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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나이 든 소년

기상이변은 언제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자연현상이었다. 인류가 지구에 존재하며 그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한, 예측 불가능한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자연이 주는 혜택을 고스란히 떠안아 삶의 영역을 굴곡지게 할지 모른다. 미처 겪어보지 못한 지난여름의 폭염과 폭풍우가 안겨주는 재난이 그런 느낌을 또다시 던져주지 않던가. 모든 것 다 물리치고 여기에 고스

  • 박태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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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층간소음 전쟁 일지

8층 오피스텔 건물 중간층인 3층 집에 혼자 산다. 지난달부터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위층에서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가 새로 이사 온 모양이었다. 천장이 울리는 소리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이 쿵쿵 뛰기도 했다. 참다 못해 관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매일 저녁 층간소음으로 고통받고 있으니 중재해 달라고 했다.그 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

  •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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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경포호의 달밤

경포호에 달이 뜨는 밤이면 일부러 걸음을 늦춘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 호수의 밤은 빠른 사람에게 좀처럼 얼굴을 내주지 않는다. 가을로 접어든 경포호는 낮보다 밤에 더 많은 것을 품는다. 바람은 얇아지고, 물결은 낮게 숨을 죽인다. 달빛은 물 위에 닿자마자 풀린다. 흔들리지만 흩어지지 않는다.강릉의 경포호에는 월파정이 있다. 호수

  • 최승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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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가마솥에 끓여낸 그리움

“모여라!”그 한마디에 가마솥 안에서는 오래된 고향이 들끓기 시작한다. 갯벌의 숨을 머금은 망둥이와 우럭이 우리 5남매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주었다. 무와 양파, 대파가 어우러진 갈무리 뒤로 알싸한 청양고추가 정점을 찍는다.한소끔 끓어오르는 생동감 위로 푸릇한 날배추를 숭덩숭덩 썰어 넣는다. 낡은 가마솥의 무쇠 벽을 뚫고 나올 듯, 고향의

  • 박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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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쉼표

오랫동안 달려왔다. 언제부터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멈춰 서 있던 때보다 달린 시간의 기억이 더 또렷하다. 멈추지 않는 것이 성실이라 믿었고,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빈틈없는 삶이라 여겼다.달리기는 그런 나의 삶과 가장 닮은 행위였다. 출발선보다는 결승선에 익숙했고, 과정보다는 기록에 더 민감했다. 힘들어도 숨이 가빠도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야만 아직 무언

  • 김주현(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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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찌개

인천역에 내리니 12시 30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간신히 찾아가니 모임이 12시인데 1시간이나 늦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십 명의 동창들의 모습이 들어왔다.마침 전임 회장에게 신임 회장이 상패를 전달 중이었다. 머쓱하게 손을 흔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족히 40명은 넘어 보이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36명이라 했다. 눈에

  • 안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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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혼자 놀기

어제 일을 사과하며 맺는 김씨 전화가 얄궂다. 형님도 이젠 혼자 노는 법을 익혀야 하신다며 서먹하게 충언한다. 뭔 말이지? 게임 중간에 걸려온 친구 전화에 얼씨구나 내빼더니 뚱딴지같이 혼자 놀라니. 게임에 져서 기분이 상한 건가? 그래도 그렇지 형님 아우 하는 사이에 그깟 승부가 뭐라고. 2년 세월이 허수하다.70 중반 들어 등산이 힘들어진 뒤로 나는 대신

  • 오세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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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천국은 분홍색일 거야

분홍색 벚꽃이 바람에 날려 춤을 추듯 바닥으로 떨어진다. 벚꽃 나무 아래에서 두 팔을 벌려 꽃비를 맞는다. 은회색 머리칼 위에도 검정색 코트에도 분홍 벚꽃 잎이 나비처럼 내려앉는다. 순간 천국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꽃잎이 떨어진 도로는 분홍빛 천을 깔아 놓은 것 같다. 비가 후드득 내리자 꽃잎들은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며 분홍

  • 박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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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보이지 않아도

난 밖에 나가 노는 아이가 아니었다. 집 안에서 뒹굴며 책 읽기를 좋아했고 체력도 약해서 몸 쓰는 놀이엔 영 소질이 없었다. 여자아이들이 좋아하던 고무줄놀이는 젬병이었고, 술래잡기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든 그다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같이 놀던 아이들이 가끔 ‘깍두기’로 끼워줘서 놀이의 맛은 봤지만, 놀이의 정수를 제대로 체험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 한혜경(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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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4 686호 세월

한 장 남은 달력이 내 눈을 잡는다. 지나온 시간 돌이켜보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나이만 보태지는 세월의 무게를 느낀다. 엊그제만 해도 꿈이 많은 소녀 같은, 그래서 목소리도 쨍쨍하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세월이 내 등 뒤에 올라앉아 나를 짓누르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까, 사는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

  • 박정희(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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