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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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수필 창작과 이론9
수필에서의 서두(序頭)
소설이나 시 등 다른 문학 장르와 마찬가지로, 수필의 서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수필에 있어 서두야말로 작품 전체를 반영하는 상징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서두를 통해 작품의 내용이나 의도를 재빨리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서두는 수필을 읽는 독자와 처음 만나고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첫 번째 관문이자 ‘첫인상’이다.
독자들은 이 서두를 통해 그 작품의 의미나 내용을 대충 파악하려는 심리가 있고, 이를 통해 흥미와 관심이 생겨야만 비로소 수필을 읽게 된다. 만일 서두를 통해 작품이 그저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거나 흥미나 관심을 끌지 못하면 더 이상 읽기를 포기해 버릴 것이다.
바쁘고 복잡한 세상에 흥미나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의미 없는 글에 시간을 낭비할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더욱이 글 읽기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네 풍토 속에서.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의 ‘첫인상’을 유심히 살피거나 그 ‘첫인상’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나 특성, 성격 등을 파악하려는 수가 많다. 또 이 ‘첫인상’을 통해 그 사람에 대해 나름대로의 평가를 내리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사람에 대한 ‘첫인상’은 그 사람의 기질적 특성이나 과거 경험 등을 통해 많은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갖는 수가 많다. 또 이러한 ‘첫인상’에 대한 이미지가 실제와 일치하는 수도 적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필 작품을 대할 때에도 많은 사람이 그 작품의 ‘첫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서두를 통해 나름대로의 판단을 내리기 쉬운 것이다. 따라서 수필 작품에 있어서, 그 서두의 성패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첫인상’, 즉 작품의 서두가 좋아야만 관심이나 흥미가 끌리고 수필을 읽는 묘미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 만큼 서두를 어떻게 쓰느냐, 또는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즉, 수필의 첫머리를 어떤 내용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다음 단락과 어떻게 이어 나가며 글의 말미와는 어떻게 연관 짓느냐, 또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 의도를 서두에 나타내느냐 아니면 변죽만 울리느냐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만일 이 서두가 신선미가 없이 진부하거나 너무나 평범한 내용으로 관심이나 흥미를 끌지 못하거나 작가 자신의 주장을 너무 강조, 강요하는 듯한 내용, 교훈적이거나 훈시하거나, 무슨 뜻인지 모를 정도의 불분명하거나 지식의 나열이나 자기 과시, 구태의연한 설명, 저속한 표현, 꼭 필요하지도 않은 외래어나 외국어의 남용, 모방이나 불필요한 인용 따위로 시작된다면 독자들은 이내 흥미를 잃거나 거부감, 불쾌감, 반발심 등을 느끼며 실망감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읽기는커녕 책을 덮어 버리거나 내팽개쳐 버릴 것이다. 이렇게 되면 중간이나 뒷부분에 아무리 좋은 내용이 실려 있어도 소용이 없게 되고 만다. 그렇기에 수필가는 대개 수필 작품을 쓸 때 그 서두에 상당한 관심과 노력을 기울인다. 단 몇 줄의 서두, 또는 첫 구절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장시간 고뇌하는 수필가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단 한 줄의 적합한 서두를 찾아내지 못해 며칠씩 끙끙거리는 수도 있다.
나는 우선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이 지금 돈으로 한 오만 원쯤 생기기도 하는 생활을 사랑한다. 그러면은 그 돈으로 청량리 위생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
이것은 피천득의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의 서두이다. 이 서두는 간결하면서도 상징적인 표현과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읽는 사람의 관심과 흥미를 끄는,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이 서두를 읽은 사람이라면 우선 이 작가가 왜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꽤 오래전의 돈 5만 원 가량이 왜 필요할까 하고 궁금해할 것이다. 또 그런 돈이 있다면 하필 청량리 위생병원에 낡은 몸을 입원시키고 싶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의아함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이 서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궁금증과 의아함 때문에 그다음을 계속 읽어 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호기심이란 가속이 붙어 더욱 적극적으로 책을 읽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호기심에 대한 ‘해결 욕구’는 사실 인간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의 서두는 일단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끄는 데에 성공한 셈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도 있지만, 일단 독자들이 흥미를 느끼고 계속 읽어 나가야만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가치가 전달될 것이 아닌가.
물론 이 같은 궁금증이나 의아함은 곧 풀리게 된다. 가난한 형편에 돈 5만 원 정도의 여유가 생긴다면 병원에 입원하여 그동안 삶의 세파에 지친 몸을 좀 쉬고 싶고, 사랑하는 아내와 딸에게 그동안 해 주지 못했던 선물도 해 주고, 가까운 친구들을 집에 초청하여 함께 음식을 들고 싶다는 것 등이 이 수필가의 조그마한 바람인 것이다.
비록 그의 이러한 바람은 어디까지나 소망일 뿐 아직 실현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 ‘작은 소망’을 통해 정신적인 행복과 기쁨을 느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작은 소망’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소시민이 갖고 있는 ‘작은 소망’이기 때문에 호소력이 크고 공감을 느끼게 된다. 즉, 그의 이 ‘작은 소망’은 바로 우리 모두의 ‘작은 소망’인 것이다. 이렇듯 수필에 있어서의 서두는 중요한 것이며, 서두가 훌륭하고 흡인력이 강해야만 작품의 품격을 높이고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수 있다.
그렇다고 서두만 그럴 듯하게 쓰고 나머지는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또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 위해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흥미를 끄는 표현을 쓰거나 저속한 표현, 전체 내용과는 너무 동떨어진 표현, 거짓된 표현을 써서도 안 된다. 이러한 행위는 독자를 기만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고 실망감을 안겨 준다. 물론 작품으로서 성공도 거둘 수 없다.
그야말로 ‘용두사미(龍頭蛇尾)’격인 글에 누가 공감하며 갈채를 보내겠는가. 또 서두가 불분명하고 흡인력이 없는 것 역시 독자들로부터 외면만 당하게 된다.
수필에서의 결미(結尾)
수필에서의 서두가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필에서의 마지막 부분, 즉 결미 역시 아주 중요하다. 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작품의 가치와 성패가 판가름 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특히 수필에서의 결미 부분은 흡사 여러 갈래로 흘러 내려오던 강물이 이윽고 하나로 합쳐지는 곳과 같다. 즉, 다양한 내용들과 여러 가지 상념들이 전개되어 오다가 서로 한데 모아져 비로소 작가의 의도와 결론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곳이다.
더욱이 이 결미 부분이 잘되어 있고 문학성과 예술성이 있으며 감동적이어야만 그 글을 처음부터 읽어 온 독자들에게 강한 인상이나 호소력, 또는 공감이나 감동을 안겨 줄 수 있다. 이것은 비단 수필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시, 영화나 희곡, 연극, 오페라 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흔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깊은 인상이나 감동 받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나 소설을 다 읽고 난 후에도 가벼운 충격과 가슴 벅찬 감동, 여운 등이 한동안 가슴과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어렸을 때나 청년기에 본 영화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몇십 년이 지난 후까지도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는 수도 적지 않다. 이 세상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 주었다고 하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전쟁과 평화> <의사 지바고> 등과 같은 영화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바로 마지막 장면이 깊은 감동, 공감과 깊은 인상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수필에서의 결미야말로 마치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명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감동과 공감, 가벼운 충격이나 여운 등을 창출해 내는 구성법의 묘미가 들어설 수 있는 핵심 부분이다.
그런 만큼 수필에서의 이 결미가 별로 인상적이지 못하거나 감동이나 공감적인 요소가 적거나 은은한 여운마저 없다면, 그것은 분명히 수필로서 실패작이다. 또 이런 수필을 읽고 난 독자는 실망감이나 허탈감, 나아가서는 배신감마저 느끼기 쉽다. ‘이 따위 것을 공연히 읽었구나!’ 하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는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가는 결미 부분에 대해 고심하고, 그래서 좋은 결미 부분을 보여주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수필에서의 결미는 거창한 결론이나 주장 같은 것보다는 잔잔한 여운이나 차분한 호소력이 담겨 있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이것이 오히려 거창한 결론이나 주장보다 더 큰 감동과 공감을 안겨 주고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닌다.
또한 결미를 교육자나 종교인 등의 수필에서 많이 보게 되는 교훈조나 당부하는 투의 글은 좋은 결미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인간이란 원래 남한테 간섭을 받기 싫어하고 훈계의 말은 듣기 싫어한다. 비록 그것이 옳은 얘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다만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 또는 직장 상사나 윗사람 등이 보는 앞에서 직접 내색할 수 없어 참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마음의 여유나 ‘작은 기쁨’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기 위해 읽은 수필에서 또다시 그러한 ‘잔소리’가 들려온다면 오히려 거부감이나 반발심만 느끼게 될 것이다.
자기 과시적이거나 우월감을 나타내는 결미, 마치 달관한 경지에 들어선 사람이 하는 말, 다른 사람이나 독자를 얕잡아 보는 듯한 투, 가식과 허위가 담기거나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이나 거짓말, 편협되거나 고루한 생각 등이 실린 결미도 좋은 마무리가 아니다.
또한 처음에는 거창한 얘기로 시작되다가 결미에 가서는 흐지부지하게 끝나는 글,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글, 서두와 모순되는 내용, 다른 사람의 글이나 말을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인용하거나, 불필요한 외래어나 외국어 등을 사용한 결미 등도 잘못된 결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미는 독자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어이없게 만든다.
물론 독자들에게 감동과 공감, 기쁨과 여운, 나아가서는 수필을 읽는 묘미와 멋을 안겨 주는 결미, 서두와 균형을 이루며 전체적인 내용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한 결미, 논리에 모순이 없으며 호소력과 설득력이 강하면서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결미 등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마지막의 멋진 마무리를 위해 많은 수필가들이 고뇌하고 노력한다. 어떤 수필가는 마지막의 이 멋진 마무리를 장식하기 위해 거의 다 써놓은 원고를 며칠씩 묵히기도 한다.
수필가 박연구(朴演求)는 그의 「여운을 남겨야만」이란 글에서,
어떤 이들은 서두를 쓰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나는 결미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 고심한다. 용을 다 그려놓고 마지막에는 눈〔睛〕을 찍는 일이 지난(至難)하듯이 한 편의 수필을 거의 써 놓고도 결미 한 구절이 생각나지 않아서 며칠을 서랍 속에 묵혀 두기도 한 경험이 없지 않다.
길을 걸어가거나 차를 탔을 때나 화장실에서도 내 생각은 거기에 가 있기가 십상이다. 그러다가 실로 번개처럼 붙잡히는 결구가 생각나서 멋지게 마무리를 하고 났을 때의 쾌감, 나는 이 쾌감을 맛보기 위해서 수필을 쓰는지도 모른다.
미인도(美人圖)를 잘 그리는 P 화백(畵伯)에게 마지막 붓을 어디서 떼느냐고 물었더니 눈이라 했다. 그중에서도 눈동자를 찍는 일이 제일 어렵다고 했다. 마지막 예술의 심혼(心魂)을 온통 기울여 한 점 찍고 나면 미인(美人)이 선녀 되어 금세 하늘에라도 오를 듯이 그림 전체가 신비한 빛을 발하게 된다.
수필에 있어서도 잡문과 문학이 대개 끝부분에서 가름되는 것 같다. 생활과 신변적인 소재를 가지고 얘기를 전개한 수필도 마지막에 가서 하나의 사상이나 철학이 부여되어 작품으로서의 승화(昇華)를 이루는 걸 흔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라고 역설하고 있는데 이것은 좋은 결미를 잡기 위한 수필가로서의 고뇌와 결미 쓰기의 어려움, 그리고 좋은 결미가 떠올랐을 때의 기쁨 등을 잘 나타내 준 글이라 하겠다.
오랜 고뇌와 노력 끝에 쓰인 결미, 또는 문학성과 예술성이 넘치고 은은한 여운과 감동이 담긴 결미는 오래도록 가슴과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강한 뒷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것이 은은히 내뿜는 문학적 향취는 흡사 꽃의 향기처럼 감미롭고 매혹적이다.
98년 전 우리의 조상들은 자유의 이념 아래에서 싹이 트고, 만인은 모두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명제에 투철한 새로운 국가를 이 대륙에 세웠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나라, 혹은 이와 같은 이념과 명제를 내세우는 어떠한 나라가 과연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커다란 내진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에서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나라가 존속할 수 있도록 이곳에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그 싸움터의 한 조각을 헌정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고도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없고, 봉납할 수도 없고, 신성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전사자이건 생존자이건 이곳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더하거나 빼는 우리의 미약한 힘을 초월하여 이미 이 땅을 신성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지금 이곳에서 말하는 것을 주목하지도 않을 것이며, 오랫동안 기억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곳에서 이룩해 놓았던 업적을 영원히 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그처럼 숭고하게 추진해 온, 그 미완성의 과업에 진력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 생존자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진 이 위대한 과업, 즉 이들 명예로운 죽은 자들로부터 그들이 마지막까지 몸을 바쳐 지키고자 애썼던 대의에 더욱 헌신해야 하며, 이들 앞서 간 사람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굳게 결심해야 하며, 이 나라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굳은 결의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글은 너무나도 유명한 「게티스버어그 연설문」 전문(全文)이다. 1863년 11월 19일,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그때, 당시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주 게티스버어그에서는 전쟁터에서 전사한 전몰 용사들을 위한 헌정식이 있었다.
이때 당시 미국 국무장관과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능변가로 유명했던 에버리트는 무려 2시간에 걸쳐 마라톤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마라톤 연설은 청중들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지루함과 짜증만 안겨 주었다. 그 내용이 장황하기만 할 뿐 청중들의 가슴속에 파고드는 내용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링컨 대통령은 불과 2분 남짓한 짧은 연설을 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도 명연설로 꼽히는 ‘게티스버어그 연설문’인 것이다. 이 연설은 청중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공감을 안겨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때 링컨 대통령이 한 이 연설은 그 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지고, 그로부터 160여 년이나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명연설로 일컬어지며 많은 사람에게 또다시 커다란 감동과 공감을 안겨 주고 있다.
이 유명한 ‘게티스버어그 연설’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라는 말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제까지 수많은 정치인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이 말을 자주 인용해 왔을 뿐만 아니라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민주 정부’를 상징하는 말로써 자주 거론된다.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나 역대 정권, 언론 등에서도 이 말을 자주 써 왔다.
여기서 우리는 감동적이고도 훌륭한 ‘끝맺음말’ 한마디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또한 능변가 에버리트가 무려 2시간에 걸쳐 기나긴 연설을 한 것보다 링컨 대통령의 이 짧은 한마디가 훨씬 호소력이 크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연설이나 연설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수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수필의 마지막 부분에 쓰이는 끝맺음말, 즉 결미를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그 수필 전체의 가치나 문학성이 달라지며 수필의 생명력은 한층 고양되기 마련이다.
제목은 어떻게 달 것인가
사람마다 각자의 이름이 있듯이 수필 작품에도 그 고유의 제목(題目)이 있다. 더러 수필 작품 가운데에는 ‘무제(無題)’니 ‘실제(實題)’니 하여 제목이 없는 것처럼, 또는 제목을 구태여 붙이지 않겠다는 뜻에서 이런 것들을 붙여 놓은 경우를 보게 된다. 시나 음악, 미술, 조각에서는 단지 ‘작품 ×’, 또는 ‘작품 O번’이나 ‘작품 제O번’ 등으로 애써 제목을 회피하거나 구속되지 않겠다는 의도에서 이러한 방법을 택한 것이겠지만, 바로 이런 것 자체가 제목이다.
수필에서의 제목은 왜 필요하며 중요할까. 제목을 붙일 때 어떠한 방법이나 선택을 하여야 할까. 흔히 어떤 상품을 만들어 팔 때 그 상표나 제품명을 상당히 중요시 여긴다. 물론 상품의 내용이나 질도 좋아야겠지만, 그 상품의 상표나 제품명이 제품 판매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설령 상품의 내용이나 질이 같다 하더라도 그 상품의 상표나 제품명에 따라 소비자의 관심이나 판매량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회사에서는 소비자의 관심을 끌고 오래도록 인상에 남아 판매도 많이 할 수 있도록 ‘멋진 이름’을 붙이기 위해 애쓴다. 때로는 ‘멋진 이름’을 찾기 위해 공모하기도 하고, 작명가에게 의뢰하기도 한다. 심지어 잘 팔리는 다른 회사의 상표나 제품명을 유사하게 모방하는 수도 있다.
물론 상품에서의 상표나 제품명과 수필에서의 제목은 같을 수 없다. 특히 상업성을 중시하는 상품의 이름과 상업성이 배제되어야 하는 수필의 제목을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상품에서의 상표나 제품명이 중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필에서의 제목이 중요하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특히 수필에서의 제목은 작품에 대한 느낌이나 내용 등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게 해주는 ‘얼굴’과 같다. 또한 수필 작품의 모습을 가장 짧고도 암시적으로 표시해 주는 ‘문구’이기도 하며, 독자들의 관심이나 흥미를 끄는 ‘유혹의 눈길’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수필집 같은 책이라면 판매량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심지어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제목에 반해 책을 사는 사람들도 있다.
이 같은 이유로 수필가들은 자신이 쓴 수필의 제목에 상당한 정성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보통이다. 또 멋진 제목, 내용이나 의미를 한마디로 나타낼 수 있는 제목을 찾기 위해 골몰한다. 특히 수필집을 내놓을 때에는 더 많은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 굳이 상업성을 따지기 전에 작가로서 당연히 기울여야 할 노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예지나 수필 전문지, 또는 신문·잡지·사보 등을 통해 발표되는 수필 작품의 제목을 살펴보면, 의외로 멋지고 호기심을 유발하는 제목이 적다. 그보다는 흔하고 평범한 제목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때로 내용과는 너무 동떨어진 제목,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제목, 필요 이상으로 길게 늘어뜨려 놓은 제목 등도 있다. 심지어 제목만 그럴듯하고 내용은 보잘것없는 수필이나 이미 다른 사람이 썼던 ‘멋진 제목’을 그대로 도용한 경우나 너무 저속하거나 과장된 표현의 제목,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야한 표현을 쓴 제목이나 문법에도 맞지 않는 이상한 표현의 제목, 자기 멋대로 신조어(新造語)를 만들어서 붙여 놓은 제목, 너무나 막연하고 피상적인 제목 등도 발견된다.
특히 꽃, 바람, 난, 거울, 어머니, 산, 바다, 여인, 봄, 가을, 비, 인생, 들판, 여로(旅路), 길, 바위, 강물, 고향, 소나기, 우정, 사랑, 행복, 노인, 자화상, 돈, 고궁 등과 같은 제목을 단 수필 작품을 자주 보게 되는데, 이러한 제목은 너무나 흔하고 진부하다. 그 수필이 지닌 의미와 내용에 있어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이와 같거나 유사한 제목으로 그린 수필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러한 경우 관심이나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작품의 품격이나 가치를 떨어뜨리기도 한다.
비록 ‘어머니’나 ‘꽃’ ‘고향’ ‘사랑’ ‘행복’ 등과 같은 흔한 소재를 선택해서 수필을 쓰더라도 내용이나 의미, 말하고자 하는 의도나 표현 등은 사람마다 각기 다르고 특성이나 관심 방향 등도 다른 만큼 이에 적합하면서도 뭔가 새롭고 호기심을 끌 수 있는 제목을 붙이는 것이 좋다.
이와 함께 개성적이면서도 독창적인, 간결하면서도 선명한 제목, 그 작품의 내용이나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해 주는 제목, 문학성과 예술성이 넘치는 제목, 막연하거나 포괄적인 의미의 제목보다는 구체적인 제목, 생동감이나 활기가 넘치는, 주제나 중심사상을 한마디로 집약하는 제목을 선택해서 쓰는 것이 좋다.
이를테면 여러 문예지나 수필 전문지, 수필집, 또는 산문이나 잡지, 사보 등에 발표된 수필 작품 중에 다음과 같은 것들은 대체로 제목을 잘 붙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딸깍발이」 「오척단구(五尺短軀)」(이희승), 「수필」 「나의 사랑하는 생활」(피천득), 「구름 위의 서정」(박목월), 「인생 예찬」(김진섭), 「잠시, 그리고 영원히」(김남조), 「물 한 그릇의 행복」(김소운), 「언덕 위에 머문 향기」(장돈식), 「묵향으로 피는 여심」(김애자), 「갈꽃 길섶 이야기」(이창옥), 「지는 잎, 피는 꽃」(김우현), 「모시옷의 향기」(조희순), 「장구매미」(김종태), 「품바, 품바」(서정범), 「흙에서 묻어 온 휘파람 소리」(박희선), 「가슴으로 오는 소리」(반숙자), 「패랭이꽃의 화문」(변해명), 「흰 글라디올러스의 서글픔」(이정원), 「나의 연인 같은 목련꽃이여」(박연구), 「목마 할아버지와 별」(배혜숙), 「당신 품에 얼굴을 묻고 싶을 때」(이철호), 「그대는 내 하늘의 작은 별입니다」(허영자), 「봄이 열리는 길목에서」(한석근), 「사랑이 머무는 노을빛 고향」(임중택), 「들꽃을 좋아하는 여인」(윤재천), 「까치와 우체부」(염정임), 「벽 쌓기」(김흥용), 「서울 뻐꾸기」(윤모촌) 등.
물론 제목이 멋지다거나 호기심을 끄는 것이 반드시 그 내용이나 작품의 문학성이 훌륭하다는 법은 없다. 제목만 그럴듯할 뿐 그 내용이 빈약하고 작품의 수준이 낮은 수필 작품도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내용만 중시하고 제목은 소홀히 하는 것도 결코 좋은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이 모두를 서로 조화시키고 중시해서 둘 다 모두 좋게 하는 것이다.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그다음에 수필 내용을 쓸 것인가, 내용부터 다 써 놓은 다음에 나중에 제목을 붙일 것인가 하는 것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자의 취향이나 그때그때의 상황이나 판단에 따라서 결정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어떤 제목이 정해진 채 원고 청탁이 들어온 경우가 아니면 처음에는 제목을 대충 구상해 놓고 내용을 다 쓴 다음에 다시 구체적인 제목을 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제목을 정해 놓고 글을 쓰게 되면 그 제목에 구애를 받을 뿐만 아니라 자칫 제목과 다른, 엉뚱한 내용으로 흘러갈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내용부터 다 쓰고 난 후에 제목을 붙이게 되면 그 내용에 걸맞은 제목을 붙일 수 있어 제목과 내용이 달라질 가능성은 한결 적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