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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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4년 9월 중순 국제환경지구화학회 참석차 폴란드 크라쿠프(Krakow)를 일주일간 방문했다. 폴란드에서의 국제 심포지엄 개최는 매우 이례적이었는데, 폴란드가 소련의 지배로부터 1990년에 자유화되면서 가능해졌다.
크라쿠프는 17세기 초반에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다. 크라쿠프는 아름다운 도시로 2000년에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되었고, 201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이 도시에 는 많은 기념물, 풍부한 건축물 및 교회가 있는데, 그 웅장함은 이탈리아, 독일 및 프랑스의 건축물과 일치한다. 언덕 위의 바벨 왕실 성은 폴란드에서 가장 큰 성 중 하나이며, 500여 년 동안 폴란드 군주의 성좌였다. 시장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큰 중세 광장이다.
지금은 크라쿠프가 문화·예술·학문의 중심이며, 바르샤바는 정치·경제의 중심이다. 크라쿠프 부근에는 독일 나치의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유대인 탈출을 돕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리암 니슨 주연, 1994년 3월 국내 개봉)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30여 년 전의 크라쿠프는 참으로 쓸쓸한 도시였다. 13세기 중세에 조성된 중앙 광장은 성 마리아 성당이 자리 잡은 유명한 곳임에도 그리 한산할 수가 없었고, 주민들의 무표정과 쓸쓸한 분위기가 여전히 눈에 선하다. 요즈음에는 인기 관광지이니 세월의 변화를 느낀다. 동부 유럽 관광에 폴란드 바르샤바나 크라쿠프는 빠짐없이 포함되는 인기 여행 코스 중의 하나가 되어 있다.
당시 나는 김포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바르샤바를 경유하여 크라쿠프에 도착하였다. 바르샤바 공항에서 환승하며 공항의 카트 전체에 ㈜대우 로고가 부착되어 있어 놀랐다. 이 시기에 이미 동구권까지 미친 우리나라 기업의 저력이 놀라웠다. 이미 30년 전의 방문이어서 남은 기억이 많지 않으나, 귀국길에 바르샤바에서 환승하기 전 시내를 반나절 관광했다. 바르샤바 구시가지에서 한국 사람은 물론 아시아계 여행객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바르샤바 시내의 한 작은 상점에 삼성이라는 영어 간판과 폴란드 사람들의 무표정, 가게에 가도 살 만한 생활용품이 별로 없고 쓸쓸한 거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학회는 크라쿠프 광산대학에서 개최되었는데, 대학 소개 자료를 얻으려 하였더니 예산 부족으로 준비가 안 되어 있었고 대학 시설도 낙후되어 있었다. 대학에 북한 유학생이 네댓 명 있었으나 폴란드가 자유화되면서 모두 본국으로 송환되어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학회장에서 영국의 한 대학에 박사과정 유학 중인 제자를 만나 크라쿠프 시내 중국 음식점(당시 한국 음식점은 없었음)에서 저녁을 사 주던 기억이 생각난다.
나는 지난 30여 년 동안 동유럽 국가 중 폴란드, 동독(베를린과 드레스덴, 프라이베르그 도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루마니아의 도시들을 학회 참석차 또는 초청 강연차 방문하며 대학과 연구소에 단기간 체류한 적이 있다. 이 나라들은 모두 1990년대에 소련으로부터 해방된 국가들이다. 내가 방문한 시기는 이 나라들이 소련에서 벗어난 지 10여 년 정도밖에 안 되어 개발도상국 수준이었고, 소련 지배의 영향이 채 가시지 않은 때였다. 대학의 학과를 소개하는 안내 책자도 없었고 모두 예산 부족이라 하였다. 미술관이나 박물관 전시와 같은 전시 행정은 아주 잘 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점이 공산 사회주의 전시 행정의 특징인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식당이나 상점에서는 대부분 현금 거래였고 신용카드 사용은 거의 보지 못하였다. 초청 강연을 하여도 강연료를 지불할 여유는 없었으며 보통 초청자가 식사 한 끼를 대접하는 정도로 예산이 빈약했다.
학구열이나 연구열은 매우 높아서 시설은 노후화되어 있어도 인터넷 지식 습득이 강하고 익숙했다. 연구자나 교수들이 영어에 미숙하고 러시아어에 강한 반면, 젊은 대학생이나 대학원생들은 영어 공부에 열심이던 기억이 난다.
폴란드는 동쪽의 러시아와 서쪽의 프로이센(독일) 두 강대국 사이에 위치하고, 동부나 서부 국경지대가 모두 평지여서 쉽게 침공당할 수 있는 지형이다. 폴란드는 오랜 기간 주변 강대국의 지배를 받거나 나라도 없이 살아온 역사를 지니고 있어 우리와 동병상련의 느낌이 드는 나라이다. 그 때문일까 나는 유난히도 이 나라에 관심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