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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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곳곳이 연둣빛으로 물들기 시작했어요. 산들산들 부는 봄바람에, 풀잎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듯 속삭였지요.
다빈이 할머니네 옆집 사과 과수원에도 봄이 왔어요. 잎보다 먼저 핀 사과꽃들이 하얗고 연분홍 빛깔로 가지마다 수줍게 피어났지요. 마치 하늘에서 솜사탕이 내려앉은 것처럼, 과수원 전체가 뽀얀 꽃구름으로 가득했답니다.
“아이고, 올해는 꽃이 더 탐스럽네.”
할머니는 꽃 사이를 조심스레 지나며 나뭇가지를 쓰다듬었어요. 햇살은 따뜻하게 사과나무 사이로 내려앉고, 새들은 하루 종일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며 노래했지요.
겨우내 조용했던 과수원은 누군가가 색연필로 하나하나 칠한 듯, 연두, 분홍, 흰빛으로 물들었어요.
옆집 사과 과수원에 사과꽃은 예쁘게 피어 있는데도 할머니의 마음속에는 온통 다빈이 생각으로 걱정이 그득했어요. 다빈이가 몸이 아파 할머니 집으로 잠시 쉬러 왔기 때문이지요. 할머니는 시장에서 그동안 과일 장사를 했는데 작년에 할아버지가 하늘나라로 가시고 나서 지금은 과일 장사를 하지 않고 있답니다.
“올해는… 꼭 다빈이한테 내가 유기농으로 기른 채소를 먹여야지.”
할머니는 그동안 가꾸지 않았던 비어 있는 땅을 부지런히 일구었어요. 삽으로 흙을 파고, 거름을 뿌리고, 다시 고르고 또 고르며 손에는 흙이 가득 묻었지요. 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지만, 할머니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어요.
며칠 뒤, 시장에 나가던 길. 할머니는 시장의 모종 가게 앞을 지나게 되었어요. 그곳엔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 그리고 채소 모종들이 햇빛을 받으며 놓여 있었지요.
“어머나….”
할머니의 발걸음이 멈췄어요. 눈에 띈 건 초록빛이 반짝이는 방울토마토 모종이었지요. 아기 손바닥만 한 작은 잎들이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 듯, 해님을 향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있었어요.
“이 녀석들 참 예쁘네… 꼭 다빈이 손 같구먼.”
할머니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손주 다빈이를 위해 정성껏 키우고 싶은 마음이 마음속에서 콩콩 뛰었지요. 할머니는 망설이지 않고 모종을 담았어요. 품에 꼭 안은 채 버스에 올랐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곧장 밭으로 향했지요.
“자, 이제 우리 다빈이의 방울토마토밭을 만들어 볼까?”
아직 공기가 살짝 싸늘했지만, 할머니는 마음이 급했어요. 사 들고 온 모종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심기 시작했지요. 호미로 조심스럽게 흙을 파고, 작은 뿌리를 감싸듯 덮고, 마지막엔 물을 퐁퐁 적당히 주었어요.
그리고 ‘다빈이네 텃밭’이라는 작은 팻말도 만들어 꽂아 두었어요.
“잘 자라렴. 너희는 농약 없이, 햇빛이랑 내 손으로만 키울 거야. 그러니까 건강하게 자라렴!”
할머니는 방울토마토가 자라나는 모습을 상상하며 말했어요. 그 모습은 마치 아기를 돌보는 엄마 같았답니다.
그날 저녁, TV에서 들려온 날씨 소식에 할머니는 깜짝 놀랐어요.
“내일 새벽,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겠습니다. 농작물 피해 없도록 주의하세요.”
“이런, 이 봄날에 영하라니… 이럴 수가….”
할머니는 걱정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요.
“우리 방울토마토 모종들이 얼면 어쩌지….”
그날 저녁, 할머니는 다락방에서 헌 이불과 신문지, 그리고 낡은 비닐 천막을 꺼내 내려놓았어요.
그다음 날 아침 할머니는 날이 밝아오자 밭으로 향했어요. 땅은 축축하고, 공기는 차가웠지만, 할머니의 걸음은 조심스럽고도 단단했지요.
“얘들아, 춥지?”
할머니는 모종 하나하나를 신문지로 싸고, 그 위에 비닐을 덮은 뒤 비닐 가장자리를 돌로 눌러 주었어요. 바람이 들지 않도록, 구석구석 꼼꼼하게 덮어 주었어요. 손끝은 시렸지만 마음만큼은 따뜻했어요.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할머니는 다빈이가 일어나기 전 새벽에 밭으로 나와서 텃밭을 가꾸었어요. 이제는 습관처럼,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밭으로 향했지요.
“다빈이가 먹을 건데… 벌레 한 마리도 못 오게 해야지.”
손에 작은 집게를 들고 방울토마토 잎 사이를 살피는 할머니의 눈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답니다.
어느새 잡초가 고개를 내밀었지요. 할머니는 허리를 굽혀 하나하나 뽑아내며, 토마토 모종에게 속삭였어요.
“힘내라, 아가들아. 아주 예쁘고 맛있는 열매를 맺자꾸나!”
이른 아침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할머니의 손길은 따뜻했어요. 다빈이네 텃밭 팻말을 볼 때마다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어요.
‘우리 다빈이 건강하게 해 주세요.’
다빈이는 올해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하지만 또래 친구들처럼 마음껏 뛰어놀지는 못해요. 몸속에 크론병이라는 친구가 살고 있어서 늘 조심조심 지내야 하거든요.
그래서 3학년이 되었는데 1년을 쉬면서 도시에 있는 아파트를 떠나 공기 맑고 햇살 좋은 시골, 할머니 댁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다음 날, 방 안 창가에 앉아 힘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다빈이에게 할머니는 텃밭에 나가 보자고 했어요. 다빈이는 ‘다빈이네 텃밭’ 팻말을 보더니 빙그레 웃었어요. 그리고 힘없이 할머니에게 말을 걸었어요.
“할머니, 여기가 ‘다빈이네 텃밭’이에요?”
할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자 다빈이도 빙그레 미소 지었어요. 다빈이는 방울토마토 모종의 잎사귀를 보며 신기한 듯 살펴보았어요. 그때 다빈이의 눈에 약간 작은 돌멩이가 눈에 들어왔어요. 그 돌멩이는 시냇가에 있는 돌처럼 반질반질하고 까맣게 생겼어요.
다빈이는 텃밭에 혼자 놓여 있는 반질반질한 돌멩이가 갑자기 자기 자신처럼 느껴졌어요.
자신이 친구들이 없는 시골에 혼자 와 있는 것처럼 시냇가에 있어야 할 까만 돌멩이가 텃밭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빈이는 돌멩이를 슬그머니 주머니 속에 넣었어요. 할머니는 여전히 두 손으로 흙을 만지며 풀을 뽑고 있었어요.
그날 이후 다빈이는 매일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고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문을 열고 채소밭을 나갔어요. 잎이 하나 늘어난 것 같기도 하고, 줄기가 더 꼿꼿해졌다고 할머니께 이야기도 했어요. 어느 날은 유독 쑥쑥 자란 상추를 보며 신이 나서 손뼉을 치기도 했어요.
“이건 어제보다 더 자랐네요, 할머니!”
조금씩 다빈이의 모습은 밝고 환해지는 것 같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햇살이 유난히 따뜻하던 오후였어요. 다빈이는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밭 사이를 걸었고, 발에 닿는 흙의 감촉이 마냥 좋았어요.
흙투성이 발로 다시 운동화를 신을 수 없어, 다빈이는 잠시 할머니 장화 한 짝을 빌려 신었어요. 밭일을 마친 뒤, 장화를 말리려고 밭가에 벗어두고 그냥 집으로 들어갔어요. 그 장화는 며칠간 그대로 밭가에 놓여 있었어요.
며칠 뒤, 할머니가 다빈이를 다급히 불렀어요.
“다빈아! 이리 와 봐라! 네 장화에… 새가 알을 낳았단다!”
정말이었어요. 다빈이가 벗어둔 장화 안에 작고 동그란 새알이 다섯 개나 있었어요. 그 위에는 숨죽이듯 앉아 있는 어미 참새가 있었지요.
“어쩌면 네가 남겨둔 따뜻한 장화 덕분에, 이 새가 둥지를 튼 걸지도 모르겠구나.”
다빈이는 말없이 장화를 들여다보았어요. 작고 여린 생명이 그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게,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새알이 부화하려면 스무 날쯤 걸린단다. 우리가 잘 지켜주자꾸나.”
할머니가 다빈이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어요.
다빈이는 매일 아침 할머니와 함께 밭에 나갔어요. 채소에 물을 주고, 장화 속 둥지에 있는 새알을 위해 발걸음도 조심조심 다녔어요. 그리고 스무 날쯤 조금 지난 새벽, 장화 속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어요.
짹… 짹… 다섯 마리 아기 참새들이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어요. 부스스한 솜털, 반쯤 감긴 눈, 그리고 힘차게 들썩이는 생명의 몸짓. 다빈이는 그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는데 마음속에서 무엇인가 뜨거운 희망이 부풀어 올랐어요.
다빈이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어요. 그 안엔 며칠 전 텃밭에서 주운, 작고 반질반질한 돌멩이가 있었지요. 다빈이는 그 돌멩이를 손에 쥔 채, 가만히 속삭였어요.
“너도 나처럼 혼자인 줄 알았지? 근데 우리 둘 다 새 친구를 만났어.”
다빈이는 돌멩이를 조심스레 장화 옆 흙 위에 내려놓았어요. 마치 그 돌멩이가 새 둥지를 지키는 작은 수호자처럼 보였답니다.
“나도 이 아기 새들처럼… 조금씩 튼튼하게 자라갈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아주 환하게 활짝 웃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