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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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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사는 조카 내외가 귀국을 했다.
남동생의 두 아들 중 큰애인데 2019년 미국에서 치러진 조카의 결혼식에 참석할 때 보고 햇수로 칠 년 만의 만남이다. 그사이 세 자매의 부모가 된 조카 내외는 여섯 살, 다섯 살, 백일 된 딸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맞벌이 부부가 어떻게 시간을 냈느냐 물었더니 셋째 딸의 출산 휴가가 한 달여 남아 있어 틈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체류 기간은 25일 정도인데 첫째 목적이 한국에 있는 양가 친척들에게 두 사람의 아이들을 보여주고 싶어서란다.
이제 갓 백일이 된 갓난 셋째 딸은 아기 바구니에 담겨 잠들어 있고 첫째와 둘째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가 앙증맞도록 귀엽다. 보기만 해도 예쁜 나이인 여섯 살, 다섯 살 두 아이가 영어도 잘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는 애들처럼 한국어를 유창하게 해서 더욱 예뻤다. 조카며느리에게 어찌 이렇게 아이들이 한국어를 잘하냐니까 한국어 유치원을 보내고 있단다. 미국이라는 먼 나라에 살면서도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잊지 않게 하려는 조카 내외의 교육관이 엿보여서 마음이 흐뭇했다.
체류 기간이 꽤 여유 있을 거로 생각해 우리 집에서 하루라도 쉬어가려나 했는데 그게 아니란다. 자주 오기 어려우니 이번 기회에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고 여행하고 싶은 곳이 많아서 미리 계획을 짜서 왔단다. 스케줄대로 움직이느라 바쁘다는 조카 내외는 점심 식사를 포함해 세 시간 정도의 만남을 끝내고 렌터카를 운전해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나의 남동생은 재미교포다. 우리나라가 아직 가난했던 1970년대, 부모의 지원이 전혀 없는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남다른 노력을 해서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하고 외항선을 타면서 동생은 착실하게 돈을 벌었다. 그런 동생이 이민을 생각한 것은 결혼을 하고 두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이다. 직업의 특성상 수입은 좋은 편이었지만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느라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환경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친의 빈자리를 실감하고 자랐던 동생에게, 자신의 자녀들에게 아빠로서의 부재는 커다란 아픔이요 문제였다.
하여 과감하게 직업을 바꾸려고 국내에서의 일자리를 모색했으나 쉽지가 않았다. 고심을 하던 동생이 어찌어찌 혼자 미국으로 입국을 하고 뒤이어 가족을 데려간 것은 아이들이 세 살, 두 살이 될 무렵이었다. 어떤 연고도 없는 이국땅에서 동생은 한참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애들을 돌봐야 하는 아내를 전업주부로 살게 하고 외벌이로 가족을 이끌어 나갔다. 간간이 들려오는, 온갖 허드렛일부터 노동판을 전전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에 마음이 아팠지만 나 역시 돈 한 푼 보내줄 만한 여력이 없었다.
고난과 역경의 세월이 흘러갔고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엔 동생은 건축 리모델링 사업가로 자리를 잡았다. 생활이 안정되자 동생은 일 년에 한 번 정도 방학이면 아이들을 한국에 내보냈다. 일가친지와의 유대와 친밀감을 쌓고 조국인 한국의 풍습과 문화를 익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두 아이는 한국을 자주 드나들면서 큰아버지 가족, 고모 가족과의 친밀감과 유대가 돈독해졌다. 아이들이 올 때마다 다 같이 모여서 하는 국내 여행은 한국의 풍광을 보고 느끼게 했고 지리를 익히게 했다. 또한 올 때마다 함께하는 큰집이나 고모집에서의 기거는 조금 서툴렀던 그 애들의 한국말을 많이 익숙하게 만들었고 따라서 한국식 예의범절도 지킬 줄 알게 됐다.
그사이 큰아이는 미국의 UCLA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LA 시청 공무원이 됐고, 작은아이는 미국 동부에 있는 ○○ 대학을 나와 워싱턴 DC에 있는 세계적인 건축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그중 큰아이는 사회인이 되어서도 한국에 오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었다. 연애를 해도 한국 여자와 했고 스스럼없이 여친을 가족 여행에도 동반해서 인사를 시키곤 했다. 그 애의 세 번째 여친을 만난 것은 십 년쯤 전이었다. 서른 살이 넘어가던 조카가 결혼을 생각한다며 인사시킨 아가씨는 LA에 사는 재미교포였다. 초등학교 때 온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미국에서 나왔다는데 조카보다 한국말을 더 잘하며 상냥하고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이는 아가씨를 우리들은 모두 반겼다.

 

역사를 보면 우리 민족의 타국 이민사는 일제의 침탈 시기부터 자의반 타의반 또는 속아서 대규모로 시작된 것 같다. 그것이 6·25 동란 이후 전쟁의 폐허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개인들의 이민으로 전 세계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재외 동포가 수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24시간 정도면 지구의 어디라도 갈 수 있는 교통의 발달과 급속하게 좋아지는 미디어의 발달로 여행을 콘텐츠로 개인 방송을 하는 유튜버들이 날로 늘어나는 것 같다. 덕분에 저 머나먼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사는 우리 동포부터 지구의 오지인 아프리카며 망망대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나라에 사는 동포들까지 자주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됐다.
원래 여행을 취미의 한 가지로 생각할 만큼 좋아하고 자주 다니는 내가 미처 가보지 못한 곳을 보여주는 여행 유튜브를 자주 보는 것 또한 취미의 연장이지 싶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를 화면을 통해 관광을 하는 것도 좋지만 전혀 예상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에서 우리 동포를 만난 유튜버가 반가움과 친밀감을 나타내며 다가가 인사를 할 때면 보고 있는 나까지 덩달아 반가워진다. 거기에 우리말을 제대로 쓰는, 그것도 이민 2세나 3세가 우리말을 하면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진다. 오랜 세월 모국을 떠나 비록 이역만리에서 살지라도 모국어를 잊지 않고 후손에게까지 전하기 위해 애쓴 그 마음이 장하면서도 애잔해서다.
이젠 돌아갈 수는 없지만 마치 고향과 어머니를 잊지 못해 그리워서 놓지 못하는 애수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서다. 아울러 그 머나먼 이국에서도 한민족이라는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고 있는 것 같아서다. 또한 그들이 모국을 떠나 있으나 우리나라가 그 어려운 혼란과 고난의 시간을 딛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니 이국의 땅 어디에 살더라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모두가 민주국가를 지키고 경제 발전과 문화의 융성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 이들 덕분이니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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