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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임윤택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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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온이 40도다. 해열제를 먹고 젖은 물수건을 올렸지만, 이마는 불덩이였다. 중추절 연휴가 끝나 동네 의원을 찾았다. X레이를 판독한 의사는 위급하다며 빨리 큰 병원을 가라고 했다.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침대에 누웠다. 갑자기 옆 침대에 있던 환자가 중환자실로 실려 갔다. 숨을 쉴 때마다 어깨, 복부, 옆구리를 칼로 찌르는 듯한 흉통에 이러다 죽는 게 아닐까 하는 공포가 몰려왔다.
정년퇴직 후 시골 전원주택에 살며 글을 쓰는 모습을 상상하며 지금까지 힘듦을 이겨냈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전업주부인 아내와 아들은 힘들게 살겠지…. 남아 있는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그들에게 나는 어떤 존재였을까? 지금까지의 삶은 잘 살아온 것일까?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더 심해졌다.
의사는 하얗게 퍼져 있는 폐사진의 염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병명은 급성폐렴. 순간 폐사진의 하얀 염증은 뉴질랜드 여행에서 본 하얗게 쌓인 폭설과 겹쳐 보였다.

2007년 6월 중순, 뉴질랜드는 우리 가족의 첫 해외 여행지다. 남섬의 명소인 밀퍼드 사운드 관광을 마치고 호머 터널을 경유할 때 함박눈이 내렸다. 아름다운 퀸스타운 전경이 꽉 찬 푸르름에서 텅 빈 흰색으로 탈바꿈했다. 때아닌 폭설은 퀸스타운 사람들에게 축복이지만, 갈 길 먼 여행자에겐 고난의 여정이었다. 오렌지색 제설차가 관광버스에 앞장 서서 부착된 칼날로 열심히 눈을 밀었다. 하지만 10cm 폭설에 그만 항복. 지루하게 버스 안에서 반나절을 보냈다. 날이 어두워지자 할 수 없이 퀸스타운으로 되돌아갔다. 퀸스타운에서 출발하는 크라이스처치행 비행기는 기상악화로 운항할 수 없었다.
이튿날 다른 길로 우회를 했다. 한참을 달리던 관광버스가 ‘진입 금지’ 팻말 앞에서 멈췄다. 가이드는 뉴질랜드 관광버스 기사 등급이 비행기 조종사와 동격인 캡틴이라 했다. 기사는 교통법규위반으로 하루 아침에 수년간 쌓아 놓은 공든 탑을 허물 수 없었는지 어디론가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전화를 했다.
여행객들은 아무것도 없는 눈길 위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렸고, 생리작용 문제로 불편함을 겪었다. 모임에서 여행 온 십여 명의 여성 관광객들은 가이드 L에게 격하게 항의했다. 버스 안이 혼란스러웠다.

뉴질랜드 여행 당시 지인들 상당수가 조기유학을 보내는 분위기였다. 난 아들을 유학 보내고 싶어졌다. 아내는 동고동락 속에 가족애를 느끼는 것이 좋다며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장기간의 유학 생활은 아들이 아빠를 보아도 데면데면할 테니 가치관이 확립되었을 때 보내자고 했다. 굳이 외국어 습득을 위해서라면 방학을 이용해 외국 여행을 떠나자는 멋진 아이디어를 꺼냈다. 좋은 생각에 맞장구를 쳤다.
여행이 유학에 판정승. 뉴질랜드 여행을 예약하며 출발일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맘이 설렜다. 그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열흘의 휴가를 위해, 출발하기 전 무리하게 남은 회사 업무를 처리할 땐 힘든지도 몰랐다. 그렇게 설렜던 마음이 지금은 두렵고 겁이 났다. 아내와 아들이 불안해할까 봐 내색하지 못했다. 혹시 여행이 길어질지도 몰라 지갑 속의 달러를 세었다. 아내에게 신용카드 사용 한도액도 물었다. 다행히도 비상시를 대비해 여유분 카드 한 장을 더 가져왔다고 했다.
가이드 L은 기상이변으로 시간이 지체되자, 남섬 해안선을 따라 크라이스트처치로 가는 여행 일정으로 변경했다. 관광버스는 눈이 내리지 않은 남쪽으로, 시냇물처럼 굽이굽이 흘러갔다. 저녁나절이 되어 인버카길에 도착했다. 인버카길은 지구 최남단, 뉴질랜드 최남단에 있는 바람의 도시로써 호텔도 단층이었다. 얼었던 몸을 한증탕에 녹이고 만찬과 포도주를 즐겼다. 지구 끝머리에서 태양의 에너지와 자연의 기를 듬뿍 느꼈다. 생의 비약, 엘랑비탈이랄까.
뉴질랜드 남섬 인버카길에서 출발한 버스는 더니든으로 향했다. 장거리 이동이라 염려되었지만,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전경을 만끽하며 힐링할 수 있었다.
관광버스는 오마루, 티마루 해안 도시를 향해 줄기차게 달렸다. 구름 천지의 세상에서 꿈을 꾸었다. 가이드 L이 지구에서 가장 추운 지역 남극 대륙 기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며 잠시 설명을 했다. 꿈속에서 누군가 “어서 와요, 환영해요” 하며 인사를 했다. 노르웨이 탐험가 로열 아문센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침내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뉴질랜드 북섬 오클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이다. 꼭두새벽 집에 갈 생각에 마음이 설레 눈이 빨리 떠졌다. 잠꾸러기 아들도 아내도 이미 깨어 있었다. 호텔 근처에 있는 호수 주변으로 산책을 떠났다. 새벽의 찬 바람이 얼굴에 스쳤다. 차가움이 오히려 청량하게 느껴졌다. 어둠을 온화한 빛으로 둘레길을 안내하는 가로등을 따랐다. 걷는 사이 주위가 환해졌다.
앞장서서 가던 노랑 잠바를 입은 아들이, “쌍무지개가 떴다”라며 소리를 질렀다. 무지개가 호수와 하늘 사이에 놓인 다리처럼 보였다. 쌍무지개는 여행하지 못한 북섬의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사람이 여행하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하기 위해서라고 괴테가 말했다. 나는 여행으로 아등바등한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 지친 몸과 마음을 치료했다. 그곳에서 돌아오면 거기서 얻은 힘으로 다시 치열한 삶을 살아나갔다. 지치고 힘들면 다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다.

링거를 포도주로, 맛없는 병원 밥을 여행지의 별미로, 병원 침대의 하얀 시트는 인버카길에서 크라이스트처치로 가는 해안선에서 본 구름이라고, 최면을 걸었다. 그 구름은 고통의 하루를 쪽빛 바다와 파란 하늘에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행복한 비행기로 만들었다. 그 비행기로 모퉁이 길에서 나타날 새로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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