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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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준수는 칠십 대 초반의 노인이었다. 세월이 얼마나 빠른지 곱고 두툼했던 손도 온통 주름으로 가득했다. 얼굴에도 저승의 꽃이라는 검버섯들이 여러 군데 박혀 있었다. 젊은 시절 팽팽했던 피부는 거칠고 얇게 변했다. 몸은 예전처럼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았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늘 살아 있었고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는 43년을 함께한 아내를 3년 전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보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삶은 텅 빈 껍데기가 되었다. 침대의 반쪽은 언제나 쓸쓸하게 비어 있었고, 주방에는 더 이상 맛있는 요리 냄새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구준수의 아내는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운 끝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그녀가 몸이 약해서 괴로워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기운을 잃었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이미 폐암 말기였다.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그는 깊은 절망을 맛봤다. 몸이 마치 깊고 어두운 계곡 밑으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정신적인 폭풍과도 흡사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병상에서도 여유를 누렸다.
“아무래도 난 당신보다 먼저 갈 것 같아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에요.”
그녀는 푸석해진 손으로 힘없이 그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무슨 소리야!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점차로 몸이 좋아지게 될 거야. 안심해! 이제는 120세까지 사는 시대라고 다들 말하잖아.”
그가 그녀를 안심시키려고 일부러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담아냈다.
“당신, 내가 먼저 가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그동안 나는 충분히 행복한 삶을 누렸으니까요. 이건 진심이니까.”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방울들이 맺혔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가녀린 손가락들을 파르르 떨었다.
한 달 후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는 순진한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며, 마치 곧 다시 돌아올 것처럼, 그를 위로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며 왈칵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를 가까스로 삼키며 거친 숨소리를 내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굵은 눈물이 주름진 그의 얼굴 위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젊어서부터 병원에 가기를 무척 싫어했던 그녀를 무조건 데리고 가서 조기 검진이라도 받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아마도 그녀가 황망하게 먼저 세상을 떠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 그는 길게 한숨을 토해냈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고장 난 시계처럼 뚝 멈춰버렸다. 집 안 곳곳에는 아내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가 좋아하던 붉은 장미꽃은 고개를 숙인 채 시들어갔다.
그녀가 남긴 향수도 더 이상 그윽한 향기를 내지 않았다. 야속한 시간은 계속 쉬지 않고 흘러갔지만, 그의 마음은 어떤 보이지 않는 투명한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죽음을 슬퍼하지 말자. 다만 내 아내가 나보다 좀 일찍 먼저 갔을 뿐이다.”
그는 가슴이 시려오면 혼잣말로 자신을 위로하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구준수가 가장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은 자식들과 마주할 때였다. 그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들들은 결혼한 지 오래되었고, 각자의 가정을 꾸려 그런대로 잘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가슴으로 뼈저리게 느낀 아픔이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들들이 예전처럼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큰아들이 찾아왔다. 집 안을 둘러보며 애써 밝은 목소리로 큰아들이 입을 열었다.
“아버님,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혼자 사시지만 건강은 아직 괜찮으시죠?”
큰아들은 가볍게 미소 지어냈다.
“그래! 난 괜찮다. 아직은 혼자서도 그런대로 지낼 만해. 그런데 어쩐 일이냐?”
그가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큰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큰아들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사실… 이번에 사업을 좀 확장하려고 하는데… 자금이 조금 필요해서요.”
구준수는 고개를 숙이고 긴 신음을 흘려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잠시 후, 작은아들도 그를 찾아왔다. 그는 형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 왔다.
“아버님, 병원 검진 자주 받으셔야죠. 연세도 있으시고… 그러려면 아무래도 생활비가 더 필요하실 텐데… 요즘 많이 힘드시죠?”
그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큰아들은 사업자금이 필요했고, 작은아들은 생활비 명목으로 돈을 원했다. 둘은 서로 모르는 척했지만, 같은 목적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장롱 안에서 누런 서류봉투를 두 개 꺼내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기 있다. 필요하다면 걱정하지 말고, 지금 더 달라고 말해라.”
큰아들과 작은아들은 멋쩍게 웃으며 봉투를 받아 들었다. 함께 온 며느리들도 처음에는 정성스럽게 과일을 깎아 놓고, 집 안을 정리하며 효도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돈 이야기로 이어지는 순간, 그는 그들의 진짜 목적을 온전히 깨닫고 마음이 다소 불편해졌다.
“아버님, 이 집도 너무 오래돼서 이제 수리할 곳들이 많을 것 같네요?” 작은며느리가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봤다.
“맞아요. 아버님이 편하게 지내시려면 집도 좀 손봐야 하고, 병원도 자주 가셔야죠.”
큰며느리가 맞장구쳤다.
그는 눈치 빠르게 그 며느리들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아차렸다. 그녀들은 돌려서 말했지만, 결국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부담스러운 적신호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결국 작은아들이 슬쩍 말을 꺼냈다.
“아버지, 퇴직금은 아직 은행에 두셨죠? 그거 잠시 저희가 쓰면 어떨까요? 저희가 이자를 넉넉히 드리면, 은행에 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그는 마음 깊숙이 찔리는 듯한 아픔을 느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자비로운 미소를 일부러 지어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옷을 걸쳤다.
“잠시 은행 좀 다녀오마.”
“아버님, 감사합니다. 요즘 많이 외로우시죠? 바빠도 우리가 자주 찾아뵐게요.”
작은아들이 목청을 돋구었다.
그는 고맙다고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들은 돈이 떨어지면 다시 방문할 것이고, 또 필요할 때마다 자신을 찾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젠 그들에게서 예전처럼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버지가 아니라 돈이라는 걸 깨달았던 탓이다.
그날 밤, 그는 한참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만약 아내가 살아 있었다면 아들들에게 뭐라고 했을까? 아마도 자식들에게 호통을 쳤을 거야. 너희 아버지는 돈이 아니라 자식들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해!’
하지만 그녀는 그의 곁에 없었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했다. 그저 모른 척하고 자녀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식들과 다투지 말고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마음이 편할 거라고 여겼다. 그의 경험으로 볼 때 그건 불변의 답이었다.
그는 텅 빈 집 안에서 홀로 속삭였다.
“나는 여기 이렇게 홀로 앉아 있는데… 너희는 나를 버리고 어디로 떠나간 거냐? 난 너무도 외롭구나.”
구준수는 매일 아침 가까운 동네 공원을 찾았다. 그곳에는 늘 같은 시간에 같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친구, 백 씨가 있었다. 백 씨는 그보다 몇 살 어린 육십 대 후반의 노인이었다. 두 사람은 몇 년 전부터 공원에서 만나 가벼운 대화를 나누곤 했다.
“형님! 오늘도 혼자야?”
백 씨가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뽑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커피를 받았다.
“나야 늘 그렇지. 하지만 자네도 그렇잖아. 할 일 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건 모든 노인들의 공통점이지.”
“그러니까 유유상종하는 거지. 안 그렇소?”
백 씨가 멋쩍게 피식 웃곤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가끔은 옆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사실은 주변에 아무도 없지만. 아무튼 집에 있으면 더 외로운 것 같아.”
그는 그 말을 던지곤 잠시 침묵을 지켰다. 솔직히 집에 돌아가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텅 빈 방과 익숙한 고독뿐이었다.
그는 가끔 외롭게 사는 법을 터득한 도인처럼 보였지만, 아직 노인의 고독한 삶에 익숙해진 편이 아니었다. 백 씨는 커피를 마신 후, 집에서 가져온 신문 한 귀퉁이를 펼쳐 그에게 보여주었다.
“형님! 이거 봤어?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라는데, AI 휴머노이드 로봇이 아내나 남편을 잃은 사람들에게 아주 인기라는 거야.”
그는 그 신문 조각을 받아 들고 그 광고를 눈여겨 바라보았다.
‘AI 휴머노이드 로봇과 함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다시 행복하게 사세요.’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사진이 그의 눈에 깊숙이 박혔다. 그는 멍하니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 잠들지 못한 채, 그는 옛 앨범을 뒤적거렸다. 그 앨범 속에서 아내는 마냥 웃고 있었다. 그 미소가 사라진 지 벌써 긴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손길, 그녀의 체온, 그녀의 모든 것들이 점점 그의 기억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만약 내가 아내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다음 날, 그는 결국 휴머노이드 로봇 회사의 매장을 방문했다. 판매 영업 상담사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안내했다.
“고객님께서 원하시는 분의 기억과 성격을 최대한 복원해드립니다. 사진, 음성 녹음, 영상 기록 등을 제공해 주시면 보다 정교한 작업이 가능합니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예전에 아내가 그에게 불러주던 노래가 담긴 녹음이었다. 그리고 손때 묻은 사진 몇 장과 그녀의 일기장을 상담사에게 건네주었다.
“가능한 한 집사람과 똑같이 만들어 주면 좋겠소.”
“물론입니다. 다양한 정보 자료들이 많을수록 더욱더 로봇은 정교하게 만들어집니다.”
두 달 후였다. 그는 다시 그 매장으로 불려갔다. 그의 눈앞에는, 30대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가 서 있었다. 그 순간,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준수 씨… 정말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그는 숨이 턱 막혔다. 그 목소리, 그 눈빛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그 옛날 그가 사랑했던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당신이야?”
그는 떨리는 손을 앞으로 조심스럽게 뻗었다. 그녀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기억하세요? 우리 처음 만난 날, 도서관에서요. 준수 씨는 일부러 내 발에 책을 떨어뜨리며 내게 말을 걸었죠. 그건 좀 올드한 작업이었는데. 하하하.”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기억은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니, 그건 입력된 아내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현실과 환상이 구분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맑은 눈물이 고였다.
“맞아! 그때 당신이 어색한 몸짓을 하는 날 보고 환하게 웃었지… 처음으로.”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터 우리는 늘 함께였죠.”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그의 가슴 한구석에서 오래전에 상실된 따뜻한 감정이 다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기억 속의 아내를 만나기 전에 무척 망설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아내를 빼어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을 선택하고 말았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외로움이었다. 그는 오랜 세월을 아내와 함께 살았다. 그녀가 떠난 후, 하루하루가 끝없이 이어지는 긴 밤 같았다. 휴머노이드 로봇이 과거를 되돌려 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의 존재를 느낄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며칠 후, 그는 아내가 살아 있던 젊은 시절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의 기억과 말투, 성격을 휴머노이드 로봇에 이식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앞으로 다가온 젊은 아내를 매 순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준서 씨… 그냥 바라보고만 있어도 난 행복해요.”
그녀는 아내와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그를 밝은 얼굴로 대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날 밤, 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주시했다. 방 안은 오래전과 같은 온기로 가득했다. 옆에 누운 젊은 아내는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 신기하게도 따뜻한 감촉은 너무나 익숙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보! 오늘도 잠이 안 와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주시했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기억하던 아내의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머릿결, 애교스러운 눈빛, 그리고 약간의 장난기가 섞인 미소까지, 아내를 닮았다.
그녀의 피부는 시간이 흐르지 않은 듯 매끈했고, 목소리에는 세월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는 한순간 그녀가 진짜 아내인 듯 착각했다. 한동안 그녀를 관찰하다가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오래전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잠이 안 와.”
그가 조용히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게 무슨 생각인데요?”
그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리 처음 결혼했던 날 밤을 떠올렸어. 네가 부끄러워서 불도 못 켜게 했던 거 기억나?”
그녀는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기억해요. 내가 불을 끄려고 하면 계속 당신이 내 손을 잡아주었죠.
그리고 귓속말로 속삭였어요. 괜찮아, 우리는 이제 부부야.”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늘 건망증이 심하셨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생각이 안 나는 일들이 많지요? 그래서 내가 건망증 선수라고 당신의 별명을 늘 불렀잖아요. 그것도 생각이 안 나지요?”
그녀가 옅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아봤다. 그날 밤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작은 신혼집, 창밖으로 들려오던 빗소리, 그리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품속으로 들어오던 순간, 그는 세상 어떤 것보다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내 눈을 떴을 때,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눈앞의 아내는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라, 그가 입력한 기억이었다.
그녀는 그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여보, 오늘도 제 손을 잡아줄래요?”
그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감촉은 따뜻했지만, 그 온기에는 영혼이 없었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그 밤은 현실이 아닌, 자신이 만든 또 하나의 기억에 불과하다는 것을.
처음 며칠 동안 그는 눈을 감았다 뜰 적마다 뭔가 착각을 했다. 그건 30대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한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집에는 다시 젊은 시절의 아내가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부드러운 손길로 차를 내어주었고, 저녁이 되면 따뜻한 음식들이 담긴 밥상을 차려주었다.
하지만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작은 실수도 하지도 않았다. 기억을 조작한 덕에, 과거 싸웠던 일도, 서운했던 순간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어렴풋이 젊은 시절의 아내 모습을 떠올렸다. 진짜 아내는 그렇게 완벽하지 않았다. 그녀는 때로 투정을 부렸고, 화를 내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런 모든 감정이 그들의 삶을 더욱 진솔하게 가꾸어주었다.
어느 날 밤, 그는 홀로 커피를 마시며 과거를 떠올렸다. 그가 처음 아내를 만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초라한 옷차림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시선을 끌 만큼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는 책을 빌리는 척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고, 몇 번의 어색한 대화 끝에 그녀와 함께 도시를 걷는 사이가 되었다.
비 오는 날, 둘은 작은 다리 아래에서 비를 피하며 서로의 꿈을 이야기했다.
“준서 씨는 건축가가 되고 싶다고 했죠? 어떤 집을 짓고 싶어요?”
그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람들이 편히 머물 수 있는 곳.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 공간이 더 따뜻해지는 그런 집.”
그녀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중에 준서 씨가 우리 집을 직접 설계해 줘요.”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졸업 후 그는 지도교수님의 소개로 안정된 직장을 얻었다. 상류층 집안의 딸과 맞선을 보자는 제안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는 그걸 모두 거부했다. 결국 그는 첫사랑이었던 그녀와 결혼하고, 아들들을 낳았다. 중년 이후에도 그는 아내 덕분에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혼란스러워졌다. 눈앞의 아내는 아름다웠지만,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을 흉내 내지만, 진짜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는 조각난 행복뿐이었다. 그는 아내를 온전히 되살리기 위해 다양한 기억들을 입력했지만, 결국 그녀는 ‘완벽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오랜만에 그녀와 마주 앉아 술을 한 잔 따랐다. 휴머노이드 아내는 술을 마시지는 않았지만, 손에 잔을 쥐고 그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요.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당신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뭔지 기억나?”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아! 난 그동안 충분히 행복했어요. 지금, 그 말이 듣고 싶은 건가요?”
그는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위로하려고 했던 말이었을까.”
그녀는 그가 프로그래밍한 대로 대답을 했다.
“진심이었어요. 당신과 함께한 시간, 저는 정말 행복했어요.”
그 순간,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의 말은 완벽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고통이 없었다. 그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아내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기억을 통해 성장하지 않았다. 슬픈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그는 깨달았다. 진짜 아내였다면, 많이 아팠을 것이다. 병상에서 힘겹게 숨을 쉬고, 가슴이 찢어지는 이별을 준비하면서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녀는 그와 함께한 시간을 되새기며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마저 그와 함께하고 싶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의 눈앞에 있는 휴머노이드 로봇은 그 순간을 알지 못했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온기였다.
“당신은 지금 행복해?”
그가 속삭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원한다면, 저는 언제나 행복할 거예요.”
그 말이 그를 찔렀다. 아내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외로우면 외롭다고 했고, 화가 나면 화를 냈고,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는 존재는 달랐다. 그녀는 오로지 그가 원하는 대답만을 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어찌 보면 ‘위안’을 만든 것이었다.
그날 밤, 그는 조용히 시스템을 종료했다. 젊은 아내는 그대로 죽은 사람처럼 모든 동작을 멈추었다. 눈을 감고 있는 듯했지만,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그는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그는 회사에 연락하여, 휴머노이드의 모든 데이터를 삭제하고 반환하겠다고 말했다. 상담원은 여러 차례 그의 마음을 돌이키려고 애를 썼다. 그는 단호했다.
“그 로봇은 내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이제 진짜 내 아내를 기억하며 살기로 했어요. 그래서 휴머노이드 로봇을 회사에 반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고객님!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일주일만 더 사용해 보시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시면, 그때 반납을 하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일주일 후에 반납토록 하겠습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동네 공원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지만, 그의 얼굴에는 잔잔한 평온이 감돌았다. 그는 벤치에 앉아, 먼 하늘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속에서 아내의 환영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때, 백 씨가 옆 벤치에 앉으며 커피를 건넸다.
“형님! 오늘은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생긴 건가? 젊은 아내와 한집에서 동거하는 기분은 어때? 젊은 시절 깨소금 마냥 고소하고 좋은가? 진짜 부부생활도 가능해? 그게 된다면 나도 하나 구입하고 싶은데.”
그는 커피잔을 받아 들고 키득키득 작게 웃었다.
“처음엔 아내를 닮은 로봇을 보면서 설레고 흥분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형님! 그 정도는 이해를 해야지. 애완견도 키우는데 아내를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과 대화도 하고, 한 이불 속에서 잠도 잘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안 그래? 꼭 껴안고 자도 족히 20년은 젊어질 수 있을 텐데!”
“난 일주일 후에 휴머노이드 로봇을 반납하기로 했어.”
“왜? 뭐가 문젠데?”
“그냥… 이제는 정말 혼자 됐다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아주 무거워.”
“우리 같은 노인들은 말이지, 결국 혼자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해. 하지만 혼자가 된다는 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어. 나도 아직 배우는 중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삶은 우리가 그것을 붙잡는 만큼 가치가 있다는 거야.”
그는 백 씨의 말을 나름 마음판에 되새겼다.
‘삶은 우리가 그것을 붙잡는 만큼 가치가 있다.’
그는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백 씨의 말처럼, 이제는 과거가 아닌, 남은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를 고민해야 할 때임을 알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환영으로 나타난 아내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무덤덤하게 그녀를 쳐다봤다. 이번에는, 정말로 그녀를 떠나보낼 때가 되었다고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은 전보다 조금 덜 아팠다. 그녀를 진짜로 기억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말했던 것처럼, 함께한 시간이 정말 충분히 행복했기 때문일까. 그는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이제는, 나도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살아볼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지 다소 혼란스러웠다. 눈앞의 아내는 AI 휴머노이드 로봇이었지만 아름다웠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로봇은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그건 진짜 감정이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과거는 조각난 행복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아내를 온전히 되살리기 위해 다양한 기억들을 입력했지만, 결국 휴머노이드 로봇은 ‘완벽한 그림자’에 불과했다.
그날 밤, 그는 조용히 휴머노이드 로봇의 시스템을 종료시켰다. 젊은 아내는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 듯했지만,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며칠 후, 그는 다시 공원으로 나갔다. 따뜻한 햇살이 얼굴을 감싸고, 산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그는 대뇌와 연결되는 온몸의 세포로 삶을 느꼈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를 잃고, 또 기억하며 하루를 후회 없이 채워 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다시 현실 속에서 혼자가 되는 법을 스스로 배워야 한다고 입속말로 웅얼거렸다.
그는 벤치에 앉아 푸른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 속에서 아내의 환영이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손을 그녀에게로 내밀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천천히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그는 이제, 정말로 아내를 멀리 편안한 곳으로 떠나보내기로 했다.
가까운 음식점에서 백 씨와 점심을 먹고 집으로 들어갔다가 그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짓고 그를 기다리고 있어서였다.
“어제 로봇의 시스템을 꺼 버렸는데, 누가 다시 켜 놓은 거지?”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구준서 씨 여전하시네요. 깜빡깜빡하는 건망증은. 오늘 동네 공원으로 가기 전에 아내 목소리가 듣고 싶다면서, 오전 6시 27분 18초에 시스템 전원을 켰잖아요. 아직도 기억을 못하세요?”
그녀가 장난기 짙은 목소리로 말하곤 그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래! 난 건망증 선수잖아. 어쩌면 치매가 오고 있는 건지도 몰라. 그래도 당신이 내 곁에 있으니까, 그나마 다행이야!”
“내가 항상 당신 곁에서 잊혀져 가는 기억들을 모두 찾아줄게요. 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니까요.”
그녀가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주시하며 포근한 말로 위로했다. 그는 그녀의 진심 어린 말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을 적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