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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영희(청주)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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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발싸심한다. 작가의 혼이 녹아든 예술품 앞에서 진선미에 잠기는 일은 얼마나 멋스러운지. 의도하지 않았어도 이름난 피서지나 다름없는 쾌적함은 덤이다. 실은 동행 인에게 당신이 저 화가같이 잘 산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대형 전시장은 다섯 면이 온통 컬러풀하고 화려하다. ‘원래 내 것은 하나도 없다’, ‘만병의 근원은 성냄에 있다’ 등 삶의 지혜 200문장을 적어 놓았다.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로 읊어주니 꿈의 나라에 온 듯하다. 청주시 통합 출범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강익중 화가의 소통과 화합 메시지를 담은 ‘청주 가는 길’이 전시 중이다. <내가 아는 것> 시리즈는 장 모님이 사위가 못마땅했는지, “자네는 도대체 아는 게 뭔가”라고 물으셨단다. 가슴에 한이 될 수 있는 마음의 옹이를 위기가 기회라는 듯 그만의 긍정으로 무장하여 창의력으로 승화했다. 이 순간 살아 있음을 안다는 것과 우암산의 품에 달려가 안기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무엇이 더 있을지 의문이 생기며 동기유발이 되었으리라. 그렇게 시작한 3천 글자로 된 문장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는 세계적 작가가 되어 뉴욕에 살면서도 고향 청주의 무심천과 우암산, 짜글이 찌개를 잊은 적이 없다고 한다. 그 마음을 고향 그리는 자필 시에 담아 조화롭게 배치했다. 뉴욕 유학 중 작업할 시간이 없어 버스나 지하철에서 이동하며 그릴 수 있게 3인치 조각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습작했다. 3인치 화가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며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 작가로 참가해 특별상을 받기도 했다.
옹이를 생각하니 캘리포니아 브리슬콘 숲의 소나무 ‘무드셀라’가 떠올랐다. 수령 4,800년이 넘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나무의 이름은 969세까지 장수한 성경 속 인물 무드셀라에서 따왔다고 한다. 나무가 잘려 나간 상처가 옹이로 바뀌는 것을 감내하며, 대형 조각품인가 하면 우람한 분재처럼 성장했다. 그래서 강철 소나무라고 한다던 기억이 난다. 그 나무를 생각하면 인간은 나약한 듯하고 먼저 가신 아버지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선친은 시골에서 한약방을 하시며 의술, 인술을 베푸셨다. 우리 산의 밤나무에서 떨어진 알밤을 이웃이 다 주워가도 그 밤으로 차례를 지내니 우리가 공덕을 베푸는 것이라 하셨다. 그래서였는지 믿는 친구에게 보증을 서주고 그게 옹이가 되어 작고하셨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가슴이 아프고 신이 원망스러웠다. 사람은 생로병사를 피해 갈 수 없으니 대개 위기를 타개하지 못하고 옹이를 안은 채 스러져 간다고 합리화했다. 아버지를 보낸 후라 동방삭처럼 오래 산 소나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한계가 느껴졌다.
살면서 보니 대작가만큼 이름이 나지 않았어도 옹이를 삶으로, 삶을 말로, 다시 글로 승화시키며 우뚝 서신 분이 계신다. 병약하게 유복자처럼 태어나 수면제 세코날을 숨긴 채 절에서 요양했어도, 인고의 피눈물로 모범이 되는 오늘을 보여 주신다. 늘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씨와 말씨, 주인 정신으로 내가정을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매운 살림 솜씨에 명작을 유려하게 빚어 놓으신다. 거기에 후배들이 닮고 싶게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여 몸에 밴 맵시는 주위를 행복으로 물들인다.
지난번 동행한 친구도 그렇다. 그가 싸준 떡을 먹다가 목이 메어서 울컥했다. 그녀도 늘 주위를 챙기는데 어제도 다르지 않았다. 초대를 받아 갔는데 떡이 맛있어 봉송 싼다고 주섬주섬 챙기더니, 떡은 가장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임자라고 차에 놓고 내린다. 그 친구는 해 뜨는 게 겨우 보이는 첩첩산중에서 맏딸로 태어나 남동생들 학교 보내느라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그래도 부모나 동생들 한 번 탓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하고 열심히 성당엘 다니면서 신심을 쌓았다. 성실한 그 친구를 보며 성당엘 다니고 싶다고 말하는 신도들이 늘어날 정도였다. 그녀는 공직 시험에 같이 합격했는데 큰아버지가 6·25 때 부역하고 월북한 게 문제가 되었다. 국가보안법상 연좌제에 걸려서 발령이 겨우 나더니 신원 특이자로 분류가 되어 얼마 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사표를 냈다. 가슴에 옹이가 깊게 박힐 만도 한데 가을에는 도토리를 주워서 묵을 쑤어 돌리고 겨울이면 만두를 빚어서 이웃을 챙기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선행을 베푸는데 신이 착각했는지 남편을 갑자기 데려갔다. 우리들은 모이면 그녀 입장을 헤아리면서도 편하게 이야기하다 보면 남편이란 존재가 튀어나온다. 그녀는 덤덤하게 말한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남편이 가장 착한 남편이야. 스트레스가 만병의 근원이니 잘 해”라고 먼저 겪은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감성이 풍부하고 순수한 그녀가 글을 잘 쓸 것 같아 권하면, 개나 소나 다 글 쓰느냐며 출산율이 바닥인데 손자들 잘 봐주는 것도 애국 아니냐고 딴전을 피운다. 본질이 중요한데 취미생활이니 자아실현이니 하며 그녀보다 긴 가방끈에 헛바람만 잔뜩 들어간 것은 아닌지.
백조가 우아하게 물 위에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물속에서 얼마나 부지런히 물 갈퀴질을 했겠느냐 생각하면 밤잠 못 자며 노력하는 모습이 보여 가슴이 먹먹하다. 그분들에 비하면 나의 작은 옹이는 일회용 반창고만 붙여도 무난한데 건강 염려하며 최선을 다하지 않고 적당히 사는 내 의지가 부끄럽다.
강익중 화가의 전시회를 다녀와서 사유가 깊어진다. 관솔 박힌 소나무 삭정이가 되지 않고 옹이를 둥그런 나이테로 승화시키며 잘 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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