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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묵은 상(床)에 대하여

우리 집엔 낡은 호마이카 상이 하나 있다. 남편의 대학 시절 희읍스레한 여명이 스며들 때까지 하숙방의 불을 밝히던 학구열의 산증인인 이 상은 우리 부부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남편의 손때 묻은 전공 서적과 함께 우리의 신혼에 동참하게 된 이 상은 귀퉁이가 마모되고 칠이 벗겨진 내 타박의 대상이었다. 반짝반짝한 새 가구들과 그 신분이 걸맞지 않고 책상까

  • 김세희(본명·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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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지구촌 시골 마을에서

약수터 가는 길, 숲정이에서 꿩 한 마리가 솟구쳤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얼떨결에 ‘깜짝이야’ 하고 소리쳤다. 놀라긴 했어도 얼마 만에 보는 꿩인지 반가웠다.초등학교 5학년 때다. 사냥하는 아버지 친구분이 꿩 한 마리를 허리춤에 매달고 오셨다.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장끼가 수꿩이라는 걸 알았다. 참새나 까치, 종다리, 비둘기 등 농촌에 흔한 텃새

  • 조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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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땡큐’의미학(美學), 삶을 물들이다

오래전,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당시 외국 영화를 볼 기회란 일 년에 한두 번, 학교에서 단체 관람으로 극장에 보내 주는 게 고작이었다. 영화에서 보는 외국 풍경은 고층 빌딩과 물결치듯 흘러가는 자동차의 행렬 등 모든 것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영화에 빠져들면서도 내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던 건 그들의 특이한 생활 문화 두 가지였

  • 이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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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을왕리에서 이숙 선생님을 기리며

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창밖으로만 바라다보고 살아온 시간이 오래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아픈 다리로 세상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깥세상과의 단절은 살아가는 의미도 희망도 모두 내려놓은 삶이었다. 그것은 곧 절망으로도 다가왔다. 보고 싶은 인연들과의 단절은 나로 하여금 마음의 서러운 씨앗 하나를 심고 살아가는 형국이었다. 오늘은 용기를 내어 딸들을 따

  • 신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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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아빠를 닮았어요

정아는 아빠를 쏙 빼닮아서 아빠가 얼마나 귀여워해 줬는지 몰라요. 기분이 좋아서 아빠의 어깨를 안마해 드린 적도 많았어요. 어떤 날에는 아빠의 발을 씻겨 드리기도 하고 구두도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닦아 드렸죠. 아빠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셨죠.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정아와 아빠 사이는 좀 서먹해지기 시작했어요. 딱딱하고 웃지도

  • 이정순(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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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엄마의 두 번째 스무 살

엄마가 뿔났다. 내가 내뱉은 바른 말 탓이지. 어쩌면 좋아?“아휴! 엄마가 아무리 바빠도 오늘 가봐야겠지? 우리 딸 수업 참관인데….”마트에서 일하는 엄마가 동동걸음으로 왔다 갈 일이 마음에 걸려 ‘엄마는 젊어 보이는 옷도 없으면서… 안 와도 돼요’ 했는데 엄마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사라지더니 먼저 출근해 버렸다.그러더니 5학년 1반 교실에 오시지 않았다.

  • 박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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