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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으리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서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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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왜 이리 바쁠까? 작년 봄, 도심에서 꽤나 벗어난 새로운 동네로 이사 오고 난 뒤엔 더욱더 종종거리게 된 것 같다. 마트 가는 길, 은행 가는 길, 서점과 백화점 가는 길은 예전보다 훨씬 더 멀어졌다. 대신에 산과 숲으로 가는 길,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길, 꽃이 피고 단풍이 물드는 자연으로의 길은 더욱더 가까워지고 확장되었다. 시골의 조용함과 도시의 세련미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동네. 이곳에서 일 년을 지내는 동안 마음은 환희에 젖어 큰 만족감을 느끼고 있으며, 몸은 갑자기 늘어난 활동량을 다 감당 못 해서 열 가지의 일거리 중 절반 정도만 챙기며 겨우 산다. 하루에 한 가지 일만 완성하는 걸 목표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시나브로 적응해 가고 있는 중이다.
지난 몇 년간의 시간을 돌아보노라면 내 일상에도 소소한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2022년 4월, 벚꽃이 흐드러지게 만개한 날에 큰아들의 혼례를 치른 것이다. 프러포즈에 그렇게나 공을 들이더니, 착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영애(令愛)를 신부로 맞이한 것이다. 새 출발을 앞둔 신랑 신부에게선 빛이 났다. 파도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시험당하는 영혼이 되지 말기를, 장밋빛의 향기로운 사랑이 오래도록 퇴색되지 말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게 된다.
한 달 뒤 5월에는 작은아들이 직장을 서울로 옮겨 가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결정난 이직이라 아들은 급하게 방을 구했고, 우리도 부랴부랴 아들의 자취에 필요한 살림살이 구입에 바빴다. 남편이 차에 살림 도구를 싣고 아들과 둘이서 서울로 올라가는 날에는 혼자서 속으로 많이 울었다. 품 안의 새끼들을 하나씩 떠나보내야 하는 이별의 시간이 몹시도 아프게 다가왔던 날들이다.
애착을 품을 대상이 하나씩 하나씩 멀어져 가니, 내 마음 한구석도 휑하니 빈 듯했다. 내 방이 없어서 답답하던 날들이 다 무언가. 큰아들이 쓰던 방은 나의 공부방이 되어 주어서 어느 정도 고마웠지만, 작은아들까지 독립해서 나가고 없는 또 하나의 빈방은 들여다볼 때마다 서늘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두 번째는 작년 2024년 2월, 설 전날에 귀여운 손자가 태어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작고,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 있을까? 손자의 출생 덕분에 우리 가족은 모두 자동으로 한 단계씩 승급을 하였다. 남편과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아들과 며느리는 아빠와 엄마로, 그리고 작은아들은 삼촌으로. 그러고 보면 관계 속에서는 이름이란 없는가 보다. 오직 역할만이 자기 자신을 대변할 뿐. 기쁨 두 배가 되는 동시에 책임감도 두 배로 무거워졌다. 나는 기쁨 쪽에 반올림을 주어서 기쁨의 힘을 두 배 이상으로 더 크게 키우고 싶다. 그래야 슬픔보다는 기쁨이 내 곁에서 항상 함께하는 행복한 삶을 경험하게 될 테니까. 비록 뜻밖의 힘든 시간이 찾아온다고 해도, 그 속에서 마음의 성장이라는 깨달음의 열매 하나는 거둘 수도 있으리니 괴로운 시간조차도 희망으로 승화시켜 나갈 수 있으리라 믿어본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좋은 문장을 발견하게 되면 문장 수집 노트에 따로 기록해 둘 때가 있다. 에세이나 소설 속에는 내 굳은 습벽(習癖)의 얼음장을 깨버리는 단 한 줄의 도끼 같은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다치고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해 주는 따뜻한 문장도 있다. 둘 다 나에게는 좋은 선생이다. 최근에 만났던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화가 르누아르가 남긴 말이다.
르누아르는 60년 동안 화가 생활을 하면서 약 6,000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하루도 그림을 그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한다.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인해 50대에는 오른팔에 마비가 오고, 70대에는 휠체어에 의지했으며, 말년에는 손가락이 모두 뒤틀려 붓을 들기도 어려웠을 때조차도 손에 붕대를 감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 그리는 것이 힘들고 고통스러울 텐데 왜 계속 그림을 그리느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기에 그림을 그린다”라고.

 

‘고통은 지나가고 아름다움은 남는다.’
삶이 아직 핍진하고 애달픈 청년들과 고된 창작에 몰두하는 예술가들이 특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문장일 것 같다. 비록 지금 이 순간은 노력하고 애를 써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고, 몸과 마음은 무력감에 지치고 힘들고 고달픈 날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통틀어 가장 값지고 아름다운 어떤 것이 외현되고 완성되어진다면, 그 아름다움은 바로 자기 내면에서 바깥으로 우러나오게 된 순수한 ‘사랑의 빛’ 그 자체일 것이다. 가슴속에 설렘을 간직하고 있는 한 행복은 늘 자기 것이 된다. 작은 요정과도 같은 이 기쁨의 별빛이 자신을 이끄는 방향대로 죽는 날까지 용기 있게 따라가 볼 일이다.
아름다움은 우주와도 통한다고 한다. 감히 영원의 별을 꿈꿀 수는 없지만, 초로(初老)의 나이에 들어 다시 하늘로 돌아갈 일을 생각하니 내 하루하루의 숨 쉼이 허공에 찍히는 발자국만 같아 더욱 조심스럽고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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