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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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줄만 알았다. 나이가 들면 모든 것이 함께 익어 가는 줄 알았다. 젊어 한때 성정이 호랑이같이 사납던 사람이 순한 양이 되고, 거들먹거리고 으스대던 사람이 다소곳해지며, 인색했던 사람도 너그러워지는가 하면 수다스럽던 사람도 진중해진다고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주변에서 그렇게 바뀌는 이들을 많이 보았다.
헌데 나는 왜 이럴까? 이즘 어느 때보다 밴댕이 소갈머리가 된 듯한 내가 연구 대상이다. 예전 같으면 그냥 웃고 넘어갈 가벼운 농담에도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할 때가 있고, “아니,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하는 생각에 노여움이 치솟는가 하면 섭섭해서 삐지고 속까지 쓰릴 때도 있다. 심지어 나 아닌 가까운 친지가 무례한 일을 당했다 싶어도 솟구치는 화를 억제하기 힘들다. 이런 것을 분노 조절 장애라 하든가.
높다고 해서 반드시 명산이 아니듯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어른은 아닐 터이다. 가려서 볼 줄 알고 새겨서 들을 줄 아는 사람, 상황마다 지혜롭게 판단하되 두루 포용하는 사람, 쌓아 온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식견으로 젊은이들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어른이 아닐까. 노인 한 사람의 가치는 작은 도서관 하나와 같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으니 말이다.
어릴 적부터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은 말이 있다.
“사람은 모름지기 너그러워야 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남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공감하도록 애쓰며 나 자신이 그 당부를 비교적 잘 지키며 산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아무리 별난 성격의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성정이 서로 달라 만날 때마다 동과 서로 의견이 대척점에 서는 친구들과도 각각 따로이 소통과 이해가 자유로운 편이었다. 어떨 땐 나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할 정도였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말수가 적고 소심한 성격 덕분에 직접 누구의 공격이나 미움의 대상이 될 짓을 벌인 일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의 질시를 유발할 정도로 빼어나게 잘한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누군가에게 싸움의 상대가 될 정도로 배짱도 크지 않았다. 그러니 갈등의 단초 자체가 아예 없었다고나 할까. 거미줄처럼 얽힌 관계 속에서 이런 사람은 이런 대로 저런 사람은 저런 대로 그들의 인생관이나 소신이나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개성 그대로 받아들이려 했다.
다만 아쉽게도 내 가족, 특히 내 동생들과 자식들에 대해서만은 그러지 못한 편이었다. 차츰 나이 들고 육친들을 잃어 가며 속쓰리게 후회하고 반성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든 이야기 도중에도 꼬치꼬치 캐묻고, 말하는 내용의 정확성을 요구하고, 그게 흡족하지 않으면 딴지를 걸고 태클을 걸 때가 많았다. 어느 집 동기간 못지않게 잘 지내는 사이인데도 그랬으니…. 그러지 말라고 하면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 피붙이에 대한 나의 찐한 사랑 때문이라고 우기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믿었다. 그럴 때면 “제발 날 좀 그만 사랑해 줘” 혹은 “그런 사랑 부담스러워요. 사양할래요” 하는 반발을 살 때가 많았다. 가장 가깝고 아끼는 사람들이라서 너무 믿었던 것일까?
세계적 전염병 시절을 겪으면서 자잘한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깨달은 덕으로 이즈음 웬만하면 소속된 모든 모임에 충실히 나다닌다. 그러다 보니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오가며 나를 반추해 보는 시간이 길다. 왜 나는 무르익기는커녕 갈수록 풋내를 풍기며 어리석어질까? 갈수록 너그러워지기는커녕 옹졸해지는가?
전날 내가 남들에게 보였던 이해나 관용은 어쩌면 젊음과 모든 일에 대한 자신감이 주는 여유에서 나왔던 것 같다. 체력도 정신력도 알갱이가 빠져버린 듯한 현재의 나는 쇠약해진 스스로를 변명하거나 감추기에 바빠 과민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이즘 나에게 나타나는 가지가지 이상 행동의 원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결국 나이 들어가는 것과 맞물려 있는 듯. 인지력도 판단력도 기억력도 모두가 예전만 못해지니 역으로 기승을 부리는 것은 땅고집과 어설픈 자기방어가 아닌가 싶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별로 낯설지 않으면서도 잘 지키지 못했던 말을 새로이 음미해 본다. 손봉호 선생은 『잠깐 쉬었다가』에서 강조한다.
“성숙의 가장 중요한 표식은 역지사지의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반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정신적 여유와 상상력, 다른 사람과 같이 느껴보는 감정 이입의 능력이고, 나아가서는 사적인 감정과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입장에 서서 자신을 돌이켜 볼 수 있는 능력이다. 도덕 심리학자 콜버그(L. Kohlberg)는 보편적 입장에 설 수 있는 것은 도덕성 발달 과정의 높은 단계여야 가능하다 했다.”
‘도덕성 발달 과정의 높은 단계’라는 말이 뇌리에 꽂힌다. 성숙이란 나이테만 늘려 가는 게 아니라 도덕성을 더 높이 끌어 올리는 자리에 선다는 의미일 터. 그렇다면 나의 치기 어린 이즘의 증상들은 발달시키지 못한 나의 도덕성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 아닌가.
아, 부끄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