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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세번의만남

한국문인협회 로고 전향숙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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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생사를 알 수 없다. 동사무소도 경찰서에서도 행방을 찾을 수 없다. 안면 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물어봐도 전혀 찾을 길이 묘연하다.
처음으로 그녀를 만난 것은 결혼 전이었다. 직장의 근무지를 M시로 옮긴 나는 B백화점에서 처음 손님과 주인으로 만났다. 그때 그녀는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금발의 긴 생머리칼 한 가닥이 어깨를 넘어 흘러내렸다.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와 가녀린 몸매에 노란 꽃무늬가 있는 실크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액자 속에 들어 있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내가 찾는 물건을 찾지 못하자, 종업원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러자 뜨개질을 하던 그녀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강렬한 눈빛과 소피아 로렌을 닮은 육감적인 입술이 매력적이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냉기가 흐르듯 사무적인 말투였다. 내 사이즈에 맞는 브래지어를 찾는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가 내 앞에 물건을 꺼내 놓았다.
“여기 사시는 분 아니시죠?” 하는 질문에 “네! 어제 처음 왔어요.” 대답했다. 내 또래로 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왠지 모를 친밀감이 느껴졌다. 그 후 휴일에는 딱히 갈 곳도 없어서 자주 그곳에 들렀다. 잡다한 물건들과 꼭 필요하지 않는 것들을 사기도 했다. 물건 구입을 안 해도 그냥 놀러 오라는 그녀의 친화력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기도 했고, 이월 상품이라고 원가만 받기도 했다. 그녀는 부모가 경영하고 있는 B백화점의 딸이었다. 내가 갈 때마다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모자, 조끼, 가방, 망토는 물론 치마와 원피스도 무늬를 넣어 만들었다. 나에게도 목을 한 번 감아 돌려도 길게 늘어지는 감색 목도리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렇게 그녀와 친숙해져 갈 무렵 나는 결혼을 서두르는 아버지 부름에 그곳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정신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자연히 그녀에 대한 생각도 잊고 지냈다.
두 번째 만남은 그녀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신부는 바람 불면 쓰러질 듯 가냘픈 몸매에 모델처럼 무표정한 모습이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어 보였다. 신부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것은 왜였을까.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녀의 곁에는 유도 선수처럼 다부진 건장한 몸에 싱글벙글 행복해 보이는 신랑이 서 있었다. 친구들이 웃으면 첫딸 낳는다고 놀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낯선 곳에서 그녀를 만나 친해졌듯이, 그녀 또한 친구 하나 없는 낯선 곳이었다. 그런 이유로 우린 금방 친해졌다. 이번에는 그녀가 건어물 가게를 하고 있던 나에게 매일 놀러 왔다. 어느덧 친해지자 표정이 없고 창백하던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수다스러워졌다. 자연히 지난 과거의 일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고아라는 이유로 헤어졌던 이야기며, 아버지의 심한 반대로 방에 갇혀 있던 그녀의 탈출을 도왔던 그 남자는 이런저런 죄목으로 수감되었고, 결국엔 서둘러 지금의 신랑과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연유에선지 그늘진 얼굴을 숨기기라도 하듯,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연예인처럼 화려하게 꾸미는 걸 즐겨 했다. 그녀에게선 항상 은은한 로즈 향기가 났다. 노랗게 물들인 긴 머리칼, 40여 켤레나 되는 각양각색의 구두며, 매발톱처럼 기른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 평소에도 발목까지 찰랑거리는 화려한 치마에 깊게 파진 셔츠를 즐겨 입었다. 취향도 성격도 취미까지도 나와는 정반대였다. 때로는 보온병에 커피를 가져오기도 하고 직접 빵을 만들어 오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충격적인 고백을 들었다. 유년 때부터 아버지에게 귀여움을 받으려고 담뱃불을 붙여 주었단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중독이 되어 줄담배를 피우는 골초가 되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고등학교 다닐 때쯤에는 아버지의 바람기를 목격한 후 술도 마시고 반항하곤 했단다. 지금은 위스키 한 병쯤은 거뜬히 마신다고 했다. 우리 집에 올 때는 샤워하고 옷 갈아입고 향수 뿌리고 은단도 챙겨 먹고 왔다고 했다. 어떤 날은 오고 싶어도 갖추기 귀찮아서 못 올 때도 있었다는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사실 네가 성격도 취향도 넘 깔끔해서 안 본다고 할까 봐 술 담배 얘길 못 했어.”
그 후에도 그녀에게서는 술, 담배 냄새가 풍기는 일은 없었다. 내 막내아들과 그녀의 맏딸이 같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모임도 잦아지고 적십자 봉사단 일도 함께 했다. 우리의 어울림을 주위에선 신기해했다. 그녀는 사교춤도 사뿐사뿐 나비처럼 잘 추었지만, 나는 그야말로 몸치다. 일치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에게 내게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다. 평온하게 지나가던 어느 날 일본과 해산물 무역을 하던 남편이 사업을 접어야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개가 자욱이 낀 날이었다. 해산물을 싣고 가던 무역선과 일본 무역선이 바다 한가운데서 충돌했고, 우리나라 선원 셋이 바다에 빠져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재판은 3년을 끌었고 끝내 양방 과실로 판결이 났다. 남편은 사망한 선원들의 보상금까지 지불해야 했고, 우린 살고 있던 집까지 팔아야 했다. 이러저런 일을 청산하고 나니 오갈 데 없이 막막했다. 사업만 하던 남편도 상공회의소 국장으로 취직이 되었지만, 당시 작은 월급으로는 생활비도 안 되었다. 그때 그녀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애들 키우려면 뭐든지 해야 하지 않겠냐고.
“화장품 외판은 팔 힘도 없고 비위 약해서 못 할 테고, 보험회사는 자존심이 강해 네 성격상 못 할 것 같고, 음식은 깔끔하게 잘하니까 음식 장사라도 해 보면 어떻겠니?”
결혼한 여자는 취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상가를 갖고 있던 그녀의 제안으로 대중음식점을 시작했다. 두 애들의 교육과 생계를 위해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 울타리 안에서 10년을 살고 남편을 떠나보낸 후 1년 만에 이사를 했다. 그 후 휴게소 안에 있는 식당을 맡게 되었고, 정신없이 살아온 삶은 자연히 그녀와 멀어져 갔다. 그 후로 한동안 소식도 모르고 지냈다.
세 번째 만났을 때는 그녀의 남편도 세상을 떠난 후였다. 곱고 희던 얼굴은 한쪽으로 일그러지고, 우수에 찬 맑은 눈동자는 수시로 깜박이고 있었다. 아들은 아들대로 분가해서 다른 도시로 곁을 떠났고, 딸네 집에서 애를 봐주고 있다고 했다. 노란 긴 머리를 한 움큼 묶어 늘어뜨린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그녀는 내게 눈길을 피했다. 말수도 현저히 줄어 있었다. 무슨 말을 해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숨기려 했던 사연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 후 다시 만나자고 교환했던 전화번호도 바꿔 버리고 연락이 끊어졌다. 언제나 당당했던 그녀의 남아 있는 자존심이었을까. 내가 가장 힘들 때 곁에서 도움을 주었듯이 이제 나도 그녀를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고 어디선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세상이 그리 야속하다.
“자야, 보고 싶다. 어디에 있니?”
나는 오늘도 그녀와의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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