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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아버지의 푸른 금고

어릴 적에 염상섭의 소설 「두 파산」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두 파산’은 광복 직후 경제적, 도덕적 가치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 정례 모친의 물질적인 파산과 고리대금업을 했던 김옥임과 교장의 정신적인 파산을 의미한다.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기사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31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한 영국 여성이 8년 만에 모든 돈을 탕진하고 이

  • 최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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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루시부파긴을 잡아먹는 밤

우연히 누군가 쓴 브런치에 올린 기사가 눈에 띄었다. 나의 8번째 개인전, ‘루시부파긴을 잡아먹는 밤’을 감상하고 쓴 글이었다.“그림은 저의 삶의 궤적이지요. 각각의 궤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반딧불이나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해요. 제 삶의 궁극적인 의미죠.”<코람데오>라는 작품을 인터뷰하면서 설명했던 나의 말이었다. 종교적인 주제

  • 이혜정(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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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아버지의 치킨

아버지는 오늘도 치킨을 사 오셨다. 역시나 오늘도 술을 거나하게 드신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누르신 늦은 밤 초인종 소리보다 더 강력하게 잠을 깨우는 것은 치킨 냄새였다.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셔서는 신발장에서 술기운에 비틀거리시며 뒷굽이 약간 주름진 구두를 겨우 벗으셨다. 그리고 치킨이 들어있는 비닐봉투를 높이 들어 올리시고는 소리치셨다.“애들아! 치킨 사

  • 조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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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내친구 ‘쬐맹이’

또르르 똑 또르르 똑…. 빗물 소리에 잠이 달아나 버렸다. 물소리 장단에 가만가만 몰입을 하다 보니 일간 소란했던 마음자리에 사부자기 평화가 깃드는가 싶다. 하마터면 이 여명의 새벽을 살아서는 경험하지 못할 뻔도 하였다.새벽 단잠에서 깨어난 나는 지금 내 친구 ‘쬐맹이’를 다시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별명이 ‘쬐맹이’였던 이 친구는 여중학교 시절 고만고만한

  • 최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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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빗나간 예언

운명이 궁금했다보슬보슬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시이모님들이 집에 오셨다. 그날 어머님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하얀 반죽을 치댔다. 끓는 육수에 떼어낸 반죽은 목련 꽃잎처럼 포르르 떠올랐다. 이내 거실의 둥근 상은 희끗희끗한 시이모님들의 머리로 뒤덮였다. 시이모님들의 화제는 시간이 갈수록 발효된 빵 반죽처럼 며느리에 관한 이야기로 부풀어 올랐다. 이를테면 손이

  • 최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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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아랫녘 너른 들 알뜨르

제주도는 신혼여행으로 처음 갔었다. 육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남국의 정서, 이국적 풍광에 사로잡혀 신혼의 단꿈을 꾸었던 섬이다. 그 이후로 여러 번 다녀왔지만, 관광지를 돌고 올레길을 걷거나 해안도로 따라 드라이브하거나 유명한 카페 나들이하는 것으로 시간을 소일하곤 했다. 언제나 아름다운 경치 속에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겼다. 이번 여행

  • 한승희(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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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표지화 등재

책을 몇 권 출간하고 다수 문학상도 받고 보니 주변 분들은 내가 글 쓰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글 한 편 쓰기 위해 끙끙거리며 애쓰는 것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있는 남편은 나의 특별한 소질이 글 쓰는 데보다는 그림 그리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림 그리는 것이 어떠냐고 묻기에 나의 이런 대답이었다.“나는 그림을 그리고 있

  • 유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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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뿌리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아

‘2025년 3월 25일 오후 4시 50분쯤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가 산불에 완전히 소실됐다’고 공중진화대가 확인한 내용이다.‘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에서 발화한 괴물 산불의 영향으로 신라 시대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의성군 단촌면에 설립된 최치원 문학관이 폐허로 변

  • 최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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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천만의 말씀

그런 줄만 알았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함께 익어 가는 줄 알았다. 젊어 한때 성정이 호랑이같이 사납던 사람이 순한 양이 되고, 거들먹거리고 으스대던 사람이 다소곳해지며, 인색했던 사람도 너그러워지는가 하면 수다스럽던 사람도 진중해진다고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에서 그렇게 바뀌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헌데 나는 왜 이럴까? 이즘 어느 때보다 밴댕이

  • 鶴 汀(본명·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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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 677호 인생 산책

새벽바람이 아직은 차다. 흙바닥으로 내려앉은 바람 끝으로 느껴지는 청량함이 좋아서 새벽잠의 유혹에도 집 밖으로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오롯이 혼자 걷고 싶어 길들여진 습관이다.아침 고요의 가운데서 여린 바람이 실어 나르는 것은 비단 꽃향기뿐만이 아니다. 바짝 말라 더 이상 생명은 사라지고 소멸이라고 생각되었던 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 윤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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