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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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낡은 호마이카 상이 하나 있다. 남편의 대학 시절 희읍스레한 여명이 스며들 때까지 하숙방의 불을 밝히던 학구열의 산증인인 이 상은 우리 부부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깊다.
남편의 손때 묻은 전공 서적과 함께 우리의 신혼에 동참하게 된 이 상은 귀퉁이가 마모되고 칠이 벗겨진 내 타박의 대상이었다. 반짝반짝한 새 가구들과 그 신분이 걸맞지 않고 책상까지 혼수로 해 온 터라 남편에게 내다 버릴 것을 종용했다. 그때마다 남편은 그 상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에 장학금을 받았던 일이며, 나에게 장문의 연애 편지를 쓰던 일들을 상기시키며 그 추억의 시간을 함께 공유하기 원했다.
부부는 일심동체라더니 어느새 남편이 아끼는 그 상이 다정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방 한쪽에 펴 놓고 밥상 겸, 따끈한 차 한잔의 다탁으로, 추운 겨울날 책상에 앉기가 어설플 땐 책상으로서도 한몫했다.
몇 해 전 친정에서 낡은 고가를 대대적으로 보수를 해서 내부를 현대적으로 개조하였다. 재래식 부엌 구조에 늘 불편해했던 어머니는 언제부턴가 실용적인 부엌의 설계도를 머릿속에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곤 집을 개축할 때 그 설계도면을 유감없이 적용하였다.
단순한 부엌에서 주방과 거실의 다기능 주방으로 개조한 것이다. 그런데 싱크대 옆에 워낙 낡아서 없앴을 거라는 나의 예상과는 달리 사개가 비틀리고 돌쩌귀가 깨지고 서랍이 비틀어진 찬장이 그대로 서 있었다.
문득 그 찬장에 스며 있는 내 유년의 기억들이 생각났다. 어린 시절 부뚜막 제일 왼쪽에는 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맨 아래 서랍에는 어머니의 비자금과 치부책 그리고 우리에게 지급될 용돈 등이 들어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동전 한 닢도 엄격하게 용도를 따져 물었다. 자식들에게 논공행상을 거쳐 차등 지급하는 방법으로 어릴 때부터 검약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혹 어머니께서 잔돈을 미처 치우지 못하고 찬장 옆에 그대로 두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눈독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어느 날 동생과 나는 그 잔돈을 슬그머니 찬장 밑으로 밀쳐 넣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어머니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싶을 때 몰래 꺼냈던 불로소득의 경험이 몇 번 있었다. 그 동전으로 군것질을 할 때의 콩닥거리던 가슴, 그날 저녁 밥상에서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기억, 그날따라 나에게 더욱 살갑게 대하시던 어머니.
어머니의 의도였든 아니든 무안함과 죄책감으로 울음을 터뜨릴 뻔했던 ‘찬장의 동전 사건’은 나에게 불로소득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그렇게 어머니의 찬장은 자식들의 훈육 가구이기도 하였다.
어머니의 결혼생활 내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단 하나의 노후 가구인 찬장은 비록 낡았지만 고풍스러움으로 부엌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듯했다.
어머니는 그와 마주할 때면 헝겊에 실백(實柏)을 싸서는 윤내기를 즐기셨다. 당신의 인생 도정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온 애호(愛好) 심리를 내 어찌 다 헤아리랴. 어느 무명의 공인이 정성 들여 만들었을 진실의 예술혼이 깃든 고가구는 구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분신으로서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며 무언의 진리를 전해 주는 것 같았다.
작은 평수에서 큰 평수로 이사할 때 몇 년간의 정이 들었을 가구들을 고스란히 버리고 가는 광경을 주위에서 가끔 본다. 우린 너무 묵혀 가는 일에 소홀한 것은 아닐까. 월부 판매의 요란한 선전에 현혹된 외유내빈의 고급 가구를 들이는 시류에 편승해 상업 수단으로 만들어진 가구들에선 일시적인 감흥만 있을 뿐 애완(愛玩)될 순 없다.
단 하나의 예쁜 소반을 만들기 위해 생애를 걸고 칠의 세계를 예매던 공인들의 단아하고 소박한 공예 감각, 참빗과 죽선 따위를 가지고 장날을 찾아다니던 도붓장수들은 이제는 먼먼 옛날 일로 기억될 뿐이다.
우리 결혼의 연륜만큼이나 세월의 이끼가 앉고 애정의 진이 진득하니 배어든 이 하나의 상을 새삼 챙겨 보았다. 지나간 시절의 생활을 그대로 담고 있는 이 낡은 상은 어떠한 표현으로도 미진한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