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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꾸는 건 어려워!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명숙(훈영)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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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나라에 여름이 찾아왔습니다.
땅속의 맑은 물과 따스한 햇살을 듬뿍 섭취한 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랐습니다. 나뭇잎의 수가 많아질수록 나무의 덩치도 커져서 그늘은 점점 넓어지고 짙어졌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동물들은 너도나도 그늘을 찾아 모여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람마저 더위에 지쳐 어디 가서 늘어졌는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습니다.
동물들은 냇가로 우르르 달려갔습니다.
철벙철벙, 풍덩풍덩!
물장구를 치며 신나게 놀다가 보니 배가 고팠습니다.
“아빠, 배꼽시계가 꼬로록 먹을 걸 달래.”
아기기린이 보채자 아빠기린은 높은 곳에 있는 연한 아카시아잎을 따 주었습니다.
“또, 아카시아! 싫어, 나도 당근 먹고 싶어. 당근 내놔!”
“뭐라구, 기린이 흙투성이 당근을? 우린 이슬이 씻어주는 깨끗한 나뭇잎만 먹어야 해. 조상 대대로 땅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겠다고 허리를 굽히거나 머리를 숙인 적이 없어요. 우리 집 가훈이 ‘남의 앞에 몸을 굽히지 않는다’라는 걸 잊었니? 우아하고 고상한 우리가 어떻게 땅 위도 아닌 흙속에 묻힌 것을 먹겠다고 조르니? 쯔쯧….”
아빠기린은 당치도 않는 일이라며 혀를 끌끌 찹니다.
“체험 농장에 사는 친구들은 매일 먹는다는데, 왜 나만 못 먹어!”
“허허 참, 요즘 애들은 도대체가 집안의 전통이나 품위를 지키려고 하지 않아요. 하지만 뭐 시대가 변했으니 어쩌겠누? 하나뿐인 아들의 부탁이니 들어줄 수밖에.”
아빠기린은 아카시아잎을 한아름 따들고 당근을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식사 중인 당나귀를 만났습니다.
“여어, 귀 큰 양반. 마침 잘 만났네. 그 당근하고 이 아카시아잎하고 바꾸세.”
“뭐, 귀 큰 양반? 난 그딴 이파리 따윈 필요 없어.”
기린이 귀 큰 양반이라고 하자 당나귀는 대뜸 화를 내었습니다.
“내 말이 기분 나빴다면 사과함세. 당나귀 선생, 이건 아주 높은 나뭇가지에서 딴 최고급 잎이라 입에서 살살 녹는다네. 자, 먹어보게.”
“됐네, 귀 큰 양반이라고 했다가 당나귀 선생이라고 했다가 날 놀리는 겐가? 그렇게 좋은 거면 자네나 실컷 먹게.”
당나귀는 보란 듯이 당근을 아그작아그작 씹었습니다. 평소엔 순하지만 한 번 고집을 피우면 막무가내인 당나귀를 한 방에 걷어차고 싶었지만, 꾹 참고 다시 점잖게 말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이 아카시아잎을 몽땅 줄 테니, 그 당근 하나만 주게. 우리 아들놈이 먹고 싶다고 하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거든. 꼬솜한 잣이라면 또 모를까.”
당나귀가 끝내 바꾸어 주지 않자 기린은 그만 화가 났습니다.
“뭐야, 귀신도 빌면 말을 들어준다는데, 그렇게 애원했는데도 안 바꿔 주냐! 그러니까 널 보고 모두 고집퉁이 당나귀라고 하지?”
“그래 난 고집퉁이다 어쩔래? 넌 키다리 주제에 당근도 하나 못 뽑냐?”
당나귀가 앞니를 드러내어 히이이 히이잉 비웃었습니다.
높은 곳의 나뭇잎만 따먹을 줄 알았지, 흙속에 묻힌 당근은 뽑을 줄 모르는 기린은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그때 양손에 잣송이를 든 다람쥐가 나타났습니다. 다람쥐는 기린이 갖고 있는 아카시아잎을 보고 걸음을 멈추어 섰습니다.
“기린 아저씨, 그 아카시아잎이랑 이 잣송이랑 바꾸면 안 될까요?”
다람쥐는 두 개의 잣송이를 흔들어 보였습니다.
“뭐? 그깟 잣송이 따윈 필요 없어. 난 당근이 필요해.”
기린은 다람쥐는 쳐다보지도 않고 당나귀만 뚫어지게 쏘아보았습니다.
“오늘 우리 할아버지 생신이시거든요. 아카시아잎으로 멋진 왕관을 만들어 드릴려구요, 전 키가 작아서 아카시아잎을 딸 수 없어요. 좀 바꿔 주시면 안 될까요?”
“거참, 쬐끄만 게 거 귀찮게 구네. 저리 꺼지지 못해!”
기린이 소리를 빽 지르자 다람쥐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널 울리려고 그런 건 아냐, 잣송이는 정말 필요 없어서 그래.”
기린이 멋쩍은 듯 다람쥐를 달랬습니다. 그 틈새로 당나귀가 끼어들었습니다.
“다람쥐야, 그러지 말고 내 당근이랑 바꾸자. 고소한 잣이 엄청 먹고 싶었거든.”
“싫어요, 홍당무는 공짜로 줘도 안 가져요. 아카시아잎이 필요하다구요.”
당나귀는 잣송이가 필요하다고 다람쥐에게 사정하고, 다람쥐는 아카시아잎이 필요하다고 기린에게 사정하고, 기린은 당근이 필요하다고 당나귀에게 사정하고….
이렇게 서로 바꾸자고 실랑이를 하느라 해가 서산에 지는 줄도 몰랐습니다.
나무 뒤에 숨어서 지금까지 그 모습을 몰래 지켜보던 금빛 여우가 다가왔습니다.
“자, 모두 조용 조용! 그런 일이면 이 숲속의 꾀돌이인 제게 맡겨보세요.”
“네게 무슨 좋은 수라도 있니?”
모두 금빛 여우를 바라보며 입을 모아 물었습니다.
“있지요. 내가 누굽니까? 어려움을 해결하는 지혜 보따리 아닙니까?”
“그럼, 어서 말해 봐. 어떻게 하면 모두 필요한 것을 바꿀 수 있니?”
금빛 여우는 손톱자국 같은 작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각자가 갖고 있는 물건의 반을 제게 주신다면 깨끗하게 해결해 드릴게요.”
금빛 여우의 말에 하루 종일 실랑이를 하느라 지친 기린과 당나귀와 다람쥐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금빛 여우는 아카시아잎의 반은 자기가 갖고 반은 다람쥐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잣송이의 반은 자기가 갖고 또 반은 당나귀에게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나귀에게서 받은 당근의 반은 자기가 갖고 남은 반은 기린에게 주었습니다.
“자, 이렇게 하면 모두 갖고 싶은 것을 가졌지요?”
금빛 여우의 말에 모두 좋아라 박수를 쳤습니다.
먼저 기린이 말했습니다.
“여우야, 고마워. 바꾸는 건 너무 힘들어. 네가 아니면 우리는 밤을 꼬박 새워도 바꾸지 못했을 거야. 아들에게 줄 당근을 구해서 다행이야.”
“휴우, 할아버지께 아카시아 왕관을 만들어 드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울음을 그친 다람쥐가 아카시아잎을 한아름 품에 안았습니다.
“간식으로 먹을 잣을 구해서 참 다행이야. 빨리 먹어야지.”
당나귀는 잣송이에 숨어 있는 잣을 하나씩 하나씩 골라 빼먹었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세 동물은 바꾼 물건을 가지고 엉덩이를 흔들며 신나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금빛 여우는 세 동물이 반씩 남겨 두고 간 아카시아잎과 잣송이와 당근을 흐뭇하게 바라보았습니다.
‘호호호, 기린은 세상에서 가장 키가 크다고 자랑만 하더니 다람쥐나 울리기나 하고 쯔쯧… 키 값을 못해요. 다람쥐는 귀엽기만 하지 자기가 묻어 놓은 알밤이 어디에 있는지도 까먹어요. 당나귀는 귀가 크기만 했지 내가 하는 거짓말도 분간 못해요. 자기들이 손해 본 것도 모르는 바보들, 이런 맛에 똑똑한 내가 산단 말야. 호호호.’
금빛 여우의 웃음소리가 숲속 멀리 메아리가 되어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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