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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께 길을 묻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오대환(경기)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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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진년 처서날 천지에 올랐다. 애국가를 부르며 “마르고 닳도록” 가슴에 새긴 민족의 영산 백두산, 그 모습 보고 싶어 남의 나라 먼 길을 돌아 장백산에 올랐다. 서파로 오른 첫날은 막바지 가풀막 1442계단에 비가 내리는데 천지는 열려 있다. 북파로 오르는 이튿날은 발길 아래 계곡에 쌍무지개가 피고, 동녘 하늘 꽃구름 판타지에 탄성이 절로 터지더니 막상 천지엔 구름이 자욱하다. 구름 사이로 열리는 천지는 푸르다 못해 검푸른 진청색이다. 천년 세월이 가라앉은 담담한 숨결이다.
지축을 흔든 불구멍에 호수가 생겼다. 구름만 오가는 2600고지, 산 정수리인 만큼 신성한 하늘 물로 채웠으리라. 지상에서 온갖 수행 마치고 승천한 물의 혼이 백두산 인연을 만나 탄생한 하늘연못. 물과 불의 기운을 한 몸에 품고 천년 세월 담담한 숨 고르기가 경외롭다. 신령스러운 조화의 극치다.
불이 타고 나면 재만 남는다. 그러나 맹렬히 탈수록 진한 씨를 남기는 불이 있다. 사랑의 불이다. 민들레 한 포기조차 꽃 한 송이로 영생을 릴레이한다. 무릇 생명은 꽃불의 씨다. 그 불꽃의 씨앗으로 사람은 시민으로, 인민으로 제각각 팔자가 정해진다. 그야말로 복불복이다.
빗방울도 떨어진 그 바닥이 고향이다. 꽃밭이나 호수, 시궁창이나 전쟁터일 수도 있겠다. 영생을 사는 물의 혼이 생명의 전령으로 인간의 영혼을 품었던 때가 최상의 꽃자리였으리라. 백두산 천지에 내려앉은 물방울의 전생(全生) 이력을, 태초부터 낱낱이 살펴본다면 강감찬 장군의 땀방울이나 충무공의 피눈물, 황진이의 벽계수나 춘향이의 그리움도 녹아 있겠다. 북간도에 뿌렸던 선구자의 선혈이었거나 동족상잔의 6·25 핏물일 수도 있겠다.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브 잡스의 영혼을 품었던 천재의 이력일 수도 있으려니, 사람의 전생을 아무도 모르듯이, 빗물 이력 또한 그 누가 알아낼 수 있을까만은 천지사방 구석구석 날고 흐르며 해탈하고 백두산 천지에 내려앉았으리라. 천상천하 꽃자리 백두산 천지 물빛이 어째서 그토록 푸르다 못해 하염없이 깊은 하늘을 닮았는지 짐작이 간다.
물의 탄생 경로는 오직 하나뿐. 온기를 타고 하늘을 떠돌던 물의 씨가 어떤 인연을 만나 영원을 윤회하는 새로운 여정에 드는 그 한 길이다. 안온한 만남이면 이슬이 되고, 격한 숨결로 천둥번개를 동반하는 폭풍우가 되기도 하며, 냉정한 만남으로 온 세상 평정하는 눈꽃으로 피기도 한다. 이합집산 변화무쌍 물의 일생이 어찌 그리 인생과 닮았을까. 사람들은 물과 불이 상극이라 하지만 하늘에선 둘도 없는 동반자다. 생멸의 시원(始原)이자 극즉반 기적의 파트너다.
깊은 바다는 푸르다기보다 검다. 한반도 정수리에서 하늘을 경배하는 천지 물빛도, 독도를 품고 있는 동해바다도 신령스러운 진청색이다. 밝은 마음으로 보면 희망이요, 어두운 마음일 땐 시퍼렇게 멍든 아픔이다. 영혼의 심오한 색감이다.
천지를 바라보며 애국가를 암송해 본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일제 식민지 끝에 민족 분열 동족상잔의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70년 만에 선진국 문턱까지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 그러나 남의 땅을 밟아야 겨우 백두산을 바라볼 수 있는 엄중한 현실을 외면한 채 아직도 오만과 트집으로 네 탓 타령 일삼는 우리의 자화상을, 천지신명 앞에서 되새겨 본다.
천지의 물은 장백폭포를 지나 만주 벌판의 젖줄 송화강의 원천이며, 장백산 북녘의 물줄기는 두만강으로 흐르고, 백두산 장군봉 동남방 물줄기가 압록강을 이룬다. 만주 벌판을 흐르는 물길, 그 발원지에서 발해와 고구려의 숨결을 느껴 본다. 그러나 눈앞에 백두대간 정상 장군봉이 이틀 동안 낯가림한 탓에 남기고 온 미련이 너무 크다.
하지만 山이야 언제든 다시 가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입때껏 해오던 백두산 관광 한국어 안내 방송을 없앤 저들의 속셈은 대체 무엇일까? 세계 어느 나라건 자국에 거류하는 민족의 모국어 교육은 당연한 일이거늘 연변 조선족 학교의 조선어 교육을 왜 금지했을까? 뒤늦게 받아본 부음 같은 착잡한 심정이다. 동북공정의 끝이 이거였구나! 하는 생각에 남북으로 쪼개진 민족의 현실이 더없이 초라했다. 백두산이 한가운데 위치했던 고구려 영토! 그 북간도 땅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민족의 얼을 생각할수록 가슴이 먹먹하다.
공교롭게도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날, 일본 고시엔 야구대회에서 우승한 교토 국제 고등학교의 한국어 교가(校歌)가 일본 전역에 울려 퍼졌다는 기사가 떴다. 무참히도 물리고 찢긴 두 나라 사이에서 오늘도 남북으로, 동서로 편이 갈려 물에 기름처럼 하나가 되지 못하는 민족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 과거의 아픔으로 현재를 볼 것인지? 미래의 눈으로 오늘을 볼 것인지? 류시화 시인의 잠언시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한 구절이 영원한 절창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했다. 광개토대왕의 혼이 깃든 백두산을 제대로 노래하지 못하면 그냥 과객일 뿐이다. 여행은 만남이다. 이웃과 만나고, 역사와 만나는 본질과 교감이다.
역사적 침탈을 일삼아 온 강대국 사이에서 초진분보(秒進分步) 숨가쁜 글로벌 생존 경쟁 패러다임에 아랑곳하지 않고 헤게모니 패싸움에 중독된 내 안의 나, 스스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자화상을 일깨워 주는 천지신명의 계시를 느낀다.
일제강점기 만주의 민족 교육 전진기지 명동학교를 돌아보고 어둠이 깔린 윤동주 시인의 묘소를 찾아 묵념 올릴 때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며 존재를 바쳐 본질을 지킨 숭고한 영령 앞에서 진실을 팔아 영화를 누리는 못난 후손이라는 생각에 얼굴이 뜨거웠다. 뭉치지 못해 나라를 잃어버렸던 잘못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는 자성에 목이 메었다.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며 부르는 애국가는 허울 좋은 공염불일 뿐이다. 모리배들의 가면 쓴 혀 놀림에 휩쓸리지 않고 민초들 스스로가 희망을 찾는 내일이기를 갈망한다. 진정 담담해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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