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상태.1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조회수33

좋아요1

미국 회사 한국 지사에 다닐 때였다. 어느 날 한 팀원이 시중에 이런 것이 돌아다니고 있다며 심각한 얼굴로 전단지 한 장을 들고 왔다. 전단지는 LA에 본사를 두고 우리 회사 제품을 미국 시장에 공급한다는 어느 회사가 만든 것이었는데 이제 한국 총판까지 맡아 앞으로는 자기들이 그 물건들을 한국 시장에 독점적으로 공급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들이 얘기하는 제품들은 한국 지사인 우리가 국내 대리점들을 통해서 공급하고 있는 물건들이다. 만일 전단지 주장처럼 된다면 지금까지 시장을 열심히 개척해 온 우리 국내 대리점들은 어떻게 될 것이며 그들의 판매 활동을 지원하는 우리 한국 지사 그 분야 담당 팀원들은 또 어찌 된다는 말인가. 전단지에 적힌 내용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런데 서울 장안에 전단지가 살포된 지 얼마 뒤, 그 뚱딴지 같은 소문이 자칫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고 우려할 만한 일이 일어났다. 우리 미국 본사 높은 분이 서울의 한 호텔에 와 있다며 나를 좀 만나자고 연락이 온 것이었다. 예감이 이상했기에 나는 얼마 전에 팀원이 가지고 왔던 예의 그 전단지를 속주머니에 넣고 호텔로 갔다.
명함을 교환하면서 보았더니 미국에서 온 손님들은 두 팀이었다. 한쪽은 우리 미국 본사에서 나온 이사였고, 다른 한쪽은 LA에 본사를 두고 있다는 바로 그 전단지를 뿌린 회사의 미국인 회장과 한국 교포 부사장이었다. 한눈에 간사스럽게 생긴 한국 교포 부사장이라는 사람은 명함을 주면서 우리말로 자기를 소개했는데 어쩐지 문제의 전단지가 그의 소행이겠다는 의혹이 강하게 들었다.
우리 본사에서 온 이사는 내게 자기네들이 서울에 온 이유를 설명해 주었는데 요약하면 “함께 온 이분들은 오래전부터 LA 지역에서 우리 회사 제품을 판매해 오고 있는데 앞으로 한국의 영업도 해보고 싶어 한다. 이 아이디어에 대해서 그 분야 한국 영업을 맡고 있는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냐?” 하는 질문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에는 그 분야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한국 팀원들의 얼굴이 스쳐갔고 미국 본사도 잘 되어야겠지만 한국 지사도 잘 되어야 하고, 우리 팀도, 또 한국 대리점들도 다 공평하게 잘 되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는 지금 다섯 곳의 대리점들이 있으며, 실적은 이러저러하다고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 가지고 간 전단지를 꺼내서 본사에서 나온 이사에게 보여주었다. 그가 한글로 된 전단지를 받으며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에서는 대리점들이 어떤 전략으로 영업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거짓말을 해서는 절대로 고객들의 신뢰를 얻을 수가 없다. 이 전단지를 보면 이 분야 한국 영업은 LA에 있는 이 회사가 독점적으로 하도록 결정되었다고 쓰여 있는데 그건 거짓말 아니냐. 나는 사업을 함께 해보자고 하면서 거짓말부터 시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고, 이미 한국 고객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시장을 혼란스럽게 한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사업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말하는 그 아이디어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 설명을 듣고 난 뒤에 우리 본사에서 나온 이사는 내가 준 전단지를 LA 회사 회장에게 보여주며 뭔가 가만가만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LA 회사 회장은 깜짝 놀라며 안색이 창백해졌다. LA 회사 회장은 전단지를 함께 온 재미 교포 부사장에게 건네며 왜 이런 거짓말을 했느냐고 질책하는 것 같았고 재미 교포 부사장은 대답을 못하고 얼굴이 빨개져서 쩔쩔맸다. 그런 뒤, 나를 째려보는 그의 두 눈 속에는 원망이 부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본사에서 온 이사와 LA 회사 회장은 둘이서 또 한동안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우리 본사에서 온 이사가 내게 말했다.
“거짓 전단지를 만들어 시장에 뿌렸다는 사실은 나도 이해할 수가 없다. LA 회사 회장은 자기도 몰랐던 일이 벌어졌다며 함께 온 부사장에게 화를 냈고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있다. 그러니 LA 회사를 총판으로 한다는 전단지의 내용은 무시해도 좋겠다. 그렇게 하고, 한국에는 기존의 대리점이 다섯 회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LA 회사를 여섯 번째 대리점으로 추가해 주는 것은 고려해 볼 수 있겠나? 그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것도 같은 이유로 반대한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우리 본사에서 온 이사와 LA 회사 회장이 다시 얘기를 나누더니 우리 본사에서 온 이사가 내게 말했다.
“잘 알겠다. 시간 내주어서 고맙다.”
회의는 그렇게 싱겁게 끝났다.
미국에서 큰 회사의 높은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우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만큼 그들은 시간을 값있게 사용하며 그들이 내리는 판단은 날카롭다. 처음 나는 그런 분들이 서울까지 날아와서 고급 호텔에 머물면서 이런 일들이나 하고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니 그들도 한국인 재미 교포 부사장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 아닌가. LA 회사 회장이 뒤늦게나마 사태를 파악하고 거짓말한 것에 대해 우리 회사에 정중히 사과한 것과 한국 진출 사업을 즉석에서 군말 없이 포기한 것 등은 선진국 사람다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진국 사람들보다 거짓말에 대한 감각이 무딘 것 같다. 2025년 우리나라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짓말이 화두가 되었다. 웬만한 거짓말은 해도 괜찮다고 오해할 만한 판결이 나와서 나라가 들끓기도 했다. 선진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서 거짓말에 관대하다는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코리안 타임’을 언제 그런 것이 있었느냐는 듯 깨끗이 없애버린 우리다. 이제 거짓말하는 습관도 그렇게 날려버려야 하지 않을까?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