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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뻐꾸기시계

벽시계가 졸고 있다. 신혼집들이 선물로 받은 뻐꾸기시계다. 지금은 집마다 시계가 서너 개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삼십여 년 전에는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급전이 필요할 때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면 가격도 톡톡히 쳐주는 귀한 대접을 받던 때도 있었다.색바랜 벽시계는 이제 제 몸조차 지탱하기 힘겨워한다. 거실에서 검붉은 녹이 내려앉은 못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 건

  • 이장희(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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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6월의 오후

나른한 오후다. 세상 만물이 오수에 들었는지 고요하다. 아직 한여름은 도착하지 않았는데 마당의 기운은 습하고 끈적하다. 무심하게 내리쬐는 햇살마저 지루하다.오랜만에 들른 시골집이다. 굳게 잠긴 현관문이 부재중인 주인을 대신해 출입을 막아선다. 낯선 이의 등장에 백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제 밥그릇도 못 알아보는지 찌그러진 양은 냄비가 목줄에 쓸려 마른 먼지

  • 황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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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보랏빛 향수

‘오월의 보랏빛 향수.’ 초록으로 눈 뜨며 일어나는 봄. 그 유혹에 빠져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나의 텃밭 가장자리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고 흙을 사랑하여 텃밭을 구입했다. 들머리 가장자리에는 매화나무가 있어서 꽃샘추위에 하얀 향수를 입에 물고 벌을 유혹한다. 자연은 계절을 어기지 않으며, 꽃 피우는 순서

  • 김유진(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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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길을 나서다

길은 끝없이 길게 이어진다. 길은 직선이 되어 가리마같이 단정하기도 하고, 뱀 같은 몸뚱이로 고불고불 고부라진 곡선이 되기도 하고, 여름의 아스팔트 길은 덥고 지쳐 퍼지기도 한다. 또 길은 꼬리를 감추기도 하는 변화무상한 모습을 보인다. 길은 때로는 하얀 눈길로, 빗발치는 빗길로, 어스름 새벽길로, 밤을 집어삼킨 어두운 얼굴로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길은

  • 이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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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게으름의 미학

퇴직한 후에 집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나태해지고 게으른 생활습관도 함께 찾아오는 것 같다.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료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세월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잘도 흐른다. 잠깐이면 한 달이요. 조금만 더 지나면 일 년이니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 아닌가 싶다. 직장에 다닐 때는 바빠서 못했던 일을

  • 이상수(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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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툇마루의 추억

2024년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덥고 길었다. 나의 고향 김포는 곡창지대였고 특히 우리는 시골 쪽이었다. 열대야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아련한 추억! 그 옛날 학교 종소리 듣고 달려가서, 오후 수업까지 끝나면 가방 둘러메고 새집 털기도 하고, 집게벌레(사슴벌레) 잡으러 다니고 계곡으로 달려가서 차가운 물로 멱감고 가재 잡아 깡통에 넣어 가져와서 구워 먹기도

  • 송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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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주인 되는 법

TV를 켠다. 리모컨으로 자주 보는 채널로 바로 갈 수 있지만 하나씩 순서대로 누른다. 중간중간에 홈쇼핑 채널이 있다. 구입하고 싶은 물건이 있어 찾아본다기보다 습관적으로 그냥 본다. 어느 날 한 쇼핑 방송에 꽂혔다. 젊은 남성 모델이 입은 셔츠가 너무 멋있게 보였다. 저 옷을 입으면 나도 조금은 더 멋스럽게 보일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점을 찍었다.

  • 성장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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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문밖에 있는 그대1)

“씨발, 교통사고래요!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와 냅다 욕부터 내지르는 강현수였다. 인하가 교통사고를 당해 K병원에 와 있다는 것이다.비명과 신음, 의사와 간호사들의 발걸음이 분주한 응급 실에서 인하를 찾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여기저기 두리 번거리다 한 칸막이 커튼을 젖히고 나오는 강현수를 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는 말없이 커튼을 밀치고 칸막이 안으로

  • 권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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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내가 투영된 거울 2

혹시 글 맛을 느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문협에 갈 일이 있을 때 만나는 문우에게 불쑥 묻고 싶은 질문이다. 오래전에 『근원수필』을 여러번 정독하듯 읽었던 적이 있었다. 얇은 부피의 책으로 펜이 끄적이는대로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듯, 물 흐르듯 글을 써내려 간 근원의 글이 좋아 수필가로 등단을 하고 강산이 한번 바뀐 세월이 되어도 마치 교본처럼 곱게 책장에

  • 조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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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K의 마지막 탱고

밀롱가는 K에게 또 하나의 다른 세상이다. K는 선배 민 진호가 운영하는 탱고 카페를 거의 매일 찾다시피 했다. 무엇엔가 단단히 홀려 다른 것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처럼 K는 탱고에 푹 빠져있는 상태였다. K는 강남 역 부근의 탱고 카페 라썬으로 갔다. K는 카페 출입문 앞에 서서 탱고 스텝을 밟았다. 물론 머릿속에서였다. 슬픔이 깃든 정열의 탱고

  • 박해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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