추었다.

미국식 합리주의였다.

1945년 8월 10일 일본 정부가

항복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 25사단은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 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소련 해군은 북동부 한반도 해안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8월 15일 미군 지휘부는 종전 후의

동북아 전략을 매듭짓고

소련에 공식 통고했다.

"한반도의 미소 점령군 경계선은

북위 38도선으로 한다."

스탈린은 수락했다.

원자탄의 위력 앞에서,

그는 한반도 남쪽을 포기하기로 선택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통보했다.

항복을 선택하고 저항을 접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함성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천황의 떨리는 육성이 라디오를 타고 흐르며

삼천만 동포가 거리로 뛰어나와

눈물겨운 "만세"를 외쳤다!

한반도 전역이 환호했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해방이다!”

태극기를 꺼내 들었고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환희 뒤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이미 각자의 진주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북에서 내려왔고 미군은

남으로 들어올 준비를 했다.

해방의 주인공은 승전한 제국들이었다.

그것은 잔혹한 분단의 출발점이었다.

삼천리강산은 이미 차가운 냉전의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는 미국이 종전 이전부터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미국은 종전 수년전부터

동북아를 주목하며 머리를 굴렸다.

“일본이 무너지면, 미국은

동북아 어디를 차지할 것인가”

그 질문 속에 한반도가 끼워 넣어졌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익숙한 땅이었다.

그것은 미 국익을 위해 점령해야 할 대상 이었다.

1945년 6월 전쟁이 끝을 향해 가자

미국의 극비 문서 속에

일본, 만주, 대만, 그리고

한반도가 점령대상으로 포함됐다

서울도, 개성도, 군산도 ‘점령 대상’이었다

1945년 8월 중순 미국의 일본 원폭 투하 후

소련군은 만주를 점령하고

한반도 북부로 빠르게 진격했다.

소련은 만주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 1백 여 만 명을 무장해제 시키켰다.

한반도와 일본 본토까지 진격할 기세였고

8월 21일 원산에 상륙해 평양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38도선을 넘지 않았다.

미국의 핵 위협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주력부대는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일본 본토 점령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분할 점령을

소련이 너무나 쉽게 수락한 것은,

미국이 쥔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기가 꺾인 탓이었다.

소련은 평양에 사령부를 차리고

더는 남하하지 않았다.

38도선 이남에는

일본군이 점령군 행세를 하면서

미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의 모습은 세계 1,2 차 대전 때

연합군내에서도

점령지역 쟁탈전 등이

심각했던 것과 대비된다.

그만큼 미국 핵폭탄에

크게 주눅이 든 탓이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태평양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5년 9월 4일 하지 중장 부대의 선발대가

항공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다.

그들은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1945년 9월 8일 24군단이

인천항에 발을 들였다.

성조기가 게양되었고, 하지 중장은

포고문 제1호를 발표했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조선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해방을 기다린 35년.

그 끝에 맞이한 것은, 또 다른 점령이었다.

조선민중은 광복을 외쳤지만

강대국은 점령을 준비했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중앙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 중장과 T.C. 킨케이드 제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명 직후, 조선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갔다.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닌

다른 외세의 상징, 성조기였다!

미군정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도,

해방 직후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조선인민공화국도

그 어떤 정치조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 중장은 일제 총독부의 일본인

간부들을 고문으로 앉혔다.

그들은 미국인보다 한반도를

더 잘 알았다는 이유였다.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계속 근무했다.

일제치하에서 동포의 피를 빨던

친일 한국인 관리들을 원래의 권좌로 복귀시켰다.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친일 청산의 역사적 기회는

그렇게 점령군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파묻혀 버렸다.

서울의 미군정에는 한국어 통역군인이 전무해서

오키나와에서 붙잡힌 조선인 전쟁포로 6명을

통역사로 배속시켰다.

워싱턴 정부는 서울의 미군정과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달했다.

“일본과 남한에 동일한 군정원칙이 적용된다.

친미파를 양산하라.

미국익을 위해 철저히 복종할

자들을 군과 경찰로 등용하라.

남한에서 친일세력을 친미세력으로 만들어라.”

미국 정부는 동북아에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을 방패로 삼으려 했고

군정사령관도 본국 정부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할

야전군 사령관들을 기용했다.

정무적 감각이 있는 장군들은 배제한 채

동북아를 미국 진지로 만들려는

전략에 맹종할

군인들을 앉힌 것이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일부처럼 보였다.

미군정은 해방된 민족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패전국 식민지를 다루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우리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우리의 통치에 도전할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원하지 않는다."

1946~1947년, 38도선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남과 북의 균열은 더 깊어졌다.

북쪽은 소련의 지원 아래 김일성이

중심이 된 통일 전선을 구축했다.

남쪽은 미군정 아래에서 우익 세력이 결집했다.

한반도를 독립시키겠다던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약속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념대립의 대 혼돈 속에 한반도는

좌우의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탁통치 합의가 불발되고 1947년

미국은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그리고 유엔 감시 아래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치르자는 안을 통과시켰다.

소련은 반발했다.

"38도선 전체에서 동시에 선거를 치르자"고 맞섰다.

미국의 단독 총선거 강행에

이승만과 친일파가 적극 지지하면서

남과 북은 분단의 비극을 향해 치달았다.

서로 다른 이념 속에 불신이 쌓였다

하나는 자유를 말했고

하나는 해방을 말했지만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같은 언어로 욕하고 같은 땅에서 죽어갔다

미국은 한반도의 특수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국의 이익과 공산주의 저지라는

거대한 성벽만을 쌓아 올렸다.

조선인의 독립 열망은

미국의 국익을 앞세운 전략 앞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1948년, 제주도에서

제주 4.3항쟁이 일어났다.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외침이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군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아름다운 탐라의 섬, 한라산의 붉은 흙은

미군과 조선인 군경 토벌대의 칼날 아래 숨져간

3만여 무고한 주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비공식 기록은 그보다 훨씬 많다.

제주의 피는 단독정부의 초석 아래 흘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성조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그 태극기는

38도선 이남에서만 펄럭였다.

북쪽에서는 한 달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탄생했다.

서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조상을 모시며

같은 산천을 노래하던 민족은

두 개의 체제와 두 개의 군대와

두 개의 미래로 나뉘었다.

드리는 말씀

연재하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363 2026.06.09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4- 6.25와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나왔다.

“무조건 항복.”

태평양의 포성이 멎자마자,

승리의 북소리 뒤편에서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서냉전은

총과 탱크만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정보와 공작,

신문 기사와 침묵 속에서도

역사는 방향을 바꾸었다.

총성이 아니라 이념의 칼날로,

지구촌의 하늘을 갈라놓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팽창에 대한 공포로

동북아를 공산주의 저지선으로

삼기 위한 군사전략을 강행한다.

패배한 일본을 다시 일으켜

동북아의 성채로 만들고,

남한을 소련과 중국을 막는 전진기지로 삼겠다.

소련은 유럽에 다수의 위성국가를

만들며 세력을 확장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이 이루어졌다.

같은 날,

트루먼은 명령을 내렸다.

“미 해병 5만 명을 중국 북부로 보내라.

7함대를 황해로 진입시켜라.

장개석이 일본군 점령지역을 확보하도록 지원하라.”

트루먼은 표면적 이유로 일본인·한국인 60만 명의

송환과 자국민 보호를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장개석 군을 앞세워

모택동 공산 세력을 저지하려는 노림수였다.

중국에서 장개석과 모택동의 내전이 격화됐다.

트루먼은 일본과 한반도 점령통치를 지시하며 외쳤다.

“냉전이 시작됐다.

소련을 막아라.

사회주의가 번지지 않게 하라.”

맥아더는 동경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사령관이 되어

본국 정부의 지령에 따라

일본 점령 정치를 시작했다.

일본을 동북아 대소 기지로 만들기 위해.

선글라스와 파이프가 그의 상징이었다.

그는 트럼프의 지휘 속에서

황제처럼 굴었다.

영국도, 소련도, 중국도

자문만 할 수 있었다.

맥아더가 장악한 SCAP가 전범 재판을 열었다.

5,700명이 체포, 4,300명이 기소됐다.

984명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920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짜 책임자는 살아남았다.

히로히토.

맥아더는 진술서를 변조했다.

천왕이 전쟁범죄와 무관하다는 방향으로.

이는 훗날 문서로 밝혀졌다.

왜였는가.

“천왕을 기소하면 일본인들이 반발한다.

반발이 커지면 소령과 공산주의가 파고든다.

천왕 한 명의 죄를 덮는 것이

동북아 전략에 더 유리하다.”

그것이 미국이 만든 냉전의 계산법이었다.

서울의 하지도 남한을 대소 초소로 만들라는

본국 정부 지시를

맥아더를 통해 전달받았다.

미국의 대남한 정책은

조선인의 독립 열망을 철저히 깔아뭉개고

'소련 견제'라는 대일본 점령 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집행된다.

1945년 10월 중국에서 작전하던 미군은

모택동의 공산군과 수차례 무력 충돌한다.

미국은 장개석·모택동 간의

평화 조약을 중재하려다 실패했다.

미국은 맥아더를 앞잡이 삼아 일본에서

친미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천왕을 감싸고, 전범 재판 지휘하며,

일제에 복무하던 관리들을 미군정에 참여시킨다.

미국은 반인륜적인 범죄 집단 731부대의

생체실험 자료를

부대원 전원 면책해주는 대가로 손에 넣었다.

미국에 의해 인간 백정인

부대장 이시이 시로 등은

살인마에서 정보 제공자로 둔갑해

전후 유력인사의 삶을 누렸다.

인간 악마들과 거래한 미국의 민낯이었다.

미국은 국익을 위해 인간 괴물들을 사면하고

선혈이 낭자한 데이터를 챙겼다.

인류에 대한 범죄 기록이

미국의 군사 자산이 됐다.

나치 로켓 기술자를 풀어준 것처럼.

악마와의 거래는 냉전의 규범이었다.

731부대장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핵심 의료진은

'인체실험 데이터 및 생화학 무기 연구 자료'를

미국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면책 특권을 받았다.

미국은 이 귀중한(?) 데이터를

소련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 죄를 묻지 않았다.

731부대 생체실험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이 주도한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범죄 중 하나다.

생화학 무기 개발과

인간의 신체 한계를 측정하기 위해

최소 수천 명의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반인륜적 실험을 자행했다.

731부대원들은 실험 대상자들을

인간이 아닌 '마루타(통나무)'라는 암호명으로 불렀다.

피해자들은 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및

정계 인사, 중국인 항일군인 및 민간인,

러시아인, 몽골인 등이었다.

실험 대상이 된 이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임산부, 영유아, 소년 소녀도 예외 없이

실험 대상에 포함되었다

731부대 출신의 의사들과 과학자들은

전후 일본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학장, 유명 제약회사 임원,

국립보건원 간부 등 일본 의학계의

주류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인간을 통나무로 여기며 학살했던 이들이 전후

' 의학 박사'이자 '사회 지도층'으로 대접받았다.

731부대의 만행은 전쟁이 끝난 후

전 세계적인 지탄을 받았으며,

과학과 의학이 도덕성을 상실했을 때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민중은 해방을 외쳤지만

미군정은 질서를 먼저 말했다.

독립보다 반공,

자치보다 통제,

공작을 통한 대중조작

그것이 점령의 언어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 과정에서

협상 테이블 위에 한반도의 운명이 놓였다.

미국이 제안했다. 10년 신탁통치.

소련이 반박했다. 즉시 독립.

타협안이 나왔다. 5년 신탁통치.

진실은 그랬다.

그런데 같은 날 서울의 한 통신사가

긴급뉴스를 신문사에 전달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미국과 소련의 입장이 뒤바뀐 뉴스였다.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민중일보, 신조선보가 실었다.

진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진실처럼 인쇄됐다.

남한이 들끓었다.

“소련이 신탁통치를 주장한다니.

소련이 우리를 속국으로 만들려 한다니.”

소련의 타스통신이 반박했다.

"신탁통치는 미국이 주장한 것이었다.

국무부가 1942년부터 입안했다."

뉴욕타임즈 1945년 12월 28일자는

진실을 정확히 보도했다.

그러나 서울의 신문들은 계속 가짜뉴스를 실었다.

사람들은 몰랐다.

실제로 장기 신탁통치를 먼저 제안한 쪽이

미국이었다는 사실을.

미군정의 검열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남한 내 반소·반탁 감정이 극에 달해

좌우 대립 격화된다.

거리에서 반탁운동이 터졌다.

반소 감정이 폭발했다.

좌우 대립이 극으로 치달았다.

당시 남한 언론을 검열하던 미군정은

이 가짜뉴스를 왜 방치했는가.

맥아더 밑의 정보책임자 윌러비의 언론검열과

보도지침에 충실히 따랐던 남한 언론.

그 언론은 미 정보기관의 정치공작으로

남한의 반소 감정을 부풀리기 위해 동원됐다.

미국 주도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여론 조작 목적이었다.

거짓 보도는 남한의 하늘에 반소의 불길을 퍼뜨렸다.

좌와 우는 갈라졌고

형제는 서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겨울 이후

분단은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자라났다.

1946년 ~ 1947년 냉전의 심화와 미·소의 대립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의 열기도 뜨거워진다.

중국 대륙에서 내전의 불길이 타오르고

미·소 공동위원회는 공전한다.

미국은 한반도와 일본을 소련·중국 견제할

최전방 전진기지 만들 작업에 속도를 낸다.

1946년 소련군이 만주에서 철수하자

미국의 장개석 군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이 시행된다.

60개 사단 무장이 가능한 40억 달러 상당의

군수물자를 제공받은 장개석 군이 대공세를 펼친다.

위기에 몰린 모택동은 미국이 내전을 부추겨

유엔 헌장을 위반하고 있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1946년 3월 ~ 5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덕수궁에서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본회의가 열렸으나,

신탁통치 논의를 둘러싼 미·소의 입장 차이로

진전 없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1946년 9월 미군정은 남한 내 독립 요구 시위와

총파업을 좌파 공작이라며

좌파 탄압과 언론 통제를 강행한다.

하지 중장은 좌파 신문을 조선노동당의 하부 기구로 몰아

언론사를 폐쇄하고 언론인들을 대거 체포했다.

1947년 5월 ~ 8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양측의 의견 대립을 좁히지 못하고

8월 12일 최종 결렬된다.

1947년 9월 23일 미국의 한국문제 유엔 상정

유엔 감시 하 남북한 총선거 후 정부수립을 제의했다

소련은 반대하며 미소 동시 철군과

남북 대표 참여를 주장했다

10월 28일부터 11월 5일까지 치열한 논쟁

소련의 반대결의안은 부결되고

미국의 안이 채택되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 본회의

미국 안을 40대 0(기권 6)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

모스크바 5개년 신탁통치 안은 묵살되었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발족

9개국 대표로 구성되었으나

소련과 우크라이나는 불참

“조선인 대표 없는 위원단에 참가할 수 없다”

1948년 1월 위원단 서울에서 임무 착수

북한 지역에 대해 소련군정이 출입을 거부하고

위원단은 활동을 계속 했다.

“선거 가능한 지역에 한해 과업을 계속하라”

그렇게 남한만의 5·10 총선거가 결정되었다

미국은 한반도 옆 중국 대륙에서

소련 저지를 위해 진력했다.

1947년 10월 미국은

중국 대륙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장개석 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단을 만들고

수억 달러를 추가지원 했다.

그러나 중국 대륙에서 전세가 뒤집히고 있었다.

1948년 모택동의 군대는

만주를 장악했고

국민당의 무기와 도시를 차례로 삼켰다.

부패한 국민당은 무너졌고

미국은 장개석에게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난징이 함락되자

미국 외교관들은 철수했다.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한반도에서

'선거 가능 지역' 총선을 결정했다.

소련의 거부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북한 지역에 진입하지 못하자,

유엔 소총회는 미국의 안에 따라 '

남한 단독 선거'를 결정한다.

1948년 5월 ~ 9월 한반도에서

남북 분단정부가 각각 출범했다.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를 거쳐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한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출범했다.

1948년 9월 모택동 군이

만주 일대를 완전히 점령하고

장개석 군의 탄약을 무더기로 노획했다.

장개석 군 내부의 자멸적인 부정부패를 목격한

미국은 추가 지원 거부를 검토했다.

1948년 12월 제3차 유엔총회는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를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했다.

1949년 4월 ~ 5월 공산군에 의해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이 함락된다.

미국은 공관원을 철수시키면서도 대사에게

대만으로 도망치는 장개석을 따르지 말고

난징에 남아 모택동 군과 협상하라고 지시한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민족통합 주장하면서 5·10 총선거 거부한

김구 선생을 총으로 쏜 범인 안두희는

당시 주한미군 방첩대(CIC) 소속이었다.

안두희는 다음해 6.25 전행이 발생하자

이승만 정권에 의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고

육군 포병 장교로 원대 복귀해

소령까지 진급했다.

주한미군 방첩대(CIC)는 동경에 있던

맥아더 휘하의 정보기구 G-2의 지휘를 받았다.

G-2는 윌러비가 대장으로

극동 전역은 물론 한반도의

모든 군사 정보 활동을 총괄했다.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제971 방첩대는

주한 CIC의 핵심이었다.

안두희의 백범 암살은 CIC와 무관한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영원한 분단으로 가는 길이라며 격렬히 반대했다.

1947년 말 유엔(UN)이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결의하자

김구 선생은 1948년 2월

성명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선언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김구 선생은 분단을 막기 위해 1948년 4월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가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북연석회의를 개최하는 등

민족통합을 위해 힘을 쏟았다.

남한 지역에서만 '5·10 총선거'가 실시되자

김구 선생과 그가 이끌던 한국독립당은

선거를 전면 거부했다.

"분단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

결국 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가 구성되고,

석 달 뒤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선거 거부 이후 김구 선생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지만,

여전히 통일 운동과 반이승만 정권의

상징적인 인물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해방공간에서 암살된 독립운동가

지도자들은 엄청 많았다.

고하 송진우, 몽양 여운형,

설산 장덕수선생 등을 비롯해

이분들과 함께 활동하던 중간 간부급 및

청년 단체 지도자들까지 합치면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라인'이 선포됐다.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 이유는 장개석 군이

부정부패로 패퇴했으며

남한 역시 부정부패가 자심해

희망이 없다는 판단한 결과로 알려졌다.

미국은 중국 내전 당시

장개석의 국민당 정권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쏟아 부었다.

국민당 수뇌부의 부정부패는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이 보낸 원조 물자와 자금이

국민당 고위 관리들의

주머니나 암시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미국이 준 무기가 모택동군에게

밀매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당시 사석에서

극도의 배신감을 토로했다.

"우리가 장개석에게 지원한 돈 중 수억 달러가

뉴욕의 부동산 투기나 은행 계좌로 들어갔다"

미국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고 보고,

타이완으로 쫓겨 간 장개석 정권을 포기했다.

당시 남한 상황도 타이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미군정기와 남한 정부 수립 이후

막대한 원조가 제공되었으나,

정권 비호 세력에게 불하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정경유착과 부패가 발생했다.

이승만 정권이 무분별하게 화폐를 발행하면서

물가가 폭등했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 선포 직전인 1950년 1월초

이승만 정권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인플레이션을 잡고 부패를 척결하지 않으면

모든 경제 및 군사 원조를 중단 하겠다"

'애치슨 라인' 선포 소식을

스탈린, 중국, 김일성이 들었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물러선다.

미국이 한국을 지키지 않는다.”

5개월 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탱크가 38선을 넘었다.

오판이었는가.

아니면 유도였는가.

역사는 아직도 논쟁한다.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해,

산천이 핏물로 물들고 포화가 가득할 때,

패전국 일본은 축배를 들었다.

일본은 미군의 거대한 병참기지가 되어

막대한 특수를 누리고 경제를 재건했다.

미국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3차 대전이 나면

선거에서 패배할까 두려워하는데

맥아더는 압록강, 두만강까지

북진하려 했고

그 곁에서 정보책임자 윌러비는

“중국은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했다.

그러나 겨울 산맥 너머에서

중공군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장진호의 눈보라 속에서

수많은 미군병사들이 얼어 죽자

맥아더는 만주를 핵공격하자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를 파면하고

전쟁은 교착상태로 빠져들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9월 8일

미국의 동북아 전략 수립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체결됐다.

쉰 두 나라가 협상대표로 모였건만,

중공과 대만, 남북한은 초대받지 못했다.

미국이 사실상 혼자 설계한 조약으로

일본에게 파격적 특혜를 줬다.

전쟁 배상 의무를 최소화하고

일본의 전쟁범죄 부인 근거를 줬다.

독도 문제는 조약에서 빠졌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의 씨앗이

그 빠진 자리에서 자라고 있었다.

성노예, 강제징용 등 역사의 상처도 방치됐다.

1905년 미국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했던

가쓰라-태프트 밀약,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그 밀약의 20세기 판이었다.

미국은 이 조약으로 일본의 전쟁범죄 처벌을 최소화하고

전후 배상 부담을 최대한 가볍게 만들었다.

미국이 주도한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극동전략기지가 되었다.

미국은 일본에게 파격적인 특혜를 주어

주권을 회복시키는 대신,

일본을 대소 전초기지로 삼는

전후 동북아 대립 구도를 완성했다.

미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고통 받은 한반도를

강화조약 배상 대상에서 제외할 때

이승만은

그가 당시 정전협정 체결에 반대한다는 친서를

미 대통령에게 수차례 보낸 것과 너무 달랐다.

이승만은 대일 강화조약이

미국의 극동 전략 수립에서

핵심 사항의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고 침묵한 것이다.

정권 유지를 위해

미국 몰빵에 몰두한 사례의 하나다.

이승만은 정전 후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미국과 체결했다.

동시에 미군의 한국 주둔을

치외법권적 특권인 ‘권리’로

인정해주면서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의 길을 열어주었다.

미국은 강화조약, 미일안보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 유엔사 후방기지 협정으로

동북아 전략의 기본 틀을 완성하게 된다.

미국은 일본,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최종 보루로 만드는 작업을 마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전범 처벌을 흐지부지하고,

한국에서 친일세력을 복권시켰으며,

막후 정보 공작(CIC, CIA)을 통해

한국과 일본 내의 사회주의 세력을 철저히 척결했다.

미국 정보기구 G-2 부장인 윌러비 소장은

맥아더의 눈이자 귀이자 손이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거해야 할 바이러스였다.

그는 악명 높은 특고경찰을 중용했다.

일제강점기 사상범을 탄압하던 비밀경찰이었고

독립 운동가를 잡아 고문하던 자들이었다.

윌러비는 그들을 비밀리에 공직에 복직시켰다.

낡은 술을 새 병에 담았다.

남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독립군을 잡던 친일 경찰들이

미군정 휘하에서 다시 총을 들었다.

이번엔 빨갱이를 잡는다는 명분으로.

이는 남한에서 친일 경찰과 일본군 출신 세력이

권력기구로 복귀하는 흐름과 궤를 같이한다.

1952년 미국의 일본 미군정 종식을 앞두고

일본 극우 세력이

미군 정보기구 G-2의 묵인·개입 하에

일본의 재무장을 노린 쿠데타를 모의했으나 발각됐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일본 내 좌파 세력의 집권을 막고

일본을 아시아 반공의 거점으로 묶어두기 위해

자민당 정권과 온건 야당 분열 공작에

수백만 달러의 비밀 자금을 지원했다.

1955년 이래 2021년까지 단 두 번의 예외뿐,

자민당의 집권, 미국의 그림자 아래 이어졌다.

CIA가 만든 정당, 미국이 유지한 정권.

일본 민주주의의 이면이다.

미국의 태평양전쟁 종전 후 정책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다.

"소련과 사회주의, 동북아에서 저지하라"

그러나 그 과정에서

중국은 공산화되었고,

한반도는 분단의 상처를 안았으며,

일본의 전쟁범죄가 경감되고 미국 기지가 되었다.

일본이 주권을 회복한

1952년 미군은 오키나와에 남았다.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하면서

미국이 주도하는 3각 군사협력 체제가 만들어졌다.

일본은 후방기지, 한국은 전방기지이고

유엔사와 그 후방기지가 둘을 연결한다.

미국은 동북아를 하나의 군사작전 공간으로 재편했다.

그 공간의 중심에

워싱턴이 있다.

이 모든 일이 소련을 막는다는

하나의 명분 아래 만들어졌다.

진짜 목적은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거였다.

동북아를 지배하고

태평양을 미국의 호수로 만들어

한반도를 그 패권의 최전방기지로 삼는다.

그 설계는 1945년 이후 7년 만에 완성됐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설계 위에서 한반도가 살고 있다.

2026년 미국은 주한미군이 전략적 유연성으로

중국과 인도, 태평양까지

작전지역으로 삼게 되었다.

3각 군사협력체제가 더욱 강고해진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자주와

전작권 환수를 강조하고 있는데

미국이 주도하는

한미일 3각 군사협력체제와

어떤 관련 속에 이뤄지는지

국회, 언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70 여 년간 지속되고 있는

미맹에 모두 취해 있는 것인가.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269 2026.06.11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5- 미군정과 친일파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독일이 항복하고 석 달이

지난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폭탄이

약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해

도시 인구의 약 39%를 소멸시켰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주저하자

사흘 뒤인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이 투하되어

약 7만 명이 즉시 사망했다.

같은 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160만 보병, 2만 7천 문의 대포

5,600대의 탱크, 3,700대의 전투기를 이끌고

만주벌로 진군했다

관동군 100만은 그 적수가 되지 못하고

종이호랑이처럼 무너져 내렸다

일본군의 탱크 400대는 소련의 철갑 앞에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소련의 군대가 움직인 그 날

트루먼은 일기에 썼다

"스탈린이 마침내 움직였다.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탄이 투하되면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항복을 주저한 일본을 향한 최후통첩인가.

나치 군을 궤멸시킨 세계 최강

소련을 향한 무언의 견제인가.

강대국들이 앞 다퉈 연구하던

원자탄을 미국이 개발한 것에

세계열강은 주목했다.

일본, 독일도 다 이 무기를 만들면 세계를

지배할 거라면 열을 냈지만

미국이 과실을 맨 먼저 딴 것이다.

무력이 국력이고 그것이 승패를 가리는 세계는

미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자폭탄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면서

국가 간의 관계도 이전과 달라졌다.

미국은 원자탄을 인류 최초로 발명해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소련은 절대적 군사력을 과시한

미국의 요구에 순응했다.

8월 10일, 소련은 미국이 제시한

‘북위38도선’제안을

두 말 없이 받아드렸다.

원자탄이 동북아에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일본 진격을 막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민족의 동의도 없이 강대국 둘이

조선의 허리를 단칼에 잘라낸 것이다.

서울과 남쪽의 1,600만 영혼은

자본주의 장막 안으로,

평양과 북쪽의 900만 삶은

사회주의 깃발 아래로.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이념국가들에게 장악됐다.

1945년 8월 9일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소련군은 웅기·나진·청진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8월 21일 원산을 점령한 뒤 8월 26일 평양에 입성했다."

평양에 들어선 소련군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인민위원회였다

소련군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1945년 10월 3일 공식 출범한 소비에트 민정청은

이듬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될 때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전면에 조선인 행정 기구를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배후에서 북한 지역을 통제하는

간접군정 체제를 구축했다.

9월 19일, 원산항에 한 배가 들어왔다

66명의 조선인 붉은군대 장교와 함께

젊은 게릴라 지휘관이 내렸다

그의 이름은 김일성

소련군은 그를 영웅으로 소개했다

"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점령군으로 상륙했다

성조기를 앞세운 존 하지 중장은

일제의 마지막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는 미 정부의 지시를 집행했다

"조선인의 어떤 자치기구도 인정하지 말라"

"일본인 관리와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을 고용하라"

하지 중장의 첫 번째 과제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 40만 일본인의 송환

그리고 1천 명의 일본인 기술자를

미군정에 잔류시키는 일 이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일본인 관리들은 그 자리를 지켰다

조선인은 여전히 2등이었고

일제의 잔재는 미군정하에서 현실 이었다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파가 득세했다

조선인들은 분노했다

"일본의 앞잡이가 다시 권력을 잡다니"

"해방이 이렇게 무색할 수 있나"

그러나 미군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정의 편의를 위해, 반공의 보루를 위해

친일파는 용서받았고, 되레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민족정기는 짓밟혔고, 정의는 빛을 잃었다

한반도 남북에 진주한 두 국가의 정책은 달랐다.

소련은 조선인의 자생적 기구를 인정했다

조만식의 인민위원회와 함께 일하는 형식을 취했고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실행했다

미국은 조선인의 자치기구를 불허했다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를 복귀시켰고

민족정기를 짓밟았다

북에서는 사회주의 식 혁명이 진행되었고

남에서는 반공국가가 세워졌다.

김일성은 항일영웅으로 호명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 속에 권력을 세웠다.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체제로 갈라졌다.

한쪽은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한쪽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러나 그 두 이름 아래

공통으로 흐르던 것은

외세의 전략과 냉전의 공포였다.

남한에 온 미 군정은 1945년 11월

미군사고문단(KMAG)을 만들었다.

40보병사단 미군 장교 18명이 차출돼

남한 각 도에 조선인 치안경찰대를 조직했다.

조선인 경찰대 인력을 선발하는

기준이 있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을 우대한다.

광복군, 독립군 출신은 근대적 기준에 미달한다.”

그 기준을 만든 자들은 미국인이었다.

그 기준을 집행한 자들은

일본군 장교 출신 이종찬, 백선엽 등이었다.

미군정이 만든 군사영어학교가 열렸다.

조선인을 미국식 군대로 양성하는 곳이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간 자들은 영어 회화가 가능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이종찬, 백선엽, 그리고 수많은 친일파

일본 육사 출신이 특혜를 받았다.

영어학교 학생 선발을 시작했을 때

광복군 출신은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광복군 출신은 미국식 규율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충성도, 즉 친미 성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 주인이 된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꼬리를 흔들었지만

광복군 출신은 그렇지 않았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자들이

미군에게서 권력의 완장을 받았다.

군사영어학교는 친일의 온실이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사냥하던 자들이

해방된 나라의 군복을 입었다.

노덕술, 하판락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악질 친일파들이

해방 후 미 군정의 배려로 경찰복을 입고

민중 앞에 나타났다

조선인을 짓밟던 일제의 개들은

해방정국의 공무원으로 변신했다.

미군정은 이들을 비호했다.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한 경찰 간부를 파면했다.

1946년 대구 사건이 터지고

일제 경찰 청산 목소리가 높아져도

미군정은 수용을 거부했다.

미 군정청 조선인 2만 5천 명의 경찰.

그 중 일제경찰 출신이 5천 명.

전체의 20%.

그리고 광복군 출신은 몇 명이었는가.

달랑 열다섯 명.

열다섯.

567명의 광복군 유공자 중에서

단 15명만이 경찰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2018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한다.

해방된 나라의 경찰이

누구의 나라를 지키는 경찰인지를.

왜 미국은 일본의 식민통치 잔재를 부활시켰을까

미국은 왜 미군정을 통해 독립군 출신을 배제하고

친일파를 우대했을까.

육군 최고사령관 1946년부터 1968년까지

초대 참모총장.

2대 참모총장. 3대. 4대....

18대까지.

모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거나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1946년부터 1968년까지.

22년.

독립군 출신이 한국군을 이끈 적이 없었다.

만주 벌판에서 총을 든 자들이

자신의 나라 군대를 지휘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 군 일각에서 말한다.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라고.

미군 주둔을 통한 군사적 의존이 안보라고.

이것은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의식화된 결과다.

22년 동안 군 최고사령관 옆에 앉아

자문하고 조언하고 지휘한 자들의 유산이다.

1945년 11월, 미군정은 국방사령부를 세웠다

그 아래 경무국과 군무국

그리고 미군사고문단(KMAG)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미군 장교 2명, 사병 4명

형식은 "자문", 내용은 "지휘"

고문단은 군사영어학교 입학생이나

조선인 경찰의 선발을 지휘했다.

해방정국에서 남한의 지배계급을 만들었다.

군사고문단은 조선인 국방경비대 5만 명 구성을 지휘했다.

조선인 병력 3개 여단 사령부 창설은 물론

서울, 대전, 부산 등에서 현지 부대를 관리했다

미군사고문단의 지위는 특별했다

외교관 면책 특권, 치외법권

그들은 한국의 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은 그들을 제재하거나 심판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 미군은 점령군과 다를 바 없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그 자리를 채웠다.

KMAG의 초대 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

그는 한국군과의 관계에 대해 확고한 원칙을 가졌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라"

"매일의 업무를 공유하라"

"부대원을 함께 점검하라"

로버츠는 자신의 별도 사무실을 제외하고

모든 고문관들을 한국군 지휘관 옆에 배치했다

그 결과, 미군 장교는 한국군의 모든 작전을 지켜보았다

모든 결정에 개입했고, 모든 현장에 함께했다

제주 4.3의 현장에도

여순의 산골짜기에도

대전교도소의 비극에도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국방부 장관 옆에 앉았다.

참모총장 옆에 앉았다.

대대장 옆에 앉았다.

별도의 사무실이 없었다.

한국군 지휘관이 가는 곳에 항상 동행했다.

그것이 로버트 장군의 원칙이었다.

무기를 공급하는 자가 갑이었다.

무기를 받는 자가 을이었다.

이것이 한미관계의 본질이었다.

그 갑이 을과 함께 간 곳이 있었다.

제주도였다.

여순이었다.

대전이었다.

제주 4·3이 터질 때

미군 대위가 현지 경찰의 책임자였다.

두 대의 정찰기와 소해정 두 척이 있었다.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이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학살 현장의 사진을.

미국 정부에 보낼 보고용이었다.

1945년에서 1949년까지

2만에서 3만 명이 제주에서 죽었다.

미국은 '반란군과 동조자들이 살해됐다'고 보고했다.

1948년 내 작전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여순에서 민간인 2천 명이 죽었을 때

한국군 각 부대 옆에 미군사고문단이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이동에 동원됐다.

미국은 말했다.

우리는 기록했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를 준 자가 책임이 없는가.

지휘관 옆에서 자문한 자가 책임이 없는가.

갑이 을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갑의 면죄부가 되는가.

1948년 4월 3일, 제주도는 피에 물들었다

미군 대위가 책임자로 있던 부대가

남한 경찰을 통해 진압을 지휘했다

미군은 정찰기 2대, 소해정 2대를 동원했다

산악지대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미군은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4·3의 피로 물들었다.

미군 로버츠 준장이 작전을 지휘하고

미군사고문단은 현장 사진을 찍었다.

여순에서도, 대전교도소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과 함께했다

"자문"이라는 이름의 지휘, "갑"과 "을"의 관계

치외법권의 외교관들이 한국의 군경을 쥐락펴락했다.

제주 4.3의 학살 현장에

여순의 피 묻은 골짜기에

대전교도소의 어둠 속에

KMAG의 장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미소 짓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민간인의 시신 사이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미국 국방부 기록실에

대학 도서관 아카이브에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에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았다"

"단지 지켜보고 보고했을 뿐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말한다

"제주 4.3 사태는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했다"

"1948년 8월까지 미군 대위가 치안대 책임자였다"

"미군정과 KMAG의 책임이다"

그러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미국 정부는 침묵한다

한국 정부도 침묵한다

가해자는 기억하지 않고

피해자만 기억한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순천

반란 진압 과정에서 2천여 명의 민간인 사망

한국군 부대마다 미군 장교가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다

"자문"이 아니라 "참전"이었다

미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미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군은 민간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로버츠 준장이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그의 사진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소 짓는 미군 장교들 사이로

제주도민의 시신이 보인다

마틴 하트-란즈버그는 기록했다

"미군은 진압 전 과정을 통제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미국은 입을 다물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가 출범한 뒤

미군 7만 명의 철수가 시작되어

1949년 6월 철수 완료했다.

그러나 500명의 KMAG가 남아

미군 지배는 계속되었다

미군 철수 후, KMAG의 행정감독권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무초 주한미국대사에게 있었다

맥아더 장군조차 KMAG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그러나 로버츠 장군은 있었다

한국군 참모총장이 가는 곳마다 로버츠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였고, 그림자는 주인이었다

6·25 전쟁 후 KMAG 인력은 대폭 증원되었다.

1951년 12월 800명에서 1,800명으로 늘어났고,

그런 과정에서 한국군은 1953년

20개 사단, 60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이

권리(right)로 규정된 후,

KMAG는 합동군사고문단(JUSMAG-K) 체제로 개편되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사령관이 장악한

한미 연합 지휘 체제의 틀 안에서,

한국군은 주한미군에 예속된 상태로

70 여년을 지내고 있다.

KMAG이 미국익을 위해 맹활약을 하면서

한국군 지휘부의 영혼과 기백은 USA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 초대부터 18대까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거나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이응준, 손원일, 정일권, 백선엽

그들의 과거는 일제의 장교였고

그들의 현재는 미군의 협력자였다

오늘날 한국군 일각에서 들리는 주장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다"

그것은 KMAG가 심어준 의식의 결과였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슬은 여전히 채워져 있었다

이승만은 집권 초 예속적인 한미동맹과

분단을 고착시키는 국가보안법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이승만은 일제 잔재 청산을 차단하는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집권 2개월 후인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민중의 함성

그러나 그 함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완강히 반대했다

"국가가 분열된다"는 이유로

그는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경찰은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했다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 프락치로 체포됐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

안두희의 총탄이 그 가슴을 뚫었다.

안두희는 주한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이었다.

미국의 어둠 속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특위는 업무 개시 8개월 만에 무너졌다.

1951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됐다.

친일파를 처벌할 법이 사라졌다.

반민특위 구성 두 달 만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립운동을 처벌하던 법의 후예가

이제 통일을 처벌했다.

단죄받아야 할 친일세력이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했다.

국보법이 그들의 보호막이 됐다.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이

멸공전선의 제1인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2016년, 뉴스타파가 폭로했다

친일 인사 222명이 해방 후 440여 건의 훈장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은 친일파 48명이

대한민국에서 다시 훈장을 받았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까지

그의 가슴에는 대한민국의 훈장이 빛나고 있었다

해방은 그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두 번째 맞이한 영광이었다.

일본의 지배는 끝났지만

친일파의 지배는 여전했다

그들은 미군정의 보호 아래

더 강력해졌고, 더 교묘해졌다

그들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빨갱이 사냥"을 외치며

민중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감췄다

일본에게 받은 훈장을 감추고

대한민국에게 새 훈장을 받았다

그들의 가슴은 훈장으로 가득했지만

그들의 양심은 텅 비어 있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강이 흘러 오늘까지 이어진다.

1945년 8월의 결정이

2026년에도 살아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만든 군대의 문화가

자주국방보다 동맹을 우선시하는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국보법은 아직 살아있다.

78년의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통일을 처벌하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나라.

친일파가 훈장을 받은 나라.

독립군 출신이 열다섯 명만 경찰이 된 나라.

그 나라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 구조 위에 한미동맹이 올라앉아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바꾸는 자의 것이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 구조의 이름은

친일과 미군정이 합작해 만든

분단 체제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이 함께 지탱하는

주권 반쪽짜리 나라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쓰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진정한 해방의 시작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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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 2026.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