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엄마의 두 번째 스무 살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경선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조회수11

좋아요0

엄마가 뿔났다. 내가 내뱉은 바른 말 탓이지. 어쩌면 좋아?
“아휴! 엄마가 아무리 바빠도 오늘 가봐야겠지? 우리 딸 수업 참관인데….”
마트에서 일하는 엄마가 동동걸음으로 왔다 갈 일이 마음에 걸려 ‘엄마는 젊어 보이는 옷도 없으면서… 안 와도 돼요’ 했는데 엄마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사라지더니 먼저 출근해 버렸다.
그러더니 5학년 1반 교실에 오시지 않았다. 저녁에 ‘엄마보다 더 나이 많은 엄마도 많더라고요’ 하려고 했는데 졸음을 못 참고 엄마보다 먼저 자버렸다.

 

아침에는 엄마 얼굴 볼 용기가 없어서 아침밥도 안 먹고 나와 버렸다. 사실 어제 내 짝 상미가 할머니 같은 사람을 보고 ‘엄마’ 하며 달려가서 놀랐다. 알고 보니 상미뿐 아니라 우영이, 은숙이 엄마도 우리 엄마보다 나이가 많아 할머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친구들 엄마보다 훨씬 젊은 우리 엄마가 늙었다고 싫어했으니. 우리 엄마는 머리도 한 갈래로 질끈 묶어 다니고, 화장도 잘 안 하고, 옷도 편한 옷만 입고 다녀 그렇지만, 내 친구들 엄마보다는 젊은 편이다.
어쨌든 큰일이다. 내일이 엄마 생신인데. 종일 걱정하다가 학교 마치자마자 아빠를 찾아갔다. 아빠가 생선 상자를 트럭에 실으면서 앞에 서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떼돈을 얹어 줘도 오늘은 물건이 없어요. 이 바닥에서는 약속과 신용이 재산이라서.”
그러자 험상궂은 남자가 ‘이깟 게 뭐라고 똥폼이야?’ 하면서 생선 상자를 발로 찼다.
“허허! 발로 차면 생선도 놀라 내장이 튀어나와요. 보슈. 놀라서 펄쩍 뛰는 것 안 보이남요?”
화를 참고 비위 좋게 넘기는 아빠의 너스레에 남자가 술 냄새를 풍기며 ‘흥!’ 코웃음 치며 지나가자, 내 다리는 얼어붙었지만 마음은 남자의 앞을 가로막고 말했다.
‘아저씨, 우리 아빠한테 왜 코웃음 쳐요? 고기도 놀라게 발길질했으니, 당신을 불량배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당신이 말할 모든 것은 법정에서….’
내가 상상으로 불량배에게 수갑을 채우는 중인데, 아빠가 배달할 상자를 다 싣고 차에 타려고 했다. 달려가 좀 태워 달라고 했더니 ‘우리 공주가 웬일이냐?’ 하면서 나를 덥석 안아 높은 트럭에 태워 주었다. 옆자리에 앉아서 보니 아빠 옷에서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얼른 커야 할 것 같았다. 변호사가 되어 돈을 벌면 아빠한테 다 드릴 거다. 그렇지만 내가 엄마를 뿔나게 했다는 사실을 알면, 당장 나를 아무 데나 버려 두고 갈지도 몰라. (아빠는 늘 엄마 편이니까) ‘헨젤과 그레텔’처럼 버려지면 찾아가려고 도로 표지판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아빠가 ‘도로 지명 공부하러 나왔냐?’ 물어서 ‘아빠, 나 버려 두고 가지 마!’ 부탁부터 하면서 엄마 뿔나게 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빠는 잠자코 듣고 있더니 손 전화기를 내게 넘겨 주었다.
“부르는 대로 적어서 엄마한테 보내 봐! ‘공주님이 마님을 속상하게 했소? 버리고 갈까?’”
“아빠, 너무해요. 정말 버리고 오라 하면 어떡해요?”
“문자 보내긴 보냈지? 가정의 평화를 위해 마님 처분대로 따라야지. 이참에 너도 젊은 엄마 찾아갈 자유를 얻으면 축하할 일이지.”
비꼬는 투로 들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수길에 늘어선 벚꽃들도 ‘젊은 엄마 만나니? 축하, 축하해!’ 뭣 모르고 축하해 주며 꽃잎을 흩뿌리고 있었다. 세상에 나 혼자만 외톨이야! 서러워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빠가 손수건을 건네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너 옛날 이야기 좋아하지? 옛날 옛적에 말이야. 어둑어둑한 시골길에 더벅머리 총각이 차를 몰고 문경새재를 넘는데 말이야. 여우골에서 뛰쳐나온 여우 귀신이 차 앞을 가로막는 거야. 얼굴을 보면 아가씨인데, 등허리까지 치렁치렁 내려온 긴 머리로 여우 꼬리를 감추고 있었어. 어디든 버스 타는 곳까지만 좀 태워 달라잖아. 어디까지 가느냐고 물었더니 총각이 가는 곳과 같았어. 하지만 곧바로 휴게소가 보여 차를 세워 잘 가라고 했어. 여우 아가씨는 ‘저 혼자 내리라고요?’ 되묻는 거야. 총각이 기가 차서 ‘그럼 내 차인데 차 두고 내가 아가씨를 따라 내릴까요?’ 했더니 ‘죄송해요. 실은 처음 보는 남자가 따라와서요. 밖은 너무 어둡네요’ 하며 울먹울먹했어.”
그때 엄마 손전화기의 애칭 ‘나의 하느님’ 알림음이 울렸다. 내가 문자를 급히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읽었다. ‘하느님, 무슨 그런 끔찍한 말씀? 기쁨이랑 같이 있죠? 데이트 잘 ♡’ 나는 눈치 빠른 엄마의 ♡를 보며 새삼 눈물이 줄줄 흐르는데 아빠는 벙글벙글 웃었다.
“하하하! 하마터면 기쁨이를 버렸다고 내가 쫓겨날 뻔했네. 어디까지 했지? 그래. 처음 보는 남자가 따라온다고 했지? ‘나도 처음 보는 남자인데 믿을 수 있겠어요?’ 했더니, 차 앞에 성모상이 달려 있어 믿고 탔다네. 별수 없이 총각은 성모님 마음으로 철없는 아가씨를 집 앞까지 안전하게 태워 주었지.”
“호호! 착한 총각과 철없는 아가씨가 사귀면 좋은데.”
내가 눈물을 닦으며 끼어들었다.
“나이 차이가 컸어. 그 아가씨는 스무 살, 총각은 서른 살이었지.”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아가씨가 철이 없어 총각이 계속 골탕 먹는 이야기로 써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그럴까? 그런데 실제 같이 살면 골치 아프지 않을까? 우선, 네 엄마처럼 스무 살에 결혼해도, 아이를 못 낳아서 서른 살에 낳으면, 아이가 열 살일 때, 엄마는 마흔 살인데 아이가 괜찮아하겠냐?”
“어머, 지금 우리 엄마도 마흔 살이잖아요. 나도 열 살인데. 어? 지금 이야기! 엄마, 아빠의 첫사랑 이야기지요. 맞죠?”
“그래,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지. 십 년 만에 얻은 넌 세상에 다시 없는 기쁜 선물이지.”
“그래서 내 이름을 ‘기쁨’이라고 지었군요.”
입덧과 대상포진으로 죽을 지경이라도 엄마는 약도 안 먹고 나를 포기하지 않았단다. 나는 부끄러웠다.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가 늙었다는 생각만 했으니.
“요즘 노총각이 좀 많으냐? 노총각을 구해 준 네 엄마가 내겐 아직도 스무 살로 보인다. 누구에게나 풋풋했던 스무 살 청춘은 있는 거란다. 하하하!”
나는 아빠가 좋아하는 엄마의 스무 살 처녀 때를 그려 보았다. 긴 머리 엄마는 화장은 안 해도, 눈웃음 살살 치고 마음이 고운 여자라서 반했겠다. 엄마도 아빠랑 사귈 때, 재미있고 마음이 고운 남자라서 반했다고 했다. 서로가 고운 눈으로 보면 사랑하게 되나 보다. 나도 커서 아빠처럼 재미있고 마음씨 고운 남자를 만나면 고운 눈으로 보고 싶다.
“저기 제과점 보이지? 아빠 일할 동안 가서 네 엄마 두 번째 스무 살 케이크 하나 사 와!”
아빠는 맛집 식당 앞에 차를 세우며 카드를 넘겨주었다.
“어떤 케이크를 사지요?”
“스무 살에 잘 어울리려면, 핑크색이나 빨간색? 그런 케이크가 있으려나….”
아빠가 나를 안아 트럭에서 내려놓자 ‘딸기 케이크’ 생각이 딱 떠올랐다. 새콤달콤한 딸기 맛 생각에 침샘이 먼저 마중 나와 침을 잘잘 흘리며 제과점으로 달려갔을 때, 나는 첫눈에 만났다. 초콜릿 색 동그란 케이크 위에 오송송 모여서 웃고 있는 빨간 딸기 케이크! 그것은 햇볕에 그을린 아빠 얼굴을 보며, 수줍게 볼 붉히며 웃는 엄마 얼굴로 보였다.
“이 케이크 주세요. 축하 초는 스무 개요. 우리 엄마의 두 번째 스무 살을 축하할 거예요.”
친구들 엄마에 비하면 훨씬 젊은 우리 엄마가 자랑스러워 일부러 묻지도 않은 말을 했다. 제과점 언니는 축하 폭죽도 챙겨주었다. 나는 케이크 옆에 살짝 곁들여 놓을 나의 축하 카드도 생각해 봤다. ‘긴 머리 엄마의 두 번째 스무 살 생신을 축하합니다!’ 이 카드만 봐도 엄마는 ‘내가 스무 살이라고?’ 하며 깔깔깔 웃겠지. 이모네 가게 일을 도와주어 얻은 돈으로, 별러 왔던 영양 크림을 사 드릴 거다. 돈이 남으면 아빠 손에 바를 핸드크림도 하나 사 드려야지.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