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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70호 도라지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흘러갔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세월, 내 유년의 시절은 춥고 배고픈 기억밖에 없다.아릿한 내 상념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 힘이 없어 여전히 가랑가랑한 가엾은 노인, 내 어린 시절 어머님 모습 같다. 기력이 부족해서 저러는 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신은 그렇게 너그럽지 않을 것만 같다.“아

  • 박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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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2025.3 70호 ‘흰’이 주는 메아리

입춘의 절기를 무색할 정도로 영하의 날씨다. 성에가 창문에 낀 아침인데, 다른 때보다 흰 성에에 눈길이 머물렀다. 짧은 바늘 끝처럼 예리한 것들이 별 같기도 하고 눈송이처럼 그 모양이 신비롭다. 어린 영혼이 작은 손바닥을 펼치면서 세상을 향해 만사가 찰나의 순간이라고 알려주려는 듯하다.지난 구정에 긴 연휴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이박삼일 간의 일정 동안 애

  • 윤영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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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2025.3 70호 우리 차가

우리 차가 없어졌다.나는 먼저 조수석에서 내려 새로 조성한 공원에 갔다. 그 사이 아내는 아울렛 주차장에 차를 댔다. 구경을 모두 마치고 주차장에 갔다. 차가 없다. 어디 있을까? 벌써 왕복 세 번째 찾고 있다. 처음 두 번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차를 찾느라 피곤한 줄 몰랐다. 나와 아내는 각각 다른 방향에서 차를 찾기 시작했다. 롯데아울렛 주차장은 끝이 보

  • 오형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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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25.3 70호 백자 파편

도라지밭을 일구다가 백자 파편이 눈에 띄어 한두 개씩 모은 것이 큰 바구니에 가득 찼다. 산성(山城) 밑의 이곳이 옛날 집터 자리인지 기와 조각도 잡힌다. 대숲이나 풀숲, 논둑, 물 흐른 도랑에도 파편은 엎드려 있다. 전에도 절터에서 가끔 백자 파편을 보아왔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요사이는 그 파편들의 빛깔에 이끌리어 모으기 시작했다. 은은한 빛깔을 보고 있

  • 최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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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70호 안개는 안개일 뿐

-논문은 검증받기 위해 쓰는 것 아닙니까?미친놈. 누가 그걸 모르나? 순진한 건지, 답답한 건지, 미련한 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바로 이런 놈이다. 나는 정의로운 척하거나, 순수한 척하거나, 양심적인 척하는 인간이 싫다. 세상이란 특히 군대란 상식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조직이다.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져도‘돌격! 앞으로!’라는 명령

  • 이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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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70호 마틸다

모든 사내가 사랑스러워. 돈이 떨어져 13시간 동안이나 굶은 담배의 첫 모금 맛과 함께 문득 그걸 깨달아. 아직 벌어지지 않은 앞 대문니 사이로 뛰쳐나가지도 않는 침을 입가로 질질 흘리며 생각하면 어떤 때는 귀여워 죽겠어. 어쨌거나 세상 사내들은 내게 제법 많은 것을 가져다주니까. 엄마 아빠가 죽었다 깨어나도 해주지 못할 것을 그들은 거저 주었으니

  • 최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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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70호 카론을 기다리며

또 한 사람 환자가 들어왔다. 휠체어에 앉은 환자는 오랜 병마에 시달린 듯, 고개를 모로 박고 미동도 없었다. 여명 시간이 얼마일까, 환자를 보는 순간 떠올려진다. 여명 시간이 짧은 순서대로 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차례가 되기 전에 운명을 하기도 한단다.이곳 호스피스병동으로 오는 환자 대부분이 치료가 무의미하고 연명, 즉 모르핀이나

  • 송경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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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70호 변신

참극의 체르노빌프리페트강이 벨로루시 평원을 거쳐 우크라이나 국경에 접어드는 곳에 체르노빌이 나타난다. 체르노빌은 원래 리(里) 소재지 정도였으나, 소련이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원전이 들어서면서 조상 대대로 이 바닥에 살던 원주민인 코사크족의 후예들은 대부분 다른 곳으로 이사 가고 일부는 남아 조상의 땅을 지키고 있었다.

  • 신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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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70호 어느 바리스타에게

"왜 이렇게 늦는 거야."혼잣소리를 중얼거리며 또 한 번 편의점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바람만이 쌩하고 안으로 치고 들어온다. 새벽 6시 30분. 아직 교대시간은 10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마음은 안절부절이다. 거의 한 달 만에야 다시 시작한 아르바이트. 어제 저녁, 처음 출근을 하느라 대충 입고 나온 가을 점퍼로 파고드는 찬 기

  • 서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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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70호 엄마의 시간

"당장 차 세워."엄마가 운전석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깜짝 놀란 지선이 핸들을 꽉 움켜쥐고 소리를 질렀다."엄마,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여긴 고속도로라고.""고속도로고 뭐고 필요 없으니까 당장 차 세워. 난 집에 갈 거야."평소에는 어눌해서 알아듣기 힘들던 엄마의 발음이 이럴 때는 정확하다."대체 어쩌라고 이러는 건데? 조용히 운전 좀 하자고.""

  • 김택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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