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11
0
약수터 가는 길, 숲정이에서 꿩 한 마리가 솟구쳤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얼떨결에 ‘깜짝이야’ 하고 소리쳤다. 놀라긴 했어도 얼마 만에 보는 꿩인지 반가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다. 사냥하는 아버지 친구분이 꿩 한 마리를 허리춤에 매달고 오셨다. 두 분이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장끼가 수꿩이라는 걸 알았다. 참새나 까치, 종다리, 비둘기 등 농촌에 흔한 텃새를 보다가 이름도 생소했고 예쁜 깃털을 가진 새는 처음이라서 자세히 보았다.
내 인기척에 도망친 겁쟁이 꿩도 덩치가 크고 몸 전체가 화려한 모습이 장끼다. 장끼는 암꿩(까투리)보다 꼬리가 길다. 양 볼을 덮고 늘어진 육수(肉垂)는 연지를 바른 것처럼 진홍색이다. 머리는 암녹색이며 목덜미에는 사철 백색 띠를 둘렀다. 새들은 높이 날아다니며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 세상을 보았을 텐데, 어려서 본 차림과 육십여 년이 흐른 지금도 그대로다.
우리 가족이 몇 년째 신세를 지는 약수터 이름은 ‘무지개’다. 마지막 구간은 기울기가 심해 서너 번은 등산 지팡이에 의지하여 허리를 폈다가 간다. 쉬엄쉬엄 고갯마루 중간쯤 올라갔다. 멀리서도 무언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식용할 수 있으며 버섯 중 여왕, 드레스 버섯이라는 별칭을 가진 노랑망태버섯이다.
어떤 귀여운 곤충과 약속이라도 한 걸까. 수줍은지 특이한 문양을 새긴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노란 색실로 벌집무늬를 넣어 코바늘로 짠 듯한 망토를 걸쳤는데, 양쪽 어깨선을 따라 봉긋이 살려서 입었다. 전문 디자이너 솜씨처럼 완벽하다. 나무 아래가 습해서 통풍이 잘되라고 그랬는지 숭숭 뚫린 벌집무늬 사이로 뽀얗고 통통한 외다리가 얼비친다. 속옷을 안 입었어도 흉하지 않다.
어디쯤에선가 뻐꾸기 소리가 흥에 넘친다. 뻐꾸기는 둥지를 틀지 않고 ‘붉은머리오목눈이’ 둥지에 알을 낳아 키운다고 미운털이 박힌 새이다. 둥지 주인한테 허락도 받지 않고 부화와 육아를 맡긴다니 얄밉지 않은가. 천연덕스럽도록 내뿜는 저 구성진 목청도 지난해 ‘붉은머리오목눈이’ 둥지에 키운 꺼병이(꿩의 어린 새끼) 첫돌 잔치라도 벌이는 것 같아 귀에 거슬린다. 전후 사연을 모르는 멧비둘기는 같은 산에 사는 이웃이라고 골짝에 모여 축가를 불러주는가 보다. 구구, 구구, 첫 음은 활발하고 후렴은 약한 음으로 주고받는다.
이 산은 소나무와 잣나무, 야생화가 어울려 숲을 이루었다. 덤부렁듬쑥에는 짐승과 곤충, 야생식물이 살기 적당한 안식처다. 우리 가족 안주처(安住處)도 그 뒷산 자락에 자리 잡았다. 넓고도 넓다는 지구촌 한 귀퉁이에 키 작은 촌로(村老)를 닮은 단층 주택이다.
변두리로 이사했다는 걸 알고 친구가 전화했다. 무엇이 가장 불편하냐고 묻기에 장점이 더 많다고 자랑했다. ‘운동 삼아 걸어가기 적당한 거리에 약수터가 몇 개나 있어서 산행은 덤이다. 물줄기는 가뭄에도 멈출 줄 모른다. 물고기가 뛰어노는 시냇물과 징검다리는 물장구치던 유년으로 돌아가게 한다. 좁다란 화단에 상추와 고추를 키워 식탁에 올린다. 오일장에 가서는 싸고 싱싱한 먹을거리에 시골 인심까지 얹어 온다’고 했다.
한 열흘 지났을 즈음, 내 말이 허풍인 줄 알았는지 친구가 집알이를 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는 내내 침묵했다. 오래뜰이나 담 곁에라도 과실나무가 한두 종류는 있으리라 기대했던 모양이다. 나무는 없고 옆집 지붕과 하늘만 보여 실망하는 눈치다. 한동안 인기 좋았던 전원주택이겠지 했다가 실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디에 살아도 장단점은 있는 법, 맑은 공기와 조용함을 선택한 대가로 다소 불편한 점은 감내하기로 했다.
현관과 주방 창문을 통해 꽃밭에 화초가 다 보여 만족한다. 3월이 되면 꽃밭에서 월동한 금낭화와 국화가 선두로 줄기를 세우고 살랑거린다. 뒤따라 터줏대감인 패랭이, 비올라, 매발톱이 나도 살아 있다며 인사한다. 꽃이 피자마자 나는 사진 찍고 눈 맞추기 바쁘다.
봄에는 뒷산에서 송홧가루가 날아와 장독대 소래기마다 물들인다. 할머니 생각이 간절하다. 다식판에 찍어주는 송화다식을 받아먹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늙었나 싶어 애꿎은 송홧가루를 찍어 맛을 본다. 꽃이 피었다고 기뻐한 시간이 잠깐이듯 모든 건 잠시 머물다 떠나는 것을 어쩌리.
도시생활을 해 본 결과, 매연과 소음으로 건강과 정신이 고달팠다. 알고도 사십여 년 휘둘렸다. 시야를 가로막는 건물에 갇혔어도 편리하다는 이유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어디를 가나 꼬리를 물고 속력을 내는 자동차는 위험 자체다. 차가 뜸한 이곳에 와서야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공기를 마음 놓고 마신다.
내 발짝 소리에 놀라서 자리를 떠난 장끼처럼 나도 옮겨 다니다가 혈육도 친구도 없는 시골로 왔다. 여기가 종착지이기를 바란다. 삶과 계약이 끝나는 날은 따뜻하게 품어주어 고마웠다고 자연에 인사 남기고 떠나련다. 지구촌 조용한 어느 마을에 세 들어 아름답게 살았다는 추억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