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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한 통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영희(중랑)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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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켠 듯 작고 앙증맞은 노란 수박꽃. 꽃말이 ‘큰 마음’이라더니, 꽃이 진 뒤 커다란 수박을 매단다. 수박 크기만큼이나 꽃말도 넉넉하다. 여름이면 수박 한 통으로 대가족도 너끈히 먹을 수 있으니 과연 그 꽃말이 허사가 아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1박 2일로 대구 문학 행사에 들렀다가 다음 날 서울로 올라가는 도중에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했다. 여선생님은 바닥에 비닐을 깔고 쟁반 위에 수박을 올려놓았다.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어서 남선생님이 큰 칼을 수박 가운데에 놓고 힘껏 누르자 수박이 반으로 쩍! 하고 갈라졌다. 그리고 수박을 다시 먹기 좋게 잘랐다. 선생님은 일행에게 수박 한 쪽씩 건네주었다. 빨간 속살에 까만 씨가 박힌 수박을 한 입 베어 먹는 순간 나는 입 안에 가득 찬 수박즙에 금세 갈증이 사라졌다. 우리는 그날 그렇게 헤어지기 전에 수박 한 통으로 마지막 만찬 같은 수박 잔치를 벌였다.
모임의 대표를 맡은 선생님은 전날 과일 가게에서 싱싱하고 커다란 수박을 사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눠 먹을 생각에 즐거운 꿈을 꾸며 잠을 청했을 것이다. 수박은 그런 주인 옆에서 제가 요긴하게 쓰일 내일을 기다리며 더위도 잊고 밤을 새웠을까.
우리 일행은 새벽부터 대형 버스에 몸을 싣고 대구로 내려가느라 잠이 부족했고, 저녁에 진행된 팀 장기자랑이 끝나고는 피곤하여 빨리 쉬고 싶어졌다. 또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바빴던 우리는 수박 먹을 시간이 없었다. 수박은 전날 우리와 함께 다섯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달려서 대구로 내려와 숙소로 옮겨졌다. 수박은 아무 일 없이 우리 곁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시 차에 태워져, 덜컹거리는 버스가 달리는 대로 흔들리는 제 몸의 균형을 잡으며, 마냥 기다리고 있을 터. 수박은 어쩌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될 수도 있겠다고 체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잊힌 듯했던 수박이, 어느 누군가의 묘안으로 ‘휴게소 수박 잔치’를 벌인 것이다. 깨질 새라 애지중지하며 함께 다닌 수박 한 통이 우리의 건조한 목을 빠르게 축여 주었다. 갈증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단맛이 입 안을 맴돈다. 수박 한 쪽씩 들고 앉아서 먹는 사람, 서서 먹는 사람, 뒤돌아서서 먹는 사람들. 수박 한 통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거운 수박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면서 지체된 시간이 서럽지 않게, 깔끔하게 수박을 해결하니 마음이 가뿐해졌다. 짧은 시간 동안의 멋진 수박 잔치였다.
한여름 강렬한 햇볕을 듬뿍 받고 몸집을 키우며 단맛을 가득 품었던 수박. 뜨거웠던 긴 여름 동안 수박의 당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갖은 병충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붉은 속살에 가득 찬 즙을 단단하게 에워 싸고 있는 수박껍질. 그 두껍고 단단한 수박껍질은 이리 뒹굴고 저리 뒹굴어도 떨어뜨리지 않는 한 웬만해선 상처를 입지 않는다. 어린 자식을 품에 안고 사랑으로 꼭 감싸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일까.
그날의 수박 잔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동생네 가족과 함께 계곡으로 피서 가서, 개울물에 담가놨던 수박을 잘라 각자 한 쪽씩 들고 먹던 풍경과 닮았다. 수박은 90프로가 수분이라서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수박 한 통으로 갈증을 해결했고 정을 나누었다. 맛있는 수박으로 수분을 보충한 아이들은 튜브를 몸에 두르고 얕은 계곡에서 물장구를 치고, 서로에게 물을 튕기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내가 어릴 적에 여름이면 어머니가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사와서 큰 대야에 넣은 후, 얼음에 바늘을 꽂고 장도리로 두드리면 빗금을 그으며 얼음이 갈라졌다. 그 얼음물에 수박 속을 수저로 떠 넣어 수박 화채를 만들었다. 투명한 얼음 속에 담긴 빨간 과육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서 수박 화채 한 그릇씩 받아들고 과육을 다 떠먹고 남은 수박 주스를 들이켠다. 시원하게 목을 타고 가슴을 지나 위로 내려 가는 수박 화채는, 언제 더웠냐는 듯 몸속까지 더위를 잊게 하는 여름철 대표 음료였다. 요즘은 집에서 수박 화채를 잘 해먹지 않고, 카페에서는 수박을 갈아서 만드는 수박 주스나 수박 스무디 같은 음료가 인기 있다. 시대가 바뀌며 수박도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다.
올 여름은 유난히 뜨거웠다. 낮 기온이 섭씨 37∼38도를 넘나드는 높은 기온이 9월까지 이어졌다. 밖에서 십 분을 있기가 정말 어려웠던 올해 여름이다. 또한 여름이 한 달쯤 더 길어졌다. 초가을이어야 할 9월이 한여름이 된 것이다. 길어지는 열대야에 오전부터 밤중까지 계속 에어컨을 틀게 된다. 이제는 여름에 에어컨 없이 살 수 없겠다는 걱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점점 더 뜨거워지는 여름철에 우리들은 전기 요금 폭탄 때문에 고심하고 있다. 외출하면 햇빛을 피해서 에어컨이 켜진 공간으로 빠르게 대피하며 긴 여름을 간신히 견뎌왔다. 추석이 지났는데도 여름은 좀처럼 비켜나지 않는다. 이제는 ‘추석(秋夕)’이 아니라 가을 ‘추(秋)’ 대신 여름 ‘하(夏)’를 써서 ‘하석(夏夕)’이라고 해야 되겠다는 웃지 못할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수박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재배하는 과일이며 여름철 우리에겐 최고의 과일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수박 한 통 값이 쌀 다섯 말과 같다는 기록이 있고 보니, 그 당시에는 수박이 상당히 귀하고 비싼 과일이었다.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에는 맛있는 수박을 먹고 있는 쥐와 단내를 맡고 날아오는 나비들이 그려져 있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프리다 칼로는 사망 8일 전에 그린 수박 그림에 ‘인생이여 만세(ViVA LA ViDA)’라고 썼다. 자신의 인생을 수박으로 승화시켰다는 해석이 있다. 또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세상의 모든 사치품의 으뜸이며, 한 번 맛을 보면 천사들이 무엇을 먹고 사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수박을 찬미하였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며 사랑의 시인 칠레의 파블로 네루다는 수박을 ‘둥글고 멋지고, 별 가득한 수박, 여름의 초록 고래, 물의 보석상자, 과일가게의 냉정한 여왕’이라고 예찬하였다.
휴게소 주차장에서 문우들과 함께 먹었던 수박과 어머니가 만들어주었던 수박 화채, 동생네 가족들과 계곡에서 나눠 먹었던 수박 모두, 내가슴속 깊이 간직한 추억의 명장면들이 되었다. 수박의 꽃말처럼 그날 우리는 수박 한 통으로 넉넉하고 큰 마음을 나누었다.
내년에도 벌어질 즐거운 수박 잔치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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