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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공이 구르는 시간

한국문인협회 로고 황단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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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풀 위로 햇살이 굴러 
공처럼 맑다
막 피어난 이슬은
첫 타를 기다리는 숨결

 

백발 어른들,
몸을 툭툭 털고
구부정한 허리 펴며
조심스레 티샷을 날린다

 

멀리 날아간 공 따라
웃음도 날아간다
바람이 공을 손짓하며 
한 홀 한 홀
인생의 굽은 길을 안내한다

 

“나이스 샷!”
칭찬은 오늘도 넉넉하고
승부는 어느새
서로의 안부로 물든다

 

홀인원이 아니어도 좋다
함께 걷는 이 길이
오늘의 최고 점수다

 

1.고요한 일상과 복례
퇴직한 지 오래 지나지 않아, 복례는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아침마다 일어나는 건 여전했지만, 일어날 이유가 사라진 시간은 길고 텅 비었다. 창밖으로 햇빛이 들이쳐도, 그것이 따뜻한 건지 더운 건지 알 수 없었다. 허전한 손끝은 예전 직장에서 다루던 종이 뭉치나 붓펜을 떠올리다 말았고, TV 소리는 늘 혼잣말처럼 멀게만 들렸다.

 

동네 뒷산 자락에 조용히 자리한 작은 공원. 그곳엔 넓게 펼쳐진 잔디밭 위로 색색의 공들이 떠다녔고, 나무로 된 채 끝에서 탁 하고 울리는 소리는 뜻밖에도 상쾌했다. 공이 잔디 위를 미끄러질 땐, 마치 오래된 기억 하나가 조용히 먼 곳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건, 힘으로 하는 게 아니고요. 마음으로 해요.”
처음 만난 동호회 아저씨가 웃으며 말했다. 복례는 그 말에 별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채를 쥐는 손끝에서 묘한 긴장이 돌았다.

 

첫 샷.
팔과 어깨에 익숙지 않은 떨림이 지나가고, 공은 생각보다 멀리, 그리고 곧게 나아갔다.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그 순간, 복례는 아주 오래전 잊고 살았던 어떤 기분을 느꼈다. 아무것도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몸이 가볍고, 마음이 환한 아침이었다.

 

그 이후, 복례는 매일 잔디 위를 걷기 시작했다. 공을 치는 게 아니라, 마음을 쳤다. 아무 말 없이, 조용하지만 점점 멀리, 단단하게.

 

처음에는 걷기 운동한다 생각하고 놀기 삼아 따라가 보았다. 나이 들어 하기엔 딱 좋은 취미였다. 놀이라고 하기엔 조용한 그 무언가, 별 기대 없이 따라간 첫날, 복례는 공을 처음으로 쳐 봤다. 파크골프는 별로 배우지 않아도 되었다. 매너 운동이라 에티켓 정도는 배워서 함께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작고 둥근 공이 툭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걸 바라보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다.

 

그날 이후, 복례는 잘 모르지만 배우기도 할 겸 골프장을 찾았다. 막대기 같은 클럽 하나, 빨간 공 하나. 그걸 들고 걷는 일은 생각보다 익숙했고, 걸음을 멈추는 순간조차 고요했다. 속이 복잡한 날일수록 공은 더 곧게 날아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파크골프를 치는 동안은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늘 집에서 시간을 보냈는데 파크골프를 잘 배워 보리라 오늘도 다짐을 해 본다.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도 가장 먼저 찾은 건 파크골프장이었다. 사람들 틈엔 좀처럼 끼지 않았다. 복례는 말없이 공을 치고, 간식을 혼자 먹었다. 누가 다가와 말을 걸어도 “예” 혹은 “괜찮아요”로만 답했다. 함께 웃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복례는 늘 한 걸음쯤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골프장은 늘 그 자리에 있었고, 공은 굴러가고, 복례는 그 길을 따라 걸었다.

 

70대 초반 복례는 홀로 사는 여성이다. 새로 이사를 갔지만 여전히 익숙한 파크골프장을 찾는다.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간식도 혼자 먹는다. 늘 말없이 공을 치고, 느리게 걷는다.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어도 섞이지 않고, 섞일 생각도 없다.

 

2.윤 선생과의 거리
윤 선생은 복례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골프장에 들어설 때마다 밝게 손을 흔들었고, 사람들 사이를 종종걸음으로 오갔다.
“오늘도 공이 기가 막히게 굴러가네!”
“이거요, 내가 구운 거예요. 하나씩 드셔봐요.”
말끝마다 웃음이 붙었고, 웃음 끝마다 누군가는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 웃었다.

 

그는 누구에게나 말을 걸었고, 누구도 그 말을 귀찮아하지 않았다. 그날 복례는 간식을 꺼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윤 선생이 먼저 다가왔다.
“어이구, 손수 준비하셨네요. 뭐예요, 김말이인가?”
복례는 반사적으로 뚜껑을 닫았다.
“아니에요, 그냥… 남은 거예요.”
그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엔 내가 뭐라도 하나 싸 올게요. 다음엔 바삭한 김말이로 대결하죠.”
복례는 무뚝뚝하게 웃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다음 날 그녀는 조금 더 일찍 골프장에 나왔다. 윤 선생이 있는 자리에서 두 홀쯤 떨어진 곳에 서서, 그의 말소리와 웃음이 멀리서 들리는 걸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실수로 공을 엉뚱한 방향으로 보냈을 때였다. 사람들이 웃고, 그도 웃으며 말했다.
“원래 골프는 공이 아니라, 인생이 어디로 튈지 보는 거지요.”
복례는 그 말을 듣고도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입가가 아주 조금, 말없이 말려 올랐다.

 

윤 선생은 다가오고, 복례는 물러섰다. 하지만 그녀의 물러섬은 점점 짧아졌고, 그가 던지는 말은 자꾸 기억에 남았다. 복례는 자신이 매일 비슷한 시간에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 알아차렸다. 그가 있는 시간에, 그가 걷는 홀 쪽으로. 그들의 거리는 늘 한 걸음 어긋나 있었지만, 어딘가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3.공동 1위와 양보
봄 대회 날, 공기는 상쾌했고, 하늘엔 구름 하나 없었다. 복례는 말없이 모자를 눌러쓰고 골프장에 섰다. 대회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장기자랑도 없고, 상품도 크지 않은 소박한 대회였지만, 사람들의 눈빛은 이상하게 반짝였다. 평소 연습할 때와는 많이 달랐다.
윤 선생도 나왔다. 새 양말을 신은 듯 발걸음이 경쾌했고, 공을 칠 때마다 “이번엔 직진입니다”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사람들은 웃었고, 복례는 멀찍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는 얼굴로 공을 따라 걷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묘하게 마음이 덜 허전했다.
마지막 홀을 마치자 점수가 동률이었다. 윤 선생과 이웃 동네의 박 씨가 공동 1위였다. 순간 골프장 분위기가 정지된 듯 조용해졌고,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쏠렸다. 두 사람은 1번 홀로 나오라는 사회자의 말을 듣는 순간 윤 선생은 할 말이 있다고 손을 들었다. 박 씨가 장난 섞인 말투로 말했다.
“어이, 윤 선생. 동점이면 나이 순으로 하지?”
사람들이 웃었지만, 윤 선생은 미소만 지었다. 그는 복례 쪽을 한순간 흘끗 바라보고는, 이내 조용히 말했다.
“제가 양보하지요. 점수는 동점이지만, 오늘은 박 형님 공이 더 예뻤어요.”
그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탄성과 웃음이 터졌다. 박 씨는 멋쩍은 얼굴로 트로피를 들었고, 윤 선생은 박수를 가장 먼저 쳤다. 박 씨는 트로피와 상금을 받고 윤 선생은 상금만 받았다. 그 모습은 허세도 없고 계산도 없는, 그냥 따뜻한 모습이었다.
복례는 손뼉을 치며 그를 바라봤다.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조금 더 크게 움직였고, 박수 소리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마음 안쪽 어딘가가, 봄볕처럼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그날 밤, 복례는 평소보다 늦게 집에 돌아왔다. 씻고 누운 침대 위에서 자꾸 윤 선생의 말투가 떠올랐다.
“점수는 동점이지만, 오늘은 그쪽 공이 더 예뻤어요.”
그 말이, 묘하게 가슴속을 툭, 건드렸다.

 

4.복례의 김밥
그날 이후, 복례는 윤 선생의 말을 종종 떠올렸다.
“점수는 동점이지만, 오늘은 그쪽 공이 더 예뻤어요.”
그 말은 마치 오래된 연못에 던져진 조용한 돌멩이처럼, 그녀의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을 만들었다.

 

며칠 후, 복례는 장을 봤다. 김, 단무지, 우엉, 달걀, 당근, 오랜만에 싸는 김밥이었다. 손끝이 낯설었고, 당근은 너무 얇게 썰어졌다. 속이 비뚤비뚤했지만, 복례는 김밥을 몇 줄 말았다. 그걸 한쪽 도시락통에 조심스레 담아두고는, 새벽에 눈을 떴다.

 

그날 아침, 복례는 다른 날보다 조금 더 빨리 골프장에 도착했다. 윤 선생은 아직 오지 않았다. 복례는 도시락통을 가방에서 꺼내 들고는, 잠시 고민하다가 돌벤치 위에 살짝 올려두었다. 뚜껑은 닫힌 채, 아무 말도 붙어 있지 않았다. 잠시 후, 윤 선생이 도착했다. 그는 복례를 향해 익숙하게 손을 흔들었다. 복례는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이거… 누구 건가?”
윤 선생이 김밥통을 발견했다. 누가 놓고 갔는지 묻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도시락 옆에 붙은 손수건을 펼쳤다. 그 손수건엔 작게 복례의 이니셜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는 도시락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말은 없었지만, 얼굴엔 웃음이 천천히 번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윤 선생이 조용히 김밥을 꺼냈다.
“누가 주셨는진 몰라도… 이거 참 정갈하네요.”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고, 그는 김밥을 한 조각 입에 넣었다. 복례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입꼬리는 오르지 않았지만, 시선은 오랫동안 윤 선생 쪽에 머물러 있었다. 그날 저녁, 복례는 김밥 재료를 다시 메모지에 적었다. 글씨가 약간 흔들렸지만, 마음만은 단단히 다져졌다.

 

5.그날의 파크골프장
이상했다. 복례는 그날 아침부터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윤 선생이 오지 않았다. 늘 같은 시간에 손을 흔들며 들어서던 그가, 아무 말 없이 골프장에서 사라졌다. 하늘은 흐렸고, 공은 유독 땅을 튕기지 않았다. 공을 치던 사람들도 웅성였다.
“윤 선생, 안 왔대요?”
“그 양반은 비가 와도 오는 사람인데….”

 

복례는 가방을 메고 골프장을 나섰다. 그의 동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머리는 조용했지만, 심장은 계속 무언가를 두드렸다.

 

그의 집 앞.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복례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고, 순간 멈춰 섰다. 거실 바닥에, 윤 선생이 쓰러져 있었다. 팔이 흐느적,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윤 선생!”
복례는 소리를 질렀다.
그토록 오랜 세월 입을 꾹 다물고 살았던 그녀가, 그 순간 울부짖듯 소리쳤다.
다급하게 구급차를 불렀고, 손을 붙잡은 채 말을 쏟아냈다.
“왜 하필 오늘이야… 왜 하필 그날도 아니고 오늘이야….”
윤 선생은 눈을 깜빡였지만, 말은 하지 못했다. 복례는 그의 손을 꼭 쥐었다.
“나… 당신 김밥 반응 기다렸어요. 그날 김밥 다 드셨잖아요. 나, 그거 한 조각이라도 남기셨으면, 다신 안 싸려고 했어요….”
그녀의 말은 울음 섞인 웃음이 되었고, 마침내 구급대원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날 오후, 복례는 혼자 골프장에 앉아 있었다. 해는 저물고 있었고, 사람들은 하나둘 떠났다. 복례는 손수건을 펼쳤다. 그 안에는 윤 선생의 이름이 적힌 작은 메모지 한 장이 있었다.
‘김밥, 너무 맛있었어요.
다음엔 된장국도 기대해요.’
그 메모가, 그녀의 무릎 위로 툭, 떨어졌다. 바람 한 줄기 스쳐가고, 복례는 아주 오래도록 눈을 감고 있었다.

 

6.다시 봄이 오면
윤 선생은 회복했다. 병원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마치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조용해졌다. 많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복례에게 짧게 말했다.
“그날 김밥… 아직도 생각나요.”
복례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말이 필요 없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게 좁혀졌다. 별다른 말 없이도, 함께 걷는 시간이 늘어갔다.

 

계절은 바뀌었고, 파크골프장엔 다시 연두가 돌았다. 복례는 새 김밥통을 샀고, 그 안에 밥을 조금 더 넉넉히 담았다. 이젠 맛있는 건 혼자 먹지 않았다. 사람들과 나누는 법을 천천히 배우고 있었다. 윤 선생은 여전히 공을 칠 때마다 “이번엔 직진입니다”라고 중얼댔고….
복례는 그 말에 짧게 웃었다. 웃음은 처음엔 작았지만, 점점 자주, 오래 이어졌다.

 

어느 날, 윤 선생이 복례에게 말했다.
“복례 씨는 공을 참 조용히 쳐요. 근데, 멀리 가요. 내 생각엔 마음이 고요한 사람만 그런 샷이 나와요.”
복례는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빨간 공 하나가 햇빛을 머금고 반짝이고 있었다. 그 순간, 마음이 이상하게 편안해졌다.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아도 좋은 날,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한 오후였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종종 같은 시간에 골프장에 나타났고, 간식은 여전히 돌아가며 싸 왔다. 윤 선생은 된장국을 끓여 왔다. 복례는 처음으로 그의 도시락을 다 먹었다.

 

봄이 다시 찾아왔다. 연둣빛 잔디 위에 공 하나가 굴러가고,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는 두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복례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윤 선생이 다시 골프장에 나올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지만, 그녀는 매일 가방에 김밥을 넣어 왔다. 한 번도 이름을 써 붙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사람들은 다 알았다.

 

어느 날 아침, 파크골프장에 안개가 옅게 내려앉았다. 복례는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 평소처럼 가만히 잔디를 바라봤다. 이슬 맺힌 잔디 위에 빨간 공이 하나, 똑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그 공이 멈춘 자리에는, 언젠가 윤 선생이 쓰러졌던 위치가 겹쳐 떠올랐다. 복례는 조용히 걸어가 그 공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가방 속 김밥통을 꺼내, 벤치 위에 내려놓았다.

 

잠시 뒤, 누군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은색 모자를 눌러쓴 사람. 복례는 돌아보지 않았다. 대신 손수건을 꺼내 도시락 옆에 놓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오늘은, 바람이 조금 불겠네요.”
그 말에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복례는 천천히 웃었다.

 

그날 오후, 공은 천천히 굴러가 먼 곳에 멈췄다. 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어느새 나란히 겹쳐졌다. 누군가의 이름도, 감정도 말해지지 않았지만 그날 이후, 사람들은 둘을 자주 함께 보게 되었다.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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