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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그리고 진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은경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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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이울고 있었다. 대기에 조금씩 서늘한 기운이 묻어났다. 아이들 손을 잡고 산책을 나갈 때 진한 색깔로 물든 떡갈나무 잎들이 가끔 발에 밟히곤 했다. 이 아름다운 시간을 연장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이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울의 병원에서 귀국할 날짜를 확정해 달라고 재촉하는 이메일이 여러 번 왔기 때문이었다. 딸네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꿈같이 달콤했지만 결국 인터넷에 들어가 비행기 표를 샀다. 돌아갈 생각에 기분이 착잡했다. 귀여운 손녀 아이들을 떠나 비행기를 타고 먼 거리를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병원과 계약한 기간이 끝나면 그녀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동안 미국에서 20년, 한국에서 10년 가까이를 방사선과 의사로 보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딸과 사위에게서는 그녀가 한국에 있는 동안 외손녀 둘이 태어났다. 그 애들이 아기일 때 돌봐주지 못한 것이 언제나 맘에 걸렸다. 하지만 돌볼 시간이 남아 있는 네 살, 다섯 살배기이니 아직 할미한테 기회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손녀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딸을 낳은 것은 내 일생일대 잘한 일이었어. 그녀는 위태로웠던 결혼생활 중에 딸을 임신해서 남편과 헤어지지 않았던 일도 마음 쓸며 감사했다.

 

비행기 안에서 의사를 찾는 방송이 들려오면 그녀는 언제나 갈등을 겪는다. 일단 조금 망설인다. 기내에 다른 의사가 타고 있기라도 해서 그녀가 나서지 않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하지만 다급한 승무원의 방송에 응답 없는 시간을 그녀 자신 견디기 어렵다. 결국 그녀는 앞으로 나간다. 가슴을 부여잡고 거의 정신을 잃고 있는 초로의 남자, 사실 이런 종류의 환자는 승무원이라도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그녀들은 습관적으로 의사를 찾는다. 기내에 비치되어 있던 심세동기를 받으며 그녀들의 도움으로 환자를 바닥에 눕힌다. 여승무원 둘이 기내에 비치된 담요를 재빨리 바닥에 깔아준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이등석 칸이지만 좌석을 길게 편다 해도 심장 압력을 가하기에 의자는 나쁘다. 그녀는 재빨리 행동에 옮긴다. 심장 부분에 두 개의 판을 대고 압력을 가한다. 다행히도 세 번 만에 남자는 의식을 회복한다.

 

“정말 수고하셨어요.”
나이 어린 담당 승무원은 많이 놀랐는지 환자보다 더 안색이 나쁘다. 그녀들의 감사의 말을 뒤로하고 남자가 자리에 눕는 걸 지켜본 후 자리에 돌아온다. 그 남자의 좌석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이제 정신을 차리고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아직까지 승무원 외엔 누구도 그 남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그는 혼자 여행하는 사람인 것 같고 한국 남자인 것 같다.
피곤하다. 그녀도 눈을 감는다. 남편 생각이 난다. 남편도 이런 경우를 한 번 당했는데 결국 그 전조 증상이 남편을 끝까지 구하지는 못했다. 그녀 생각으론 이런 경우를 당했다면 생활의 모든 패턴이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 편이었다. 하지만 남편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후회되는 점이었다. 둘이 다 직장을 그만두고 산속에 가 살거나 아이슬란드로 여행 가서 한 달이건 두 달이건 문명세계를 잊고 자연 속에서 지냈다면 남편의 상태가 좋아질 수 있었을까?
남편의 경우 첫 번, 강의실에서 쓰러졌을 때 학생들이 앰뷸런스를 불렀고 가벼운 스턴트 시술을 받고는 귀가했다. 그러고는 다시 일상을 이어갔다. 그래서는 안 되었는데….

 

이 남자는 어떨까?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대로 병원으로 갈까? 아니면 그대로 일상으로 돌아갈까? 갑자기 궁금증이 일어 남자 쪽을 돌아다보다가 그만 그 남자하고 눈이 스치고 말았다. 남자는 계속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기다렸다는 듯이 목례를 한다. 그녀도 잠깐 고개를 까딱하곤 다시 정면을 주시한다. 차라리 도착하는 대로 꼭 병원에 가 보시라고 확실하게 말할까? 하지만 이제 의사로서의 임무는 끝났는데 새삼 불필요한 충고를 덧붙이는 것 같아 망설인다. 분명 이 남자는 내일 병원을 찾을 것이다. 아니 가야만 한다.

 

항공기가 착륙하기 위해서 고도를 낮추기 전쯤, 남자가 결국 그녀의 좌석을 찾아왔다. 감사하다고, 인사가 늦었다고, 죄송하다고… 그녀는 남자의 눈을 간절하게 보면서 그에게 당부한다.
“내일이라도 꼭 병원에 가서 체크하셔야 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공항에 도착해서 입국 수속할 때 그 남자도 서 있다가 그녀와 눈길을 마주치자 눈에 큰 주름이 지도록 싱긋 웃는다. 기내에서는 느끼지 못했는데 남자의 눈 표정이 소년 같다고 그녀는 문득 생각한다. 생각은 과거로 달려가 미국 병원에 출근한 지 얼마 안 되어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가느다란 몸피에 큰 눈을 한 남편은 처음 봐도 순한 인상이어서 먼저 그녀가 마음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두 달 비워둔 셈치고는 허술한 곳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돌아올 때를 예상하고 열심히 청소를 해두고 떠났기 때문이다. 냉장실은 거의 비워두고 갔다. 생수 몇 병만 눈에 띌 뿐이다. 폰을 꺼냈다. 거실 창으로는 완연한 가을이 보인다. 노란빛으로 물들어 가는 은행나무가 계절을 말해준다. 하나둘씩 떨어지는 이파리도 보인다. 병원 사무처장한테 전화를 해서 지금 막 도착했다고 알려주었다.
“피곤하셔도 일단 나오셨다가 오후에 일찍 귀가하시는 걸로 하죠. 병원장 사모님이 엄청 기다리고 계세요.”
처장은 고마워했다.
밤이 되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이곳과 저곳, 어느 곳으로 돌아가야 할까? 시간이 날 때마다 그녀를 휘감고 있는 생각이었다. 남편 고집으로 한국에 돌아오게 된 것이지만 한 번 오게 되자 그녀는 미국 생각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남편은 모교에서 교수 초빙을 받았을 때 뛸 듯이 기뻐했다. 조국에 봉사할 기회를 얻었다는 생각으로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 역시, 부모님, 친척들에 대해서 미국에 있느라고 하지 못했던 의무사항들이 그녀를 재촉했다. 하나뿐인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미국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몽롱했다. 남편이 죽은 것도 꿈만 같았다. 악몽을 꾸고 정신을 차렸을 뿐 달라지는 게 없어야 했다. 그런데도 남편이 옆에 없는 것이 이상했다. 남편은 연구실에서 죽음을 맞았다. 처음에는 강의실, 이번에는 연구실이라니. 피곤하니 좀 쉬겠다면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구실 문을 잠그고…. 무언가에 씌지 않았다면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연구실 문은 그날따라 왜 잠갔을까? 그렇지만 세월은 흘러갔다. 황당하고 억울했던 시절이었다. 혼자 있게 되면 눈물이 쏟아져 병원에 남아 밤새 일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자는 둥 마는 둥 아침이 왔고 그녀는 병원으로 나갔다.
“안녕하세요?”
교수실로 막바로 가려 하다가 갑자기 허기를 느끼고 지하의 식당으로 갔을 때였다. 점심식사는 직원 식당이 따로 있지만 조식은 병원에 온 환자, 문병객들과 함께하는 곳밖에 없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초만원이었다.
그녀는 인사를 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이게 웬일이지? 어제 비행기에서 그녀가 도움을 준 남자였다.
“깜짝 놀라셨죠. 저도 너무 놀랐는걸요.”
그 남자는 다시 눈주름이 가득해지는 미소를 지었다. 얼굴이 희구나. 이번에는 그런 느낌이 왔다. 남편도 얼굴이 희고 갸름했다. 순하게 보였지만 고집이 셌다. 그 고집 때문에 그를 잃을 줄은 몰랐다.
“이 병원이셨군요.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말씀대로 병원에 왔습니다. 등록하고 좀 시간이 남아서 조반 먹으러 왔습니다. 선생님도요?”
“네….”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식당에 들어왔는데 뭐라고 다른 핑계를 대지?
“뭐 드실 건가요? 약소하지만 제가 대접하면 안 될까요?”

 

이렇게 해서 백종회 씨와 같이 조반을 먹게 되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남자가 먼저 자기소개를 해서 그녀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금주, 영상의학과에 있어요.”
“이름이 예쁘시네요.”
“평범한 이름이죠.”
언젠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였나, 이름을 개명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유는 그저 이름이 너무 평범해서였다.
“심장외과에 등록하신 것 맞죠?”
“네.”
“담당의는 성함이 누구시던가요?”
“아, 방준…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만.”
남자가 담당의사 이름을 잊어버린 것을 부끄러워했다.
“네, 방준혁 박사님이겠네요.”
“금방 들었는데 잊어버렸어요. 요샌 이름이 잘 외워지질 않아요. 집사람이 있었을 때는 그런 일은 그 사람 소관이었지요. 전 그저 그 시간에 나타나기만 하면 되었거든요.”
“사모님은 같이 안 오셨나 봐요.”
그러면서 그녀는 아차 했다. 내가 뭐라고 이런 걸 물어보나?
“그 사람, 지금은 없어요.”
“네?”
“간 지 벌써 3년이나 돼요.”
“…….”
뭐라 말하나. 미국인들은 그런 말을 들었을 때 통상 ‘유감이네요’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선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피차일반 아닌가? 그렇다고 자기 또한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남들에게, 모르는 남자에게 남편이 일찍 자기를 떠났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은 시끄러웠지만 두 사람 사이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괜한 얘기를 했나 봅니다. 전 시간이 돼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자가 바쁜 듯이 일어섰지만 그녀 쪽의 빈 쟁반을 챙기러 오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는 두 사람 몫의 빈 쟁반을 겹쳐서 잔반 수거대로 향해 갔다.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점퍼를 입은 뒷모습이 남편과도 비슷했다. 아니 넓은 식당에 있는 그 나이 또래 초로의 남자들은 뒷모습이 모두 비슷해 보였다.
어쩌다가 식사까지 함께하고 말았다. 그녀가 시키니까 자기도 ‘같은 걸’로 먹겠다고 했다. 이름은 서로 알려줬지만 전번을 교환한 것도 아니니까 또 다른 만남이 이어질 필요는 없었다.
다음 날 준혁을 만날 때까지 그녀는 남자에 대해서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워낙 밀린 일이 많았다. 몇몇 사진은 판독에 엄청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병원장 부인의 사진은 특히 까다로웠다.
“선배님, 어제 귀국하셨다는데 벌써입니까?”
준혁의 둥글둥글한 얼굴과 조그만 눈이 마스크 위에서도 활짝 웃었다. 복도에서 서로 지나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녀를 알아본 준혁이 신기할 정도였다. 끄덕이고 지나가려다가 그녀가 불렀다.
“어제 환자 중에 백종회라고 기억해요? 아침 일찍 왔을 텐데요.”
“왜요?”
“어제 비행기 같이 타고 왔어요. 기내에서 호출당해서 C.P.R. 했는데 바로 그분이었어요. 제가 병원 꼭 가라고 했더니 이리로 오셨네요.”
“흠, 아마 시술 날짜 정하고 가신 분 중 한 분인 것 같네요. 운 좋았네요. 이번에 만났으니….”
“누군지 확실히 모르죠?”
“뭐, 알 만해요. 전날 바로 귀국하셨다고 얘기하던 분인 것 같아요. 상태는 나쁘지 않아요. 신경 쓰이시나 봐요. 제가 결과 계속 알릴게요.”
“안 그래도….”
그러다가 그녀는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이 살짝 윙크했다. 작은 한쪽 눈이 더 작아지고 종내에는 감기고 마는 모습을 보고 그녀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리를 떠나는데 준혁이 다시 오른손을 들더니 엄지척을 하며 돌아서 갔다.
‘웬 엄지척이야? 뭐라는 거야. 그 윙크는?’
어이가 없어서 그녀는 준혁 쪽으로 눈을 흘겼다. 준혁과는 같은 의과대학은 아니지만 인턴 레지던트를 같은 병원에서 했었다. 정말 까마득한 세월이다. 세 살 아래, 하지만 병원은 이런저런 이유로 바로 한 기 아래였다. 1년 선배, 무서운 1년 선배 노릇을 그녀는 즐기면서 해왔다. 무서운 1년 선배 노릇? 그러자 준혁과 함께 다니던 M 생각이 났다. M의 결혼, 이혼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도 그녀의 머리에 새겨져 있었다.

 

며칠이 지났다. 퇴근 무렵 준혁이 연구실로 찾아왔다.
“시술 잘 끝났어요. 지금 입원해 있으니 한 번 찾아가 보셔도 돼요.”
“무슨 얘기하는 거예요?”
“그 사람 말이에요.”
“누구? 참, 내가 언제 알려 달라고 한 적 있어요?”
“누님, 괜찮아요. 그분 내일 퇴원, 기회는 오늘 하루뿐이랍니다.”
그러면서 준혁은 몸을 돌려 연구실을 빠져나간다. 또 한 번의 윙크를 날리면서 말이다. 별일이다. 하긴 준혁은 남편의 별세 이후 가끔씩 남자를 소개해 주겠다고 추근댔다. 오늘같이 ‘누님’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보통 때는 ‘이박’이니 ‘선생님’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누님’이라고 부르면 언제나 조금 이상한 일이 생기곤 했다. 내용도 모르고 나간 일이 딱 한 번 있을 뿐 그녀는 언제나 농담으로 그의 의도를 깨곤 했다. 지금도 그녀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하는 여느 때와 같은 일상을 소화하고 있었다. 가끔씩 병원과의 계약이 끝나는 10월이 되면 뭘 할까 생각하면서 말이다. 재계약을 하겠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이젠 혼자라도 아무 일 안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동안은 힘들었다. 일하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혼자 산다는 것이 그녀에겐 이제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일하면서, 또는 음악을 들으면서 쉰다든지 하면서…. 산다는 것은 이제 그녀에게 견디는 것으로 바뀌어졌다. 외로움? 그런 것은 이미 내면화되고 있었다.

 

그날 그녀는 남자의 병실에 문병 가는 일 따위 하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 가서 오랜만에 식당 앱으로 음식을 주문하고 와인 한잔 해서 밥을 제대로 먹었다. 아직 시차가 있어서 저녁 먹기가 무섭게 졸렸다. 일어나 보니 새벽 4시였다. 계산해 보니 잠은 충분히 잔 것 같았다. 하루의 일이 새벽 4시에 시작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었다. 그녀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이고 싶었다. 새벽 4시에 노량진 수산시장엔 사람들이 많을 것 같았고 그 사이에 한 번 끼어보고 싶었다. 아니면 새벽의 동대문 옷가게는 어떨까?
망설이다 결국 아무 곳에도 못 가고 아침 늦게까지 다시 자고 말았다.

 

며칠 지나서 퇴근하려는데 놀랍게도 백종회가 지하주차장 근처에 서 있었다. 그녀는 놀랐지만 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닐지도 모르므로 곧장 자기 차 쪽으로 갔다.
“잠깐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백종회가 가까이 왔다. 이젠 건강해진 얼굴색에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있었으므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좋아 보이시네요.”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정식으로 인사드리고 싶어서요. 자가용으로 출근하신다기에 여기서 기다리면 뵐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이미 인사는 받은 걸로 아는데요.”
그녀는 되도록 쌀쌀하게 들리도록 말했다.

 

끼-익. 갑자기 주차장에서 내려오는 차 한 대가 그들 앞으로 달려들었다. 들어오는 차는 그 부분에서 커브를 틀어야 하는데 운전대를 놓쳤는지 그대로 그들에게 돌진하듯 들어온 것이다. 남자가 순간적으로 그녀를 거의 껴안은 자세로 주차해 있는 차 틈새로 파고들었다. 들어온 차는 그들 바로 옆에 주차된 차를 들이받았다.
쿵- 타닥. 충돌한 두 차에서는 엄청난 소리가 났다. 바로 옆이라 더욱 큰 소리였다. 어이가 없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온 차가 속력을 줄이지 않고 그대로 돌진하다니…. 하지만 이상한 낌새가 있어 운전석을 보았다. 휠 위에 운전자가 쓰러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보였다. 그녀는 곧장 응급실에 전화했다. 병원 당국에서 사람이 여럿 나오고 운전자가 응급실로 이송되는 몇 분의 과정이 끝나자 그제서야 백종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감사해요.”
그 차에 그대로 받혔다면 어땠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잽싸게 몸을 움직여 그녀를 보호해 준 그가 놀라웠다. 마치도 젊은이같이 날쌘 행동이 아니었던가.
“운전사 양반도 심장이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그가 말했다.
“우리 큰일 날 뻔했어요.” 
자연스레 ‘우리’란 말이 나왔다.
“이번엔 제가 인사를 해야겠어요.”
그녀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그런 날렵함이 있었던가? 그가 자꾸만 다시 보였다.
“무슨 말씀을…. 하지만 저녁식사 정도는 나가서 같이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날 저녁, 병원 가까운 방이 있는 일식당에서 저녁을 같이 먹게 되었다. 혼이 나서 차를 운전해 타고 나갈 엄두가 안 났다. 다행히 병원 주변으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식당이 많았다.
그날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낸 첫날이었다. 사케 한 잔씩 하자는 남자의 의견대로 따뜻한 술을 한 잔하니 마음이 안온해졌다.
“방준혁 선생 말이죠. 두 번째 만났을 때 알게 됐습니다. 시골서 같은 동네 살았어요. 중학교 졸업 때쯤 서로 헤어졌죠. 준혁이가 서울 학교로 떠났지요. 전 거기 그대로 남았구요. 저랑 두어 살 차이 났는데 같은 학년이었죠. 그곳 사투리 억양이 독특하거든요. 그 동네 사람이면 서로가 금방 알아보죠. 그래서 내가 물어봤죠. 역시 거기 출신이더라구요. 아직도 사투리 억양이 남아 있고…. 내가 혹시 그때 기억하느냐고 해서 서로 알아봤죠.”
준혁과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다고?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도 알아봤다고?
신기한 일로 여겨졌다. 그래서 준혁이 내게 윙크를 보낸 건가? 사귀어 봐도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는 건가?
“어렸을 때 두 분은 친했었나요?”
“방 선생 만난 후로 돌이켜봤습니다. 친했다는 게 어떤 건지 하고요. 우린 원체 형편이 달랐거든요.”
그녀는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환영처럼, 서울로 떠나는 준혁의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는 이 남자의 어린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날은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서로 전번은 교환했다.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 많이 달라진 점이었다. 젊었을 때는 사람을 사귀는 데 두려움이 많았다. 한국에 있을 때의 남자친구라고 해봤자 준혁이 소개해 준 M뿐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미국에서 한국에 돌아오려고 바쁜 동안 준혁에게서 M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는 자기 인생의 반이 사라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M과의 사이에 걸린 매듭을 풀지 못한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M이 미웠다.
밤이 되자 미국의 딸이 페이스톡을 해 왔다. 코로나로 입원해 있던 자기 친구가 위독해졌다고. 미국엔 다시 코로나가 도는 모양이었다. 덧붙여 이제 엄마가 퇴직해서 한가롭게 살았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한가롭게, 한가롭게…. 그녀는 몇 번 되뇌었다. ‘한가롭다’라는 단어의 뜻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한가롭지 않았다. 아니, 한가롭지 못했다. 그러니 한가로운 게 어떤 것인지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딸의 말은 혹시 한가롭게 되면 그녀가 더 행복할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계기는 되어 주었다.

 

병원장 부인을 결국 구하지 못했다. 부인이 임종에 든 때 그녀는 병원 기도실에서 흐느껴 울었다. 삶에 대한 용기가 사그라지는 듯한 허탈감을 맛보았다. 병원장 부인의 빈소에 다녀온 다음 날, 그녀는 총무처장과 대화를 나눴다.
“계약 기간이 다 되어 오죠?”
이렇게 물을 때 그 남자의 말투는 어쩌면 냉담하게 들렸다. 이곳에서의 일이 끝난 후 전개될 삶에 자신이 없는 그녀를 눈치채기라도 한 듯했다. 그녀도 그냥, 변화가 없었으면 싶었다. 일만 하고 살 수는 없을까? 월급을 반만, 아니 안 받고서라도 있고 싶었다. 그녀가 그냥 끄덕이기만 하자 그 남자가 먼저 말했다.
“그동안 너무나 열심히 해 주셔서 어떻게 감사 말씀드려야 할 줄 모르겠다고 원장님이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아, 네.”

 

그렇게 총무처장이 건넨 병원장의 봉투 한 장으로 계약 기간과 상관없이 그녀의 병원 생활은 끝나고 말았다. 봉투에는 그 부분에 대한 후한 보상금까지 들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일주일을 선물처럼 남겨 주었다. 여러 가지로 정리해야 할 일들을 고려한 배려였다고 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원래 이 병원에는 병원장 부인과의 교분이 인연이 되어 오게 된 것이었고 그 교분도 미국 체류 시에 남편과 관계되는 일이었는데 이제 그 두 사람이 세상에 없는 지금, 더 머물 처지는 아니었다.
마지막 근무가 끝나고 돌아오는 날 그녀는 차를 끌고 서울 근교로 나갔다. 북한강을 따라 드라이브했다. 강변의 경치는 아름다웠지만 그녀의 마음은 안개 속처럼 희미했다. 마음을 도사려 먹고 기억을 더듬었다. M과 이곳에 들렀던 때를 떠올렸다.
첫 만남, 첫 키스 등 모든 첫 번째 행위의 느낌을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첫 섹스. 정작 그 부분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주위가 어둠 속같이 캄캄하고 희미하다.

 

해가 서산을 넘어갈 때쯤 해서 그녀는 항상 생각하던 모습 비슷한 카페 앞에 내렸다. 주위를 둘러보니 낙조는 하늘을 불태울 정도의 붉은빛으로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이 아려 왔다. 카페 건물 앞으로 보이는 북한강의 물결은 언제나 그리던 것과 같은 푸르름이었고 부드러움이었다. 내려서 이리저리 살펴본 그 카페는 미국에 도착해서 남편과 결혼하고 그곳에서 여러 해를 살 동안 그녀의 기억에 숙제처럼 가끔씩 떠오르던 장소와 반쯤 흡사했다. 물론 정확한 장소를 기억하진 못했다. 또 그 카페가 그대로 남아 있을 리도 없었다. 미국에서의 의사 생활은 바쁘고 고되었지만 한국을 생각하면 언제나 가슴이 탁 막히는 심정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럴 때면 그림처럼 북한강 물결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 가슴이 꽉 막히는 부분에 가서는 모든 게 안개 속의 혼돈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한국에서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미국과 한국을 왕복하면서 살게 되었다. 닥터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나면 북한강에 나가 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일이 끝나서야 이곳에 와 볼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반짝이는 불빛이 익숙해질 때까지 카페에 앉아 M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준혁은 M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혁, 나 오늘 기분이 좀 그래서…. 응, 알고 있었구나. 그래, 그만두라니 그만둬야지 뭐. 그동안 오래 했지. 내가 뭐 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M 세상 뜰 때 너 옆에 있었다고 했지? 내가 미국에서 귀국해서 처음 만났을 때 네가 그랬잖아. 내 얘기를 했었다고…. 하지만 자세히 얘기해 주지 않았잖아. 부탁인데 들은 대로 좀 얘길 해줄 수 있겠니?”
준혁은 당황한 듯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땐 누님이 듣고 싶지 않다고 하셔서…. 그게 벌써 10년쯤 전 일이 아니에요? 누님이 자형이랑 한국에서 새 직장 얻고 오실 때쯤이니…. 이젠 벌써 한참 전 일이 되어서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뭐 아니라고, 아니라고, 그런 얘기를 한 건 기억나는데…. 뭐가 아니라는 건지 잘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근데 대관절 지금 어디 있어요?”
“갑자기 바람 좀 쐬고 싶어서… 오다 보니 북한강 쪽으로 왔네. 오늘 낙조가 좋았어. 강가에서 보니 정말 좋네. 옛날에 여기 자주 오지 않았나 싶어.”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옛날 일은 하나도 기억 못하는 사람처럼.”
“정말이야. 기억 안 나. 어쨌든 고마워. 여기서 한 잔 하다가 대리 불러서 집에 돌아갈 테니 걱정 말고.”
그녀는 전화를 끊고 칵테일 한 잔을 시켰다. 그리고 또 한 잔, 또 한 잔, 그 레스토랑 메뉴에 있는 몇 개 안 되는 칵테일을 번갈아 다 시켰다. 맛은 그저 그랬다. 블라디메리, 블랙러시안, 모히토, 진토닉. 미국에서 남편이 해주던 칵테일 맛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만 드시죠.”
옆에서 어떤 목소리가 그녀의 술잔 잡은 손목을 잡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는 몽롱해진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M이었다. 아니? 이 사람은 죽은 사람인데…. 갑자기 뒷목이 서늘해왔다. 남자가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천천히 빼서는 테이블에 놓았다. 남자의 한 손이 그녀의 등을 감쌌다. 그녀는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싫어. 싫다구. 제발 그만둬. 날 건드리지 말아줘….”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남자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카운터에서 놀라 뛰어오는 바텐더에게 얼음물 한 잔을 주문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침 햇살이 한 줄기 가늘게 커튼 사이를 삐져 들어온다. 그녀는 노곤한 몸을 뒤척이다가 깜짝 놀라 이불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는 이불을 이리저리 뒤집었다. 그 옛날 모텔 방에서 고통 속에서 밤새 잠 못 이루다가 아침에 깨었을 때 요에 묻은 핏물을 발견하고 소스라쳐 놀랐던 기억이 스물스물 머리 한구석을 비집고 올라왔다. 아니라고? 그래, 그 남자가 M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 손길이 M이었을 리가 없어. 그 난폭하던 손길, 그녀를 기절시킬 정도의 완력. 난 왜 M한테 그 일을 따져보지도 않고 미국으로 도망쳤을까?
“싫어, 싫다구. 제발 그만둬.”
외치는 자신의 목소리도 환청이 되어 들려왔다. 끔찍히도 기억하기 싫었던 그때가 이제 와서 그대로 생각나는 것이 이상했다. 안개에 깔려 있던 기억이었다.
첫 경험이 너무나 싫었어. 기억하기 싫었어. 그것만은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었지. 한국이 끔찍했지.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났지.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를 매만졌다. 방엔 아무도 없었다. 옷도 어제 입었던 그대로였다. 한바탕 꿈을 꾼 것 같았다. 방을 내려왔다. 어제 저녁을 보냈던 레스토랑 이층에 있는 모텔이었다. 체크아웃을 위해 카운터로 갔다.
“어제 남자 손님이 지불하셨는데요.”
웨이터가 말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주차장으로 갔다. 차에 올라 준혁에게 전화했다.
“혁, 너 어제 혹시 백종회 씨한테 나 여기 있는 것 알려줬니?”
“누님, 혼자 있으면 좀 걱정되잖아요. 마침 그 형이 전화했길래….”
“언제 두 사람이 그렇게 친해졌니? 동창이라면서 형이라고 부르네.”
“뭐, 원래 내가 학교를 빨리 갔어요. 알고 보니 세 살이나 많더라고요. 그런데 누님, 그 형, M 형하고 좀 비슷하지 않아요? 체격도 그렇고, 모습도 그렇고. 목소리가 비슷해요. 또 우리 사투리가 그렇잖아요. 전화하다 보면 내가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그런데 어젠 괜찮으신 거죠?”
“응, 어제 그분 덕분에 술도 그만 마시고…. 잘 되었지만, 그런데 너 M 별세할 때 너 혼자 있었니? 병실에?”
“네, 사실 그때, 누님 얘기를 주절주절했어요. 누님하고 어제 전화한 다음 잘 생각해 봤는데 그 형 임종하기 전부터 저한테 누님 얘기를 했어요. 사람들 없을 때면 더 했는데요. 사실 전 그때 누님 얘긴 줄 몰랐다니까요. 미안하다고 그 형이… 말했어요. 깡패들한테 거의 죽을 만큼 맞아서 올라갈 수가 없었다고 하데요. 그건 내가 아니다. 무슨 말인지 정말 알쏭달쏭하지 않아요? 오해했을 거라고요. 자긴 오해를 풀어야 한다고 했어요.”
“알쏭달쏭? 오해?”
“네….”
“그런데 왜 내게 자세히 얘기를 전해 주지 않았어?”
“정말 제대로 얘기하질 않았다니까요. 횡설수설했다니까요. 누님 이름이 어쩌다가 나오지 않았으면 누님 얘기인 줄도 모를 뻔했다니까요.”

 

아마도 그녀가 취해서 먼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한밤중, 난폭한 몸놀림에 온몸을 유린당하고 정신을 잃었지만 깨었을 때 옆자리엔 M은 없었다.
자기가 아니었다고? 그럼 누구였단 말이지? 누가? 왜? 자기가 아니라고? M과 함께 레스토랑에 있을 때 시비를 걸어오던 건장한 사내가 문득 저 먼 기억에 잡혔다.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좋겠다나? 하는 어이없는 말로 시작했던 남자였고 종내에는 M을 때리려고 덤비기까지 했다. 주변엔 그 사내의 일행도 몇 명 있었던 것 같다. 그 남자를 피해 방으로 급히 올라갔던 것은 기억나는데 왜 M이 다시 내려갔을까? 아마, 무슨 물건을 차에 두었다고 그랬었는데…. 그 말을 할 때의 그의 표정이 붉어지던 것도 기억에 있는데…. 아침, 주차장엔 M의 차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서울까지 택시를 불러서 갔다. 누구에게 와 달라고 차마 전화할 수 없었다. M에 대한 증오와 배신감, 다시는 그를 보지 않겠다고 몸을 떨었다.
그녀가 한 달가량 병원을 쉬었을 때 같은 기간 M도 병원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른 원인은 생각해 보질 않았다. 그저 원망과 미움에만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아니라고? 대신 누가 그녀가 자는 방에 들어왔단 말인가? 누가?

 

지금 생각하니 그 이후로 그녀 자신 M을 찾지 않았다는 것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M 또한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 후로 M이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얼마 후 이혼했다는 소식도 어렴풋이 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남편과 함께 귀국하기 바로 전에 별세했다는 소식까지….
어쨌든 그 일들은 모두 옛날 일들이다. 하지만 그대로 사라져 버린 일은 아니었다. 그때 이후 그녀는 남편과 결혼한 뒤에도 정상적인 성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하나 낳은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마 백종회는 북한강변에 있는 카페마다 그녀를 찾기 위해 차에서 내렸을 것이다. 만나보고 싶었다. 옛날 젊었을 때와 똑같지는 않지만 삶을 이대로 껴안고 싶었다. 보고 싶다는 감정,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녀는 거의 무감각해져서 살았다. 평생 섹스의 느낌을 모르고 살았고 남편에게 그 이유를 말하지도 못했다. 도망치듯 미국으로 달려간 이유에 대해 그녀 자신 꽁꽁 숨기기에 바빴다.

 

이제 한국에 다시 온 이유가 분명해졌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돌아와서 숙제를 풀 곳이기도 했다. 딸이 있고 귀여운 외손녀가 둘이나 있는 미국이지만 그녀를 매혹시키는 곳은 이곳이었다. 삶의 미스터리가 가득한 이곳, 내 조국이었다. 찬찬히 살면서 다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다면 하나씩 챙겨서 하고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M처럼 말도 똑똑히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숙제를 하려고 허둥지둥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정신이 온전할 때 그 일들을 하나씩 해 나갈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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