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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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린은 여명의 빛을 느끼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또 하루가 시작된 아침이었다. 창문 너머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찬란한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강하게 스며들어 더욱 눈이 부시게 했다.
밤새도록 꿈과 현실의 괴리에 붙잡혀 불면증에 시달리며 밤을 보낸 매린리아안 그녀는 겨우 무거운 몸을 이끌고 초점 없는 시선으로 천천히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서 창문을 활짝 밀어 열자, 상쾌한 미풍이 밀려들며 온몸을 감싸며 정신을 맑게 만들었다.
하늘은 파랗게 젖어 있고 그 아래는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돌며 낭만을 그렸다. 담장 위를 장식한 장미 넝쿨에는 빨간 오월의 장미꽃이 아름답게 물들어 있고, 정원의 나뭇가지에는 나뭇잎이 싱그럽게 덮여 평화롭고 경이로우며 감미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매린리아안의 눈 속에는 한 점도 담아지지 않았다. 갑자기 밀려드는 삶의 궤적에 눌려 불분명한 감각으로 현실에 발걸음하고 있을 뿐이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겨우 정신을 찾은 매린은 전화기 옆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매린! 나야.”
“어! 그래, 유진아.”
미국에 거주한 친구였다. 매린리아안은 미 이주 3세대였다. 그래서 그녀의 이름은 미국 현지에 맞게 붙여진 이름이다.
“걱정되어서 전화했어, 건강은 어떻니?”
“고맙다. 덕분에 큰 변화는 없어.”
사고와 우환이 그녀에게 끊임없이 이어져 친구와 친척들의 위로 전화가 빈번히 걸려 왔다.
“나 다음 달 서울 갈 거야. 친정 조카 결혼이 있어서 그때 보자 매린.”
“응 그래, 도착하면 전화해.”
수화기를 내려놓자 똑,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며 집사가 불렀다.
“회장님! 일어나셨어요?”
“어 그래, 무슨 일이야?”
“네, 도련님 방에 가보세요.”
매린은 비탄에 잠긴 한숨을 내쉬며 20년 전 교통사고로 전신마비가 돼 전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아들 승진 방으로 들어섰다.
“어머니.”
아들 승진이 매린을 바라보며 불렀다.
“응 그래, 어디 불편한 데 있니?”
“아니요.”
“그럼, 할 말이 있니?”
“네, 저 별장에도 가고 싶고, 여행도 다니고 싶고요.”
승진은 답답했다. 물론 격일로 교대 근무하는 남자 간호사가 그의 곁에 있어 목욕 및 안마, 마을 골목길이나 한강변을 산책시켜 주며 건강을 돌봐 왔다. 그러나 그가 그 외에 할 수 있는 건, 엎드리거나 소파에 기대 문학지나 소설을 넘기며 보는 것이 유일한 그의 삶이었다. 얼마나 불우하고 안타까운 삶인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답답했다.
“그래 알았다. 별장엔 언제 가고 싶니? 여행은 차차 계획을 세우마.”
“오늘이라도 가면 좋아요.”
“그것은 아니다. 너 혼자가 아니고 간호사들도 가는 데 준비 시간을 줘야지.”
“네, 알았어요.”
“내가 집사에게 부탁해 놓으마. 준비되면 가도록 해라.”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별장은 양평호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산 언덕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산수가 맑고 주변의 경관이 좋아 주말이나 휴일을 이용하여 주변 정서에 빠져들어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다.
“힘든 엄마에게 짐이 돼서 미안해요.”
그녀는 5개 계열사를 운영하는 현 회장이었다. 해운 운송, 토목 건설, 식품 생산 유통, 호텔 경영, 백화점 운영 등등 5개 계열사를 거느린 주식회사 진도그룹이었다. 고 박진모 회장이 2년 전 심근경색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가 경영 일선의 회장으로 투신하게 된 것이다.
매린리아안은 미국 뉴욕주에 거주하며 컬럼비아대학교 세무회계학과에서 공부하다 남편 박진모를 만났다. 컬럼비아대 교정을 드나든 학생들은 대부분 백인과 흑인들이었다. 황색을 띤 동양인은 극히 드물어 눈에 띄기 쉬웠다. 1학년 겨울방학을 맞이하게 된 어느 날 매린은 캠퍼스 교정에서 동양인 박진모와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그의 외모에 매료되고 말았다. 또 같은 동양인이라 경계심보단 친밀감이 느껴져 쉽게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 네.”
그가 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같은 동양인이라 실례를 했습니다. 국적이 어떻게 되십니까?”
“사우스 코리안, 한국입니다.”
“와아! 정말이요?”
매린은 반가움에 가녀린 손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그도 ‘역시’라고 되물으며 서슴없이 매린의 여린 손을 성큼 잡았다. 역시라는 것은 너도 역시 한국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네, 이주 3세대지요.”
“오우, 정말 반가워요.”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같은 민족을 만났다는 데서 그도 매우 긴장했다.
“네, 정말 반가워요. 저는 매린리아안이어요.”
매린이 조각상처럼 잘생긴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대한민국 서울의 박진모입니다.”
그가 시원하고 경쾌한 표정을 띠며 말했다.
“차 마실 시간이 있나요?”
매린이 물었다. 그가 시원하게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요.”
대학가 주변에는 서점, 문구점, 카페를 비롯하여 음식점이 많았다. 두 사람은 교정을 벗어나 그린가든 하우스로 들어가서 커피를 주문해 마시며 신상에 대해 궁금한 점을 얘기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졌다. 그 후 두 사람은 사랑이 매개된 아름다운 세월 속에 학창 시절을 보내다가 졸업이 가까워 어느 날 박진모가 매린에게 프로포즈해 왔다.
“매린! 우리 결혼해요.”
매린이 가슴 조이며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네?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저는 매린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제 인생에 길이 돼 주세요.”
“생각 좀 해보고 답 드리면 안 될까요?”
매린은 그 자리에서 곧 예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가볍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가벼워 보인다는 이미지를 남겨 주고 싶지 않았다. 그 후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시 물었다.
“아직도 고민 중이신가요?”
그는 활달하고 여유가 있으면서 무게가 있는 성격이었다. 급한 성격이라면 그 문제로 여러 차례 나에게 종용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매린은 그에게 믿음이 생겼다.
“네, 한 가지 질문이 있어요?”
“말해봐요.”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인생을 16년 동안 학업에 투자했어요. 결혼하고도 사회 일선에 나가 제가 닦아온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요.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 줄 수 있느냐, 나는 묻고 싶어요.”
그는 입술을 꼭 닫고 한동안 매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가에 시원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 그가 커다란 웃음을 터뜨린 뒤, 말을 시작했다.
“매린!”
“왜요?”
“그것을 들고 두 달이나 고민한 거예요? 쉽게 삽시다. 그대가 하고 싶은 건 모두 다 만들어 줄 거니까.”
매린은 박진모가 대그룹의 외동아들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럼, 하늘의 별이라도 따 줄 건가요?”
“인간이 풀 수 있는 내에서 당신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요.”
매린리아안과 박진모는 졸업과 동시 결혼을 하고 서울로 날아왔다.
남편 박진모는 아버지가 경영한 진도그룹 본사 기획부에 입사하였고, 매린은 본사 총무부에 자리를 잡아 사회 속에 입문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 매린은 임신하여 아들 승진을 낳았다. 시어머니는 손자를 더 보고 싶어 끊임없이 종용했지만 이후 가업을 등에 업고 형제 사이에 경쟁 관계가 될 가족사가 상상이 되어 더 이상 매린은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그룹 운영에 태클을 걸며 이의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이가 있다. 창업주 2세대인, 해운 운송 계열을 경영하는 숙부 박중호 부회장이다. 그렇듯 가족계획을 분명히 하게 된 매린과 남편 박진모는 현재를 교훈 삼아 미래를 건설적으로 설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것이 이후 크게 걸림돌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창업주 2세대 시아버지 박중인 회장도 나이 고령이 되어 세상을 타계하고 떠났다. 그 여파로 공석이 된 총괄회장의 자리를 두고 숙부 박중호 부회장과 남편 박진모의 지분 전쟁이 이루어지며 이사진 충돌과 사내 내분으로 한동안 회사가 시끄러웠다. 그러나 지분 40퍼센트를 가진 남편 박진모가 그룹 회장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시아버지 박중인으로부터 20퍼센트 지분 유산을 받아 든 매린도 남편의 뒤를 이어 기획실 이사로 자리를 옮겼다. 그것으로 인해 연쇄적 승진과 인사 이동으로 업무가 어지러웠다. 그 와중에 줄 서기라는 미묘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보유 지분 확보의 교차로에서 견해 차이로 자주 술렁거렸다. 모든 사람은 운명의 여신이 만들어 놓은 자기의 그릇 안에서 묵묵히 살아가야 일생이 무난하다. 욕망의 눈망울로 세상을 더듬으며 주어진 운명을 초월하려 드는 것은, 곧 불행의 씨앗이 움터 오르게 함이라. 그렇듯 나의 적은 내 가까이 있다는 말이 있듯 숙부인 박중호의 어두운 내면이 총괄회장을 이어받은 박진모를 불안하게 했다.
오, 신이여 굽어살피소서! 그러나 그 암울한 현실에서도 진도그룹은 원활히 발전하며 성장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세월이 흘러 장난감을 들고 거실을 통통 뛰어다니던 아들 승진이 어느새 스무 살이 넘어 대학 재학 중 병역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 입소를 하여 복무에 들어갔다. 그 과정에서 하늘을 날아 낙하를 자주 하는 특전사에 자원하여 매린의 가슴을 조이게 했다. 그래서 매린은 승진에게 부탁했다.
“승진아, 다른 일반 부대로 전출하면 싶다.”
“엄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훈련하다가 사고로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 없어요.”
더 이상 승진과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제 아버지를 닮아 키가 190이 넘었다. 또 매끈하게 균형이 잡히고 단단한 몸매를 가진 아이는 초등학생부터 축구, 농구를 즐겨 했다. 그래서 하늘 위도 날아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승진은 병역 의무를 다 하고 다시 대학에 복학했다.
“엄마, 사랑해요.”
이젠 매린은 남편 사랑이 아니라 아들 사랑이었다. 그렇듯 승진도 매린의 따뜻한 품속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행복했다.
“승진아, 이젠 하늘 좀 그만 올라가면 안 되니?”
아들이 좋아한 낙하산이지만 걱정을 놓을 수 없었다. 어제 아침, 그것도 이른 새벽에 나갔다가 밤을 보내고 오늘 늦은 저녁에 들어왔다. 즉, 패러글라이더에 너무 매료되어 있었다.
“패러글라이더도 단체가 있니?”
매린은 궁금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럼요, 동호회지요. 그렇게 걱정돼요?”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세요, 여자 회원도 있어요.”
“어, 그래?”
그래도 걱정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이 엄마다. 겨울방학이 끝나면 이젠 대학 3학년이 된다. 매린은 갑자기 예후가 심상치 않게 불안했다. 막연한 확신이지만 더 이상 위험에 빠져드는 것을 방관할 수 없었다. 미국 뉴욕에는 외가가 있었다. 매린은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래서 도미를 시켜 뉴욕 컬럼비아대 산업경영학과에 아버지의 전철을 밟도록 유학을 보냈다. 방학 기간이 되자 승진이 득달같이 집으로 달려왔다. 그리고 주말이 되자 패러글라이딩 장비를 챙겨 들고 대문을 빠져나갔다.
“엄마, 저 내일 와요.”
“그래, 알았다. 그런데 네 차를 두고 왜 걸어 다니니?”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강요는 할 수 없었다.
“왜, 불편해 보여요?”
“그럼.”
승진은 검소하며 예의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승진이 대그룹을 거느린 집의 고명아들인 줄 몰랐다.
“택시 타면 돼요.”
승진이 즐기는 패러글라이딩 동우회는 서울에서도 5∼6개의 단체가 있었다. 그 단체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무게가 만만치 않다. 또 패러글라이딩 장비도 고가이고 산악길을 달려야 하기에 사륜구동 SUV가 필수다. 그러므로 회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승진은 풍요로운 환경을 등에 업고 있어 세 곳의 단체에 등록이 되어 군대 동기 정진우 친구와 그의 사촌여동생 정효주가 삼총사 콤비를 이루며 그날의 비행장을 찾아 비행한다.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컬럼비아대 유학의 시간도 1년이 되어 3학년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서울로 달려온 승진은 삼총사 콤비 정우진과 정효주를 만나 춘천 대룡산 제1비행장에서 첫날을 비행하고 오늘은 제2비행장에서 비행을 즐기고 춘천을 떠났다. 마포구 합정동 사무실에 오후 5시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짧은 해는 곧 밤이 시작되었다.
“야 정진우! 저녁 해결해야지.”
사무실을 나오며 승진이 진우에게 말했다.
“어, 그럴까?”
“숙녀분도 계시는데 사나이가 체면 정도는 알아야지.”
승진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와아! 너 지금 사람 마음 유괴하려 드는 거니? 그리고 또 내 동생 넘 보는 거 아니니? 그것은 내가 절대 용납할 수 없지.”
‘이 둔상아! 뭐? 용납?’
승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승진이 효주를 알게 된 것도 1년 반이 되었다. 2년 전 여름방학 어느 날 진우가 홍익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 1학년생인 효주를 옆에 달고 나타났다. 그리고 효주를 패러글라이더 회원으로 가입을 시켰다. 그 후 박승진과 정효주는 진우의 눈길을 피하며 비밀 교제를 시작했다.
그래서 진우는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지난 여름방학 어느 날이었다. 아침 일찍 헬스클럽에서 승진이 운동을 하고 나오는 중이었는데 휴대폰 벨이 울려 받았다.
“저 효주인데요.”
“어어 그래, 효주?”
“네, 그런데 놀라지 않았어요?”
“놀랐지.”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서 기분이 어때?”
승진이 효주에게 물었다.
“좋지요.”
“그래! 왜 좋을까?”
“그건 비밀이에요.”
“어, 그래?”
“네! 지금 어디예요?”
“집 근처. 왜? 할 말 있어?”
“집 근처라면 내가 알아요? 부산인지 대구인지.”
그는 자신의 신상을 꼭꼭 숨겨두고 있어 효주는 그렇게 말했다. 승진은 재치 넘치는 그녀의 말솜씨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커다랗게 터뜨렸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내가 어디로 가면 될까?”
“홍대 앞에 그랑카페가 있어요.”
“알았어, 한 시간 후에 만나.”
승진이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까지는 1시간 10분이 걸렸다.
“여기요.”
승진이 헐떡이며 출입문을 들어서자, 효주가 손을 들며 일어섰다.
“어, 미안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승진이 말했다.
“왜요?”
효주가 웃으며 물었다.
“늦었잖아.”
“뛰어오기까지 했잖아요. 더 늦을 수도 있는데요, 뭐.”
“고마워, 이해해 줘서.”
“그런데 동네가 어디예요?”
“봉천동.”
이 사기꾼은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숭실대 너머요?”
“맞아요.”
두 사람은 커피를 주문해 마시고 나왔다. 근처에 한식당이 있어 간단하게 점심 식사를 즐겼다. 그 후 은빛 물결이 잔잔히 밀려들며 소곤거리는 한강변을 거닐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가 헤어지게 되었다.
“내일은요?”
효주가 물었다.
“아, 미안해요. 알바를 해볼까 해서요.”
승진이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학비 벌게요?”
“아니요. 미래를 건강하게 하려고요.”
“알바가 미래를 잘 살게 해줘요?”
“당연하지. 경험이 많으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 아닙니까.”
“와아, 저를 빠져들게 만드네요.”
“빠져도 돼요. 다만….”
“다만 뭐지요?”
“신중해야 할 거요.”
“네! 신중해 볼게요.”
그 후 3일 만에 승진은 효주를 만났다. 그리고 커피를 마시고 나오며 효주에게 말했다.
“오늘은 제가 쏠 겁니다.”
“힘들게 일해서 벌어온 돈을 가지고요?”
“오해 말아요. 그 돈 없어도 우리 집 무난하게 살아요. 중, 상류층은 못 되지만요.”
“저를 지금 안심시키려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했다면 기꺼이 예, 라고 하지요.”
그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여름방학 동안 극장과 음악회, 회화 전시회, 연극 공연 등과 해수욕장을 찾아다니며 방학 시즌을 즐겁게 보냈다.
“효주 씨, 다음 겨울방학 때 만나요.”
개학을 앞두고 승진은 뉴욕으로 달려가야 했다.
“왜, 어디 가세요?”
“아, 제가 말 안 했던가요? 저는 부산에서 공부를 해서요.”
이 사기꾼은 훌륭한 사기꾼이었다.
“아 그래요, 미처 몰랐네요. 그럼, 그때 봐야지요.”
승진은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며 사기 행각을 하고 있다. 이는 효주나 주위의 친구들에게 배신이고 우롱이었다. 그러나 승진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승진의 집은 한남동에 있었다. 몇몇 재력가들이 오밀조밀 모여 사는 동네로 한강물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지 600평 위에 규모가 커다란 본건물을 호위하듯 아담한 부속 건물 두 동이 좌측과 우측에서 본 저택을 바라보고 있는 대저택이다. 그 사실을 효주가 알게 되면 깜짝 놀라 까무러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결혼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 재벌 그룹의 자녀들은 정략결혼이 보편적인 일이다. 하지만 효주에게는 다가설 수 없는 마치 거대한 벽일 것이다.
승진은 자신의 미래를 계산하며 효주를 신중히 관찰하는 중이다. 또한 부모님의 틀에 박힌 정략결혼의 강요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이기도 하다.
효주는 눈과 마음을 현혹할 만한 절세 미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여인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보조개가 깊숙이 들어가며 눈웃음을 짓는 그녀의 미소는 신이 선물을 내린 듯 환상적이었다는 말 한마디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더 나아가 육감적인 몸매는 더욱 그녀를 돋보이게 했고, 기품이 넘친 여자로 인격과 교양이 가득 담겨 승진의 마음을 뿌듯하게 해주었다.
그래서 승진은 자신의 미래 속에서 효주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가 사랑에 빠지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효주 오빠 진우는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둔상을 보며 승진이 제의했다.
“야, 정진우! 내가 오늘 쏠 테니까 다음은 네가 쏴.”
“그래 알았어.”
사무실 근처에 한식 전문 식당이 있었다. 세 사람은 그곳에서 술과 음식을 주문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밤 8시가 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효주와 진우가 떠난 다음 승진은 택시를 잡아타고 한남동 집으로 향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을 찾아 달리던 승진은 갑자기 달려든 대형 트럭과 추돌하며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5대 조간신문 1면에 대서특필 보도되었다. 진도 그룹 회장 외동아들 박승진 2.5톤 뺑소니 트럭에 사고, 중태. 택시 운전기사 사망.
이 사고 소식을 당면하게 된 승진의 엄마 매린 리아안은 충격을 받고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시부모의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아들 하나로 만족하려 했던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남편과 자신이 일생을 투자해 이끌어 온 거대 기업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자책하기 시작했다.
이 신문을 우연히 보게 된 효주는 소름이 돋아 심장이 조여 들었다. 물론 동명이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효주는 애써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오빠! 이 신문 봤어?”
진우를 찾아 신문 펼쳐 놓으며 말했다.
“어, 그래. 그런데 왜?”
“박승진이잖아, 성도 이름도 같고….”
“야, 정효주! 박승진이 우리나라에 한두 명만 있겠니? 넌 너무 기우가 많아서 걱정이야.”
오빠 진우의 말도 맞는 말이었다. 그는 분명히 봉천동 서민들의 마을이라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이 불안했다. 그녀는 불안을 떨칠 수 없어 진우 집을 나서며 휴대폰을 꺼내 박승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로도 감감무소식이 되고 말았다.
다음 날 슬픔을 안고 회사로 출근한 박진모 회장은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어 법률 부서장 홍성호 변호사를 호출해 2인 회의실에 들어섰다.
“부서장! 이번 사고를 어떻게 생각해요?”
“네, 회장님! 위로를 먼저 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법무 부서에서 회의를 하다가 오는 중입니다.”
“나는 이번 사고가 우연이 아니라 생각해요.”
박진모 회장이 생각하는 거는 시시때때로 그룹 경영에 반목하며 회장 자리를 시시탐탐 노리던 숙부, 박중호 부회장을 오랜 시간 경계해 왔다.
“네, 저희도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직 수사관을 고용하여 암행 수사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 잘 생각했어요. 비용에는 부담을 버리고 철저한 조사를 해 주시오.”
사고 차는 렌트카였다. 차를 렌트한 사람은 서울역 노숙을 하며 살아가는 노숙자였다.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사건의 핵심 배후자는 감이 오지만 증거가 없어 전적이 화려한 전직 수사관이 자신의 경험을 총동원하여 은밀히 수사하고 있지만 미제 사건으로 남고 말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며 의식을 잃었던 승진이 조금씩 의식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족이 마비되고 기억상실이 되어 버린 승진은 모든 의욕을 잃고 말아 그것을 바라보는 매린의 가슴에 대못이 박히고 말았다.
“여보!”
매린은 자신이 짊어져야 하는 유산의 무게에 숨이 멎을 것 같아 불면증에 시달리며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고민에 빠졌다. 그 과정에서 문득 아들 승진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엄마! 여자 회원도 있어요.”
매린은 그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남편을 불렀다.
“왜요?”
“패러글라이더 동호회를 수소문해 줘요. 수사관을 고용해서요.”
“그건 또 무슨 생각에서?”
“누구 좋아할 일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 유산을 물려줄 아이가 있을지 몰라서요.”
“왜? 사귀던 여자라도 있었나요?”
“패러글라이더 동호회에 여자 회원도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박진모는 탐문 수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는 물거품이 되며 실망만 잡아들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며 숙부 박중호도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박현모가 뒤를 이었다. 그 속에서 매린의 삶에 불행이 또 찾아왔다. 심근경색으로 병원을 드나들던 남편 박진모가 건강을 찾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진도 그룹은 또다시 경영권 싸움이 벌어지며 회사는 태풍 중심 속에 있는 듯했다. 하지만 이사진들의 강렬한 지지와 과반의 지분으로 매린은 남편 박진모의 뒤를 받아들었다.
벌써 남편을 사별한 지도 3년이 넘었다. 그래도 매린은 유산의 무게를 놓을 수 없었다. ‘여자 회원도 있어요.’ 승진이 했던 말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에 집사 미정이 숨 가쁘게 방문을 열며 사모님, 사모님 하고 불렀다. 매린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집사.”
“이것 좀 보세요.”
그녀가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젊은 청년의 사진이 있었다. 매린은 대충 훑어보고 핸드폰을 집사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이건 뭔데 날 보인 거지?”
“아우, 사모님! 자세히 보세요. 도련님 학창 시절하고 똑같잖아요.”
매린은 화면에 있는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승진이 사진은 왜 찍은 거야? 그것도 앨범 속 사진을?”
승진의 앨범은 매린의 방 책장 속에 모두 다 있었다. 그런 앨범 속의 사진이 왜 미정의 핸드폰 화면 속에 있는지 의아했다.
“아우, 사모님! 왜 그렇게 감이 안 가요? 어쩌면 이 사진이 사모님께서 평생 짊어진 짐을 놓게 해 줄지도 몰라요.”
“짐! 무슨 짐?”
“사모님! 지금 도련님 아이를 찾고 싶은 것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이 사진은 도련님 아이로 추정되는 인물을 찍어 온 거예요.”
“아, 정말이야?”
“네, 정말이요.”
집사 미정이 살고 있는 마을은 재건축 아파트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래서 미정의 가족은 3년 전세로 이사를 해야 했다. 그 집에서 화면 속의 청년과 마주치며 미정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장애인이 되어 삶의 의식을 잃고 있는 진도 그룹 아들 승진의 학창 시절을 다시 본 것 같아서다.
그 말을 들은 매린은 긴장에 빠지며 소름이 돋았다.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서 방 안을 서성이다가 집사 미정에게 부탁했다.
“김미정 집사! 지금 그를 만나 볼 수 없을까?”
“사모님!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어요. 우선 유전자 검사를 먼저 한 다음 순차적으로 풀어 나가야지요. 제가 머리카락이나 칫솔을 구해 드릴게요.”
집사 미정은 일주일이 지나 칫솔 두 개와 머리카락 한 올을 들고 와 유전자 검사에 들어갔다. 99.98퍼센트 일치였다. 매린은 흥분이 일어 잠시도 기다릴 수 없어 집사 미정과 같이 청년의 집으로 달려갔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현관문이 열리자 미정이 인사했다.
“그래, 어서 와요. 그런데 무슨 일이지요?”
“할 말이 있어서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매린은 아들 승진의 일생에 주어진 일탈을 들려주며 할머니에게 유전자 검사지를 펼쳐 놓았다.
“그런데 이 서류는 무엇이지요?”
할머니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매린에게 물었다.
“아, 네. 의료기관에서 검사한 혈연관계 맞습니다.”
“누구와 누구를 지칭한 거지요?”
“제 아들과 할머니의 손자 정원에 대한 것입니다.”
인적 사항에 기록된 할머니의 손자 이름이 정원이었다.
“아, 그래요? 이 문제는 크게 잘못된 것 같네요. 그래서 부탁인데 다른 데 가서 찾아보세요.”
할머니에게는 사정이 있었다. 딸 효주가 대학교 2학년 여름 어느 날부터 음식을 먹다가 구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화 불량이라 생각하며 넘어갔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병원을 찾은 효주에게 내려진 소식은 임신이었다. 뜻밖의 소식을 받아 든 효주는 눈앞이 캄캄해져 실신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며 고민에 빠진 효주는 유산을 결심하고 산부인과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의사의 질문이 뒤따랐다. 초임에 유산을 하게 되면 영원히 임신이 불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의 출산은 여자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효주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휴학계를 내고 아들을 낳았다.
효주의 엄마 방연심에게는 남매가 있었다. 딸 효주와 효주의 오빠 정진구였다. 아들 진구는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결혼하였지만 며느리에게 임신 소식은 없었다. 그 속에서 아들 진구에게 불행이 덮쳤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수업이 끝나 귀가 길에 들어선 진구는 중앙선을 넘어 달려든 대형 트럭에 추돌하여 식물 인간이 되고 말아 그의 엄마 방연심은 불행 속에서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딸 효주가 임신 사고를 치면서 그녀의 가슴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거대한 태풍이 일어났다.
이미 아들 진구의 미래는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딸 효주의 미래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 방연심은 딸 효주가 낳은 아이를 아들 진구의 호적에 입적을 해 주었고 딸 효주는 새로운 사람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매린은 더 이상 효주 어머니 방연심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친자 소송에 들어갔다. 이 소송 사실을 알게 된 손자 정원은 스스로가 매린을 찾아 박정원이라는 이름으로 호적 입적을 하며 매린이 짊어졌던 유산의 짐을 내려놓게 했다.
“오, 나의 손자!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매린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