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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왕리에서 이숙 선생님을 기리며

한국문인협회 로고 신미자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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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이 바뀌는 모습을 창밖으로만 바라다보고 살아온 시간이 오래된다. 누구의 도움 없이는 아픈 다리로 세상을 마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깥세상과의 단절은 살아가는 의미도 희망도 모두 내려놓은 삶이었다. 그것은 곧 절망으로도 다가왔다. 보고 싶은 인연들과의 단절은 나로 하여금 마음의 서러운 씨앗 하나를 심고 살아가는 형국이었다. 오늘은 용기를 내어 딸들을 따라 나서기로 한다. 봄기운이 몰고 온 밖은 어느새 꽃들이 만발하여 눈을 시리게 한다. 이 꽃들의 향연은 절망하고 살았던 나의 시간을 깡그리 잊게 한다. 오랜만에 집이 아닌 밖의 공기를 마주하니 살아 있었다는 것에 이렇듯 감사할 수가 없다.
나는 지금 을왕리로 가는 중이다. 을왕리에는 남편과의 추억도 있지만, 고인이 된 이숙 선생님과의 추억이 더 많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나는 선생님의 부음을 듣고도 참석하지를 못했다. 허리 골절로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마지막 배웅을 못 해 드려 지금까지 마음 한구석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그 아픔을 삭이기 위해 절룩거리는 발걸음으로 선생님과 있었던, 이제는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는 것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선생님은 나의 영혼의 지주와도 같은 분이셨다.
선생님 생전에 나에게 나의 죽음에 부의금을 들고 오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유언이 될 줄은 생각이나 했겠는가, 나의 조그마한 보살핌이 선생님에게는 부담이 된 것은 아닐까 하여 망설여질 때도 종종 있었다. 선생님과 나의 관계는 혈육 못지않은 끈끈한 관계여서 섭섭한 감정들이 이입될 수가 없었음에도 머뭇거릴 때가 있었다.
내가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신사임당 백일장에서 입상한 사람들의 모임인 시문회에서였다. 나는 그때 선생님이 인천에 살고 계신 것도 모를 때였다. 그때부터 인연이 시작되어 나는 선생님으로 인해 문단에 나오게 되었고, 선생님의 고마운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선생님을 인천 문인협회로 이끌어 인천시 문화상을 수상하는 데 도움을 드렸다. 선생님은 인천 여류 문학의 불모지인 인천에서 문학지를 10집까지 출간하는 기염을 토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하셨다. 다음 호를 나에게 맡기려는 것을 능력의 부재를 강조하며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다음 호를 잇지 못하고 마무리를 짓게 되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누구 하나 선생님처럼 희생하며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늘 선생님과 함께 있었다. 선생님이 서울에 일이 없으시면 우리는 늘 함께였다. 어떤 시인은 너는 아직도 이숙을 쫓아다니냐며 비아냥거리며 못마땅한 모습을 드러내곤 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나의 남편과도 인연이 깊다. 남편이 외항선 선장을 끝으로 사회에 나와 해양 청소년이란 단체를 이끌고 있을 때 선생님과의 만남을 자주 가졌다. 남편은 중국 위해시 장보고 유적지에 비석을 세우기를 원했다. 선생님은 기꺼이 응하시어 윤모천 선생님이 글을 짓고 이숙 선생님이 붓글씨를 써서 비석을 세웠다. 후일 위해시를 가보니 협소한 장소였지만 두 분의 손길이 미친 비석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비석에 두 분 선생님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두 분에 대한 그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선생님이 이사를 가시면서 더는 만남을 갖지 못했다. 더욱이 남편의 병이 깊어 입원하고 있을 때라 배웅도 해 드리지 못했다. 선생님의 안부가 궁금하고 선생님을 만나서 나의 고통을 호소도 하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어 안타까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때마침 걸려 오는 선생님의 안부 전화는 절망 속에 있는 나를 구원하는 구세주와도 같았다. 선생님은 노구에 문밖을 나서지 못하는 이유를 대시며 몹시 아쉬워하셨다. 남편의 부음을 들으셨을 때는 아직도 젊은데 갔다면서 몹시 안타까워하셨다. 마지막 가는 길이 궁금했던지 묻고 또 물으셨다. 선생님의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나는 나의 서러운 마음을 다잡기도 했었다. 나의 서러움이 선생님께 전이되면 더욱 아파하실 것만 같아서이다.
누군가 교통비로 쓰시라고 성의를 보이면 당신보다 더 궁핍한 사람을 주셨던 선생님이시다. 시인 낭승만 선생님을 만나는 날엔 선생님은 망설임 없이 도움을 주셨다. 나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이 좋았다. 당신도 여유롭지 못한데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그런 모습을 배우고 싶었다.
을왕리는 선생님과 있었던 추억의 장소를 찾기 어려운 곳으로 변해 있다. 상전벽해가 돼버린 이곳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찾는다는 것은 무리가 가는 일이다.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며 죽을힘을 다하며 이 길에서 주섬주섬 추억을 가슴에 주워 담는다.
나는 이 길에서 선생님의 살아오신 이야기들을 자주 들었다. 평탄치 못했던 삶의 여정을 들으면서 선생님이 살아오신 삶에 경의를 표하고 눈물을 훔치곤 했었다. 선생님은 나는 항상 길 위에 있었다고 하시면서도 긍정의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나는 오늘 선생님이 나에게 끼워 주신 바다색과 어울리는 반지를 끼고 왔다. 빛바랜 모조품 반지이지만 선생님과의 각별했던 인연을 잊지 않기 위해서 깊숙이 보관했던 것을 꺼내 끼고 온 것이다. 반지에는 선생님의 모습이 각인되어 있어 선생님이 더욱 보고 싶어진다.
또 하나의 추억을 묻어두고 이 자리를 떠나려고 하니 아픔이 몰려온다. 이 길에 다시 설 수 있는 시간을 약속할 수 없는 나이기 때문이다. 선생님과 함께 불렀던 사우(思友)가 파도를 타고 내 귓가에 맴돈다.
봄에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이 길에 선생님과의 고귀했던 인연을 이제는 놓고 가련다. 다음 생애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인연으로 이어가길 염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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