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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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5일 오후 4시 50분쯤 의성군 단촌면 등운산 자락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가 산불에 완전히 소실됐다’고 공중진화대가 확인한 내용이다.
‘2025년 3월 22일 경북 의성에서 발화한 괴물 산불의 영향으로 신라 시대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의성군 단촌면에 설립된 최치원 문학관이 폐허로 변했다’고 경북도 소방본부가 제공한 내용이다.
고운사에 소장 중이던 보물 석조여래좌상을 비롯해 불화 대웅보전 석가모니 후불탱화 등 유형 문화유산 마흔한 점은 의성조문국박물관 등 경북 각지로 옮겼다고 한다. 종각 터에 남은 종은 종각이 무너지며 추락해 종에 굵은 금이 가고, 범종이 깨졌다.
어제 같은 2020년 백두대간 인문 캠프 첫날, 의성 조문국(召文國) 고분전시관과 의성조문국박물관에서 사라진 왕국, 조문국을 만났다. 둘째 날에는 천년 고찰 고운사로 향했다.
고운사는 구름을 타고 오른다는 뜻의 등운산(騰雲山)에 있다. 통일신라 신문왕 1년(681)에 화엄종의 시조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원래 고운사(高雲寺)였다. 신라 말 고운 최치원이 머물면서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세웠다. 이후 최치원의 자 ‘고운(孤雲)’을 빌려서 ‘고운사(孤雲寺)’로 바뀌었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섰다. 천왕문을 지나 가운루에 다다르니 반기는 분위기, 그랬다. 구름 위의 누각이라는 뜻의 가운루 현판은 고려 공민왕 어필이다. 옆길로 돌아가니 우화루가 있고 그 옆으로 범종각이 가운루 뒤에 있다. 뜰 사이에서 우주를 품은 범종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가운루 위에 흰 구름 두고 일주문을 나섰다.
2019년 준공한 최치원문학관이다. 신라의 대학자 고운 최치원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했다. 전시관에 들어서니 나를 부르듯 방명록이 펼쳐져 있다. 붓펜을 들어 반갑고 기쁜 마음을 적었다. 그리고 최치원의 여정을 따라갔다.
초상 앞에 섰다. 아버지가 발행한 가승(家乘)에 들어간 채용신 화가의 작품이다. 1831년 비단 위에 채색한 초상화 최치원은 빈 벽을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있다. 양손에는 흰 털이 풍성한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의자 아래는 돗자리를 깔아 놓아 멋스럽다. 영혼이 살아 있는 듯한 초상, 금세 「지리산 둔세시 제2」 읊을 것 같은 초상, 채용신의 붓끝에서 살아난 문창후 최치원 초상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최치원은 신라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나라의 장학생으로 뽑혀 중국 당나라로 유학 갔다. ‘남들이 백의 노력을 하면, 자신은 천의 노력을 한다(人百己千)’라는 정신으로 공부하여, 육 년 만에 당나라의 과거인 빈공사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인생사희(人生四喜)를 고운사 가운루에서 떠올렸다.
칠 년 동안 기나긴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렸을 때(七年大旱逢甘雨)
천리 타향 머나먼 곳에서 고향 사람 만났을 때(千里他鄕遇故人)
달도 없는 어두운 밤 방 안에 촛불을 밝혔을 때(無月洞房華燭夜)
소년 시절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이 올려질 때(少年登科名時)
— 최치원, 「인생사희(人生四喜)」
‘최치원은 고향을 떠나 당나라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동안, 큰 기쁨을 주었던 네 가지 인연을 「인생사희(人生四喜)」라는 시로 표현했다.’ 액자 앞에서 역량만 다를 뿐 나의 인생사희도 그러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최치원은 황소를 꾸짖는 격문을 썼고 이를 많은 사람이 보게 되었다. 「격황소서」 내용 중 ‘오직 세상의 사람들이 너를 죽여 시체를 늘어놓으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땅속의 귀신들까지 너를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은 황소가 놀라 자신도 모르게 의자에서 내려왔다고 하여, 이규보가 크게 내세웠다.
최치원의 뛰어난 실력을 신라에서도 펼치기를 바랐다. 헌강왕은 그가 돌아오기를 원하였다. 최치원이 스물여덟 살 때 당 희종은 신라 사신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귀근(歸覲)을 허락하였다.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오자마자 당나라에서 쓴 글을 『계원필경』 이십 권으로 써서 헌강왕에게 바쳤다. 일만 수 이상의 분량으로, 당나라가 처해 있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상황을 사실적으로 반영한 책이다. 이로 인해 헌강왕에게서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의 관직을 받아 중앙정부에서 일하였다.
최치원은 주변의 시샘으로 중앙 정치에 참여하기 어려웠다. 중앙정부에서 내려와 지방관이 되어 서산, 태인, 함양 군수를 지냈다. 왕의 명령으로 신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승려 세 명과 절 한 곳을 쓴 『사산비명(四山碑銘)』은 많은 자료를 살펴보면서 여러 번 고쳐 썼다.
894년에 정치를 새롭게 바꾸기 위한 「시무십여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렸다.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개혁 의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후 세상을 떠돌다 가야산 홍류동 농산정 계곡에 은둔한 채 세상을 등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패배적 현실 도피였던 것일까. 은둔은 최치원 나름의 현실적 참여 방식이었다.
스님이시여, 청산이 좋단 말 마오(僧乎莫道靑山好)
산이 좋다면 무슨 일로 다시 나온단 말이오(山好何事更出山)
두고 보시오 뒷날 나의 자취를(試看他日吾蹄蹟)
한 번 청산에 들면 다시는 나오지 않으리니(一入靑山更不還)
— 최치원, 「贈山僧 : 어느 산승에게」 전문
외로운 천재 사상가이자 개혁가는 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그리고 일천 년. 2025년 3월 최악의 산불로 고운사와 최치원 박물관이 폐허가 됐다. 국가유산청은 2026부터 복구 작업에 나설 계획인데 복구 기간은 빨라야 칠 년이라는데 순조롭게 복구되길 기원한다.
일천 년을 신선으로 살아온 문창후(文昌侯) 최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