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타사를 품은 공작산 자락엔 어느새 옅은 녹음이 우거져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계곡의 물줄기가 건장한 남성처럼 박력 있게 쏟아져 내린다. 물살이 흐르는 한쪽 모퉁이에 쌓인 모래밭에 누가 만들었을까? 크고 작은 돌탑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은다.돌탑을 처음 보았던 오래된 기억이 흑백 영상처럼 떠오른다. 엄마 손에 이끌려 뒷산에 있는 보덕사에
- 정정애
수타사를 품은 공작산 자락엔 어느새 옅은 녹음이 우거져 싱그러움으로 가득 차 있다. 계곡의 물줄기가 건장한 남성처럼 박력 있게 쏟아져 내린다. 물살이 흐르는 한쪽 모퉁이에 쌓인 모래밭에 누가 만들었을까? 크고 작은 돌탑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은다.돌탑을 처음 보았던 오래된 기억이 흑백 영상처럼 떠오른다. 엄마 손에 이끌려 뒷산에 있는 보덕사에
오늘따라 벽에 걸린 여러 사진들 중 1973년 10월 9일 가족 친지들과 수십 명이 모여 찍은 결혼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반짝반짝 빛나던 사진과 틀은 흐릿하고 누렇게 변해가고 있었다. 마침 아내가 저녁 먹으라며 다가와 사진을 바라보는 나를 향해 묻는다.“뭘 보고 있소?”“응, 당신도 좀 보구려.”둘은 서로 마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사진보다는 더 기막힌
김포 아트홀이다. 한 달 전 가까운 인천 공연예매를 놓친 까닭이다. 국지성 소나기가 퍼붓겠다는 소식을 들으며, 찜통더위를 안고 도착하였다.<고도를 기다리며> 9개 지역공연은 전석 매진이다. 연극 시작 1시간이 지나 인터미션 때에 느낀 몽매한 상황이 처음이 아니다. 그때도 1막이 끝날 즈음에 이런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무대 위 허
강한 것과 연약한 것의 대비를 본다. 상호보완 관계라거나 어울리는 부분이 전혀 없을 듯한데 그 중심에 자리한 공생을 본다. 억세고 강하여 구부러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고철의 본질에서 이성을 발견하고, 여리디여려 작은 충격에도 쉽게 꺾이는 꽃의 본질에서 감성을 발견한다면 억지일까. 이성과 감성. 두 성질의 분배가 사람에게 균등하게 주어질 때 참된 인간성이 성
녹음이 짙어가는 여름이다. 담장의 능소화는 초록빛 운동장에 붉은 물감을 붓끝에 흠씬 눌러 찍은 듯하다. 걸음을 멈칫하고 마주한 꽃이 교정 벤치에 나란히 앉아 팔을 걸고 사진을 찍었던 친구들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며칠 전 고향 친구를 만난다며 무궁화호 왕복권을 폰에 저장하고부터는 벌써 동면하던 의식이 눈치를 채고 스멀거리며 학교 앞 들녘을 가로지른 지평선과
어머니는 한껏 차려입고 학교에 가는 나를 보며 “내도 마음은 니하고 똑같다” 하셨었다. 그러면서 어머니 눈에는 내가 예뻐 보였는지 등교하는 나를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파트 복도 난간에 기대서서 바라보시곤 하셨다. 아파트 모퉁이를 돌아서며 위에 계시던 어머니께 손을 흔들고 등교를 하곤 했는데 그 당시는 어머니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7월이 오면 강변도로에는 자귀나무꽃들이 지천이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만개해서 산책 나온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마치 수많은 공작새가 화들짝 날개를 펼치면서 화려한 예술의 미와 기예를 뽐내는 듯이 그 광경은 실로 환상이다. 이곳은 자전거 전용도로이며 시내 초입에서 금광호수로 가는 나들목이다. 자귀나무꽃이 100미터 이상 터널을 이루고 나머지 5킬로미터는
올 들어 최악이었다는 황사가 전국을 누런 흙먼지 속에 가두어 버리던 날. 황사주의보를 귀담아듣지 못했던 우리 가족은 모처럼 떠나는 주말여행에 모두 들떠 있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터라 몸단장에 열을 내는 아내는 물론 막내딸 녀석도 벌써 지도를 펼쳐보며 목적지까지의 제일 빠른 길 찾기에 바빴다. 우리 부부가 벌어들
*기억은 스냅사진과 같고, 변형은 왜곡된 기억이나 보정된 사진과 같다. 망각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 꺼내보지 않는 사진과 같지 않을까?나에게는 서른일곱 살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10살 되던 해 3월 30일, 아버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오늘은 사라진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추위가 꺾이고 코트를 벗어버릴 때쯤이면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가 회사
꽃샘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사월 하순인데도 바람 때문인지 제법 썰렁하다. 주공아파트 쪽으로 걸어가니 벽에 붙은 붉은 현수막이 바람에 춤을 춘다. 지역신문에서 이 아파트가 곧 헐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미세먼지가 많은 날인데도 길을 나섰다. 그리 먼 곳이 아닌데도 차를 타고 지나가기만 했지 직접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산한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