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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숨

한국문인협회 로고 오영정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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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끝 층에서 보이는 전망은 온통 숲이었다. 베란다를 따라 쭉 이어진 유리창 너머로 매일의 다른 조도와 날마다 조금씩 변하는 색을 보는 것을, 그렇게 시간의 흐름을 목도 하는 것을 나와 내 고양이는 좋아했다. 우리는 함께 앉아 머리칼처럼 이리저리 쓸리는 초록 파도를 보거나, 우렛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장맛비에도 나뭇가지 꼭대기에 앉아 내내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던 이름 모를 새를 지켜보기도 했으며, 또 가끔은 바닥에 나란히 누워 뉴스에서 예고한 개기월식이나 별똥별을 기다리기도 했다.

바스락. 형체 없는 소리. 손 뻗으면 닿을 듯 눈앞 가까이 보이는 숲은 이제 온통 마른 갈색이었다. 바스락. 빼곡히 길쭉하고 앙상한 나무 기둥들 사이 어디에선가 또다시, 바스락. 메말라버린 나무 잎사귀들이 온몸이 부서지는 소리를 냈다. 바스락… 바스락.
빼꼼 열어 놓은 창틈을 비집고 그 낯선 소리가 들어온 때는 긴 겨울이었다. 이른 새벽의 숲이 아직 오지 않은 싸늘하고 진한 눈 냄새를 데려와 미리 풍기고 있던 때였다. 열린 창틈에 바짝 붙어 서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안, 바스락거리는 그 소리는 마치 하얗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내 입김처럼 회갈빛 숲 사이 어디에선가 들려왔다, 바스락. 조금씩 더 가까워 오는 선명한 소리, 바스락. 이미 뜬 해는 어디로 숨어버린 건지 어느새 밝아진 하늘엔 온통 구름뿐이었고, 지난 며칠간 줄곧 이어진 한파주의보 탓인지 등산로는 고요했다. 바스락.

산 중턱 마른 덤불 속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키가 큰 하얀 진돗개였다. 텅 빈 등산로를 조심스레 가로질러, 맞은편 덤불을 향해 걷는 그의 뒤를 따라 연이어 크고 작은 다섯 마리의 개들이 줄줄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시베리아허스키를 닮은 진회색, 하나. 래브라도-리트리버를 닮은 금색, 둘. 몰티즈를 닮은 흰색, 셋. 진돗개를 닮은 밝은 구리색, 넷. 슈나우저인지 요크셔테리어인지 검정에 어렴풋한 노란 빛깔 덥수룩한 작은 털 뭉치의, 다섯. 별안간 나타난 그 낯선 조합의 사연 따위에 관한 한낱 인간의 얕디얕은 궁금증이 차고 올라오기도 전, 등까지 붙어버린 강마른 뱃가죽이 꿀꺽꿀꺽 가쁜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그들의 작은 입에선 신기루 같은 하얀 안개가 잠시 돋아났다 이내 사라지길 반복했다. 잇따라 걷는 그들의 발자국 아래로 바스락,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가슴을 후벼파는 소리. 억장을 무너뜨리는 소리. 별안간 수술 일정이 잡힌 내 고양이는 입원 전 몇 가지 검사를 위해 동물 병원 대기실에 나와 함께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꾹꾹 닫힌 진료실 문들을 관통해 대기실까지 새어 나온 온갖 소리들을 꼼짝없이 코앞에 두고 우리는 긴장했다. 참지 못할 아픔과 두려움이 만들어냈을 각양의 울음소리들이 작은 몸뚱어리들에게서 여과 없이 뿜어져 나오는 동안, 나는 작은 케이지 안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내 고양이의 엄지손톱만 한 작은 볼을 말없이 자꾸 쓰다듬었다.
엄마 보고 가지, 왜 먼저 갔어. 엄마가 금방 온다 했잖아. 왜 먼저 가 버렸어…. 더 일찍 못 와서 엄마가 미안해…. 직장 유니폼 차림으로 사색이 되어 막 동물 병원 로비로 뛰어 들어온 한 여성이 닫혀있던 많은 문들 사이 어딘가로 허겁지겁 들어간 곳에서 곧 통곡 소리가 터져 나왔다. 헝클어진 울음 아래 잔뜩 뭉개져버린 발음을 타고 그녀의 비통함이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져 왔다. 오래 아파 입원 치료를 반복해야만 했었던 그녀의 강아지는 방금 전 눈을 먼저 감았다 했고, 이미 몇 번이나 마음의 준비도 했었을 이별임에도 그녀는 꺼이꺼이 한참이나 울었다. 그렇게 오늘 누군가는 가족을 영영 잃었다.

바스락. 흰색의 키 큰 아이가 마른 수풀 사이를 헤치며 없던 길을 내고, 색색의 다섯 아이들은 그 뒤를 따른다. 바스락. 진두지휘하듯 거침없이 무리의 선두를 지키며 한참 앞서가던 큰 아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저기 멀찍이, 키 작은 두 아이들이 따라오지 못하고 제 몸의 두 배가 훨씬 넘는 너비의 수로를 앞에 두고 한 번 짖지도 않은 채 발만 이리 동동 저리 동동거리고 있다. 움푹 땅 아래로 패인, 지난 장마철이 시작되기 전 알알이 다각형 돌을 박아 모양을 낸 그 수로를 큰 아이들은 단숨에 뛰어 건넜지만, 작은 아이들은 발아래 낭떠러지를 만난 듯 겁을 내다 멈춰 선 지 한참 후였다. 수로 앞에 멈춰 선 아이들 쪽을 바라보던 선두의 큰 아이는, 방금 제가 왔던 길을 다시 돌아 저만치 낑낑대고 있는 작은 아이들을 향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뛴다. 그리고,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마치 길을 안내하듯 경사가 완만한 쪽으로 그 작은 아이들을 이끈다. 작은 꼬리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함께 살랑인다. 저만치 앞선 자리에서 내내 기다리고 있던 세 개의 큰 꼬리들도 이제야 안심한 듯 살랑 흔들린다. 다시 바스락바스락. 하늘을 향해 바짝 위로 솟은 나무를 닮아 높게 쳐든 꼬리들이 줄지어 더 깊은 숲을 향한다. 바스락바스락. 언젠가 제게서 멀어지던 주인의 두 다리 대신, 앙상한 네 다리 무리를 따라 걷는다. 바스락바스락.

그날은 늦은 아침부터 폭설이 쏟아졌다. 그 후로 며칠 동안이나 낮에도 밤에도 창밖은 온통 새하얀 날이 이어졌고, 숲은 내내 침묵했다. 피할 수 없는 눈을 앞에 둔 어떤 숨의 겨울은 혹독했다. 앙상한 다리들이 나란히 깊은 숲속으로 사라져간 그날의 이른 아침 이후, 하얗게 변해버린 숲에선 그 어떤 바스락 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숨이 투명한 창에 가닿을 때마다 희뿌연 색의 벽이 자꾸 나타났다. 이내 자취도 없이 사라지길 반복했다. 눈을 머금은 알싸한 숨은 여전히 온몸을 관통했다. 겨울이 내쉬는 숨이 어디론가 하염없이 흘러갔고, 나는 오늘도 그들의 안부를 초심하며 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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