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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품에 나타난 회화적 특성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덕화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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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반적으로 한강 작품이 가지고 있는 회화적 특징
한강 작품의 문체는 사물이나 빛, 어둠, 눈, 비, 진눈깨비 등 자연현상까지 구체적으로 묘사, 마치 바로 눈앞에 보는 듯한 영상 효과나 시각적인 효과를 보여주는 듯한 묘사들이 많다.
초기 작품집 『여수의 사랑』 『네 여자의 열매』까지는 강한 서사성을 바탕으로 작품화한 반면, 그 이후 작품들은 이미지, 혹은 시적인 환상적 특징들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체는 구체적인 사물들의 명징한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는 시각적인 효과를 많이 보인다.
그래서인지 한강은 화가를 초점 인물로 작품화한 작품들도 많다. 2003년 『문학동네』에 발표한 「노랑무늬영원」의 초점 인물이 화가이고, 2010년도에 출판한 『바람이 분다, 가라』의 초점 인물들 역시 화가이다. 2004년 『문학과 사회』에 발표한 「몽고반점」 역시 초점 인물 비디오 아티스트이다. 특히 「노랑무늬영원」은 서사의 핵을 이루는 두 이미지는 삶에 대한 은유이다. 잔멸치 떼의 무수한 은빛 반짝임과 대낮의 태양을 드러내는 노랑 태양의 이미지이다. 이미지를 보자.

 

한 마리 한 마리의 투명한 물고기들이 물을 가르려 안간힘 쓴다. 나아가기 위해, 퍼렇게 물든 몸들을 물살에 부딪친다. 몸부림친다. (「노랑무늬영원」 288쪽)

 

한 마리 한 마리 투명한 물고기는 살기 위해 죽을힘을 다하는 인간 군상의 은유이다. 세상으로부터 상처를 받아 퍼렇게 물들었지만 언제나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은빛 점들은 한강이 이상적인 삶을 향한 꿈이다. 그 떨림은 자신의 내부에 삶을 추동하는 힘이다.
중동 사막 지역에 서식하고 있는, 불 속에서 서식한다고 알려진 노랑무늬영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이 불도마뱀의 이미지는 대낮의 이글거리는 노란 태양과 연결된다.

 

노랑은 태양입니다. 아침이나 어스름 저녁의 태양은 아니라, 대낮의 태양이지요. 신비도 그윽함도 벗어 던져 버린 가장 생생한 빛의 입자들로 이뤄진 가장 가벼운 덩어리입니다. 그것을 보려면 대낮 안에 있어야지요. 그것을 겪으려면, 견디려면, 그것으로 들어 올려지려면…… 그것이, 되려면 말입니다. (「노랑무늬영원」 293쪽)

 

위의 두 인용문은 이 작품의 주체를 드러내는 은유이다. 세상의 상처에도 꿋꿋하게 떨리는 마음으로 매 순간 살아, 언제나 삶의 한가운데 대낮 노랑 태양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 상처를 입었다고 세상을 피하지 말고 맞부딪치고 나가야 함을 말한다.
「노랑무늬영원」에서 ‘나’는 일요일 새벽 작업실로 가다 검정개를 피하려다 급회전을 두 번, 차가 붕 뜨며 전복, 그로 인해 왼손 신경이 으스러져 버렸다. 왼손을 쓰지 못하게 되자, 오른손의 관절도 망가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가벼운 물건조차 드는 것도 힘든 상황 속에서, 옆에서 간호를 해 주고, 불편을 도와주던 남편과 어머니, 가까운 사람들부터의 깊은 상처를 받는다. 그들과의 심리적 거리를 가짐으로 삶이 홀로그램의 한 장면처럼 굴절해서 인식, 스스로가 고아라는 의식을 통하여 그들과의 분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추스른다. 자신 속에 반복되는 광채로 빛나는 잔멸치들의 무리와 대낮의 노랑빛의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삶을 꿈꾼다.
이렇듯 한강 작품은 색과 이미지, 서사로 이루어진 복합 서사이다. 
그런 시각적인 효과로 인해 한강 작품은 영화화로, 한 작가로서는 많은 4편 이상의 작품이 나와 있다. 부산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되었던 임우성 감독의 장편영화 <채식주의자>(2009)는 선댄스 영화제의 경쟁 부문에 초청된 바 있다. 소설집 속 세 편의 연작, 「채식주의자」에서의 남편, 「몽고반점」에서 형부, 「나무 불꽃」에서 언니 인혜를 초점화자로 서술됐던 원작의 내용을 객관적인 카메라의 시선으로 한 영화에 담아냈다. 육식에 대한 악몽에 시달리다 채식주의를 선언한 영혜(채민서), 비디오 아티스트 형부 민호(김현성), 인내심의 화신인 언니 지혜(김여진, 소설의 인혜)를 중심으로 원작 소설의 사건을 충실하게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폭력적인 현실에 저항하려는 영혜의 내면이나 예술적 갈등을 지닌 형부 민호의 심경을 그리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영혜와 형부의 몸에 그린 그림의 이미지가 소설의 퀄리티에 미치지 못하고 정사 장면이 불필요하게 길어 아쉬움을 남긴다.

 

작품집 『내 여자의 열매』 속 「아기 부처」(1999)를 영화화한 중편영화 <흉터> 임우성 감독 연출로 2011년 산세바스티안 영화제에 초청된 바 있다. 남편인 뉴스 앵커 상협(정희태)의 불륜으로 상처받은 동화 일러스트레이터 선희(박소연)의 상처와 극복 과정을 통해 사랑의 미묘한 감정을 그렸다. 단편영화 <여수의 사랑>(1998)은 정순애 감독 연출로 가족으로 인한 상처를 가진 정선이 여수발 기차에 실려 와 서울역에 버려진 자흔과 동거하게 되면서 자흔에게 상처를 입혀 떠나게 만들지만 그녀를 생각하며 여수로 밤기차를 타고 가는 내용이다.
이외의 작품도 한강의 명징한 이미지 묘사를 통한 에피소드의 뚜렷한 장면화로 인한 시각적인 효과는 한강이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마크 로스크 같은 화가, 말러 제2 교향곡에 나타난 뚜렷한 시각 효과를 보여 주는 음악까지 심취하게 한다. 이러한 한강의 취향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죽음과 관련 이미지와 형상을 통해서 인간의 꿈을 주고자 하는 인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폭악적인 현실로 삶을 온존히 유지할 수 없는 타자들의 삶을 통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희생제물과 같은 것이 한강의 작품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대부분이 폭악한 현실 속에서 트라우마로 꿈을 잃은 무력한 타자들의 삶을, 집단 폭력으로 죽은 진혼제 같은 작품들, 축제의 자리인 노벨문학상 수상식에 일체의 화장기 없는 얼굴로 평상시의 검은 드레스를 입고 참석한 것이 그 예이다. 이러한 타자의 대속 의식은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한강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2. 프란시스 베이컨의 회화와 한강 작품에서의 죽음
베이컨은 1909년 10월 28일 더블린에서 태어나 1992년 4월 28일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그는 순수한 허무주의라는 느낌을 받는 작가라고 프랑스의 칼럼니스트는 평가한다. 그의 그림 <루시안 프로이트의 세 가지 연구>는 경매가 1500억을 넘는 최고의 상종가를 친 화가이며, 프랑스 드골 대통령이 초대 전시회를 열 정도로 각광을 받은 화가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인간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포착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형태를 부여하는 화가이다. 그에 의하면 세상은 비루하고 야만적이며 범죄적이다. 그들은 세상의 신경질적인 수수께끼를 재현한다고 강조한다. 베이컨의 그림은 강렬한 감각을 통하여 어둠과 빛을 따라 생생하게 그대로 느낄 수 있는지 체험할 수 있게 재현한 그림이다.
프랑스의 칼럼니스트이자 소설가인 야닉 에널은 베이컨은 르누아르 이후 가장 위대한 살〔肉〕의 화가라고 했다. 그가 그린 그림의 강렬한 색과 소재의 아름다움은 동시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야닉 에널은 살의 벨벳처럼 부드러운 부위와 썩은 부위를 함께 느끼고 싶었고, 어떻게 그림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작가 자체의 삶 자체가 되었다고 쓰고 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번에 나온 『블루 베이컨』(뮤진트리, 2025)이다.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이 주목한 화가 역시 프란시스 베이컨과 미국 화가 마크 로스크였다. 한강의 프란시스 베이컨의 영향력 아래 쓰여진 작품이 맨부커상을 받은 『채식주의자』였고, 마크 로스크의 영향 아래 쓰여진 작품이 『바람이 분다, 가라』였다.
한강은 들뢰즈, 플라톤 철학과 우주학까지 폭넓은 인문학을 공부, 쉽게 작품에 다가가기 힘들다. 결국 프란시스 베이컨 작품에 구현하려는 세계가 한강 작품들을 꿰뚫은 주제들이다.
그중 한 문장을 인용해 보겠다.

 

여기서 나는 베이컨이 자신을 정육점 진열장에 매달려 있는 고깃덩어리와 동일시하는 유명한 문장을 들어보고 싶다. 왜냐하면 이 문장은 병적인 즐거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연민의 현기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으며, 이러한 대체(代替)보다 더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없다. “정육점에 갈 때마다 나는 내가 동물의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것이 그의 예술의 미친 듯한 목표다. 베이컨은 죽은 동물을 대신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한강 작품 패러다임 속에서 첫 번째 나타나는 특징은 죽음이다. 한강은 인간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포착하여 그것을 형상화한 작가이다. 한강에게도 세계는 비루하고 야만적이며 범죄적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매일 밤 사람을 죽이거나 죽는 꿈을 꾸고, 가족 모임에서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칼로 손목을 그어 피가 흐르자, 가족들이 혼비백산 병원까지 데리고 가는 장면, 또 대낮에 가슴을 내어 놓고 병원 화단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 형부와 섹스 등 충격을 주는 장면들이 많다. 『검은 사슴』에서는 의선이 서울 시내를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모습, 「어둠의 사육제」에서는 영현이 대학 입학을 위해 4년 적금한 돈을 뽑아 전세금으로 고향 언니와 동거를 시작, 일 년도 안 되어, 고향 언니가 자신의 몫뿐만 아니라 영현의 몫까지 전세금을 뽑아 도망간다. 당장 살 집도 없지만 영현의 키워 온 꿈을 송두리째 훔쳐 간 언니에게 살의를 느끼고 사촌언니 집으로 쳐들어가 구박을 받으며 빌붙어 살다, 온방도 제재로 되지 않은 베란다에 쫓겨나 비리한 삶을 이어 간다.

 

죽음은 내 뒤를 따라다닌다. 때로 앞서서 걸어가기도 했다. 잠을 잘 수 없는 밤, 좀처럼 새지 않는 밤에, 어둠 속에 누워 있다가 그것을 느낄 때가 있었다. 다리를 바꿔 꼬아 가며 밤새 나를 건너다보고 있는 그것의 눈을 나는 땀을 흘리며 뒤척였다. (『바람이 분다, 가라』, 문학과 지성사. 2024. 26쇄판. 26쪽)

 

죽음을 망설일 여지가 없는 빈손이 되기 위해, 그는 일생 동안 키워 왔을 삶에 대한 욕망과 미련들을 저 불 꺼진 방의 어둠 속에서 차근차근 짓부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둠의 사육제」, 『여수의 사랑』 중, 1995년판, 문학과 지성사. 131쪽)

 

이런 인용문에 나온 죽음에 관한 묘사는 한강의 어느 작품을 펼쳐도 찾을 수 있는 문장이다. 어떤 삶도 결핍은 있다. 결핍을 통해 상처를 경험한다. 상처를 통해 우리는 희망과 꿈,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다. 상처는 절대 아물지 않는다. 죽음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삶, 어둠의 미학이 한강 작품의 특징으로 이루어진다.
들뢰즈의 철학을 그림으로 실현한 더블린 화가, 프란시스 베이컨을 아는 사람은 『채식주의자』 시리즈를 읽으면 한눈에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다. 『채식주의자』의 어떤 문장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문장이 나온다. 유튜브 방송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을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해도 한강의 작품에 나오는 어둠의 미학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삶의 철학과 회화를 그대로 닮고 있다.
야닉 에넬은 위의 책에서 프란시스 베이컨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를 해설하며, 오이디푸스 이후로 인간은 괴물의 자리를 차지했다. 살인을 주도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그가 제물로 바치는 것은 동물과 그의 종족들이다. 그는 강간하고 학살하고 말살한다. ‘인간은 그가 싸우고 있는 비인간 존재’라고 한다. 괴물은 스핑크스주의라기보다 오이디푸스이기 때문이다. 범죄자, 부모 살인범, 근친상간자,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고 했다.
한강 역시 죽은 동물들을 위하여, 집단 폭력으로, 또 다양한 형태의 폭력 희생자를 대신하여 글을 쓰는 것이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이나 한강의 소설은 우리 삶에 미치는 극단적 폭력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상처 입은 육체뿐 아니라 불타는 영혼까지 노출되는 이 장작더미에서 자신들을 드러내면서 우리를 대변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이 파란색에 주목했듯 한강 작품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는 어둠의 경계선에 있는 파란색 이미지에 집중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의 파란색은 상처 없는 나라를 은유한다. 이 은유는 한강에게도 통한다.

 

삼촌이 그랬듯이, 인주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푸른빛을, 푸른 시간을, 밤의 비밀과 낮의 명료함이 맞바뀌는 지진 같은 떨림을. 피가 뼈까지 파랗게 베어드는 서늘함을. (『바람이 분다, 가라』 위의 책. 57쪽)

 

위의 인용문에서 ‘고요한 푸른빛, 푸른 시간’은 미지의 시간, 순수함의 시간이다. 야닉 에넬이 프란시스 베이컨의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을 해석하며, 베이컨은 그의 그림이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예술을 통해 지옥에서 벗어나는 법을 발견하려고 누구 못지않게 애쓴 화가라며, 수도꼭지에 흐르는 물은 유년 시간을 상징, 파란색은 상처 없는 나라를 은유한다고 했다.
한강도 「수도꼭지에 흐르는 물」과 같은 이미지를 『검은 사슴』에서 보여준다.

 

좀 전에 마당에서 보았던 수도꼭지, 노파가 손을 담그고 있던 맑은 헴굼들, 녹쇠 대야 속의 밝은색 빨래감들, 반짝이며 사방으로 튀겨지던 물방울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검은 사슴』 52쪽)

 

위의 이미지들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에서 보여주는 감각적 이미지와 거의 똑같다. 수도꼭지에서 흐르며 반짝이는 물방울은 어둠을 뚫고 세상에 빛을 제공한다. 인간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포착하여 그것을 드러내는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화가이듯이 작가 역시 상징과 은유를 통해 세상의 스핑크스가 지구에서 사라진 이후 수수께끼를 풀려고 노력한다.
한강의 작품, 특히 첫 장편 『검은 사슴』은 작품 전체 이미지가 가져오는 어둠, 검은 이미지는 베이컨의 색채와 이미지를 닮았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끈질긴 타자의 추적은 곧 사회가 잊고 지내왔던 폭력을 새롭게 현재화하려는 의도로 읽혀진다. 어둠에 대한 익숙은 폭력이나 악을 인내하는 것이다. 한강은 어떠한 인내, 심지어 가부장적 폭력에도 인내로 견디는 것도 참을 수 없어 한다. 그런 의식을 주제화한 작품이 『검은 사슴』과 『채식주의자』이다. 그것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이미지, 색깔에도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베이컨이 길거리 부랑아, 조우지 다이어를 거둬들여 자신의 평생 동반자로 삼고 평생 돌본 타자에 대한 현기증 나는 사랑을 『검은 사슴』에서 버려진 인물 의선, 사회의 폭력에 희생된 타자를 끈질긴 추적을 통하여 보여준다.

 

3. 마크 로스크의 번지고 스며드는 힘
한강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러시아에서 태어난 마크 로스크가 1970년 2월 25일 뉴욕 브루클린에서 자살, 자신은 그해 11월 27일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고 있는 특별한 인연을 소개한다. 이 인연으로 한강은 시집 『저녁을 서랍에 넣어 두었다』에 ‘마크 로스크와 나’라는 제목으로 두 편의 시를 발표, 자신과의 특별한 인연을 만들어낸다.

 

어둠과 빛 사이// 어떤 소리도/ 광선도 닿지 않는/ 심해의 밤/ 천년 전에 폭발한// 성운 곁의/ 오랜 저녁// 스며 오는 것/ 번져 오는 것/ 피투성이 밤을/ 머금고도 떠오르는 것// 방금/ 벼락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내 실핏줄 속으로/ 당신 영혼의 피 (「마크 로스크와 나 2」20∼21쪽)

 

한강은 마크 로스크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는 죽음과 삶 사이에 ‘벼락치는 구름을 통과한 새’처럼 스미며 번지는 두 인연과의 관계를 피를 나눌 정도의 동질성을 가진다.
이 시집에서와 같은 내용을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 다시 서술하고 있다. 마크 로스크의 그림에 대해서 화자 정희가 마크 로스크의 그림을 접하고 묘사한 내용을 보자.

 

색채들의 충돌이 인간의 내부에서 스며 나오는 감정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놀랍다.
시작도 끝도 없던 혼돈이 방금 갈라져 피 흘리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이, 그토록 단순한 구도의 비구상 화면에서 극적으로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바람이 분다, 가라』 위의 책. 45쪽)

 

마크 로스크의 그림의 특징인 색과 색이 스미고 번져서 경계를 넘나들고, 시작도 끝도 없는 혼돈의 세계, 극적인 강렬함은 한강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다.
한강의 작품에서 타자 껴안기는 바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스미고 번지는 관계이다. 「여수의 사랑」에서 자흔의 의식이 정선의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를 흔들어 정선에 스며들어 자흔을 찾아 여행을 떠나듯이, 한강의 작품에서 인물들의 모든 관계는 서로 스미며 번지는 관계로 발전한다. 『여수의 사랑』의 단편 속 인물들이 대체로 페르소나적 관계로 드러나는 것도 그로 인한 것이다. 장편도 『검은 사슴』의 인물부터, 『희랍어 사전』 『바람이 분다, 가라』, 가장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에서까지 그렇지 않은 작품이 없다. 유독 작품 속의 상징적 이미지로 ‘눈’과 ‘비’가 자주 나오는 것도 스미고 번지는 관계에 대한 은유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한강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서술 화자의 페르소나 같은 인물이 쌍을 이루며 작품을 끌고 간다. 「여수의 사랑」의 자흔과 정선, 「야간 열차」의 영현과 동걸, 「진달래 능선」의 정환과 황씨, 「어둠의 사육제」의 영진과 명환, 『바람이 분다, 가라』의 정희와 인주, 『채식주의자』의 영혜와 인혜, 『소년이 온다』의 동호와 정대,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하와 인선은 내 안의 어떤 틈이나 균열, 자신 안의 수동적 자아를 외부 타자를 응시함으로써 자신의 주체성을 찾아간다.
「여수의 사랑」에서 인물들은 둘 다 여수가 고향이다. 두 사람은 모두 어릴 때 상처로 여수를 떠난 인물이다. 자흔은 트라우마를 자신 나름대로 해법을 찾아, 어항에 물고기를 기른다든가 아리아를 들으며 고향의 향수를 달랜다. 반면 정선은 트라우마로 억압된 의식이 결벽증과 강박증이라는 신체적인 위협으로 침범, 삶을 파괴, 분열증 증상을 보인다. 동거하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 스미고 저며 들며 알지 못하는 사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는다. 조그마한 다툼으로 자흔이 여수를 떠나자 결국 정선도 자흔을 생각하며 꽁꽁 숨겨둔 트라우마를 조금씩 풀며, 여수로 떠난 자흔을 찾아 떠난다.
한강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이 한 쌍의 인물들은 그들의 무의식에 잠재화되어 있던 상처를 분신과 같은 인물을 응시함으로써 스며들고 저미며 서로가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영향을 받게 되고 다시 주체성을 찾는 인물이 많다.
페르소나의 등장은 주체가 충족되지 않은 욕망의 결핍이고, 그 욕망은 타자를 만나지 않았으면 스쳐 지나갈, 즉 주체에게 전면화되지 않는 결핍이다. 주체는 이 욕망을 통해 자신 속의 또 다른 타자를 만나 스며들고 저미며 새로운 주체가 된다.
특히 『바람이 분다, 가라』는 정희와 인주, 정희와 인주 삼촌 세 사람과의 관계는 스며들고 저미는 삶의 가치나 세계관이 일치하는 스미고 저며드는 사이의 인물이다. 정희는 고등학교 때 틈만 나면 인주 삼촌이 그림을 그리는 작업방에 가서 책을 보고 대화를 하고 그가 그린 그림을 보고 시간을 보냈다. 인주 삼촌이 혈우병 환자로 외출이 어려워 주로 작업방에서 지낸 것을 핑계로 정희는 인주 삼촌의 우주학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그의 그림의 번짐을 기다리며 삼촌과 혈연관계처럼 가깝게 지낸다.

 

인주와 삼촌, 그들이 그린 그림 - 그것들이 내가 쓰려는 전부다. 단지 그들이 내 기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냄새, 소리, 색깔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불려 나오는 것뿐이다. (『바람이 분다, 가라』 위의 책. 57쪽)

 

세 명은 그 당시 거의 생활을 같이 할 정도의 친연적인 관계로 저미고 스며드는 관계로 정희는 삼촌과 인주의 양성적인 사랑 속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이 작품은 삼촌이 심장병으로, 인주가 사고로 죽은 이후 강석원 교수라는 엉뚱한 인물에 의해 인주의 그림과 삶을 그린 책을 발간한다는 것을 알고, 인주와 그 삼촌의 삶을 왜곡하고 자신의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려는 그를 응징하기 위해 인주와 자신과의 공백 기간 동안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서사이다.
또 『검은 사슴』에서는 인영과 명륜은 현대 산업 시대의 구조에 맞지 않는 의선이 발가벗은 몸으로 서울 빌딩의 숲을 돌아다니는 충격적인 일을 목격한다. 의선 스스로의 의지의 삶이 아니라,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맞춘 서울의 생활로 억압된 욕망이 몸으로 분출되는 충격을 통하여 의선을 추적, 그동안 자신들이 익숙하려고 했고 인내해 왔던 어둠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그들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의선을 찾는 여정을 통해 자신 속의 타자를 따라 과거로의 여행이 이루어진다. 의선의 모든 것에 대한 의문 속에서도 인영과 명륜은 감염되어,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무해한 의선의 그동안 행동이나 말을 반추함으로써, 그들의 과거를 통해서 드리워진 어둠을 새롭게 조명하고, 자신들 안의 타자를 알게 되고 삶과 화해하는 과정에 이른다. 결국 의선의 추적으로 인영이나 명륜은 의선이 남겨 놓은 그림자를 통해 자신들 속의 타자를 발견한다.
인영의 경우, 빚과 가난만 남기고 일찍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삶의 매 순간 분투하는 엄마와 언니를 통하여, 어린 인영이 할 수 있는 일은 견디는 것뿐이었다. 견뎌야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힘든 일은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어둠을 응시하며 현실을 인내하고 견디는 것이다. 자신은 견디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인내만이 현실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누구와도 어떤 가까운 관계도 원치 않았다. 그런데 의선에게만은 살을 부딪힐 만큼의 가까운 관계까지 허락했다. 그것은 인영은 의선에게서도 어둠을 보았고, 그 어둠을 통해서 혈흔 같은 친연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명륜 역시 의선을, 찾지 못한 동생을 보는 듯 동생 명아처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있다. 이따금 그는 글을 씀으로써 생기는 충족감에 의지하여 영영 어디로든 떠나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 명아를 찾는 일을 포기하면서부터였을까. 그는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너무 많은 말들이 몰려왔고, 막상 쓰려고 하면 그것들은 한꺼번에 몰려왔고, 막상 쓰려고 하면 그것들은 한꺼번에 썰물처럼 몰려가 버렸다.

 

명륜은 오직 삶의 동력이 되었던 쓰는 일조차 자신을 떠났음을 알았고 우울 속에서 스스로를 포기했을 때, 의선을 발견, 삶의 새로운 동력을 얻는다. 연탄 공장 골목으로 기억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등에서 풍겨 나오는 미미한 파스 냄새, 짙은 화장과 짧은 치마의 동생 명아 등 눈만 돌리면 기다리고 있는 음습한 기억들, 이 세상의 지옥 끝에 방치해 둔 명아에 대한 무력감 등은 명륜으로부터 글을 쓰는 충만감까지 뺏아, 자포자기한 삶으로 시간을 무의미하게 날려 보내게 했다. 그때 의선을 만난 것이다. 명륜은 의선의 자신 속으로 깊이 침윤된 침묵과 무구한 웃음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모든 우울이 날아가는 것을 느끼고 의선에게 절대적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의선이 그의 몸 일부와 같이 되었다는 고백은 도망간 동생 명아를 의선과 일치시키며, 새로운 삶의 활기를 찾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회의와 절망과 우유부단한 자포자기를 넘어선 그의 한 지점에 의선이 있었다. 이런 명륜이 의선의 행방불명을 절대 방치할 리 없다.
우리는 우리 몸에 맞지 않는 자본주의 메커니즘에 따라 몸의 소리를 억압하고 상상력을 억제함으로써 스스로 빈곤한 삶을 산다. 스스로 기계의 부속품처럼 기능적 존재로 전락시킴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귀로 듣지 않는 것은 들을 수 없고, 자신의 손으로 잡지 않는 것은 만질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가 된다. 인영과 명륜이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기능적 존재로 전락하지 않은 무능력한 존재가 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인영은 자신의 어둠 속에서 인내를 통하여 현실을 견디려고 했고, 명륜 역시 창작을 통하여 충만한 삶을 살려고 하지만 자신 속의 타자는 체념을 통하여 몸을 억압하고 있었음을 의선을 통하여 알게 된다. 두 사람은 의선이 어둠을 견디다 견디다 터진 폭발물처럼 의선의 어둠의 정체를 찾아 끝까지 좇아, 의선을 통하여 1980년대의 강원도 탄광 지대의 참혹한 현실이 밝혀진다.
인물들의 스미고 저미는 서로 주고받는 영향 관계는 한강 작품에서 드러나는 페르소나라는 관계적 인물로 『채식주의자』의 은혜와 인혜, 마지막 장편 『작별하지 않는다』의 경하와 인선이까지, 죽은 사람들까지 혼으로 연대하며 서로 스미며 저미는 관계로 확장된다.

 

4. 결론
프란시스 베이컨은 더블린 출생으로 프랑스 대통령에게 초대 작가로 초청될 정도로, 세계의 화가 반열에 우뚝 선 화가이며, 마크 로스크는 역시 러시아 망명자, 세계의 도시 뉴욕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작가로 각광받은 작가였다. 한강 역시 광주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한국의 최고 작가로, 책을 출간할 때마다 최소 10쇄를 찍을 만큼 환대를 받은 작가, 결국 한국 최초의 노벨상을 받은 작가이다. 세 작가의 친연성은 탄생지에서 운명적으로 다가오는 타자에 대한 십자가 의식, 죽음에 대한 묵상은 그들을 새로운 주체로 탄생시켰으며 그것이 작품 활동으로 이어졌다.
한강 역시 모든 작품에서 어둠을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희망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윤대녕이 1990년대 최고의 소설(『문학동네』, 1998년 가을)로 뽑은 『검은 사슴』에서 인간을 은유한 타자로서의 삶을 사는 검은 사슴의 죽음을 통해서 보자.

 

깊은 땅속, 암반들이 뒤틀리거나 쪼개어져서 생긴 좁다란 틈을 따라 기어다니며 사는 짐승이랍니다. 흩어져 있는 놈들을 헤아려 보자면 수천 마리나 되지만, 사방이 두꺼운 바위에 막혀 있는 탓에 한 번도 자신들의 종족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을 외돌토리로 여긴다지요. (『검은 사슴』, 1998판 3쇄, 190쪽)

 

평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늘을 보는 것이 소원인 이 짐승은 광부들에게 나가는 길을 부탁하자, ‘네 번쩍이는 뿔을 자르게 해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게 해주마.’ 그러나 광부들은 아름다운 뿔로 만족을 못 한다. 바윗돌을 씹어 먹고 살기 위해 늑대 송곳니처럼 예리하고 단단한 이빨마저 달라고 한다. 그러나 짐승은 그럴 수 없다며 버티자 한 사람은 뿔이 뭉턱 잘라진 짐승의 이마를 누르고, 다른 사람은 흑탄처럼 시커먼 짐승의 뒷다리를 붙잡고, 남은 사람은 뾰족한 이빨을 뽑아낸다.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쯤 이 짐승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 하게 쭈그러들어 죽어간다.
그리스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신화는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예술의 모티브로 소설, 시, 연극, 회화에서 꾸준히 재현되는 화두의 하나이다.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신화에서,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음으로써, 인간이 되었다. 그러나 신화에서 드러나듯 인간이 된다는 것은 바로 상처임을, 즉 아버지를 살인하고 어머니와 근친상간함으로써, 눈이 멀고 발에 상처를 얻는, 그런 것이 인간임을 알려준다.
프랑스 칼럼니스트이자 소설가인 야닉 에넬은 최근에 출판한 베이컨의 그림을 해석한 「블루 베이컨」이라는 책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를 해설하며, 오이디푸스 이후로 인간은 괴물의 자리를 차지했다. 살인을 주도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그가 제물로 바치는 것은 동물과 그의 종족들이다. 그는 강간하고 학살하고 말살한다. ‘인간은 그가 싸우고 있는 비인간 존재’라고 한다. 괴물은 스핑크스주의라기보다 오이디푸스이기 때문이다. 범죄자, 부모 살인범, 근친상간자,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고 했다.
위의 ‘검은 사슴’ 우화에서 검은 사슴은 힘 있는 자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빼앗긴 타자의 삶을 살고 있는 탄광 인부들, 혹은 희망 없는 삶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막힌 빌딩 사이를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의선을 통해서 인간에게 죽음은 바로 희망, 빛을 뺏는 것임을 보여준다. 한강이 5·18 광주 사건을 다룬 『소년이 온다』와 제주 4·3 사건에서 집단 폭력의 피해자들을 위한 애도의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그들의 죽음을 통해, 살아남아 있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반성하게 한다. 한강이 『채식주의자』에서 영혜가 완강한 타성적 삶을 유도하는 가부장 권력에 저항하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고 채식주의자가 된 것이나 나무가 되려는 것은 연약한 타자의 입장에서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찾자는 푸른 불꽃을 노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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