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김형기 군과 서연화 양을 부른 것은 국문학 교수로서 할 말이 있어서일세.”형기와 연화는 연구실도 아닌 사범대학 건물 뜰 앞 널따란 바위로 영문도 모르게 불려 나왔다. 형기는 연화에 대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감정으로 김 교수가 주선한 뜻밖의 만남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태연해야만 한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숨겨진 마음을 들켜서는 안 된다’
- 장덕영
“오늘 김형기 군과 서연화 양을 부른 것은 국문학 교수로서 할 말이 있어서일세.”형기와 연화는 연구실도 아닌 사범대학 건물 뜰 앞 널따란 바위로 영문도 모르게 불려 나왔다. 형기는 연화에 대한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감정으로 김 교수가 주선한 뜻밖의 만남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태연해야만 한다. 그동안 쌓이고 쌓인 숨겨진 마음을 들켜서는 안 된다’
가을이 가까워진 새벽, 안개가 산자락 아래 얕게 깔리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둔덕 위, 쪽밭과 살림집을 품은 공방은 희미한 윤곽만 드러내고 있었다. 실바람에 쪽대가 길게 흔들렸다.안개 속에서 정아는 쪽잎 사이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쪽의 밑동을 움켜쥐고 낫을 그었다. 연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마다 벤 쪽이 가지런히
1남자의 오토바이는 빗물이 차오르는 도로를 아슬아슬하게 달렸다.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궂은 날씨 탓인지 4차선 도로는 텅 비어 있다.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은 배달을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남자는 헬맷을 쓴 머리를 단호하게 저어댔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다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남자는 굵은 빗줄기가
내가 처음 소개팅을 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 나는 부부가 맺어지는 것이 얼마나 엉뚱하게 시작되는지 전혀 짐작도 못했는데 진짜 결혼을 해버렸다. 모든 일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와 알게 모르게 얽혀 있다. 각자의 삶에서 끝나지 않고, 나의 삶으로 돌아와 그때 그런 일이 생겼고 그런 것들이 모여 또 다른 일이 일어나면서 인생길을 수놓기도 하고 아프
나주 송정리 장이 서는 날이다. 송정장은 오일장으로, 사흘 있으면 설이니, 이른바 그믐장이다. 아침부터 장터 입구에는, 트럭에서 내리는 상인들로 북적였다.영광통 앞으로, 시내 중심가 도로 안쪽을 따라 상인들의 차량이 늘어서고, 인도에 펼쳐진 좌판에는 채소와 생선, 과일이 가득했다.새벽안개가 걷히기도 전에 장터는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이런 날을 두고 여우가
인왕산 치마바위에 올랐다. 주말이라 등산객 대부분이 MZ세대들이었다. 한양 도성 순성길을 따라 가파른 바위산을 힘겹게 오르니 정상에 달했다. 복사나무 한 그루가 붉은 꽃망울을 터뜨린 채 호젓이 자리 잡고 있었다.2025년 4월 말, 20여 명의 산악회원은 수성동 계곡 소나무가 있는 입구에서 잠시 몸을 추슬렀다. 인왕산 동쪽 아래 있는 수성동 계곡은 예로부터
가배일 연휴 첫날부터 가을비가 푸슬푸슬 내렸다. 깨어보니 야심한 1시경이었다. 전날 하다만 만문(漫文) 작업과 번역 작업을 쾌적하게 갈무리했다. 조식을 끝내고 모처럼 온양온천에 가기로 했다. 전철을 타고 가는데 마음이 두근거리고 시원한 감동이 왔다. 전철 종점인 천안역에 내려 점심을 먹었다. 요즘 시니어 교통카드를 받은 후 여가선용이 달라졌다. 이 카드로
모내기가 한창인 논에 비가 내린다. 논바닥에 내리는 빗소리에 귀를 모은다. 맑게 윤이 나는 빗방울을 손끝에 문질러 본다. 비 젖은 하늘과 바람을 마음에 들인다. 어려서는 부모님과 많은 형제 덕에 비 맞을 일이 적었다. 늘 마중 나온 우산 속으로 쏙 들어가 비를 그을 수 있었다. 비 맞은 일이 적은 만큼 느닷없이 오는 비를 맞고 싶었다.비가 내리면 빗속을 거
낮게 깔린 재색의 하늘가에 늘어선, 습기를 머금은 감은빛 구름들이 점점 응축의 강도가 세어지면서 긴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여실하다. 툭 건드리면 지상으로 후드득 쏟아져 내릴 기세다. 창문을 세차게 뒤흔드는 바람의 강세도 심상치 않다. 폭풍전야다.드디어 진눈깨비가 몰아치며 헐벗은 나뭇가지 위로 우두둑우두둑 거칠게 내려앉았다. 오는 봄을 재촉하려는 듯, 가는 겨
이집트에서 물건 사면서 게임하듯 흥정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비싸게 샀든지 덜 주고 샀든지 간에 흥정은 긴장감을 높이며 스릴을 맛보게 했다. 칸 엔칼릴리 재래시장 골목을 지나가면서 들리는 호객 행위가 무서우면서도 흥미로웠다.솔직히 말해 재미있었다. 어린 시절 엄마 따라 장에 가서 보던 풍경이 되살아났다. 콩나물 한 줌 더 얻으려고 덤을 달라고 떼쓰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