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루시부파긴을 잡아먹는 밤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혜정(광명)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조회수3

좋아요0

우연히 누군가 쓴 브런치에 올린 기사가 눈에 띄었다. 나의 8번째 개인전, ‘루시부파긴을 잡아먹는 밤’을 감상하고 쓴 글이었다.
“그림은 저의 삶의 궤적이지요. 각각의 궤적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요. 반딧불이나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해요. 제 삶의 궁극적인 의미죠.”
<코람데오>라는 작품을 인터뷰하면서 설명했던 나의 말이었다. 종교적인 주제를 표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난 후의 전시회였다. 그 시기에는 한 가지에 진득하게 매달리지 못하고 늘 새로운 것을 그렸기에 좀 더 연속적인 주제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종교적인 주제가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신앙에 깊이가 생기면서 나의 신앙 고백을 주제로 작품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를 쓰면서 제목과 내용, 형식의 삼박자를 고려하게 된다. 문학뿐만 아니라 무용,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 분야가 그러한 범주에서 창작된다면 좋은 작품이 나올 것이다. 예술 표현은 작가 삶의 외침이고 일기다. 깊고 내밀한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거나 비유로 표현하면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한다. 반복되고 점층적으로 연관된 표현은 작가의 의도를 더 뚜렷하게 타인들에게 전달한다. 굵고 강한 선을 한 번에 보일 수 없는 작가들은 약한 점선들을 반복적으로 표현해 밀도와 양감으로 의도를 표현한다. 나는 작품에서 마음속 외침의 점선을 연결하는 데 능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쌓이자 금기시되었던 생각이나 행동을 표출하고 싶은 용기가 생겼다. 종교적인 연작도 그러한 산물이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 숲속에서 아이들이 반딧불이를 잡는 풍경 <루시부파긴을 잡아먹는 밤>도 그중 한 작품이다. 반딧불이는 빛을 내기 위해서 몸속의 루시부파긴이라는 독성 성분을 다 휘발시켜야 하고 그 과정 중 빛이 난다고 한다. 적막한 산골 같은 이 세상에 반딧불이가 날아다니며 메마른 가슴을 뛰게 했으면 하는 작은 소망 때문이었는지 그때의 작품에는 반딧불이가 유난히 많이 발견된다. 밤을 수놓는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작은 빛은 세상에서 빛이 되고 싶은 내 신앙의 원천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요즘 통용되는 관크*의 용어 중 폰딧불(전화기의 빛이 반딧불 같다)은 영화 상영 중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을 뜻하는데 어두운 극장 안에서 반딧불처럼 빛나는 휴대전화의 불빛은 영화 관람자들에게 거슬릴 정도로 불편한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인 빛이 캄캄하게 유지되어야 할 영화관에서는 금기되어야 하는 빛이 된다.
모스크바 주재원 가족으로 수년을 지낸 친구는 가장 힘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매서운 겨울 추위와 밤도 낮처럼 밝은 백야(白夜)를 견디는 것이었다고 얘기한다. 푹 쉬어야 하는 휴식과 숙면의 세계에서 등불은 삶의 필수적인 것이지만 백야는 금기의 언어가 될 수도 있다. 빛은 때에 따라 유용(有用)과 무용의 줄타기를 한다.
반딧불이의 수명은 2년이 채 안 된다. 빛을 발산하는 성충의 시기는 보통 3주를 넘지 않고 대부분의 삶이 어두운 땅속에서 유충으로 지난다고 한다. 한순간의 발광을 위해 잠잠히 참고 기다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지브리 만화영화 중 다카하타 이사오의 <반딧불이의 묘>는 세계 2차 대전 배경의 전쟁통에서 가난과 죽음을 맞는 두 남매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그려냈다. 죽음으로 결말이 이루어지는 그들 앞에 나타나는 반딧불이는 고통스러운 삶을 잊는 작은 희망과 치유의 순간이 되지만 결국 주인공들이 반딧불이로 승화되면서 끝을 맺는다.
2003년도에 상영된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노승과 소년 승의 일대기를 계절에 빗대어 전개한 영화다. 여기서 반딧불이는 인간의 삶과 순환을 상징하는 의미로서 중요한 장면이 되고 있다. “욕망은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낳는다”라는 노승의 대사가 암시하듯 욕정으로 가득 찬 환희의 순간은 너무도 짧다. 결국 삶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시작하는 순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성경의 마태복음 5장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빛은 어둠 속에서 길을 알려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세상의 도덕적, 영적 부패를 직시하라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파수꾼 역할을 담당해 주는 사람이 되길 하나님의 아들 예수도 원하지 않았을까.
도시에서는 왜 반딧불이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까? 네온사인과 대낮같이 밝은 불빛으로 가득 찬 도심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은은한 그들의 발광을 원하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온통 콘크리트와 재개발로 인해 서식지를 잃은 그들이 설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은 점점 인공으로 만들어진 화면에 익숙해지고 자연의 빛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 것일 것이다. 그것은 편리와 실용을 중점으로 두는 바쁜 현대인에게 도태된 자연의 빛일 뿐이다.
거의 온종일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접하고 살면서 나도 눈을 혹사하고 있다. 점점 뿌옇게 변하는 시력은 온갖 스마트기기들에 둘러싸인 백야 때문은 아닐까. 그러한 시점에서 어둠 속의 반딧불이를 그린 것은 쉼의 시간을 찾고 싶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인공으로 가득한 도심을 벗어나 어릴 적 뛰놀던 그 밤공기와 물비린내, 온갖 벌레 소리로 분분한 시골 숲의 한적함을 맛보고 싶었을 것이다. 반추상으로 표현된 나의 그림을 보며 보이지 않는 내 속의 반딧불이를 찾는다. 어렸을 적 시골에서 자랐으면서도 생전 만져보지도 본 적도 없는 그 반딧불이처럼 나의 독성(루시부파긴)을 태우며 세상을 비춰주고 싶다. 누군가 나의 그림을 통해 사그라져 가는 열정을 다시 피워내고 심장의 고동 소리를 듣기 바라면서 그림 속 작은 불빛에 인사를 건넨다. 이제부터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파헤치며 그려 나가려 한다. 이 땅에 꼭 필요한 빛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는 얼마나 오래 어둠 속에서 잠잠히 기다렸는가. 오랜 밤의 근육을 없애고 내 안으로 넘어온 반딧불이가 바로 앞에서 반짝이기 시작한다.
*관람 방해를 의미. 관객과 Critical의 첫 글자 신조어.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