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석 덮개를 벗기니도톰한 스펀지에 머리카락 박혀 있다 가늘고 긴, 제 할 일 다한검은 실오라기박음질되어 있다 바늘을 꿴 것도 아닌데혼신 힘으로스펀지 속으로 대가리를 밀어 넣은 저 머리카락이 지향할 곳은 어디인가 부드러워 더 막막한 벽 앞에서 검은 생애를 가늠해 본다끝내 이루지 못한 꿈그 한 조각이 닿아 있는 한
- 안춘화
방석 덮개를 벗기니도톰한 스펀지에 머리카락 박혀 있다 가늘고 긴, 제 할 일 다한검은 실오라기박음질되어 있다 바늘을 꿴 것도 아닌데혼신 힘으로스펀지 속으로 대가리를 밀어 넣은 저 머리카락이 지향할 곳은 어디인가 부드러워 더 막막한 벽 앞에서 검은 생애를 가늠해 본다끝내 이루지 못한 꿈그 한 조각이 닿아 있는 한
돌담에 맨드라미가 피어 있다 어둠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깨알 같은 씨앗이 꼼지락거려 흙더미에 꽃을 피어내는 어떤 간절함이 있었을까 한 줌 흙 속에 버젓이 피워내는 지혜돌담에 흙을 누가 놓았을까요? 햇빛 한 조각으로 줄기를 만들어 줄곧 자라 뿌리 내린 순수한 도약력 바람에 휠 때마다 꺾이지 않고 자란 것은&
초록이 내려놓는 기운을비상하게 눈치를 챈 거미들넓어진 바람길로 부산스럽다온 천지 뒤적이며제집 키우는 일이 한창인 젊은것들수군거리는 비밀 이야기 계절로 건너가는 공간의 어디쯤에서삶이 식어 갈 때쯤냉기 오를 채비를 서두르는 대지의 주인들 배롱나무 붉은 그늘에서도삶의 채도 낮추는 준비 서두른다 치열했던 함성만큼이나서늘한 화성이 깊어지고
밤새 향동 마을은말없이 눈을 받아 적었다 날씨마저 온순해진 공기 속에서세상은 숨을 고르고소나무는 하얀 모자를 눌러쓴 채 서 있었다 그때 천(川)에서 날아온두루미 한 마리 하늘의 마지막문장을 접어 소나무 위에 내려놓는다 눈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고날개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 하얀 날개를 펴고스스로를 아름답다고 인정하
팔공산 정기 서린 햇살 고운 군위 땅 푸른 절개 살아 숨쉬는 화본리충의공 엄흥도 선영 일연선사의 얼, 삼국유사 향기 깃든 곳 달빛 별빛 벗 삼아 지낸 오백오십년 세월 누구를 위한 기다림이고누구를 위한 몸부림이었을까 몸은 낮은 곳에 묻혔어도충절은 하늘 끝에 닿았던 시대의 등불, 아! 충의공 엄흥도
지나온 날들이한꺼번에 깨어나는 순간비틀린 사실에 갇혀 있던 몸통증은 이미다른 시간 속에서 아물고 있었다 새벽을 건너어둠을 달리던 발걸음이 선명해지고 내딛을 때마다 길어지던 그림자 천천히 안으로 돌아와이별을 쓰다듬는다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충분하다 잎보다 꽃이 먼저 터진 목련, 묻지 않는다&nbs
동구 밖 언덕 너머비탈진 과수원길배꽃이 눈처럼 하얗게 필 무렵 어스름 초승달이산마루에 걸리면아련히 생각나는첫사랑 그 소녀 수줍어 고개 숙인순진한 모습으로저 만치서 그녀가 걸어올 때면 바람은 영락없이과수원을 스쳐가고 꽃잎은 나비가 되어 춤을 추며 날으죠 해마다 이맘때면 그 시절 추억 땜에나도 몰래
섬은 외롭다탈출구가 없는 처녀 총각들의 놀이터어쩌다 눈 맞으면 꼬리 문 소문에온 동네가 시끄럽다 동네 누나 꼬리치다 허리 잡혀밀밭 서너 평은 망쳐 놓고동네 수캐들의 성화에 잠을 설친다 다랑이 농사일에 지친 어르신네 잠 못 이루고 독한 풍연초(豊撚草)만 힘없이 내품어앞바다 어붓배 불 밝히면외로움 달래던 처녀 총각들 잦은 발자국 소리
안개가 겨울을 빨아들이며한랭전선을 북으로 밀어 올리는그쯤,나는 여수를 떠나기로 했다 5년의 휴전을 끝내고다시 도면 위에 설계를 하려고 하니투명한 눈금들 사이로사뭇 정든 사람과 흠뻑 풀물이 든 섬과 섬을붓으로 잇다 보니거친 바다 물감 냄새가 올라왔다 맛집 앞에 길게 늘어선 이방인들을경계에 선 구경꾼처럼 낯설게 바라보기도 했다 운동화
그 산에서 석이를 본 것이 언제였는지 모르겠다 어제도오늘도그골, 골망*엔자글자글한 표피와 관념에 싸인말〔言〕의 포자들이사방으로 퍼지고 있다 개체로 갈라져 무성생식된 목소리가 커질수록 잇속으로만 치닫는 극단(極端) 소나무의 청정한 기(氣)를 받은 실(實)했던 포자마저첨예한 긴장감 속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