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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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노염(老炎)
권준희
구월의 늦더위는 인생의 축복
팔월 태풍 밀어낸 들판 위
쭉정이 벗은 이삭들 살찌우며
올게심니* 묶음이 마을 기둥을 세운다
장맛비에 넘친 둑
뿌리째 떠내려간 벼와 수수, 조
물 빠진 논밭엔
숨 가쁜 줄기 몇 가닥만 남아 있다
아침 저녁 찬이슬 맺히건만
한낮은 여전히 불의 기세
철 지난 노염의 기염 속에서
늘어진 이삭들이 다시 고개를 든다
벼와 수수, 조 이삭이 패고
고구마를 캐고 녹두를 털어
송편 속엔 청태콩과 밤이 가득
가을은 제 얼굴을 드러낸다
노염처럼 노년을 살아내리
이삭 패고 열매 맺혀
남김없이 건네주리라
구월의 늦더위는 인생의 축복이다
*올게심니-민속 추석이나 중양절을 전후하여 벼, 수수, 조 따위의 이삭을 묶어
방문이나 기둥 따위에 걸어두는 풍습. 또는 그 벼, 수수, 조 따위의 이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