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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수필 창작과 이론2 - 왜 수필을 쓰는가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철호

수필가·한국문인협회 고문

책 제목월간문학 2024년 11월 월간문학 2024년 12월 6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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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그 수필이 쓰인 시대의 시대상이나 사회상을 담는 그릇과도 같다. 수필이 쓰인 시대의 사회와 인간 심리, 인간의 여러 가지 모습과 풍조 등을 보여준다. 수필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소재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의 한 단면을 가식 없이 형상화해 내는 문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필은 비록 역사서나 어떤 기록물이 아니더라도 그 시대의 사회현실이나 시대상, 인간 심리와 인간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더욱이 수필은 ‘진솔한 문학’, ‘가식 없는 고백의 문학’으로 인간적 체취나 감동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수필은 오히려 세월이 지날수록 과거의 시대상이나 사회상, 인간 심리나 인간의 모습 등을 더욱 생생하게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점은 『한중록(恨中錄)』이나 『계축일기(癸丑日記)』,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다산문집(茶山文集)』, 『서애문집(西厓文集)』 등과 같은 옛날에 쓰인 수필류의 글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이런 옛날에 쓰인 수필류의 글들을 통해 시대상과 사회상, 인간 심리나 인간의 모습은 물론 그때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을 자세히 살필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수필류를 통해 그 시대의 문화적 상황과 문학 수준, 문학 풍토를 파악할 수도 있다. 그 시대의 문학 용어와 언어, 문장 구성, 표기법, 그리고 이런 것들의 변천 과정 등을 살피는 데에 아주 효과적인 것이다. 우리 국문학계에서 이런 수필류의 글을 아주 높이 평가하며 소중하게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20년대나 30년대, 또는 그 이후에 쓰인 많은 수필이 지금까지도 소중하게 여겨지고 있다.
특히 우리는 1920년대 이후 1945년 해방 전까지에 쓰인 수필을 통해 일제 치하에서의 암울했던 삶의 모습과 좌절감, 울분, 고뇌, 슬픔, 사회 비리, 일제의 잔학성, 여러 정치 상황 및 경제 상황, 민족의식의 고취, 인권의 존엄성과 인권 회복을 위한 외침, 자유에 대한 열망, 고난 속에서의 희망이나 기쁨, 인간애와 사랑 등 많은 것을 직접, 간접으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역사서와 단순한 기록물들보다 훨씬 실감날 뿐 아니라 감동적으로 와 닿는다. 또 8·15 해방 이후와 6·25 전쟁을 겪을 때나 그때를 회상하며 쓴 수필을 보면, 그 시대의 여러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해방 이후의 혼란기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전쟁의 참혹함, 혼돈과 공포 시대 때의 갖가지 인간의 모습과 인간 심리, 인간성 상실, 고통과 비극, 슬픔, 좌절감, 적개심, 정치적 야욕, 증오심, 허무함, 인간 간의 갈등, 온갖 상념과 고뇌, 이런 속에서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 인간미가 생생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6·25 전쟁 이후 재건의 시기였다. 1960년대와 경제 성장의 시기였던 1970년대와 80년대, 그리고 물질의 풍요 속에서 정신적 가치와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는 1990년대 등도 역시 다를 바 없다. 각 시대에 쓰인 수필이나 그때를 회상하며 쓴 수필에는 으레 그 시대의 시대상과 사회상, 인간의 갖가지 모습과 인간 심리 등이 여실히 담겨 있는 것이다.
다만 그 시대의 여러 가지 특성이나 시대적 변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 그리고 이러한 것들에 따른 인간의 변화가 각기 다르게 반영되어 나타날 뿐이다. 수필이 우리가 처한 여러 가지 현실을 여실히 반영해 나타나는 문학인 까닭이다. 이렇듯 수필은 우리의 과거 모습을 직접, 간접으로 보여주고 일깨워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자아(自我)를 다시금 살펴보고 각성토록 해주는 문학이다.
수필은 문학적 향기와 예술적 멋이 넘쳐야 하는 문학이면서 동시에 시대적, 사회적, 역사성을 담아낸다.

그런가 하면 문학작품에는 원래 비평의식이 그 바닥에 알게 모르게 깔려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과 우리 사회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하고 싶은 말들이나 의식을 글로써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 인간의 그릇된 모습이나 잘못된 삶을 돌아보고, 우리 사회의 모순된 모습이나 병리현상을 지적한다. 또 우리의 정치나 경제, 문화 상황 등을 비평하고 갖가지 제도나 정책 등도 비평한다. 그리고 작가 자신을 스스로 비평하기도 한다. 이것은 문학의 본질적 기능이며 문학이 지닌 가치와 특성인 것이다.
비평의식이 빠져 있는 문학작품이란 문학으로서의 가치가 없다. 마치 날 빠진 칼날이나 진배없다. 문학을 한 자루의 칼에 비유한다면 비평의식은 날카로운 칼날과 같다.
그래서 훌륭한 문학작품들을 보면 모두 예외 없이 작가의 비평의식이 잘 담겨 있다. 어떤 것들은 얼핏 보면 비평의식이 담겨져 있지 않은 것 같으나 ‘감추어진 칼날’로 비평의식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은유나 비유, 또는 속뜻을 감춘 간접적인 표현이나 은근한 수법, 그리고 은어(隱語)로 살짝 덮여 있을 뿐이다. 또 이런 것들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의 몫이다. 특히 정치적 강압과 문화예술에 대한 탄압, 전쟁이나, 사회불안, 혼탁하고 모순된 시대일수록 이러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비평의식이 문학 작품에 숨겨져 나타나는 수가 많다. 누구보다도 비평의식은 강하면서도 현실적으로 힘이 없고 나약한 문학인들이 흔히 써온 수법이기도 하다.
이 점은 우리가 이미 겪은, 여러 차례의 독재정권 시대 때에 쓰인 문학작품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비단 이런 독재정권 시대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시대에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왜냐하면 정치적 압력이나 문화예술에 대한 탄압, 사회불안, 혼탁하고 모순된 사회 등은 어느 때건 으레 있는 법이므로.
또한 신문의 사설에 난 논단, 평론, 시평(時評), 토론 등과 같이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현실이나 문제점 등을 직설적, 단도직입적, 강압적으로 비평하지 않고 은근히 돌려서 꼬집는 것이 문학의 특성이다.
‘적’을 예리한 칼끝으로 직접 찌르기보다는 날카로운 칼끝은 숨긴 채 은근하고도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방법으로 ‘적’을 공격하고 설득하는 것이 바로 문학인 것이다.
비평의식이 빠져 있는 작품은 문학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기 쉽다. 수필가에게 있어서도 비평의식이란 곧 작가정신과 통한다. 그런데도 수필이란 이름으로 쓰인 글 중에는 비평의식이 부족하거나 아예 빠져 버린 것들이 적지 않다. 대신 개인적인 넋두리나 자기과시, 또는 상념의 무비판적인 나열이나 미학(美學) 일변도의 글이 많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주관적, 자기중심적이며 비체계적, 비이성적, 비논리, 비난의 글이 버젓이 수필 행세를 하기도 한다.
수필이 우리 삶의 반영이요 우리 사회에 대한 깊은 관찰과 조명의 문학적 표출이라면 우리 사회와 인간들의 모순과 부조리, 잘못된 점 등을 도외시할 수 없다. 객관적이고도 냉철하며 체계적, 이성적, 논리적인 비평의식을 갖고 그러한 것들을 꼬집어 비평하는 것이 수필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비평의식은 날카롭고 단호한 직설적인 비평보다는 이를 문학적으로 순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날카로운 ‘칼끝’은 짐짓 감춘 채 은근하면서도 유머와 재치가 넘치는 방법으로 표출하는 것 말이다. 뭉근하게 데워지는 것이 발끈하는 당장의 효과보다 실질적이면서 확실한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윤병로(尹病魯)도 그의 「수필과 평론의 관련성」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본래 수필의 자유분방한 형식과 제재의 다양성에서 비롯되는 속성이 쉽사리 무성격의 산만한 문학으로 수필 자체를 떨어뜨릴 위험도 있지만, 수필은 모름지기 지성을 바탕으로 해서 정서적이고 신비적인 이미지를 표출해 내어 독자를 감동시킨다. 더욱이 수필은 비평정신을 발휘하여 잠자는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지성의 섬광(閃光)이 번뜩이기 때문에 문학으로서 가치와 생명이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비평정신이란 얼음장처럼 차가운 지성의 칼날이 인생과 사회의 부정적 현상을 단호히 척결하는 예리함도 있을 수 있으나, 유머와 위트가 미소처럼 꽃피고 보석처럼 반짝이는 속에서 비평정신은 은은히 발휘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어떤 수필 이론가는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수필에 풍자와 익살이 따르게 되는 것도 실은 그 날카로운 비평정신과 논리를 초월한 경박한 표현의 필연적인 결과에 의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수필에는 위트와 유머 그 자체에도 의의가 있거니와, 그것보다도 오히려 그것은 비평정신에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라 했다.
이와 같이 지성을 바탕으로 하는 비평정신은 유머와 위트로 인해서 더욱 그 진가를 나타낼 수가 있다 하겠다.
그러므로 유머와 위트를 동반한 비평정신은 수필의 생명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평범한 신변잡기나 단조로운 풍물(風物)의 묘사가 수필이 될 수 없는 이상, 거기에는 항상 달관과 통찰 뒤에 오는 날카로운 비평정신이 담겨 있되 평론이 아닌 것은 철저한 논리를 앞세워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비평이 아니고, 유머와 위트를 바탕으로 인생과 사회를 성찰하는 깊은 비평정신을 그 본질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평론에 있어서의 비평방법과 수필에서의 비평방법은 다르다. 비록 같은 내용의 비평적 견해를 갖고 있더라도 평론을 쓸 때의 표현 방법과 수필을 쓸 때의 표현은 달라야 한다.
즉 수필이 평론과 다른 점은 같은 비평의식이라 하더라도 이를 직설적으로 금방 표현하지 않고 작가의 깊은 사색과 이를 통한 여과 과정을 거쳐 문학적으로 승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사색을 통한 제2의 창조’를 이루어내어야 한다.

다른 문학 장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별히 수필은 풍부한 감성을 표출하기 좋은 문학이다.
감성(感性)이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감각이나 지각 등에 의하여 어떤 사물이나 경험, 내적 체험, 인상 등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힘을 말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겪은 것들을 영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표현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것은 ‘문학, 예술은 인간의 감성에서 생기며, 감성으로써만 누릴 수 있다’는 ‘감성 일원론(一元論)’이란 주장이 있을 만큼 ‘감성’은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즉 문학, 예술은 인간의 감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감성이 있어야만 문학, 예술의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표출하고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수필은 ‘감성의 문학’이라고 할 정도로 풍만한 감성이 요구된다. 감성이 풍부해야만 온갖 사물이나 경험 등을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다 볼 수 있고,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펼칠 수 있으며, 섬세하고도 다양하며 아름다운 문학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신의 감성이 풍부하다고 해서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치밀하게 솎아내지 않고, 또 언어나 문장 등에 대한 공부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한 채 무작정 써낸 글은 결코 수필다운 수필이 될 수 없다.
더욱이 좋은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언어와 문장 구사력이 훌륭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것들을 논리적, 체계적으로 구성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아울러 수필의 문장은 간결하면서도 함축성이 있고, 그 뜻이나 표현이 선명해야 하며 정적(靜的)이며 지적(知的)이어야 한다.

좋은 수필에는 대개 작품 전반에 걸쳐 따스한 인간미나 인간적인 정겨움, 또한 소박한 인간적인 체취 같은 것들이 숨결처럼 잔잔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독자들의 마음속에 전해져 은은한 감동과 공감을 안겨 준다.
수필이란 본래 따뜻하고도 소박한 인간의 마음이나 정(情)에 바탕을 둔 문학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마음과 정을 이어 주는 연결 고리의 역할을 한다. 때문에 우리는 수필을 통해 인간 간의 마음과 정을 서로 교류할 수 있다. 즉 수필은 자신의 속마음을 보이고 정을 나누며, 감동과 공감을 얻는 것이기에 수필은 ‘보다 인간적인 문학’이며 ‘정(情)의 문학’이다. 또한 이것이야말로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들이 따라오지 못할, 수필이 지닌 장점이다.
더욱이 수필은 작가의 체험이나 보고 듣고 느낀 것들, 또는 자신의 심경 등을 과장이나 꾸밈없이 진솔하게 그려내는 문학이다. 또 허구라든가 독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교 같은 것들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소설이나 시, 희곡 등 다른 문학 장르들보다 더욱 인간적이며, 호소력도 크다. 그야말로 수필은 인간 본연의 모습이 진솔하게 드러나 보이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문학인 것이다. 수필을 읽고 있으면 왠지 마음이 푸근해지는 친근함이 있으며, 작가의 따스한 인간적 체취가 느껴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니 수필에 지식이나 지성이 담겨 있더라도 그 속에 따스한 인간미나 소박한 인간적 체취가 함께 실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그것은 지식의 나열이나 훈계가 될 수 있다.
‘살아 있는 수필’, ‘생명력이 넘치는 수필’은 작가의 따스한 체온이 작품을 통해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다.
월폴리는 수필문학에 있어서 작가와 독자 사이의 대화 기능이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대화적인 것이 에세이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별 짓는 시금석’이라 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대화의 기능’이나 ‘대화적인 것’이란 다름 아닌 작가의 인간적인 체취나 피가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것을 뜻한다. 수필은 곧 인간미의 흐름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감정, 또는 보고 듣고 체험한 것 등을 표출하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으로서 누구나 지니고 있는 당연한 본능적 욕구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미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러한 본능적 욕구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출해 왔다. 이를테면 원시 시대 때부터 있어 왔던 춤이나 노래, 나팔을 불거나 북을 두드리는 것과 같은 악기 연주, 소리 또는 외침, 그림, 갖가지 표시나 모양, 여러 가지의 몸놀림이나 표정, 탈이나 가면, 언어 등으로 이러한 본능적 욕구를 표현해 왔던 것이다. 또 인류 사회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명이라고 할 수 있는 문자가 발명된 이후에는 이를 이용해 이러한 본능적 욕구와 의사 표시를 해 왔다.

특히 문자는 인간의 생각이나 느낌, 감정, 보고 듣고 체험한 것, 또는 의사 표시 등을 하는 데 있어 아주 편리하고도 적합한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기록으로 남겨 시간이나 장소, 사람 등에 구애받지 않고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함께 볼 수 있으며, 기록을 통해 후세에까지 전할 수 있는 이점까지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문자가 발명된 이후 모든 것을 점차 기록화하면서 인류는 급속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과거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문학도 기록문학으로 바뀌게 되면서 발전을 이룩하였다.

문학이 점차 세분화되어 소설·시·희곡·수필 등 여러 형태로 나뉘어졌는데, 이 중에서도 수필은 인간의 표출 욕구를 사실 그대로 표현하기에 적합하고 누구에게나 친근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호응을 받아 왔다. 특히 우리는 수필을 통해 자신의 삶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체험한 것들과 인생과 자연 등에 대한 관조와 사색, 인간과 사회에 대한 바램이나 말하고 싶은 것, 현실 세계 속에서 늘상 부딪히게 되는 인간적 고뇌와 갈등,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회의 같은 것들을 솔직하면서도 숨김없이 표출해 낼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수필을 통해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반성과 새로운 각성을 할 수 있고,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보다 맑고 깨끗하게 정화시킬 수 있으며, 좀 더 훌륭하고 인간다운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수필은 우리의 가슴 속에 진실과 참된 사랑을 심어주고 우리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불신과 미움, 갈등과 회의, 질투심 같은 것들을 덜어내 주고 대신 신뢰와 화해심을 갖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나아가서는 우리 시대와 사회의 모순이나 부조리, 불의, 불신과 ‘단절된 마음’에 대해 경종을 울리며, 그에 대한 각성과 쇄신을 촉구하기도 한다.

이 같은 수필의 여러 특성과 역할이 바로 우리들로 수필에 관심을 갖게 하고, 수필을 읽게끔 하며, 나아가서는 직접 수필을 쓰게 만드는 것이다.

프랑스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수필가인 몽테뉴는 현실에서 삶의 체험과 관조를 솔직하게 고백한 책, 즉 그의 유명한 『수상록(隨想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독자여, 여기 이 책은 성실한 마음으로 쓰인 것이다. … 모두들 여기 내 생긴 그대로,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별것 아닌 나를 보아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묘사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의 결점들은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나온다. 숨김없이 터놓고 보여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천품, 그대로의 내 모습을 내놓는다. 만일 내가 아직도 대자연의 태초의 법칙 아래 감미로운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국민 속에서 태어났다면, 나는 기꺼이 내 자신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그렸으리라는 것을 단호히 장담한다. 그러니 독자여, 여기서는 나 자신이 바로 이 책의 재료이다.

그의 이 말은 수필의 의미나 성격을 잘 나타내 주며 그가 왜 수필을 쓰는지 잘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수필은 자신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본능적인 표현 욕구나 감정을 ‘수필’이라는 형식의 글로써 표현하는 행위이다. 특히 그러한 본능적인 표현 욕구나 감정이 몹시 솟구칠 때, 또는 강렬한 창작 의욕이 넘칠 때,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보고 강한 표현 충동을 느꼈을 때 이를 글로써 표현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표현 욕구나 창작 의욕, 또는 어떤 인상이나 느낌 등이 강하면 강할수록 수필을 쓰는 행위는 보다 적극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수필을 빚어내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치우쳐 자기의 감정 표현에만 급급하거나 냉철한 판단력이나 객관성이 흐려지면 자칫 문학성이 결여될 수 있다. 따라서 수필을 쓸 때에는 먼저 자신의 감정이나 상념 등을 충분히 여과시키고 즉흥적인 감정을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에 반드시 퇴고의 과정을 거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사심(私心)이나 어떤 목적의식이 배제된, 아주 맑고 순수한 마음에서 쓰여야 하는 것이다.

문학에는 소설·시·희곡·평론·수필 등 여러 가지 장르가 있지만, 이들 중에서 특히 일반인들이 읽기 쉽고 이해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쓸 때 가장 쓰기 쉬운 것 역시 수필이다. 소설이나 시, 희곡, 평론 등은 아무래도 난해한 부분이 많아 읽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고 쓰는 데 있어서도 특별한 소질이나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된다. 반면에 수필은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으며 내용이나 소재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거나 듣거나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기에 친근하여 쓸 수 있을 것 같다고 느끼는 수가 많다. 사실 소설이나 시, 희곡, 평론 등은 그 나름대로의 격식과 구성 요건, 표현 방법, 문장이나 단어의 선택 등에 있어서 많은 것들이 요구되며 문학적 상상력이나 허구세계에 대한 묘사 능력, 치밀한 구성, 추리, 논리성, 연결성을 필요로 한다. 물론 수필문학도 마찬가지지만 상대적으로 형식이나 내용, 소재의 선택, 표현 방법, 구성 등에 있어 까다롭지 않고 자유로우며 포용력이 큰 특성이 있기에 누구나 쓰기 용이하다.

피천득이 그의 「수필」이란 작품에서 수필의 특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것과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無味)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높직이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또한 김광섭은 그의 「수필문학 소고」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우리는 시를 쓰려 한다. 소설을 지어 보려 한다. 혹은 희곡을 만들어 보고자 한다.
우리는 그때 그 어느 것에나 무심히 달려들려는 무뢰한은 아니다. 동일한 작자이면서도 그 태도가 서로 다르다. 시는 심령과 감각의 전율된 상태에서, 희곡과 소설은 재료의 정돈과 구성에 있어서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엄밀한 준비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수필은 달관과 통찰과 깊은 이해가 인격화된 평정한 심경이 무심히 생활 주변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혀 스스로 붓을 잡음에서 제작된 형식이다.
제작이라고는 하나 수필에 있어서는 의식적 동기에서가 아니요, 결과적 현상에서이다. 다시 말하면 수필은 논리적 의도에서 제작된 일이 없다.
수필은 써 보려는 데서 시작되어 써진 것이다. 어느 작가가 소설이나 희곡이나 시를 써 보려는 한가로운 마음에서 쓸 것인가.
그것들은 작가에게서 의식적으로 제작되었다. 진실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수필의 특성과 자유성, 또는 수필이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누구나 쓸 수 있는 문학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가 말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또는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구절을 두고 오랫동안 여러 가지 논란이나 오해가 있어 왔다. 즉, 이 말이 ‘수필이란 아무렇게나 붓 가는 대로 쓰면 되는 글이냐?’ ‘수필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글로 평가절하한 말이 아니냐?’ 하는 논란과 이 구절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아하, 수필이란 그저 붓 가는 대로(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쓰면 되는 것이로구나’, ‘수필은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그저 심심풀이로 쓰는 글이로구나’ 하는 따위의 오해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김광섭이 말한 “수필이란 글자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써지는 글일 것이다” 라거나 “수필은 한가로운 심경에서의 시필쯤에 그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것은 결코 수필은 아무렇게나 써도 된다거나 ‘할 일 없는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쓰는 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수필의 자유로운 속성과 누구에게나 친근하며 누구나 쓸 수 있을 만큼 ‘대중적이며 벽이 높지 않은 문학’이라는 사실을 좀 더 알기 쉽게 문학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어쨌든 소설이나 시, 희곡, 평론 등 다른 문학 장르에 비해 수필이 일반적으로 가장 이해하기에 쉽고, 읽거나 쓰기 쉬운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시를 쓰기 위해서는 언어의 압축과 정제된 표현, 시어(詩語), 시로서의 형식과 음률 등에 대한 지식이나 방법, 또는 재능이 많이 요구되지만, 수필을 쓰는 데에 있어서는 이런 것들에 대해 잘 알거나 재능이 있으면 더욱 좋지만 설령 그렇지 못하더라도 큰 지장은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수필은 어느 특정인들만이 읽고 감상하거나 쓸 수 있는 문학이 아니라 누구나 읽고 감상하며, 또 쓸 수 있는 문학이다.
이처럼 수필은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접근이 용이한 문학이다. 누구나 읽고 즐기고 공감할 수 있으며 누구나 쓸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문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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