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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여름과 겨울 사이의 문장

명사해수욕장 주차장에 차를 댄다. 햇살 한 줌이 내려와 기다리고 있다.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10년 전 넘어졌던 그 자리라는 것을 당신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남자가 서 있던 곳도 다 기억하고 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겨울바람 속에 담겨 있던 남자의 모습이 흔들리는 그림자 위로 오버랩 되는 것을 당신은 놓치지 않는다.넘어진 것은 단순히

  • 유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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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엔딩파티

벌써 네 번째다. 저장되지 않은 낯선 번호가 연이어 뜬다.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마지막엔 그마저도 귀찮아 벨소리가 끝날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지치지도 않고 울어 대던 벨소리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제발 전화 좀 받아요’ 슬슬 짜증이 올라온다. 메시지 읽음 표시를 확인했는지 또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나도 모르게 통화 버튼을

  • 정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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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그녀의 등산로

4월로 접어든 산은 개혁에 들어갔다.겨우내 짜둔 작전이 산 이곳저곳에서 펼쳐질 조짐이 일고 있었다. 혹한에 맞서 철통같이 경계를 섰던 수피는 긴장을 풀어 세상을 향한 잎눈의 길을 터주고, 조숙한 꽃들은 잎도 나오기 전에 지분대는 햇살과 눈 맞아 배시시 몸을 열었다. 지난해 떨어져 바짝 마른 낙엽은 청설모의 발걸음에도 바스러지고, 낙엽 밑에는 진격 명령 떨어

  • 이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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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팍스 몽골리카

1.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인천공항을 차고 오른 제트 여객기는 초여름 하늘을 가로지르며 북으로 끝없이 솟아오른다. 새털구름 사이를 떠가는 자신을 느끼며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벌써 기내식이 운반되고 있다. 디저트가 끝나고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끝없는 몽골 평원이 펼쳐진다. 띄엄띄엄 하얀 겔이 시야에 들어오고 말떼 움직이는

  • 구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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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AI 휴머노이드 로봇의 기억

구준수는 칠십 대 초반의 노인이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곱고 두툼했던 손도 온통 주름으로 가득했다. 얼굴에도 저승의 꽃이라는 검버섯들이 여러 군데 박혀 있었다. 젊은 시절 팽팽했던 피부는 거칠고 얇게 변했다. 몸은 예전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았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이 욱신거렸다.하지만 그의 눈빛은 늘 살아 있었고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4

  • 나향원(본명·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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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유산의 무게

매린은 여명의 빛을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또 하루가 시작된 아침이었다. 창문 너머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강하게 스며들어 더욱 눈이 부시게 했다.밤새도록 꿈과 현실의 괴리에 붙잡혀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을 보낸 매린리아안 그녀는 겨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천천히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서 창문을

  • 우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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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25.6 71호 선바위

실로 순식간이었다, 선바위가 그렇게 사라진 것은. 2000여 년 묵묵히 병지방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던 선바위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졌다.구융소 단풍이 선홍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하던 가을날. 포클레인이라 불리는 굴삭기 삽날 아래 선바위는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선바위는 아무런 실체 없이 전설이 되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은 할 말을 잃고 그냥 멍하니 무너

  • 정재영(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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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2025.6 71호 아들은 미쳤다

어느 날인가. 아마 아파트 단지를 노란 개나리로 치장하던 봄날이지 싶다. 제대 후 복학한 아들은 강의와 알바가 없다며 오전 내내 방구석에서 폰을 들고 뒹굴고 있더니 잠시 나갔다 온다며 외출을 했다. 그런데 두세 시간 후 한 손에 묵직해 보이는 쇼핑백을 들고, 가슴에는 손바닥만 한 새까만 푸들을 안고 있었다.“얘, 그게 뭐니?”“아휴, 엄마는 보면 몰라요.

  • 박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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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6 71호 영정사진

오랜만에 들른 오라버니 댁…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코끝이 싸하다.“아유, 이게 무슨 냄새지?”얼굴을 찌푸리며 앞을 보니 평상에 오라버니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언니는요?”오라버니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큰방을 가리킨다.“언니 좋아하는 거 가져왔어요.”곶감이 든 쇼핑백을 들고 방문 열다 깜짝 놀라 주춤한다. 소복한 올케 언니가 제사상을

  • 박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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