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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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공간에 의지함이 아니요, 상대가 있어 나의 실존이 분명해지고 확실해진다. 상대가 없이 홀로 존재하게 된다면 존재의 가치는 별 의미가 없음은 물론이려니와 삭막하고 쓸쓸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늘 상대를 귀히 여겨야 하고 상대에게 불편을 주지 않아야 한다. 상대의 허물을 지적하기 전에 나를 책망할 줄 알아야 하고 내가 먼저 변해야 상대도 달라진다. 어떤 사안이나 사물을 보았을 때 서로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경우 이의 다름을 일치시키기란 매우 어렵다. 각자 생각의 차이를 좁히고 줄여 나가는 양보와 이해로 공감 능력을 향상시켜 상대방을 배려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상대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얼마만큼 배려하고 베풀었을까?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을까? 지난날을 반추하며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지나치게 주관적인 사고와 자신의 언행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는지 나의 소신과 주장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는지 겸허히 자신을 성찰할 줄도 알아야 한다. 만약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인생은 무한하지 않기에 살아 숨 쉬는 동안 쌓인 것이 있으면 덜어내야 하고 맺힌 것이 있다면 풀어야 한다.
때때로 심연한 상념 속에서 아집과 번뇌의 보따리를 끄집어내어 반성과 회개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깊은 상념과 우울함, 울적함 속에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새로운 나를 만났을 때 스스로 선명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봄비가 촉촉이 내릴 것 같은 무척 흐린 날씨다. 오래전 서유럽 여행 시 독일 어느 도시 호텔에서 경험한 백야처럼 어두컴컴하기도 하고 황사 먼지같이 뿌옇게 부푼 시야는 제주도답지 않다. 제주도의 바람은 육지에서 느낄 수 없는 공포스런 바람이다. 강풍이 불어칠 때면 가끔씩 사람이 날아가기도 한다. 아마 이런 센 바람이 자주 불기에 오염물질, 먼지 등을 바람으로 날려 버리므로 맑은 공기를 맛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는 여정이 늘 새롭고 때로는 그리움과 허전함, 적막함을 낳기도 하여 요즘 친구 생각도 나고 오래전 다정다감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지금은 예전 같지 않게 소원해지는 친구들도 있어 불현듯 그들이 떠오른다.
젊은 날에는 이해의 폭도 넓고 나보다는 친구를 먼저 생각하곤 했으나 일흔을 넘긴 뒤부터는 단순해지고 사고가 고착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발견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육신이 늙어져 생각도 노쇠해진 것 같다. 혈기왕성했을 때에는 훌훌 털어버릴 일도 자꾸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맴돌고 있을 때면 낡아빠진 세상 잣대의 축적이 원망스러울 때도 있다. 지금쯤이면 모든 시름 다 내려놓고 건강한 심신으로 사회봉사도 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매인 게 많은지 생각은 생각에 그친 것 같다.
세파에 시달려 파인 상처나 흔적을 남의 탓으로 돌려 서로가 손가락질하며 내 탓, 네 탓 하면서 척을 지거나 등을 돌리는 친구들을 보아 왔기에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다시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의 이치는 반드시 상대가 있기 마련이며 상대방은 나와 다른 견해와 사고를 소유하고 있으므로 인간관계는 보는 관점과 가치의 차이, 인격의 정도에 따라서도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와 똑같기를 원하거나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를 배척하며 담을 쌓는 것은 사회적 구성 요원으로서 온당한 처사라 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관계는 무엇을 하든지 상황에 처해 있을 때, 행위의 기간에만 엔돌핀이나 행복물질이 나오고 사랑을 느끼다가 행동이 종료된 후 다시 모든 것이 중단되고 이전 그대로 돌아간다면 전에 생성되었던 행복, 사랑, 기쁨 이런 것들은 가식적이며 포장된 것이고 인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지속적이지 않고 영속적이지 않은 일시적인 사랑이나 행복, 가공된 기쁨, 행복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 버린 후에는 더 허탈해지고 허전해져 상실감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 가령 어떤 운동을 할 때나 게임을 할 때 또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정, 애정 등 그것은 그 어떤 것이든 예외일 수 없다. 그래서 기쁨이나 사랑은 진정성이 있어야 하고 진실의 토대 위에서 거짓 없는 영혼이 살아 있어야 한다. 이기적이며 사업적이고 영업적인 무가치한 기쁨, 행복은 지속 기간이 짧은데다 일시적이기에 진정한 사랑은 한 차원 높고 솔직한 인간관계의 기반 위에서 인간적인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순수한 정감이 깃든 기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즐거움이나 기쁨은 긍정적인 차원의 교감을 공유할 수 있어야 하며, 이러한 사랑은 어느 한쪽이 상대의 생각을 점유해서도 안 되고 어느 한편에 이끌려 가서도 안 되며, 서로가 서로를 상호 존중하고 희생과 배려, 봉사로 진심이 녹아 있어야 할 것이다. 어디에서 무엇으로부터 얻은 기쁨이나 즐거움이 일반적이거나 대중적이지 못하고 편협하거나 지배적이며 소수 일부에게 국한된 것이라면 이곳에서 얻은 기쁨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술에 취하고 마약, 도박을 통해 느낀 즐거움은 지극히 불량하고 자신과 사회를 병들게 하며 멍들게 하기 때문에 순간은 행복할지 모르지만 불행을 안고 있기에 이런 것을 기쁘다거나 행복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이 느끼는 기쁨이나 행복의 요소는 항상 건전하여야 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하며 일부에 치우치거나 소외된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개개인이 결집된 단체의 활동에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즐거운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이는 사회적 가치나 공동체 의식 형성에도 부합되고 저마다의 사고를 결집하는 합리성을 부여하여 어느 집단이나 단체 조직이 추구하고 있는 공동이 지향하는 목표 달성에도 기여하여야 할 것이다.
어느 조직이나 단체든 구성원 간에 일부의 유유상종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집단이든 그 형태가 굳어지고 고착되어 이질감으로 인한 동질성을 저해받고 의심받아 그로 인하여 조직 내의 인화나 화목이 깨지고 갈등이 조성된다면 그 조직은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단합과 단결을 무너뜨리는 것은 분열이고, 분열은 집단체 내의 다른 계층 구조 형성으로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공동의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주변을 돌아보고 누군가가 소외되어 아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그 눈물을 닦아줄 수 있어야 한다. 인위적인 기쁨, 즐거움, 행복은 잠시 머무르는 것이며 지속적이지 않지만 샘솟는 기쁨, 생성된 즐거움은 스스로 느끼는 행복으로 오래 지속되며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모두에게 장기간 지속되기에 닫혀진 마음을 열어 늘 같이 하는 열린 생각이야말로 참 즐거움이 아닐까? 나만을 고집하는 아집이나 주관적인 논리, 주장은 상대로부터 호응을 얻기가 힘들며 자가당착에 빠지기 쉽기에 늘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세상은 함께했을 때 즐거움이 있고, 행복물질이 더 많이 생성된다. 같이 하는 기쁨은 상대와 나에게 더 큰 즐거움과 행복을 주고 진정한 사랑의 가치 창조와 아울러 행복물질을 생산해 내는 행복 충전소가 되는 것이기에 사랑의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항상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