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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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첫돌을 앞두고 돌잔치 때 입을 한복을 마련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패션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어 패션 트렌드 파악과 부자재 구입 등으로 동대문 등지의 시장을 훤하게 꿰뚫고 있는 친구이다. 사업으로 늘 바쁜 친구이지만, 오래간만에 얼굴도 볼 겸 동행하겠다며 흔쾌히 답했다.
“주단 골목에 가면 돌쟁이 아이들 한복이 많이 있으니 가보자. 간 김에 유명한 마약김밥도 사 먹고.”
마약김밥이라는 말에 순간 움찔했지만, “그래…” 하고 답하며 얼버무렸다. 뉴스에서 간간이 듣던 그 괴상한 이름의 김밥 실체와 맛이 궁금하기도 했다.
광장시장은 예나 지금이나 활기찬 모습이다. 1905년 우리나라 최초의 상설시장으로 문을 열었다고 하니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 사는 모습을 속속들이 보여주고 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다. 근래 들어 많이 현대화되었다고는 하나, 이리저리 연결된 좁은 골목들은 여전히 미로다. 오래간만에 이곳을 찾은 나는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 채 친구의 발길을 쫓아 무작정 따라다녔다.
먼저 손자 한복을 보기 위해 주단 상가로 향했다. 상점마다 천정까지 가득 쌓아 놓은 형형색색의 포목과 주단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걸린 크고 작은 한복들은 불빛을 받아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앙증맞은 한복에 귀여운 손자 얼굴을 떠올리며 몇 군데의 상점을 거친 끝에 초록 바탕에 색동 소매가 어우러진 한복으로 골랐다.
큰 시장에 온 김에 커튼, 침구 용품, 수예품 등을 파는 상가로 가서 침대 커버와 베갯잇도 몇 장 샀다. 손품이 많이 드는 누비나 자수가 놓인 것들은 베트남 등지에서 수입해 온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가격은 저렴하지만 왠지 기분이 씁쓸하다.
골목을 빠져나오니 먹거리 장터다. 장 보는 재미에 정신이 팔려 배고픈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 그러고 보니 점심때가 지난 시간이다.
김밥을 비롯해 녹두전과 떡볶이, 어묵 그리고 국수와 죽까지 메뉴가 다양하다. 학생들을 비롯해 장 보러 왔다 들른 듯한 중년의 아저씨와 아주머니들, 그리고 단골로 보이는 연세 지긋한 어르신까지 앉아 음식을 들고 계신다. 다양한 피부 색깔의 관광객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자리에 앉은 그들의 머리 위로 ‘마약김밥’ ‘마약떡볶이’라 써 붙인 종이가 걸려 있다. 친구와 나도 그들의 대열에 끼어 마약김밥과 마약떡볶이를 주문했다. 하지만 먹는 내내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이들이 혹여나 마약이란 것이 이렇게 입을 즐겁게 해 주는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라고 생각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진짜 마약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마약자장면, 마약냉면, 마약계란장 등 맛있어서 자꾸 찾게 되는 중독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은 마약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다. 상호에 마약을 넣은 간판을 단 음식점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던 적도 있다.
사람은 말의 지배를 받는다. 대뇌 학자에 따르면 뇌세포의 98%가 말의 지배를 받는다고 한다. 마약을 쉽게 듣고 말하다 보면 실제 마약에 대한 심각성과 위험성은 어느덧 사라지고 오히려 친숙한 대상이 되어 있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6년 전 샌프란시스코 여행 때의 일이 떠오른다. 도심 한가운데 위치해 고급 백화점과 호텔들이 둘러싸고 있는 유니온스퀘어는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이다. 이곳을 찾았을 때 대낮에 마약에 취한 남성이 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약에 취해 거리 곳곳에 누워 있던 노숙자들의 모습도.
거리가 마약 중독자들로 넘쳐나는 바람에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아 백화점들이 문을 닫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아름다운 언덕과 낭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가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쉽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미국 내 또 다른 도시의 마약에 취한 좀비들이 가득한 거리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학교까지, 가정주부에까지 마약이 확산되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자부심 중의 하나는 마약 청정국과 무기 소지가 없는 나라였다. 그런데 그 전통이 깨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상호에 마약 관련 표현을 금지하고,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마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상호를 바꾸면 간판 비용을 보조해 준다고 한다. 큰 박수를 쳐 주고 싶은 일이다.
두 달이 지나면 손자가 동생을 맞는다. 이 아이들이 자라날 세상이 깨끗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