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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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_ 무대 후면에 ‘제8회 전국민 생활수기 공모 시상식’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무대 중앙에 강대와 마이크, 강대에는 생수병과 물컵이 놓여 있고 플래카드 뒤에 배경막(스크린)이 설치됐다.
막이 오르면 주인공 박순녀가 등장하여 강대 앞에 선다. 꾸벅 인사하고 말하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대한일보가 주최하는 제8회 전국민 생활수기 공모 당선자 박순녀입니다. 재주라곤 솥뚜껑 운전밖에 없는 제가 어쩌다 생활수기에 응모하게 되었고, 보잘것없는 제 글이 운 좋게 당선작으로 선정됐어요. 당선작은 제가 60세부터 65세까지 생활 전선에서 겪은 취업 경험담입니다. 보시다시피 일흔을 바라보는 노친네인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당선 소감을 말씀드리기 위함인데… 당선 소감 대신에… 우선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여러분께 양해를 구해야 될 것 같습니다. (물을 컵에 따라 조금 마신다) 한 달 전쯤, 대한일보 문화부 기자로부터 당선 통지를 받았죠. 그런데 그때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을 받았어요. 기자님이 그러데요. 신문사 사장님이 제 글을 읽고 크게 감동받아서 하시는 말씀이….
사장 (시늉) 이 글은 혼자 보기 아까우니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신문사 홈페이지에 올려서 널리 알리시오. 특히 시상식장에서 당선자가 직접 낭독… 아니, 무미건조한 낭독보다는 재미있고 실감 나게 모노드라마 형식을 빌려서 발표하면 어떻겠소?
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60평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무대에 서 본 적이 없고 연극이라곤 소싯적에 몇 번 구경한 것 말고는 전혀 문외한이거든요. 그러자 기자님은 사장님의 간청이니 재고해 보시라고 신신당부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사장님은 대학생 때 연극반에서 배우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고 하더군요. 학창 시절의 추억과 함께 연극에 대한 갈망이 늘 그의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고 봐야 하겠죠. 며칠 동안 저는 이 일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어요. 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거실을 몇 바퀴씩 돌며 간청, 간청, 간청… 수없이 되뇌어 봐도 답이 떠오르지 않데요. 삼일째 되는 날, 다시 거실… 아참! 저는 실내 운동으로 거실을 도는 습관이 있답니다. 거실을 돌다가 불현듯 무슨 영감처럼 “혼자 보기에 아깝다”는 사장님 말씀이 떠올랐죠. 요즘처럼 소설, 연극, 영화, TV 드라마, SNS, 유튜브… 등등 온갖 이야기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마당에 누가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의 글을 읽겠습니까? 그제서야 사장님 말씀이 감사함으로 다가왔어요. 또한 “실감 나게 발표한다”는 말도 가슴에 와 닿았죠. 왜냐하면 저는 50대 후반에 만학으로 S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거든요. 창작 실습 시간에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말이 ‘실감 나게 써라’ 곧, ‘리얼리티를 살려라’입니다. 리얼리티는 모든 문학 작품의 기반으로서 작품의 성패를 가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할 수 있어요. 심지어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 세계를 다룬 판타지 문학에서도 리얼리티가 필요합니다. 명색이 시나부랭이를 끄적거리는 문학도라는 제가 이처럼 중요한 리얼리티를 외면할 순 없죠. ‘혼자 보기에 아깝다’ ‘실감 나게 발표한다’는 이 두 마디에 제 마음이 조금씩 열리다가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셰익스피어가 “인생은 연극이다. 세상은 무대이고, 사람은 그 위에서 연기를 하는 배우다”라고 했잖아요? 어차피 모든 사람이 배우라면, 내가 실제로 배우가 되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결국 어렵사리 이 제안을 수락한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에요. 저에겐 두 가지 울렁증이 있는데… 마이크 울렁증과 무대 울렁증이죠. 마이크만 잡으면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무대 위로 올라가면 다리가 후둘후둘 떨려서 모노드라마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에요. 하지만 다들 아시겠지만 내 나이쯤 되면 낯이 두꺼워지고 뻔뻔해지잖아요. 그 뻔뻔함으로 두려움을 떨쳐버리려고 해요. 미리 말해 두지만… 전 전문 배우도 아니고 연극은 난생 처음이거든요. 제 연기가 서툴더라도 귀엽게 봐 주시길 부탁드려요.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니까 약간, 아니 솔직히 많이 떨리네요. 물 한 잔 먹고 기운내서 시작해 보죠.
순녀, 강대 위에 있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다.
몇 해 전 일이에요. 그날은 일부러 민원인 출입이 뜸한 퇴근 시간 무렵, 취업을 알선해 주는 시청에 부설된 일자리 센터를 찾아갔어요. 담당 직원에게 이력서를 내미니까, 여직원이 탄성을 내지르데요.
여직원 (시늉) 와우! 자격증이 많네요.
순녀 자격증에 맞는 일자리가 있을까요?
여직원 (시늉) 글쎄요, 쉽진 않을 거예요.
순녀 알아요, 이 나이에 더운 밥, 찬 밥 가릴 처지는 아니죠.
환갑을 넘긴 취업 희망자에게 자격증은 개 발에 편자라는 걸 알지만, 내가 해낼 수 있는 일을 나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순녀 대학에서 전공한 게 문예창작학과라서 독서 지도나 논술 지도도 할 수 있고요. 오래전에 어린이집을 운영한 경험이 있어서 아이 돌보미나 방과 후 도우미도 할 수 있죠. 호스피스 봉사활동을 오래 했기 때문에 환자 돌보는 일도 문제없어요.
비록 나이는 좀 먹었지만 난 이런 사람이라고… 우쭐대며 거침없이 자격증 타령을 하다가 그만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그렇게 잘난 체하면서 그동안 뭐 하고 노후 준비를 하지 않았느냐고 비아냥거릴 것만 같아서였죠. 남편 떠나보내고 혼자가 되면,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나에겐 아예 없던 걸까요? (사이) 그러다가 결혼 생활 내내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한 생각이 퍼뜩 나데요. 남편은 나한테는 ‘평생 원수’였죠. 한평생 경제적으로 힘들게 했고, 담배를 하루 세 갑씩 피워 대는 골초였어요. 라이프스타일도 달라 내가 잠들 시간에 남편이 일어나 TV를 켜서, TV 소음 때문에 깊은 잠에 들 수 없었습니다. 난 불만이 쌓여 가기 시작했죠. 웃음이 많던 내가 웃음을 잃었고 사소한 것에도 다툼이 일어났어요. 힘들게 하던 남편이 죽자 만세를 불렀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하이파이브로 손뼉을 마주치며 공감할 정도였다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욕실에서 넘어졌어요. 그 뒤로 남편의 행동이 눈에 띄게 굼뜨기 시작했죠. 현관문 비밀번호를 못 누르고 자주 넘어지데요. 검사 결과 파킨슨증후군 진단을 받았답니다. (사이) 남편이 아프고 나서야 남편이 보였어요. 수년 동안 이해되지 않던 남편의 행동이 이해되기 시작하더군요. 파킨슨이 퇴행성 질환이라 남편의 상태가 서서히 안 좋아졌던 것인데, 난 남편을 오해해서 미워하는 마음만 키워 왔던 거예요. 그 후, 세 살 난 아기처럼 응석 부리며 온전히 나한테만 의존하는 남편을 결혼 35년 만에 처음으로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양치질을 해 주고 기저귀를 갈아 주면서도 나는 더 일찍 살뜰하게 보살피지 못한 걸 후회했죠. 수십 년간 하지 못했던, 아니 하지 않았던 이 말을 남편의 귀에 속삭이기도 했어요.
순녀 여보… 사랑해.
남편 (시늉, 어눌하게) 나·도·사·랑·해 … .
순녀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어.
남편 무·슨 … ?
순녀 아침에 눈 떴을 때, 당신이 내 곁에 있어 주는 거.
남편 아·침·햇·살·이·돼·서·당·신·창·가·를·비·출·게.
순녀 그건 안 돼! 당신을 보지도, 부르지도, 만지지도 못하잖아?
남편 …….
건강할 때 서로 조금만 양보하고 소통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땅을 치며 한탄해 봐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죠. 그러다가 도둑맞듯 남편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냈습니다. 그이를 좀 더 오래, 할 수 있다면 영원히 사랑해 주고 싶었는데…. 세상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는 압도적인 슬픔이 강물처럼 밀려왔어요. 상실의 아픔이 너무 커서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었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아무 데서나 곡비처럼 울음이 터져 나오데요. 우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 울음소리가 온 집 안을 뒤흔들었어요.
남편이 떠난 날부터 생살이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가듯 밤새 앓았죠. 이제는 의지할 대상도, 손을 내밀어도 잡아 줄 손이 없다는 사실이 폐부를 도려내는 통증으로 다가왔어요.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은 그 무엇으로도 메워지지도 채워지지도 않더군요. 미움의 대상이던 남편이 실은 나를 지탱하는 기둥이었고, 나를 일으켜 세우는 발판이었다는 걸 늦게서야 깨달았죠. 매일매일 남편의 사진을 보며 기도한답니다.
순녀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고난이나 시련도 다 참아 낼 자신이 있는데….
남편 (시늉) 허허허 그 러 니 까 있을 때 잘 해 야 지.
순녀 그 노래, ‘있을 때 잘해’… 당신이 좋아 했었지?
남편 (시늉) 아·암! 명·곡·이·지, 명·곡·이·야 … .
노래 <있을 때 잘해>가 흐른다. 순녀도 따라 부르다가 그친다.
남편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을 떠났지만 나는 압니다. 나처럼 남편도 아득한 저 하늘에서 나를 추억하고, 내가 다시 일어서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사이) 시시때때로 임종 시에 남편과 나눴던 대화를 반추하며 나는 위로를 받습니다.
순녀 여보, 가지 마. 나 혼자 두고… 가지 마.
남편 (힘없이 고갤 젓는다) ……
순녀 꼭 가야 해?
남편 (끄덕인다) ……
순녀 그동안 고마웠어.
남편 으응?
순녀 실수투성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여자 데리고 35년 동안 살아 줘서….
남편 (어눌한 말투로) 나·도·고·마·워 … .
순녀 살아오면서… (목이 메인다) 너무너무 미안해, 정말정말….
남편 뭐·가 … ?
순녀 당신 아픈 줄도 모르고, 미워하고 구박하고 바가지 긁은 거… 나, 용서해 줄 거지?
남편 벌·써·했·어 … .
순녀 너무너무 착한 우리 여보야…. (흑, 하며 돌아서서 운다)
남편 (손을 내밀며) 울·지·마 ….
순녀 (눈물 훔치고 돌아서 손을 맞잡으며) 나 안 울어.
남편 (아내의 눈을 가리키며) 눈·물·맺·혔·어 ….
순녀 당신 있을 때 다 울고, 당신 떠나면 다신 안 울게. (돌아서서 입을 틀어막고 흐느낀다)
남편 잘·살·아·씩·씩·하·게 ….
순녀 (눈물 닦고 돌아선다) 그럼 잘 살아야지. 당신은 아무 걱정 말고 편안히 눈 감으면 돼.
남편 혜·린·이·채·린·이·시·집·도·못·보·내·고 ….
순녀 내가 알아서 할게.
남편 먼·저·가·서·자·리·잡·아·놓·을·게 ….
순녀 응, 나도 곧 뒤따라갈 거야.
남편 안·돼·당·신·은·오·래·오·래 ….
순녀 그딴 소리 하지 마. 당신 없는 세상, 무슨 낙으로 살아?
남편 (숨이 가쁘다) 아·이·들·부·탁·해 ….
순녀 집안일은 염려하지 말라니까.
남편 (더 숨이 차오른다) 이·제·가·야·할·때·가 ….
순녀 (손을 꽉 잡으며) 여보, 가지 마. 좀 더 있다….
남편 (아내의 손을 놓으며) 아·안·녕 ….
순녀 (남편을 흔들며 울부짖는다) 여보! 여보! 안 돼! 안 돼! (목 놓아 운다) 나쁜 사람, 나쁜 사람….
우리 아버지도 오래 앓다가 50대 초반에 돌아가셨어요. 불평 한마디 없이 지극정성으로 병 수발하던 어머니가 나중에 말씀하시데요.
어머니 (시늉) 네 아빤 임종 세례를 받고 이튿날 돌아가셨어. 세례 후, 잠든 아빠의 얼굴엔 온 세상의 평화가 가득하더구나. 틀림없이 네 아빤 미카엘 천사장님이나 가브리엘 천사장님의 영접을 받으며 천국으로 드셨을 거야.
난 어머니의 확신이 부러웠어요. ‘믿는 대로 되리라’는 그 확신 말예요. 아버지가 가신 다음, 몇 년 후, 어머니도 천국 문으로 들어가셨죠. 아마도 두 분은 그 나라에서도 영원히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어요. 또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데요.
어머니 (시늉) 얘야, 병석에 누운 네 아빠 숨소리만 들어도 난 마음이 놓였고 의지가 됐었어. 네 아빠 떠나는 순간,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거란다.
그래요, 숨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놓였다는 어머니의 말, 제 남편이 떠나니까 알겠더라고요. 남편이 세상을 뜬 후, 한 달 가량은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죠. 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몸과 마음을 추스려야 했어요. 어쩌겠어요, 산 사람은 살아야 했으니…. (화들짝 놀라는) 아이고, 내가 자격증 얘기하다가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군요.
‘물 들어야 곰바리 잡는다’는 속담처럼 뒤늦게야 자격증이 먹고 살 구멍이란 걸 깨닫고 허겁지겁 준비했어요.
여직원이 위로랍시고 몇 마디 거들었죠.
여직원 (시늉) 아유! 허드렛일 같은 건 성이 차지 않겠네. 이렇게 많은 능력을 활용할 수 없는 건 정말 안타깝고 애석한 일이지만 저 어… 혹시 청소나 단순 작업 같은 일도 하실 수 있나요?
냉큼 고갤 끄덕였어요.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아니니까요. 여직원이 이력서 용지를 주면서 학력이나 경력이 좋으면 채용이 힘드니 다시 작성하라는 거예요.
빼곡한 이력서를 들여다보다 이력서를 휴지통에 버렸어요. 학력은 중졸, 경력 없음. 이력서를 받아 든 직원이 흐뭇한 미소를 짓데요. 그녀가 구인회사 명단을 살피다가 메모지에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회사 위치까지 알려주더군요. (물을 마신다)
여러분은 강남행 새벽 만원 버스를 아십니까? 6411번 버스예요. 서울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해 강남을 거쳐 개포동 주공 2단지까지 대략 2시간 정도 걸리는 노선버스인데요. 새벽 4시와 4시 5분, 두 차례 출발하는 그 버스는 출발한 지 15분 만에 좌석은 만석이 되고 복도까지 사람들이 꽉꽉 들어찬 진풍경이 벌어지지요. 매일 같은 사람이 타는 시내버스인데도 마치 고정석이 있는 것처럼 어느 정류소에서 누가 타고 내리는지 다 정해져 있어요. 이 버스 타는 50∼60대 승객들은 새벽 3시에 일어나서 5시 반이면 직장인 강남의 빌딩에 도착하지요. 자식뻘 되는 수많은 직장인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청소 아줌마들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해서 빌딩 곳곳을 말끔히 게눈 감추듯 청소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더군요.
한 달에 85만 원 받는 미화원들은 그야말로 투명 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일 뿐이에요. 저 이름 없는 미화원, 청소부들이 고통과 시련 속에서 자신을 도와주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을 찾을 때 이 땅의 정치인, 행정가, 자본가들은 어디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에 있었습니까?
입으로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고 떠들면서 실제로는 자신과 파당의 이익을 위해 피 튀기는 정쟁을 일삼고, 궤변과 감언이설로 국민을 현혹하는 거짓과 위선, 음모와 모략의 고수요, 후흑학의 대가인 파렴치한 정치인들.
가난하고 병들고 연약한 백성들 편에 서서 그들의 입장이 되어 복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취약 계층과 서민 보호 운운하지만 법과 규정을 앞세워 약자를 억누르고 강자나 권력에 빌붙어 오로지 자신의 보신과 출세와 영달에 급급하면서 월급날만 기다리는 후안무치한 행정가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재산 증식과 이윤 창출에 혈안이 되어 탈법, 위법으로 부패와 비리의 온상이 되는 것도 모자라 노동자를 착취하고 근로자의 고혈을 짜내어 자신의 똥배를 불리는 찔러도 피가 나지 않을, 피도 눈물도 없는 몰염치한 자본가들.
이들 세 집단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아름다운 세상을 더럽히고 지옥으로 만들어 가고 있지 않나요? 아, 물론 국리민복을 위해 애쓰는 선량한 국회의원, 관료, 기업주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소수이고, 대다수는 국가를 좀먹는 벌레, 국가충(國家蟲)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거 아닙니까!
새벽 3시에 일어나 버스 타고 출근해서 정오에 퇴근하는 강남 빌딩 청소를 딱 한 달간 하고 나서 그만 탈진해 버렸답니다. 무슨 ‘천리마 운동’처럼 새벽별 보고 출근하는 고역에 체력을 다 소모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어요.
순녀 에휴! 앓느니 죽지….
이런 푸념이 저절로 튀어나오데요. 누가 ‘아침에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아 먹는다’고 했나요? 일찍 일어난 새는 골병 들어서 일찍 죽어요.
나이가 들수록 회복 탄력성이 떨어지죠. 며칠 쉬고 나서야 겨우 체력이 회복됐어요. 손 개고 앉아서 편안히 살 팔자는 못 되니까 다시 일자리 센터에 전화했답니다.
그 후, 5년 동안 저는 열 번이나 일자리를 바꾸어 가며 힘껏 일했습니다. 죽고 싶도록 힘들고 외로울 땐 남편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남편이 생각나거나 생전에 남편에게 잘해 주지 못했다는 후회가 몰려올 때마다 이 노랠 불렀지요.
순녀 (노래한다)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해 흔들리지 말고/ 가까이 있을 때 붙잡지 그랬어/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잘 해/ 이번이 마지막 마지막 기회야/ 있을 때 잘해 있을 때 잘해….
이상하게 이 노랠 부르고 나면 남편에 대한 그리움도, 죄책감도 눈 녹듯이 사그라드는 거예요. 그래서 ‘노는 입에 염불한다’고, 늘 중얼중얼 노래를 읊조렸답니다.
내 나이 예순아홉, 내년이면 일흔이 됩니다. 늘그막에 먹고 살기 위해 학력과 경력을 속인 내 인생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어요. 결혼과 함께 시어른들 모시고 3남매 낳아서 기르며 한 번도 나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죠. 그 벌을 60대 초반에 톡톡히 치른 셈이에요. 종갓집 맏며느리로 명절이면 100명의 손님을 맞았고, 시동생 결혼식 음식 장만도, 시할머니 상을 당했을 때도 300명 손님을 혼자 치러냈어요. 심지어 시외삼촌 상을 당했을 땐 그 집 딸과 며느리는 방 안에 앉아 울기만 해서, 그 많은 문상객 수발을 혼자 감당하느라 과로로 쓰러진 적도 있습니다. 그때는 관혼상제를 다 집에서 했거든요. 시댁은 물론이고 친정집의 백일, 돌, 약혼식, 결혼식, 장례식까지 불려 다녔죠. (사이) 남편과의 사별로 이 무거운 역할과 책임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자 잃어버린 자아를 찾고 내 삶의 의미를 성찰할 마지막 기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평생 하고 싶던 문학 공부를 하기 위해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하게 된 거예요. 나의 늦은 공부는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죠. 하지만 글쓰기보다 호구지책이 먼저였거든요. 이번에 당선한 취업 경험담이 나온 배경이에요.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이 글감이 됐죠. 육십을 넘기고 취업 전선에 뛰어든 나의 취업 경험담은 치열했으나, 열한 번째 일자리를 끝으로 대미를 장식하게 됐네요. 일흔 전의 나의 경험담이 일흔 후, 내 삶의 초석이 되길 기원합니다. (사이) 이상으로 60대 취업 준비생의 경험담을 극화한 1인극 공연을 모두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는 꼭 전하고 싶습니다.
몇 달 전 일이에요. 지금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너무나 끔찍한 참변을 당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청천벽력과 같은 사건이었죠. (사이, 울먹인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아들은 의식불명 상태로 산소 호흡기를 입에 물린 채 생명의 불빛이 깜박거리고 있었죠.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나님! 순녀 이 아이의 생명을 살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게요. 필요하다면 저의 눈, 장기, 뇌… 살과 피와 뼈를 다 주어도 좋아요. 제게 남은 생을 아이에게 송두리째 넘겨줄 테니 제발 준이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세요!”
횡단보도를 건너다 음주 운전자의 차량에 치인 아들의 얼굴은 피범벅이데요. 눈앞이 캄캄하고 가슴이 컥 막혀서 어떤 말도, 눈물도 나오지 않았죠. 대신 쉼 없이 딸꾹질이 나오더군요. (딸꾹질한다)
임종 직전 중환자실로 찾아갔을 때, 아들의 손이 꿈틀대는 걸 잡아주지 못하고, 십자가를 목에 걸어주지 못한 게 아직도 한으로 남아 있네요. 간신히 버티던 백열등의 필라멘트가 툭 끊어지듯 생명의 불꽃이 꺼지고 아들은 한 줌의 재가 됐어요.
서른다섯 살, 생때같은 자식을 앞세운 참척의 슬픔과 상실의 아픔은 견디기 어려웠죠. 부모는 땅에 묻고,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고 하대요. 준이를 내 가슴속 깊은 웅덩이에 묻었습니다.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웅덩이를 헤집고 나직이 속삭입니다. “준아, 세례를 받았으니 넌 천국에 갈 거야. 먼저 가서 자리 잡아 둬. 엄마도 곧 뒤따라 갈게. 천국에서 만나자.” 준이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날 따랐어요. 외출하려는 낌새만 보여도 치맛자락을 붙들고 가지 마! 가지 마! 울면서 애원했답니다.
준이의 가장 큰 걱정은 커서 결혼하면 엄마를 떠나야 하니까, 엄마와 결혼해서 죽을 때까지 함께 살겠다고 한 아이였죠. 언젠가 부부싸움할 때, 남편이 나를 때리려 하자 새끼 표범처럼 달려들어 아빠의 귀를 물어뜯은 아이였어요. 세상천지에 오직, 오로지, 온전히 하나뿐인 나의 아들, 내 생명보다 더 소중한 핏줄, 나의 모든 것… 내 꿈이요, 소망이요, 기쁨과 보람의 원천이었던 자식을 나는 영원히 잃고 말았던 거예요. 증오와 분노로 몸을 떨며 가해자를 소리 없는 총으로 쏴 죽이고 싶었습니다. 하늘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어요.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어느 날, 시를 한 편 썼어요. (배경막에 시가 떠오른다)
순녀 :
제목 「후회」
일주일에 한 번쯤 “밥은 먹고 다니니?”
그렇게 물어볼걸
한 달에 한 번쯤 “무슨 고민이 있어?”
이렇게 물어볼걸
일 년에 한 번쯤 “같이 여행이나 갈까?”
농담 삼아 물어볼걸
아빠 없는 외눈박이 사랑에 목마른 아이에게
“사랑한다, 아들아…”
이 말 한마디만 했어도
이리도 가슴 미어지지 않았을 걸
그래, 저승에서 다시 만나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꼬옥 말할게.
이승에서 빚진 거, 다 갚아줄게.
아들 사망 후, 난 모든 일상을 멈추고 ‘죽음 연구’에 몰입했어요. 과거 자살에 실패한 경험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완전무결하게 죽으리라고 결심했죠. 목 매고, 동맥 끊고, 아들이 살던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지기 등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으나 처참한 모습이 남겨진 가족들에게 상처를 줄 것 같아 망설여지더군요.
자식의 목숨이 끊어지는 모습을 지켜본 어미는 살아 있어도 산 게 아니에요. 드디어 내 육신이 서서히 무너지는 방법을 찾았어요.
결국 깨끗하게 죽는 방법은 곡기를 끊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 보름 동안 물만 마셨죠. 16일째 되는 날, 딸들이 구급차를 부르고 강제 입원시켰어요. 혼자 있을 때, 링거 꽂은 주사 바늘을 빼고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릴 심산으로 계단을 오르다가 기진맥진 혼절하고 말았죠. (사이) 눈을 떴을 때, 두 딸과 함께 다섯 살박이 쌍둥이 손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쌍둥이 언니 (시늉) 할머니, 죽지 마. 우리랑 함께 살아.
쌍둥이 동생 (시늉) 할머니, 하늘나라 갈 때 나도 데려가.
작은딸 (시늉) 아리야, 누리야. 할머니 하늘나라로 소풍 갈 때 너희들은 못 가. 너희는 여기서 오래오래 살아야지.
큰딸 (시늉) 엄마, 이 귀여운 쌍둥이를 봐. 오빠의 분신, 아바타야.
작은딸 (시늉) 엄마, 이 아이들은 오빠가 남긴 선물이야. 앞으론 손녀들만 보고 살아.
나는 어린 손녀들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았어요. 그제서야 오랫동안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데요. 두 딸이 내 가슴팍에 안겨 함께 울어 줬어요.
순녀 그래, 이젠 이 아이들이 내 희망이요, 꿈이다. 두 딸과 쌍둥이만 보고 살자, 살아 보자꾸나….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간 날, 대문을 열자 쌍둥이 손녀들이 “할머니!” 하고 부르며 쪼르르 달려오다가 동생이 넘어져서 “으앙!” 울음을 터뜨렸어요. 나는 손녀를 일으켜 세우고 머릴 쓰다듬으며 말했죠.
순녀 울지 마.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이 넘어질 거야. 무릎이 깨지고 피가 나도 울어선 안 돼. 울면 지는 거란다. 넘어질 때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탁탁 털고 일어서야 해. 일어서면서 할머니 이름을 부르거라. 박순녀! 그것은 믿음, 사랑, 소망의 다른 이름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땀과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진 어떤 인생에 대한 존경이니까….
손녀에겐 그렇게 말했지만 아들이 떠난 뒤, 얼마 동안은 곡비처럼 시도 때도 없이 울었죠. 어느 날, 다시 마음의 웅덩이를 열었어요.
순녀 준아, 이젠 울지 않을게. 널 보내 줄게. 그러니 너도 날 놔 줘. 내 걱정은 하지 마. 외로워도 슬퍼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테니까.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돕는 구호 단체 ‘옥스팜’에 아들의 이름으로 매달 후원금을 보냈는데, 해지하지 않고 그 후원을 계속하고 있는 건 아들의 영혼이 지상과 연결될 수 있는 끈 하나쯤은 남겨 두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들아, 저 하늘에서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렴.” 나는 스스로를 이렇게 달랬어요. “하나님이 준이를 누구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에 일찍 부르신 것이다.” “상처가 나를 죽이지 않는다면 나를 키울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을 열어 주신다.”
그날 이후로 난 자리를 털고 일어섰고, 이번에 당선한 취업 경험담도 써지게 됐던 거예요.
아들이 세상을 뜬 후, 몇 달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지요. 어느 날 문득, 아들과 나눴던 대화가 떠오르더군요. 화창한 봄날, 가족 소통으로 ‘한라생태숲’에 가서, 막걸리 한 병씩 마시고 얼큰히 취했을 때, 아들이 슬픈 표정으로 말했어요.
아들 (시늉) 엄마, 그 노래 해 봐, <봄날은 간다>….
노랫말은 작사가 손로원이 6·25 때 피난살이하던 부산 용두동 판잣집에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썼다고 합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이란 가사가 쓰라리게 가난했던 그 시절, 이 땅의 민초들을 위로해 줬던 노래지요.
아들이 생각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이 노랠 불렀어요. 그러면 신기하게도 파도 치던 내 마음이 잔잔해졌거든요. 사실, 어찌 보면 그동안 내가 목숨 부지하고 살아올 수 있었던 건 노래의 힘 때문인지 몰라요.
노래의 힘을 확대하면 음악의 힘이고, 음악의 힘을 확대하면 예술의 힘이죠.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을 사로잡는 예술의 힘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요?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엔 <있을 때 잘해>란 노래 덕분에 살았고, 아들이 사라진 다음엔 <봄날은 간다> 때문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지금도 난 가사와 멜로디가 좋아서 자주 이 노랠 흥얼거린답니다.
잘 부르진 못하지만 끝 마무리로, 이 노랠 부르면서 영광스런 이 자리를 떠날까 합니다. 설령 제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노래는 남아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테지요. 자, 그럼… 노랠 아시는 분은 함께 부르셔도 좋습니다.
순녀, 노래한다. 실내 스피커에서 전문 가수(백설희)가 부르는 노래가 흘러 나온다.
순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배우, 스태프, 관객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합창한다. 노래가 끝날 때쯤 무대, 조금씩 어두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