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머문 자리는 아름답습니다.’어느 휴게소 화장실 소변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음속에 새겨 두고 여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문구다. 잠시 머무른 사람들 중 더러는 아름답지 않게 그 자리를 떠났기에 그 글귀가 대신 악취를 맡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을 심안으로 살피면 머물렀던 자리가 떠난 후에도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우리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에는
- 정구평
‘당신이 머문 자리는 아름답습니다.’어느 휴게소 화장실 소변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음속에 새겨 두고 여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문구다. 잠시 머무른 사람들 중 더러는 아름답지 않게 그 자리를 떠났기에 그 글귀가 대신 악취를 맡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을 심안으로 살피면 머물렀던 자리가 떠난 후에도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우리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에는
‘시속 800km 치앙마이 4-45 소요. 9:40 도착(2시간 시차) 11시 40분 우리나라. 33도 현지 날씨.’동생과 함께 떠나는 여행. 처음이다. 공항으로 가는 길, 소녀처럼 들뜬 동생의 가붓한 발걸음을 보니 왈칵 눈물이 나온다. 왜일까? 서로가 겪은 수많은 계절이 스치며 마음에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이 솟아오른다.다섯 자매 중 바로 밑에 막냇동생이라
깨끗한 포장지에 싸여 조금은 설레게 하는 선물처럼 배달된 새로운 해가 순식간에 5개월이 지났다. 쉼 없이 흐르는 시간에 어찌 헌 해와 새 해가 있을까마는 흐르는 시간에 매듭을 묶어 놓고 시작이다 끝이다 하는 것은 지나간 실패를 인정하고 새롭게 정신 차려 살아 보자고 안간힘 쓰는 약한 인간의 가련한 노력일 것이다. 쌀쌀맞게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
역에서 택시를 탔다. 충남 아산의 모 학교로 ‘학교 시설 안전 인증 심사’를 가는 길이었다.같은 충청도인 때문일까. 반갑게 맞는 운전기사의 수더분한 말씨가 전혀 어색하질 않다. 나이가 좀 있는 것 같아 물으니, 벌써 일흔셋이란다. 나이 스물에 시작했으니 올해가 벌써 53년째란다. ‘아산 1호 택시 기사’라는 은근한 자랑도 말끝에 꼬리로 붙어 있다.지난 53
소고기로 우려낸 구수한 국물에, 비록 푸른 물기는 없지만 엽록의 풍미를 남겨 놓은 우거지를 넣고 녹진하게 끓인 우거짓국을 먹는다. 옛말에 ‘우거지 석 독 남겨둔 사람은 오래 산다’라는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흔히 고생을 남겨두면 오래 산다는 뜻이니 우거지가 결코 좋은 음식이 아니라는 뜻일 거다. 그런데 입안에 은근히 스며들어 놓치기 싫은 감칠맛이 있는 게
나무가 보인다. 아무리 작은 나무라도 뿌리에서는 물이 오르고 줄기에서는 새싹이 움트고 끝에서는 꽃이 부활한다. 온몸으로 펼쳐 내는 조그만 변화를 지켜볼 때면 나무가 지닌 힘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연은 늘 그런 변화로 우리를 일깨운다. 가지 끝에 달린 열매는 무언가 타이르는 동그란 입모양을 닮았다. 특히 무성한 잎이 산 전체를 가릴 때면 작고 약한 것이 세
도깨비 나라에도출산율이 낮아져서아기도깨비들이점점 줄어들고 있었어 도깨비 마을마다어른 도깨비들만 가득했지심심한 아기도깨비는방망이 하나 들고친구를 찾아서 마을로 갔어 개구쟁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터와문구점에도 갔지만신나게 놀 수 없었어 그러다가 무거운 가방을 메고 학원으로 가는 아이를 따라 갔어 3시간이나
화롯불 탁 탁밤은 익어 가고 누나 같은 동생동생 같은 오빠깍두기 같은 나 온종일 썰매 타다빨간 손끝 파란 입술꽁꽁 언 몸을 녹인다 얇은 문 너머로툭 툭 바람에 떨어지는소쿠리 소리 엄마 왔나 벌컥 문 열면밖엔 조용히 눈만 내리고 댓돌 위 작은 고무신 세 켤레 꼼짝 않고 엄마를 기다린다
연필에서 나오는 나의 생각자음과 모음이 된다 글자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새 소리가 들리고 대낮에도오리온 별자리가 뜬다 글자가 모여푸른 바다를 끌고 오기도 한다 내 생각이 잠시 멈추면자음과 모음이 ‘쉼표’를 데려온다 글짓기 시간은 연필을 깎듯 내가 나를 다듬는 시간
도시가 가벼워서 뿌리도 없이 떠 있었나 버티고 선 발밑 시공 깊이 숨은 허방이다 속이 빈 땅의 약속이 단단함을 흉내 냈다 숨죽인 지하수 따라 살갗 밑 흐르던 말동굴같이 텅 빈 마음 지반까지 흔들고는어느새 잠을 깼는지 허공이 입 벌린다 잊힌 틈 그 아래로 자라던 허망들이침묵한 사람들 입은 불안도 일상인 듯감춘 채 덮어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