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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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인천공항을 차고 오른 제트 여객기는 초여름 하늘을 가로지르며 북으로 끝없이 솟아오른다. 새털구름 사이를 떠가는 자신을 느끼며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벌써 기내식이 운반되고 있다. 디저트가 끝나고 기지개를 한 번 켜고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덧 끝없는 몽골 평원이 펼쳐진다. 띄엄띄엄 하얀 겔이 시야에 들어오고 말떼 움직이는 모습을 눈으로 식별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였던가. 울란바토르까지는 불과 3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간단한 수속이 끝나고 대합실로 나오자 벌써 한국보다 서늘한 바람이 콧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몽골에서는 이 기간을 가장 좋은 계절로 친다. 겨울이 길기 때문에 추운 몽골에서는 6∼8월이 황금 계절이다. 여름은 날씨뿐만 아니라 대자연의 선물인 유제품이 풍부한 계절이기도 하다. 유목민은 유목민대로 행복하고 도시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대로 행복한 시절이 바로 이때다.
마중 나온 인파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윤길원 교수님, 여깁니다.”
“오, 지란다이 교수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뭘 공항까지 나오셨습니까. 제가 혼자 찾아가도 되는데.”
“당연히 나와야지요. 피곤하시지요?”
“아닙니다. 너무 가까워서 싱거울 지경이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지 벌써 3년이나 됐지요?”
“그렇습니다. 아, 통갈릭! 인사드려요. 한국 대학의 윤길원 교수예요.”
“어서 오십시오, 윤길원 교수님. 저는 지란다이 교수님의 조교입니다. 가방은 이리 주십시오.”
“아, 괜찮습니다. 그럼…. 저는 이 손가방만 들겠습니다.”
공항 밖으로 나오니 대기하고 있던 차에서 급히 문이 열리더니 몽골인 운전수가 마치 한국인처럼 깊이 머리 숙여 인사하고 통갈릭 조교로부터 가방을 받아 뒤 트렁크에 싣는다.
통갈릭 조교가 조수석에 타고 윤길원 교수는 지란다이 교수와 함께 뒷좌석에 몸을 기댔다. 차는 공항을 빠져나와 미끄러지듯이 달렸고 어느덧 몽골국립대학의 오르혼 캠퍼스에 도착하였다.
3년 전, 서울에서 한몽 국가 연합이란 주제의 세미나가 열리고 이번에는 몽골에서 개최할 차례가 된 것이다. 그때 윤길원 교수는 한국 대학 총장이었다. 어느 날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총장님, 국제 관계학과 이재동 교수님이 오늘 중으로 면담을 했으면 하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용건이 뭐랍니까?”
“한몽 국가 연합이라는 국제 세미나를 준비 중인데 총장님더러 축사나 기조연설을 부탁하려 한다고 했습니다.”
“한몽 국가 연합이라고요?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네….”
“총장님 뭐라고요? 잘 들리지 않습니다.”
“아니에요. 알았어요. 오늘 1시 반쯤 총장실로 와도 좋다고 말하세요.”
마침 윤길원 교수는 요즈음 한민족 대연합을 구상하고 다방면으로 생각하고 있던 중에 이재동 교수로부터 그와 유사한 말을 듣게 되어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와 핏줄을 같이한 헝가리, 튀르키예, 몽골, 일본, 핀란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이 하나의 국가 공동체를 만들어 타 블록의 국제기구에 대처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발상이었으나 좀처럼 구체안이 떠오르지 않아 머리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중이었다. 시간이 되어 이재동 교수가 도착했다.
“저는 평소부터 총장님의 저서는 거의 다 읽습니다. 역사학을 하시는 총장님과 정치학을 하는 저는 접근 방식이 약간 다릅니다만 제 나름대로 총장님의 방향을 가늠해 보건대 제가 추진하고 있는 한몽 국가 연합에 찬동하실 것 같아서 면담 신청을 했습니다.”
“그래요? 일단 저도 이 방면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기본 발상은 찬동합니다. 저는 좀 더 크게 생각을 했습니다만 어찌 보면 과욕이었지요. 차라리 이 교수님의 계획이 더 현실성이 있습니다. 이 교수님의 생각처럼 먼저 두 나라만 시작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군요. 어떻든 내가 선수를 빼앗긴 기분도 들고요.”
그렇게 해서 한몽 국가 연합이라는 제목으로 윤길원 교수가 개회사 겸 기조연설을 하고, 몽골 측의 학자를 인솔하고 온 몽골국립대학의 지란다이 교수가 몽골 측 답사를 하고, 한몽 학자들이 열띤 학술적 토론을 했다.
윤길원 교수는 그간 총장 임기가 끝나고 지금은 평교수로 재직 중에 한국 측 대표로 몽골에 온 것이다.
“여기가 울란바토르의 어디쯤 됩니까?”
차가 오르혼에 도착하자 윤 교수가 물었다.
“울란바토르의 남쪽에 해당합니다. 인문대는 오르혼에 있기 때문에 제 연구실은 여기 있습니다. 또 하나의 캠퍼스가 자브항에 있습니다만, 모레 세미나는 이곳 오르혼 캠퍼스 대강당에서 열릴 것입니다.”
“네, 설명서를 읽어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다른 교수님들은 모두 블루스카이 호텔에 숙소가 정해졌다고 어제 통화했습니다.”
“윤 교수님 숙소도 블루스카이로 정했습니다. 같은 호텔에 머물러야 소통이 원활할 것 같아서요. 마침 지금 몽골은 나담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내일은 모두 나담 축제를 구경하고 모레부터 세미나를 개최할 것입니다.”
“신경 많이 쓰셨군요. 너무나 신세를 많이 지겠습니다. 다음에 또 한국에서 세미나가 열릴 때 이 빚을 다 갚겠습니다.”
“천만에요. 하하하.”
이때 영락없이 한국인처럼 생긴 아가씨가 차를 날라 온다. 윤길원 교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인이시지요?” 하고 물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곳 한국 문학과 3학년 학생 체첵입니다.”
“그래요? 나는 하도 한국인하고 똑같아서 한국 유학생쯤 된 줄 알았습니다. 발음도 영락없는 한국인인데요.”
이 대화를 듣고 있던 지란다이 교수가 말한다.
“네, 한국인과 너무나 닮았지요? 발음도 한국인이 하는 한국어와 아마 거의 분별 못 하실 것입니다. 저도 한국과 몽골을 비교하면서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어쩌면 몽한 양국은 이렇게 공통점이 많을까 하고요. 어떨 때 한국인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 분명히 몽골말을 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발음이며 억양이 몽한 양국이 똑같습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도 어순이 거의 비슷하지요. 우리는 같은 민족이었던 것이 분명하고 잠시 떨어져 있었을 뿐이지요.”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주장하는 한몽 국가 연합이 얼마나 일리가 있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하고 있지요. 그런데 사람의 이름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저 한국어과 학생의 이름인 체첵은 무슨 뜻입니까?”
“체첵은 꽃이란 뜻입니다.”
“저 조교의 이름 통갈릭은요?”
“네, 통갈릭은 맑다는 뜻입니다.”
“그럼 교수님의 이름 지란다이는 무슨 뜻입니까?”
“네, 지란다이는 육십 동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60세에 늦게 저를 얻어서 지란다이라고 했답니다. 원래 몽골인의 이름은 맨 앞에 씨족 이름, 다음에 아버지의 이름, 마지막에 자기 이름을 붙입니다만 소련이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위대한 몽골의 씨족 이름을 붙일 수 없게 되었지요. 그저 앞에 아버지(혹은 어머니)의 이름을 붙이고 뒤에 자기 이름을 붙이지요. 한국식으로 말하면 앞에 있는 아버지의 이름이 성에 해당되지요. 지금은 씨족 이름도 붙일 수는 있지만 성적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2000년대 들어 몽골 정부에서 본래 쓰던 성씨를 되살려도 된다고 했지만 70여 년간 소련의 지배하에 성씨를 사용 안 한 것이 습관되었기 때문에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씨족 명 추적도 쉽지 않습니다.”
“소련이 몽골인의 씨족 명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이해가 갑니다. 그들은 몽골이라고 하면 몸서리가 쳐지겠지요. 특히 칭기스칸에서 쿠빌라이 칸에 걸쳐서 희생된 이민족의 수효는 약 1억 명에 이르는데, 그들의 입장에서는 대부분이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실은 러시아는 몽골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 어떤 면에서는 가장 큰 수혜자라고도 할 수 있지요. 러시아 속담에 ‘몽골 제국군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은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시뻘건 땅’이란 말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항복하지 않고 반항했을 때의 경우입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말한다면 러시아는 유목민 왕조의 중개 무역 육성에 힘입어 상업적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요. 동서 교역로를 연결하는 선상에 놓여 있던 도시 모스크바는 몽골 지배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으니까요.”
“윤 교수님과 말하면 어쩌면 이렇게 말이 잘 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요. 현재 러시아 국토의 면적만 봐도 그렇지요. 당시 몽골 제국 전성기 시절 영토는 세계 육지 면적의 16%에 달했고, 세계 인구의 25%를 지배했는데, 현재 러시아는 몽골 제국 이후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요. 세계에서 2번째로 크다는 캐나다 면적의 거의 배를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참으로 몽골은 인류가 생겨난 이후로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던 나라였지요. 그런데 지란다이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몽골은 우리 단군조선의 지파 아닙니까? 그렇게 넓은 대평원을 차지하고 살던 나라는 배달국과 단군조선, 훈 제국, 투르크 제국 그리고 몽골 제국밖에 없지요.”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몽골-타타르의 멍에’(엄밀히 말하면 타타르는 빠져야 맞음)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몽골 제국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이 멸망하면서 러시아인들은 240여 년간이나 우리 몽골의 지배를 받았고, 후에는 반대로 소련이 몽골에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몽골의 찬란한 문화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지요.”
“그랬군요. 러시아 때문에 몽골은 위대한 지도자 칭기스칸에 대해서도 거의 1세기 동안이나 입 밖에 내는 것이 터부시되었다면서요. 침략당한 동유럽과 서아시아에서는 칭기스칸에 대하여 학살자이자 약탈자, 문명의 파괴자라고도 하는 상반된 평가가 있지요. 그런데 차나1) 는 몽골에 대한 태도가 상당히 다르지요? 차나도 몽골의 혹독한 지배를 받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만, 러시아는 자기들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외몽골을 세계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로 탄생시키나, 차나는 내몽골을 아예 자기 나라로 편입시켜 버리고 말았지요. 그리고 송을 무너뜨리고 원을 창시한 쿠빌라이 칸(세조)도 자기들의 소수 민족이었다고 현대판 아큐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들의 스승의 나라 단군조선은 역사에서 한마디 거론도 안 하는가 하면 수나라, 당나라를 싸워서 이긴 거대한 고구려마저도 자기들의 지방 정권이었다고 하니 더 말해서 뭘 하겠습니까?”
1) 일본은 중국을 영어식 차이나(China)를 음독하여 시나(‘支那’ しな)라 하였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은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중국을 지나라 하고 혹은 서국(西國)이란 말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을 지나라 하면 일본식 음독이어서 우리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차이나와 가까운 음독으로 ‘차나(茶那)’를 쓰고 가끔 서국이란 말을 섞어 쓰면 되겠다. 중국은 차가 많이 난다. 차나라고 하면 자기들처럼 무조건 외국을 폄훼하던 명칭과는 달리 상당히 배려해준 처사라는 것을 알 것이다.
“차나는 원래 그런 나라니까요. 그런데 윤 교수님,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만 저희들이 몽한국가연합을 성사시켜 놓으면 아마 세계가 깜짝 놀랄걸요. 무엇보다도 최초로 자본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의 연합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연합한 이후에는 한국의 남북한 통일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몽골은 건국 초기부터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여 왔기 때문에 북한 체제에 대한 이해가 남다르다. 한몽 양국의 국가연합이 이루어진다면 역으로 몽골에게서 남북한 통일의 중개 역할을 기대해볼 수 있다. 6·25 때 남한은 자본주의 16개국의 원조를 받았지만 북한도 중공과 소련의 군사원조 외에 많은 사회주의 국가의 물질적 원조를 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 동독, 폴란드, 헝가리, 루마니아 5개국이 의료 지원이 있었으며, 몽골이 물자 지원을 하는 등 총 8개국이 북한을 지원하였다. 특히 몽골은 6·25전쟁 기간에 북한에 많은 구호품을 보낸 나라이다. 북한에 군마 7000필을 무상으로 선사하였으며 추가로 378필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소, 양과 염소, 모피, 두꺼운 외투, 가죽 부츠, 양 가죽, 육류, 버터, 기타 지방질, 알코올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도 몽골은 1990년 남한과 과감하게 수교를 했던 나라이다. 아시아 사회주의 국가 중 한국과 수교한 첫 번째 나라였다. 이로써 볼 때 몽골은 충분히 향후 북한과 남한이 통일을 하는 데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라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먼저 남북한과 몽골의 3개 블록이 합쳐야 한다.
“윤 교수님, 여행하시노라 피곤하실 텐데 오늘 너무 많이 얘기해버리면 다음에 할 얘기가 없을 테니 좀 아껴두기로 하지요. 내일 나담 축제도 보아야 하니까 오늘은 이만 호텔로 돌아가셔서 쉬십시오.”
“그럼 그럴까요.”
윤길원 교수는 지란다이 교수의 연구실을 나와 호텔로 돌아왔다.
2.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다음 날 나담축제는 정말 가관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담축제를 보기 위하여 각국의 관광객들이 넓은 초원에 몰려들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내일 세미나에 발표할 9명의 교수들도 모두 나오고, 지란다이 교수 등 몽골 측 학자들과 유관 인사들도 한 떼를 이루고 나와서 같이 어울리며 사전 교제를 하였다.
칭기스칸이 중앙아시아의 부족들을 통합한 1206년부터 오늘날과 같은 축제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 7월 11일부터 사흘간 열리는 나담축제는 현대의 몽골 혁명기념일을 기리기 위함이다. 이날은 1921년 국부 담딩 수흐바타르가 차나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수흐바타르는 군인으로서 몽골의 독립을 위해 당시 몽골의 지도자 복드칸을 도왔던 사람이며 인민혁명당을 창시한 위인이다.
나담축제 기간에는 공연 예술, 음식과 공예품 판매, 구비문학 그리고 우르틴 두(長歌), 후미 창법, 비에 비옐게 춤, 현악기 모린후르(마두금) 연주 등 여러 가지 형식의 부수적인 놀이가 뒤따르지만, 주요 종목은 뭐니 뭐니 해도 씨름, 활쏘기, 말 달리기의 3종이다. 이를 ‘에링 고르왕 나담’(남자의 3종 경기)이라 한다. 현재에는 씨름만 빼고 두 종목에 모두 여자도 참가할 수 있다. 때문에 엄밀하게 말하면 에링 고르왕 나담은 좀 모순된 말이지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상황일 뿐 나담은 원래 남자들이 힘과 기예를 겨루는 축제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담 하면 보통 에링 고르왕 나담이라 한다.
특히 나담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말 달리기는 몽골 민족의 스케일과 비장함이 스며 있다. 약 5백 마리의 말이 끝없이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왕복 400km나 되는 장거리를 달려오는 시합이다. 현대의 경마에서 운동장 돌기나 장애물 넘기 같은 것은 여기에 비하면 어린애들의 장난에 비유할 만하다.
나담축제는 몽골족의 영원한 고향 몽골국(외몽골)은 물론, 차나의 내몽골 자치구와 바이칼호 주변의 부랴트 공화국 등 몽골족이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데 역시 말 달리기가 정점을 이룬다. 칭기스칸의 후예들은 ‘마상생 마배장(馬上生馬背長)’이란 말이 있듯이, 말 위에서 나서 말 등에서 자란다는 것이 실감 난다. 그들은 흔히 걸음걸이보다도 말타기를 먼저 배운다고 한다.
놀랄 사실은 말 달리기를 하기 위하여 대기하고 있는 기수들이 거의 다 어린 청소년들이란 것이다. 여기에는 나이의 제한도 없고 남녀의 제한도 없지만, 단 기수의 몸이 가벼워야 말이 중력을 덜 받고 오래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에 어린 소년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개중에는 12∼13세의 어린 소녀들도 아무렇지도 않게 말고삐를 낚아채며 출발선에서 대기하고 있다. 우리는 감히 상상을 못 하는 억센 몽골인의 기상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출발을 앞두고 무사무탈하기를 바라는 의식을 치렀다. 과자와 사탕 그리고 우유 등을 차려놓고 ‘세르짐 으러그흐(전능자에게 바침)’를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고시래와 같았다. 약지에 술을 묻혀 3번을 허공에 튀기는데 첫 번째는 하늘을 향해, 두 번째는 땅을 향해, 세 번째는 사람(손님)을 향해 뿌리고 있었다. 이는 단군조선의 지류인 모든 지역에서 동일하게 행하는 의식이다. 캄차카족, 알류산열도족, 에스키모족들도 음식을 먹기 전에 3번 던지는 의식을 하며 토번인, 멕시코인, 페루인들도 역시 술이나 음식물을 입에 가져가기 전에 3번 음식을 던지거나 술을 뿌린다. 이는 단군조선 이래로 우리가 숭상하던 천지인 사상이며 시천주(侍天主) 사상 그대로이다. 우리는 술이나 음식을 세 번 뿌리거나 던지며 “고시례(高矢禮)!” 또는 “고시래(高矢來 고시여 오소서)!”라 하는데, 이는 배달국의 초대 환웅 시절 주곡관(主穀官) 고시례를 부르는 소리였다. 그 후 원조선 시대에도 고시라는 관리 를 두어 농업을 주관하게 하였다. 고시는 농사일을 주관함과 동시에 불을 발견해 쓰게 해주었는데, 덕분에 쇠를 녹이고 단련하는 기술이 최초로 우리 민족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벌써 BC 2500년경에 이미 청동을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요서 지역의 하가점 하층문화에서 우리의 비파형 동검이 쏟아져 나왔다.
고삐줄을 채찍삼아 좌우로 내리치며 촌각의 여유도 없이 달리던 말이 골인 지점으로 들어올 때는 모두 몸을 이동하며 그쪽을 바라보았다. 멈추어 선 우승마는 땀을 비 오듯 흘렸으며 땀을 쓸어내리는 ‘호소르’라는 주걱 같은 도구로 말의 몸에서 땀을 훑어내자 마치 물 젖은 천을 짜듯이 흥건히 밑으로 뿌려졌다. 모든 사람들이 그 우승마를 만져보려고 야단이다.
“왜 사람들이 우승마를 만지는 겁니까?”
윤길원 교수가 묻자 지란다이 교수 옆에 있던 다른 몽골 교수가 받아서 대답을 한다.
“우승마를 만지면 재수가 좋답니다. 행운이 따른답니다. 윤 교수님도 한 번 만져보시지요.”
“그래요? 그럼 저도 만져보겠습니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전신이 젖은 단단한 몽골 전투마는 몸체가 뜨겁고 살결이 파도치듯 떨리고 있었다. 아! 이 말이 바로 세계를 제패하던 그 말이었구나.
몽골이 러시아를 점령할 수 있었다는 것은 순전히 말 덕분이라고 볼 수도 있다. 러시아 말은 150km를 달리면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버리고 말지만 몽골말은 400km를 달리고도 힘이 남아돌았다. 전력 질주인 경우는 서양말이나 러시아말은 2km가 한계이지만 몽골말은 20km를 너끈히 달릴 수 있었다. 천하의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러시아 정벌에서 실패한 것은 보급로선이 끊긴 것이 주원인이었다.
서양 말은 건초만 즐겨 먹기 때문에 말의 먹이가 크게 제한된다. 그러나 몽골 말은 눈 속에서도 말굽으로 눈을 헤치고 스스로 풀을 찾아 먹을 수 있으며 황막(荒漠)에서도 돌 사이에 납작 붙어 있는 풀을 찾아 먹었다. 또한 몽골 말은 측대보(側對步)를 하기 때문에 마상 전투가 원활하였다. 서양 말은 좌우 발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에 머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부분이 크게 들썩인다. 몽골 말은 한쪽 앞다리와 뒷다리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훨씬 안정감이 있고 활 쏘는 기수의 입장에서는 정조준이나 배사(背射; 뒤로 쏨)까지 가능하였다. 서양 말은 덩치만 크고 달리는 속력이나 힘이 세지 않아 쉽게 노출되거나 제압당하지만 몽골 말은 덩치가 더 작고 번개처럼 습격하는 능력이 있으며 거의 인간과 함께 움직이고 은폐할 수 있어 인마 일심동체를 이루었다. 또한 유럽의 큰 말과 달리 코너를 도는 순발력도 우수해 근거리 전투에도 알맞았다. 실제로 다른 말들은 염색체가 64개뿐이지만 몽골 야생 말은 1쌍이 더 많은 66개여서 유전적 특징부터가 다른 가축 말들과 구별되었다. 다른 가축 말과 교배할 수도 있는데, 교배된 말에서 나온 말은 65개의 염색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래도 다른 말보다는 다부지고 튼튼하다.
몽골의 10만 명밖에 안 되는 기병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것은, 한 기수가 5마리(최대 8마리)의 말을 끌고 달리며 갈아타기 때문에 지치지 않은 말로 끝없이 추격할 수 있었다. 거기에 위장 전술을 쓰기 위해 각 필의 말에 나뭇가지를 매달고 땅을 쓸며 공격해 오면 태산이 밀려오는 것 같아 미리서 오금이 저려 주저앉고 말 정도였다. 그 10만 마리의 말은 오늘날로 말하면 10만 대의 탱크 부대였던 것이다.
몽골 군대는 전법과 군량 수급 체계가 다른 군대와 완전히 달랐다. 기본식은 쿠루트(벼겻)라고 하는 분말 형태로 된 마유를 지참하고 다녔는데 먹을 때는 물에 풀어 마셨다. 군마는 수말보다도 거세마와 암말을 선호했는데 수유기에 들어간 암말 2필이 생산하는 마유는 병사 1명이 5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분량이 되었다.
또한 행군 중에는 현장 군량 조달 방법으로 종종 수렵이 행해졌다. ‘네르제’라고 불리는 전통 사냥 방식은 부채꼴로 점점 좁혀 가는 포위 섬멸전의 모의전 형식이었다. 이는 유목 민족의 전투 훈련인 동시에 식량 확보 수단 중 하나였다.
그리고 보존식의 또 다른 대표를 이루는 것이 있었다. 겨울이 가까워오면 약해 보이는 가축은 미리 도축을 하여 생고기를 길게 잘라 줄에 묶어 말린다. 다 마른 고기는 ‘보르츠’라는 육포가 된다. 보르츠는 그대로 육포로 먹기도 하고, 빻아 가루로 만들어 소의 방광에 넣으면 소 1마리가 다 들어간다. 먹을 때는 뜨거운 물에 보르츠를 약간 덜어서 불린 다음 고깃국을 만들어 먹는 식으로 야전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또한 말안장 밑에 고기를 깔아 발효시켜 먹었다는 일명 ‘타타르 스테이크’는 훗날 햄버거의 기원이 되었다. 적군은 식사 때가 되면 짐을 풀고 취사 도구를 갖추고 불을 피워 음식을 준비하여 식기에 담아서 먹어야 하지만 몽골군은 행군 중에는 식사가 간소하고 소박했으며, 불을 쓰지 않는 음식만으로도 10일을 행군할 수 있었다. 즉 타군이 번거로운 식사를 하고 있는 시간에 몽골군은 100리도 200리도 진격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말 달리기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국 대학에서 미리 와 있던 이재동 교수 일행 중 젊은 진 교수가 다가온다.
“총장님!”
“총장이라니요? 총장 끝난 지가 언젠데.”
“그래도 저는 총장님이란 말이 입에 배어서요. 우리가 주축이 돼서 한몽 국가연합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아주 잘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요. 이 일을 성사시키면 엄청난 플러스알파가 따를 것입니다.”
“먼저 현 외몽골의 영토만 봐도 한반도의 7배나 되는데 인구는 4백만 정도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세계 10대 자원 보유국이니까요. 특히 우리가 그처럼 갈망하던 희토류가 세계 매장량의 16%를 차지한다지 않습니까? 참으로 황금을 깔고 사는 나라라는 말이 실감나네요. 우리의 선진 기술로 지하자원을 개발한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렙니다.”
“진 교수, 너무 우리 좋은 방향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몽골에 어떤 이익을 줄 것인가가 더 중요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서로의 이익이 맞아떨어질 때 비로소 굳은 동맹이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요.”
“알았습니다. 역시 총장님의 탁견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하지요.”
“몽골이 그 넓은 땅을 일시적인 점거만 한 것이 아니고 3백 년 동안이나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숨은 코드가 반드시 있습니다. 나는 생각해 봅니다. 현재 미국이 세계의 주도권(지배)을 쥐고 있는데 과연 몽골처럼 3백 년간이나 지속할 수 있을까 하고요. 지배는 그저 누르는 힘만으로는 절대 안 됩니다. 진심에서 심복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미국도 좌우익에 대한 편파적인 사고가 없지 않으나 그 일변도로만 보아서는 해석이 안 되지요. 만약 힘만 가지고 주도권을 행사했다면 지금까지 지속한 것만도 기적에 가깝지요. 쿠빌라이 칸이 자기 자식들에게 명심하라고 한 말이 현재에도 이스탄불의 한 비석에 새겨져 있지요. ‘내 아들들아! 내 뒤를 이어 사람들을 모으고 나라를 지배하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그들의 몸이 아니라 마음을 끌어모아야만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나는 이 말을 몇 번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한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그들의 하늘을 섬기는 텡그리(천신 신앙) 사상이었고 우리의 시천주와 홍익인간 사상이었습니다. 하늘을 믿는 그들의 엄격한 군율은 모든 병사들의 더없는 신뢰를 얻을 수밖에 없었지요. 전리품은 공평하게 나누었으므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약탈할 필요가 없어서 몽골 병사는 전투에만 몰두할 수 있었지요. 일선에서 싸우는 병사나 후방에서 화살촉을 만드는 공인이나 전국에 거미줄처럼 쳐 있는 역참을 이용해 빠른 속도로 전리품을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10호장 100호장 1000호장 등 간부는 칭기스칸의 친척이라고 해도 조금도 특전이 없이 완전히 능력 위주였지요. 또한 배신자는 지구의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반드시 목을 베어 왔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배신자가 나올 수 없게 하였지요.”
“그렇군요. 우리는 그런 줄도 모르고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면이 많지요.”
“『몽골비사』2)에 의하면 몽골족은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이 결합하여 탄생된 민족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게 몽골족이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요. 늑대는 투르크 민족의 상징 아닙니까? 단 투르크 민족은 잿빛 늑대라 하는데 몽골 민족은 푸른 늑대라고 하는 것만 다르지요. 흰 사슴은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배달민족을 말하고요. 우리는 흰색을 숭상하여 제주도 한라산 상봉에는 흰 사슴이 와서 물을 마신다고 해서 백록담(白鹿潭)이라 했지요. 우리 민족은 백의민족 아닙니까? 흰색과 밝음이 우리의 상징이지요. 우리의 최초의 나라가 환국(桓國)이란 ‘환’ 자도 한문으로 음차한 것에 불과하고 ‘환’하다 하는 밝음의 나라라는 뜻이지요.”
2) 유목 민족과 해양 민족은 좀처럼 사료를 남기지 않는데, 『몽골비사』는 모처럼 몽골인 자신이 쓴 귀한 원사료이다. 원대에 몽골어본이 완성되고 명대에 차나어로 번역된 역사서로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도 한다. 저자는 미상이나, 내용상 칭기스칸을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한 인물로 보인다. 때문에 칭기스칸의 모후 호엘룬이 거두어 키운 칭기스칸의 의제들 중 한 명인 시키 후투후가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요. 신라의 박혁거세의 ‘박’도 한자로 음차한 것에 불과하고 실은 ‘밝’다의 박이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총장님만 대하면 항상 제가 너무 작아지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뭐 그렇게까지야….”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우리 민족에서 파생되어 나간 투르크와 원 배달 민족이 결합되어 탄생한 것이 몽골의 실위족이었다는 말이지요. 늑대의 공격은 훌륭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세계 제패는 못합니다. 흰 사슴의 아량과 지혜와 순수함이 가해졌을 때 비로소 세계 최대 평화 시대인 팍스 몽골리카를 이룰 수 있었지요.”
“우리 한국 사람이 총장님의 그런 역사적 논리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큰 책임을 느끼고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만약 당시 유행했던 흑사병이 아니었다면 역사 이래 가장 큰 지역을 지배했던 ‘팍스 몽골리카’는 훨씬 더 오래 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항상 이슬람 역사가인 아불 가지가 한 말을 되뇌어 봅니다. ‘모든 나라들은 누구도 누구한테서도 어떠한 폭행도 당하지 않은 채 황금 쟁반을 머리에 이고 해가 뜨는 땅에서 해가 지는 땅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당시 서쪽 끝으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부터 동쪽 끝으로 극동 고려의 개성까지, 그리고 북극 문화권인 사할린까지, 남쪽 끝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자바섬까지 마적, 산적, 강도를 모조리 소탕하여 황금 쟁반을 이고 맨발로 걸어가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치안을 유지했지요. 몽골 제국군의 지배를 받지 않은 곳은 구대륙에서 인도의 중남부와 동남아시아 일부, 서유럽, 북유럽 등의 몇몇 국가 정도뿐이었지요. 이러한 거대한 아시럽3)을 통일하고 평화를 구축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심도 있게 연구하여야 합니다. 막연히 침략이나 하고 약탈이나 하고 앙갚음을 했다는 그런 식으로 접근해서는 몽골 제국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3) 유라시아란 용어를 아시럽으로 대치한다. 유라시아는 서구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할 때 쓰던 용어이다. 특히 이 글에서는 유럽이 중심이 아니고 아시아가 중심이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런 평화 시대가 쭉 계속되었어도 좋을 뻔하였습니다. 그런 완전한 평화 시대가 얼마나 계속되었을까요?”
“아시럽의 팍스 몽골리카는 최소한 전성 시기가 150년은 지속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테무진이 초원을 평정하고 칭기스칸으로 추대된 1206년부터 우구데이, 구육, 뭉케, 쿠빌라이 칸으로 이어지는 대칸들의 시대와 원 제국을 세운 쿠빌라이의 제국이 멸망(1368)할 때까지 한 세기 반 동안은 완전한 평화 시대라고 보아야지요.”
“모르는 사람들은 흔히 몽골사 하면 무지한 사람들이 사람이나 죽이고 약탈이나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 일쑤였지요.”
“물론 몽골사에 그런 면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그런 일변도로 보는 것은 특히 차나인들의 관점이지요. 몽골은 먼저 항복을 권유하는 서신도 보내고 사신도 보냅니다. 단 항복을 했을 때는 모두 생명을 보존할 수가 있었지요. 당시 아랍의 최고의 문화를 자랑하던 압바스 왕조가 그처럼 철저히 파괴되고 바그다드 도서관의 문서가 다 불타고 문화가 파괴된 것은 항복을 거절했기 때문이었지요. 금나라도 항복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그처럼 무자비하게 파괴됐습니다. 금의 전성기 때(1207년)는 768만 호이던 것이 몽골이 금을 멸망시킨 다음 해(1235년)는 100만 호도 남지 않았지요(정확히는 87만 호). 즉 금나라의 89%를 초토화해버린 것이지요. 그 대신 상대국들이 복종만 하고 세금만 잘 내면 본속주의(本俗主義)에 의하여 그들의 문화를 다 인정한 멋진 정치를 했지요. 수도 카라코룸에는 그 유명한 라마 불교의 아르덴조 사원이 있어 경내에 100여 채의 사찰이 존재했습니다. 네스토리우스 기독교도 있었고 이슬람의 모스크도 번성하고 도교 사원도 있었고 유대교도 성행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백운종과 두타교까지도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나아가 그들 종교인들에게는 모두 면세 혜택까지 주었지요. 단 한 가지 몽골과 칸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는 조건 하나뿐이었지요. 이는 모든 종교를 차별 없이 동등하게 대하라는 칭기스칸의 뜻을 지키려는 후계자들의 노력 때문이었지요.”
“칭기스칸은 심지어는 이복자식들도 똑같이 대했다면서요.”
“네, 칭기스칸의 아내 부르테가 메르키트 족에게 납치되었다가 돌아온 후 9개월쯤 돼서 낳은 큰아들 주치(손님이란 뜻)도 다른 아들들과 똑같이 대했을 뿐만 아니라 킵차크 칸국(주치인 울루스, 주치의 나라)을 맡겼으니까요.”
“우리는 몽골에 대하여 많은 오해를 하고 있었군요. 특히 우리 고려와의 관계도 그렇지요.”
“고려는 무인 정권이 강화도에서 30년 동안이나 항거를 하다가 항복을 하기 위하여 태자 전(王, 훗날 원종)을 파견하지요. 그러나 그때 마침 몽케 칸이 급서하고 왕위를 놓고 둘째 아들 쿠빌라이와 막내아들 아리크 부카가 대립하고 있었지요. 전이 쿠빌라이에게 항복하자 쿠빌라이는 크게 기뻐하며 ‘고려는 만 리나 떨어져 있는 나라이고, 당 태종(쿠빌라이가 가장 존경하던 인물)이 친히 정벌하였으나 굴복시키지 못하였는데 지금 그 나라의 세자가 스스로 나에게 귀부해 오니 이것은 하늘의 뜻이다’라며 대환영을 하지요. 그 대가로 쿠빌라이는 고려의 고종(23대)이 죽자 세자 전(24대 원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도와주지요. 황제가 된 쿠빌라이 칸은 고려의 국체와 풍속을 보존해 주고 자기의 고명 딸(제국대장공주 쿠틀룩케미쉬, 16세)을 원종의 아들 왕심(王諶, 충렬왕 39세, 당시 충렬왕은 1남 2녀의 유부남)과 혼인시켜 주고 그 뒤로도 계속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지요. 다른 점령지와는 전혀 다른 대우를 한 것입니다. 고려가 몽골에 공녀를 받친 건 사실이지만 고려의 공녀는 다른 지역의 공녀와 달리, 기황후가 말해 주듯이 모두 황후 후보군이었습니다.”
“고려는 굴욕적인 관계치고는 특별 대우를 받았네요.”
“네, 말 잘했습니다. 굴욕적이긴 하지만 다른 나라와는 처음부터 기본 대우가 달랐지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전의 외교가 성공을 거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쿠빌라이 칸을 위시한 몽골인들 자신의 대한(對韓) 관념입니다. 그들은 고려가 같은 혈족이라는 관념을 분명히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놀랄 사실이군요. 참으로 지금까지 생각했던 몽골과는 차원이 다르네요. 그들이 후세에 끼친 영향도 막대하지요?”
“그렇지요. 몽골 제국이 끝나고 백년이 지난 후에 스페인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의해 대항해 시대가 열리지만 그것도 몽골 제국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콜럼버스가 항상 휴대한 책이 바로 쿠빌라이 칸 밑에서 봉사했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으니까요. 그가 휴대한 동방견문록의 여백에는 자기가 메모한 ‘보석’ ‘방대한 양의 상품’ ‘비단’ ‘향료’ 같은 말들이 가득 쓰여 있었습니다. 즉 동방의 부에 대한 호기심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고 볼 수 있지요.”
“저는 이제부터 다시 공부 많이 해야겠습니다.”
그날은 마음껏 몽골의 문화를 체험하고 토론하는 하루였다.
다음 날, 오르혼 캠퍼스 대강당에는 입추의 여지도 없이 교수, 학생, 정치인, 일반인들이 모였고, 지란다이 교수가 개회사 겸 기조연설을 하고 윤길원 교수의 뜨거운 답사가 있었다. 이어서 파트를 나누어, 각 전문별 세부 발표 및 토론이 시작되었다. 5개 발표장으로 나누어 열리는 세미나실을 윤길원 교수는 복도의 유리창을 통해서 모두 들여다보았다. 진지한 발표와 열띤 토론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