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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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짓달, 섣달, 정월은 내가 친구들, 학-두루미를 만나는 달이다. AI가 알려주는 날씨 정보에서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의 정보에 귀를 기울인다. 특히 눈 오는 날에는 나의 친구들, 촬영의 최고 순간이기에 기대감으로 가슴이 뛴다.
문선명 목사는 날마다 잠자는 것이 영계에 가는 연습이라고 설교하셨다. 영원한 천상 생활에 가는 훈련을 날마다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하루가 모여 한 달, 한 달이 모여 일 년, 일 년이 쌓여 일생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루가 축소판이다. 오늘, 여기에서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금 중에서 제일 값진 귀한 금은 ‘지금’이라 하지 않는가.
나는 마흔 대에 죽음 연습을 해 봤다. 세계 선교사 명을 받고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 14개국을 책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이슬람국가인 이란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출발하면서 가족에게 유서를 보내고 짐을 꾸렸다. 귀중품은 놔두고 꼭 챙겨야 하는 필수품만 가방에 넣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서의 왕비처럼 죽음을 각오하고 테헤란으로 가는 모험을 선택했다. 일본 선교사들의 배웅을 받고 검색대를 통과해 탑승구로 향하는 발걸음은 잔잔한 호수같이 무척 평온하고 안락했다.
구리중앙수련원에서 개최된 목회자 수련회 때, 임종 체험 프로그램이 포함되었다. 수십 개의 관이 놓인 임종 체험장에서 유서를 쓰고 시신을 보관하는 관에 들어가 누우면 관 뚜껑을 닫는 순서였다. 그때 한 목회자는 아내에게 쓴 유서를 낭독하면서 심히 슬프게 울먹였다.
심각한 분위기에 어긋난 표현이겠지만, 나는 깜깜한 관 속에서 온몸이 조여 숨 쉬기조차 거북스러워 빨리 이 위기를 탈출하고 싶어 힘들었다. 진짜 죽을 때 고인의 체형에 맞는 관의 배려가 꼭 필요할 듯싶었다.
죽음이 스쳐 가는 순간을 가장 많이 체험할 수 있는 현장이 운전이다. 사고당하지 않고 안전한 운전으로 귀가하는 순간이 기적이라 여겨진다. 나는 티브이에서 한블리의 블랙박스 리뷰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교통사고를 피하려는 본능일는지 모른다. 호기심으로 채널에 잠시 머무는 순간, 운전 중 돌발 상황이 발생하여 죽음이 오가는 영상에 급히 채널을 이동한다.
운전에 얽힌 사연들은 이렇다. 선산을 벌초하고 밤늦게 귀가하는데, 철길 건널목에서 잠시 멈추고 좌측을 살펴보니, 자전거 전조등 불빛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냥 건널목을 건너갈까 하다가 잠시 브레이크 발판에 발바닥을 댄 순간, 기차가 덜컹거리며 눈앞을 지나갔다. 서늘한 기운이 목뒤를 맴돌고 열린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경부고속도로를 자녀 넷을 태우고 신나게 달리는 중이었다. 우측 백미러로 자동차 바퀴의 휠이 퉁겨져 굴러가는 동영상이 눈에 띄는 순간, 갑자기 자동차가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려 갓길로 얼른 들어섰다. 백 킬로미터로 달리는 차량 행렬에 갓길이 최후의 생명 지킴이임이 절감되었다. 이 사건의 시작은 우측 뒷바퀴의 펑크였다. 만일 앞바퀴였으면, 자동차는 전복되어 온 가족이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했다. 어린애들은 그저 흥미진진해서 펑크 난 바퀴를 보며 사진을 촬영했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사십 년을 운전했으니, 죽을 고비를 넘긴 사연들이 숱하다. 칠십 중반에 들어서니, 이젠 운전이 무섭기만 하다.
나는 현직으로 목회자 임무를 수행할 때, 숱하게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삼일장에서 입관 예배 때는 고인에게 얘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님, 이제 ○○○은 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지상 생활은 애벌레와 같은 삶입니다. 이제 번데기가 되어 한 마리 나비가 되어 훨훨 광대무변한 우주를 향해 날아갑니다. 두 팔을 날개처럼 휘저어 펄럭펄럭 해 보세요. 두 다리로 좌우 중심을 잡으며 나는 연습을 해 보세요. 하늘 부모님이 찬란한 은하계를 창조한 까닭은 영계에서 영원히 살 인간들의 우주여행을 위한 배려요, 사랑입니다. 이 우주는 다이아몬드 별도 있고 황금 별도 있고 오색찬란한 보석 별도 있답니다. 이제 ○○○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우주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그렇다. 영계는 우리가 날아다니는 세계이다. 그 실증이 천원단지의 천정궁 광장에 들어서면 천정궁 돔으로 향하는 3층 계단 양측, 일송정과 이송정의 소나무 옆 벽면에 조각된 벽화이다. 모든 남녀노소 인물이 미소를 지으며 비둘기와 함께 전통 한복을 펄럭이며 구름 사이로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니고 있다. 여인들은 머릿결이 옷깃과 함께 바람에 휘날려 춤춘다.
내가 철원을 떠나지 않고 사는 것은 죽음 연습이랄 수 있다. 철원은 나의 마지막 목회 임지였다. 강원도 철원의 삶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사 이동이었다. 당시 친우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을 건네었다. 무슨 잘못을 했기에 최북단으로 귀양을 가느냐? 유배를 가느냐?
나도 탐탁지 않게 이사를 와서, 오랜 세월 A형 교회의 사택 생활을 해 온 생활을 청산하고 3층 석조건물에 사는 행운을 누렸다. 가장 반가운 것은 큰 창문에 가득 햇빛이 들어온 풍경이었다. A형 교회 사택들은 칠십 년대 건축이라 좁은 창문에 블록 벽으로 그늘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새로운 만남은 천일국조인 학, 두루미였다. 지금껏 살면서 황새는 봤어도 두루미는 그림이나 책에서 본 게 전부이고 협회 주관 행사 때 단상 설치물이었다. 그런데 철원평야의 겨울은 두루미 천국이었다.
마지막 목회 임지는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그래서 퇴직하고 계속 둥지를 튼 보금자리로 살고 있다.
나는 겨울이면 나는 연습을 한다. 특히 하얀 눈이 덮인 날이면 미친 듯이 들판을 누비며 두루미, 학을 찾아다닌다. 그들이 날아가는 모습은 지고지순하다. 고귀하고 거룩한 품새를 나는 닮고 싶어 목말라한다.
나의 묘비명도 나의 작품, 시나 수필, 소설의 한 구절을 옮기고 싶다.
내가 철원에 사는 것은 학처럼 우아하고 고상하게 날고 싶기 때문이다. 하얀 두루마리를 입은 선비요 신선 같기 때문이다. 흰 바탕의 창의에 깃, 소맷부리, 두루마기의 맨 밑 가장자리, 도련을 검은 선으로 둘러 학과 같이 기품 있는 선비로 날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