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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의 달밤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은신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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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보러 빌라의 옥상에 올라갔다가 하마터면 처음 보는 여인의 발목을 부러뜨릴 뻔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보니 대뜸 하얗고 둥근 달이 이마 너머 저쪽 하늘 위에 높게 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는 감동과 함께 성큼 맞은편 난간으로 다가갔는데 갑자기 발 아래가 물컹하더니 여인의 외마디 소리가 들려왔다. 난간 아래쪽에 사람이 있는 줄을 모르고 무심히 다가갔다가 그곳 난간의 그림자 안에서 발을 뻗고 앉아 있던 여인의 발목을 밟은 것이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거기에 사람이 앉아 있을 줄이야. 무조건 사과부터 하고 한 걸음 물러나 난간 아래를 살폈다. 두 명이었다. 여인들이었다. 한 여인은 앉아 있다 일어나는 중이었고, 다른 여인은 그 여인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서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별거 아니니까 염려 마세요.”
부축하는 여인이 손사래를 치면서 성큼 일어서는데 어딘가 억양이 이상했다. 취한 것 같았다. 손사래를 치는 여인은 이십 대로 보이는데 검은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얼굴빛이 유난히 희게 보였다. 발목을 밟힌 여인은 사십 대로 보이는데 첫눈에도 늘씬하게 큰 키에 길고 흐트러진 머리채가 어깨 위에서 너풀거리고 있었고, 걸음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계속 옹알거리고 있었다.
“언니, 이제 가자고. 언니, 오늘 취했나 봐. 꼭 잡아, 꼭. 미안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안녀엉.”
안경 낀 여인이 밤하늘의 달을 향해 손을 몇 번 흔들더니 끌다시피 하면서 긴 머리 여인을 부축해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라졌다.
어안이 벙벙해져서 여인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잠깐 내려다보았다. 빈 소주병과 과자 부스러기들이 널려 있었다. 여기서 술을 마신 것 같았다. 다리를 밟은 게 찜찜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잠시뿐, 옥상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면서 가슴이 트여지는 기분이었다.
옥상에는 주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달이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세 살배기 아들과 두 달 전 돌을 지난 딸을 두고 있는데 아내와 다 같이 올 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여름 밤의 옥상은 더없이 상쾌하고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빌라로 이사 온 지 일 년 만인데 사람들이 한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전망 좋기로는 정동수 씨네 집이 최고지. 이사 왔으니 이제 실감할 거요. 옥상도 다른 집하고 달라요. 빌라의 위치 자체가 약간 높은 구릉에 있긴 하지만 옥상에 올라가 보면 거치는 게 없어. 눈앞에 펼쳐진 이 도시 전체가 거기처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은 아마 없을 겁니다.”
진작 와 보고 싶었지만 일 년이나 지난 오늘에야 처음 와 보았다. 정말 도시 전체가 눈 아래에 아기자기하게 펼쳐져 있었다. 처음에는 시선이 고정되지 않았다.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아서 산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 그것이 하나의 시야 속에서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고 친근감이 들고 안도감이 들었다. 눈을 끔벅이지 않아도, 고개를 돌려 보지 않아도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있었고, 손에 잡힐 듯이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동수가 이사 온 동네는 해변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다는 보이지 않는데 해변가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는 아파트 단지보다 이른바 빌라촌이 훨씬 많았다. 옥상에서 보니 아파트 단지보다 훨씬 넓은 면적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빌라촌이었다. 일반 상가나 관청가, 학교, 시장 등은 그 두 주거지 사이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게 확연하게 보였다.
빌라촌에 들어가 보면 집들은 고만고만하게 지어졌는데 각 빌라 건물마다 이름이 붙여져 있었다. 좀 큰 집이라고 하면 주로 큰길가에 보이는데 오피스텔촌이라고 했다. 오피스텔 역시 단지를 이루면서 조성되어 있었고, 각 건물마다 명칭이 붙어 있었다.
정동수가 살고 있는 빌라는 이를테면 이 도시의 변두리에 있었다. 바둑판처럼 구분되어 있는 도심의 외곽 지대였다. 안도의 숨을 내쉬었던 때가 생각났다. 공인중개사를 따라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의 일이었다.
서울에서 대형 마트의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인데 하루는 느닷없이 낯선 전화를 받게 되었다. 살고 있는 전셋집이 팔렸다는 것이었다. 결혼하고 나서 계속 살고 있던 셋집이었다. 자기는 집을 산 사람인데 집을 비워 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이사 갈 날짜가 정해지면 연락해 달라고 했다. 보증금은 그때 돌려드리겠다는 것이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따져 보았지만 이사 비용이라면서 봉투 하나를 내밀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데 뾰족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거기에 집을 알아보려 몇 군데 다녀보고 나서 초조감이 들기까지 했다. 전세금은 일억 삼천인데 그 돈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집이 마땅치 않았다. 하루이틀 지나면서 초조감은 더 심해졌다. 아니, 자신의 모습이 하루가 다르게 쪼그라지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십 평도 안 되는 집이 십오 억, 이십 억이라고 했다. 애 둘에 일억 삼천을 달랑 들고 망연히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 초라하게 보였다.
그러던 중 아내가 주변에서 들었다면서 서울을 조금만 벗어나면 일억 정도에 살 수 있는 집이 수두룩하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무작정 생전 처음 와 보는 동네로 다니면서 집값을 알아보자 틀린 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곳에도 백화점, 대형 마트가 여러 군데 있었다. 무작정 그곳으로 가 이 동네로 이사 오려 하는데 직장이 문제라면서 이력서를 내밀었다. 그를 기다리는 곳은 없었는데 해변으로 가는 옛 마을의 시장에서 모레부터 나올 수 있겠느냐는 연락이 왔다.
이사를 하고 등기도 마쳤다. 십팔 평짜리 구옥인데 집수리를 하고 중고차까지 샀는데도 돈이 남았다. 첫 출근을 하고 집에 오는데 내가 나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여기도 집값은 천차만별이었다. 아파트는 서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빌라는 아직도 빈집이 많다는 걸 알고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정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길도, 건물들도, 사람들도, 이제는 익숙해졌는데 살고 있는 빌라의 옥상에 처음 올라와 본 것이었다.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뭘 하는 여자들일까? 달을 보고 ‘안녀엉’, 하던 목소리가 왠지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장난기가 다분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달은 무심히 높은 하늘 위를 지나고 있었다. 편안한 저녁나절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볼품 있는 광경이었다. 달빛 아래 고요히 가라앉아 있는 세상을 한눈에 바라보게 된 것이 얼마 만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정신을 빼앗긴 채 달빛 속에 잠겨 있는 아파트 단지며 빌라촌, 오피스텔촌들을 감상하듯이 내려다보았다.
거기 어딘가에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서울에서는 그런 느낌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렴풋이나마 자신도 그 도시의 일원이 되어 저만치 어딘가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달빛 속에 있음으로 해서 그 도시는 문득 정감 어린 수묵담채화처럼 느껴졌다. 생동감 있는 그림이었다. 먼 곳에 보이는 산이며 개천이며 수풀, 그 사이로 펼쳐져 있는 마을, 누군가 그 마을에서 홀로 서성이고 있는데 달이 떠 있기 때문이었다. 드넓은 하늘 한가운데로 높이 뜬 채 지나고 있는 달은 참으로 고고하고 정결하게 보였다. 수묵담채화라고 생각하자 달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고, 달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부드러워질 것 같았다.
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마치 예상치 못했던 수확을 거둔 것만 같아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달은 어느새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고개를 젖혀 달을 보고 또 보았다. 그때마다 달빛이 얼굴이며 팔뚝에도 쌓이는 것만 같아 손바닥으로 만져 보기도 했다. 예상치 못했던 수묵담채화 속에서 남자는 홀로 달빛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랬다. 여자의 발목을 밟았다. 그런데도 아무 일이 없었다. 그 사실이 어쩐지 개운치 못한 여운으로 남아 있었다. 사과를 더 정중하게 할 걸 잘못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들이 아무렇지 않은 듯 비틀거리며 가길래 별스럽게 여기지 않은 것인데 엘리베이터 안에서까지 다시금 그 석연치 않은 기분이 살아난 것이었다.

 

동수는 그의 정기 휴일인 화요일마다 도시 외곽으로 뻗어나가 있는 자전거 도로를 달렸다. 자전거 하이킹은 오래전부터 취미였기 때문에 이곳으로 이사 온 후 가장 흡족해한 것이 바로 그 자전거 도로였다. 전기 자전거를 사서 달려보았는데 의외로 시설을 잘 갖추어 놓았다. 해변을 타고 외곽으로 나가다가 주변 섬들을 일주하도록 조성되어 있는데 섬까지 연륙교가 연결되어 있고, 섬들도 모두 일주할 수 있도록 다리와 도로가 구비되어 있었다.
팔월 초순이었다. 여느 때처럼 섬들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는데 집에 거의 왔을 때 사거리 모퉁이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고, 누군가 확성기에 대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들이었다. 작은 연단을 만들어 놓고 사거리 쪽을 향해 하소연하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연단 앞에는 펼침막 하나가 둘러쳐져 있는데 ‘기자회견’이라고 큰 글씨로 적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전세사기 피해자 모임’이라고 적혀 있었다. 여자들은 지나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기도 했는데 한쪽 옆에는 방송국 차도 보이고, 신문사 취재 차량도 보였다. 연단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는 여인은 검은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순간 헬멧 속의 눈길이 움찔거리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했다. 그때 그 여인이었다. 떠오르는 달을 올려다보며 ‘안녀엉’, 했던 바로 그 여인, 그렇다면 연단 아래에서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있는 키 큰 여인은 그때 발목을 밟힌 바로 그 여인이 분명했다.
자전거를 세우고 보도로 올라가 전단지를 받아 보았다. 다리를 내려다보니 아무렇지 않은 듯했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연단의 여인은 거의 울부짖듯이 외치고 있었다.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전세금은 저희의 목숨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걸 떼먹고 도주하다니요. 집은 벌써 경매에 넘어갔고, 집을 비우라는 독촉장이 연이어 옵니다. 저희는 이제 어쩌란 말입니까. 갈 데도 없고, 하소연할 데도 없습니다. 막막한 길에서 세상에 하소연이라도 해야겠다는 심정으로 이렇게 호소합니다. 여러분, 저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기자로 보이는 이들이 연단 아래에 있다가 질문을 던져댔다. 전세사기라는 걸 안 건 언제냐, 중개사는 뭐라고 하더냐, 경매에 넘어가면 국가가 일단 매입했다가 쉽게 융자를 해 준다던데 그 방법은 해 보았는가, 등등 거침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자 여인은 일일이 답변에 응하더니 자살자가 자꾸 늘어나는 현상이 무엇보다 그에 대한 답변으로 어울릴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날 달 밝은 옥상에서 술 취한 채 만난 여인들은 다름 아닌 전세사기 피해자라는 걸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전단지를 보니 바로 길 건너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전체 세대수는 열다섯 가구인데 그중 일곱 가구가 피해자라는 것이었다. 피해자 중엔 학교를 졸업하고 오 년이나 무직으로 지내다가 겨우 직장을 잡은 후 융자를 얻어 전세금을 마련해 들어왔다가 받을 길이 막막하다는 걸 알고 음독 자살한 청년도 있었다.
그도 이사를 올 때 그 오피스텔을 알아본 적이 있었다. 모두 전세로 나와 있어 주변 빌라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가격이 맞지 않아 지금의 빌라를 선택했기 때문에 전단지에 그려진 약도가 어디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었기 때문에 전단지에 그려진 약도를 거쳐서 가 보기로 했다. 위치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오피스텔 창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종이가 먼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전세사기 경매 당장 중단하라’, ‘사기 피해자는 대부분 사회초년생’, ‘이 집이 사기당한 집’ 등등, 붉은 페인트로 휘갈겨 쓴 글씨들이 건물 전체를 뒤덮다시피 하고 있었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눈길을 들어 오피스텔을 올려다보다가 곧 고개를 숙이고 골목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깡통 전세니 갭 투자니 하는 문구들이 붙어 있는 빌라들이 눈길을 끌었다. 이사를 올 때하고는 상황이 딴판이었다.
문득 집을 산 사람이라면서 이사 날짜가 정해지면 연락하라던 낯선 목소리가 떠올랐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어 동으로 서로 집을 찾아 돌아다니던 때가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발목을 밟힌 여인은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 오늘 보니 두 여인은 같이 활동하고 있던데 이곳에서 피해를 당하고 왜 상당히 떨어져 있는 다른 동네 빌라 옥상에까지 와 비틀거리도록 술을 마셔댄 것일까. 근무 중에도 사거리가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외쳐 대던 검은테 안경 여인의 목소리가 이따금 멀어져 가는 소리로 들려온 적이 있었다.

 

그로부터 이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자전거 도로를 달리다가 또 그 여인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섬으로 들어가는 첫 번째 연륙교를 거의 빠져나갔을 때 간단한 음료를 파는 휴게소가 있는데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 바람이 시원한 난간 옆 벤치에 앉았을 때였다. 저만치 앞에 있는 자전거 거치대를 지나친 곳에 웬 여인 둘이 난간에 팔을 얹은 채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는데 이따금 깔깔거리는 소리가 이쪽에까지 들려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바로 그 여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시 고개를 돌려 보았다. 틀림없이 그 여자들이었다.
헬멧을 벗어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키 차이가 확연하게 났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기도 했다. 키 큰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려 보기에 좋았다.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지 이따금 어깨를 툭툭 치기도 하고 고개를 까딱거리기도 하면서 웃어젖혔다.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은 안경 낀 여인이었다. 흰 이를 드러내 놓고 천진하게 웃는데 웃음소리가 듣기에 좋았다. 거리 모퉁이에서 얼굴을 붉히며 악쓰듯이 소리를 내지를 때하고는 확연하게 달랐다.
키 큰 여인은 이따금 난간 아래 바닷물을 내려다보곤 했다. 둘이서 나란히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도 안경 낀 여인이 몸을 돌려 언니라 불렀던 여인의 팔을 흔들면서 혼자 지껄여대도 여인은 물끄러미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여인은 마치 마지못해 대답을 하는 듯이 안경 낀 여인을 보고 몇 마디 대꾸를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두 여인은 사뭇 다정한 자매지간처럼 얼굴을 마주 대하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면서 또 이야기꽃을 피워 나갔다.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사실이 친근감을 자아냈다. 이후 종종 만났는데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발목을 밟은 기억이 되살아나곤 했다. 그러나 아는 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대방도 무심히 지나칠 뿐이었다.

 

그런 여인들을 시장에서도 만난 적이 있었다. 근무를 하면서 보니 시장은 전통적으로 오일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도시가 커지면서 상설 시장이 되었는데 그가 보기에도 규모가 대단한 시장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장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다니는 게 업무의 전부였다. 하루는 옷가게 앞을 지나다가 옷을 고르고 있는 두 여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언뜻 보아도 동생이 언니 옷을 골라 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저것 골라 놓고는 이것이 맘에 드니 입어 보라고 권했다.
“어머, 언니, 정말 섹시하다.”
안경이 호들갑을 떨어댔다. 언니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른 걸 골라 입었다. 그때 보니 동생은 쉴 새 없이 지껄여댔고 언니는 잔잔하게 웃을 뿐 동생 뒤만 졸졸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화장품 가게에도 들렀다. 동생은 이것저것 루즈를 골라 놓고 거울을 보며 자기가 먼저 발라 보더니 언니의 팔을 이끌었다.
“언니, 이거 어때? 내가 늘상 말하잖아. 언니는 돋보이게 하는 요소가 많음에도 그걸 활용할 줄 모른다고. 인생은 어차피 튀어 본 다음에 결정하는 거 아니겠수? 입술! 언니의 그 꽃잎 같은 입술! 그러나 닫고 있으면 차갑게 보이는 입술. 언니, 이거 한 번 발라 봐.”
애교가 뚝뚝 떨어졌다. 그렇지만 언니는 발라 보더니 너나 바르라면서 다른 걸 골랐다. 새빨간 색깔이었다.
두 사람은 액세서리 가게에도 들르더니 귀고리며 목걸이, 팔찌까지 사 들고 이웃해 있는 네일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떨면서 손톱을 다듬었다. 두 사람의 나들이는 동생이 주도하고 있는 듯했다. 언니는 별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더니 네일숍에서는 동생보다 더 적극적이고 말도 많았다.

 

팔월 마지막 화요일 오후였다. 그날 또 두 여인을 만났다. 연륙교를 지나 처음으로 나오는 섬 입구의 휴게소에서였다. 섬으로 들어가는 길은 좌측으로 크게 꺾여져 있어 휴게소에 들러서 보면 지나온 연륙교가 빤히 건너다보였다.
섬을 한 바퀴 돌고 가는 길에 잠시 쉬었다 가기 위해 머물렀다. 그리고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앞으로 쌩하고 달려나가는 두 여인이 있었다. 그들이었다. 앞쪽에서 달려나가는 여인은 안경이었고, 긴 머리카락은 바짝 뒤에 붙어서 갔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보였다. 꼭 화난 사람들 같았다. 평소 같으면 가면서도 그렇게 속도를 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바짝 붙어 말을 주고받으며 갔는데 그날은 전혀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로 접어들면서부터 안경이 갑자기 더 속도를 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달려나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간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다리 중간쯤에 오더니 뒤따라오던 여인이 마치 일부러 그렇게 하기라도 하듯 속도를 줄여나갔다. 그 바람에 안경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그래도 그런데 안경은 속도를 줄이기는커녕 여전히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나가기만 했다.
공연히 긴장감이 들었다. 그래서 속도를 내 뒤를 따라가 보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별다른 일이야 없겠지만 여지껏 보아 온 느낌하고는 전혀 다른 것 같아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달리던 어느 순간이었다. 동수는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전방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의 뒷모습은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있는데 언니가 갑자기 자전거를 세우더니 헬멧을 벗어 아무렇게나 바닥에 내던지고는 느닷없이 난간 위로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손을 들어 말려 보았다.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언니가 잠깐 사이에 몸을 날려 다리 아래로 뛰어내렸기 때문이었다. 밑에는 시퍼런 바닷물이 있을 뿐이었다. 넓고 깊어 보였다. 여인은 그때에도 유별나게 긴 머리채를 허공에 흩날리며 바다로 떨어지더니 일단 잠겼다가 곧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순간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한 남자가 다이빙 자세로 물속으로 뛰어드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수였다. 그는 재난 구조사 자격증을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서울 백화점에 근무할 때 화재 사고를 당한 후에 취득해 놓은 인명 구조사 자격증이었고, 또 하나는 인명 구조사 강의를 듣던 중에 홍보차 나온 수상 구조사들의 권유를 받아들인 후에 취득한 자격증이었다. 그때 알았는데 인명 구조사 자격증은 민간 단체의 자격증이었고, 수상 구조사 자격증은 국가에서 발행하는 자격증이었다.
언니의 뒤를 급하게 쫓아가던 중 갑자기 바다로 뛰어들자 앞뒤 볼 것도 없이 단숨에 바다로 몸을 던진 것이었다. 여인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자꾸 물을 먹었다. 그런 여인의 뒤로 가 목을 끌어안고 뭍으로 헤엄쳐 나갔다. 물살은 의외로 거칠게 흘러갔다. 그러나 동수의 솜씨로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바닥이 차츰 높게 느껴졌다. 여인이 자꾸 목에 두른 팔을 떼어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어림도 없었다. 안 되겠다 싶은지 여인이 무슨 말인가를 자꾸 웅얼거렸다. 처음에는 그 소리가 무슨 소린지 잘 분간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여인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봐요. 그냥 놔줘요. 그냥 놔줘요!”
물 먹은 입으로 뱉어내는 소리는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그냥 놔달라니, 그 말은 죽도록, 물에 빠져 죽도록 놔 달라는 말이라는 걸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갑자기 당혹감이 들었다. 그러면서 온몸에 힘이 솟구치는 듯하더니 여인을 물 밖으로 끌어올렸다.
몹시 숨이 찼다. 여인은 죽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은 멀리서 들리던 구급차의 경적음이 가깝게 들리면서 확실해졌다. 구급차는 두 군데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누군가 신고를 한 듯했다. 다리 아래로 쏜살같이 달려오던 구급차가 멈추더니 구조대원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대원들은 벌써 들것에 여인을 옮기고 있었다. 여인은 눈을 멀거니 뜬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온몸에 힘이 빠졌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허리를 반쯤 일으키자 들것에 실려가던 여인과 처음으로 눈길이 마주쳤다. 그때 여인이 허공을 한 번 움켜쥐는 듯하더니 또렷하게 말했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구한테 하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손짓으로 가리키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또 당혹감이 들었다. 당신이 뭐냐니. 당신이 뭔데 나의 죽음까지 방해하느냐는 소리로 들렸다. 동수는 순간 나오는 대로 불쑥 내뱉었다.
“발목 괜찮아요? 미안했습니다. 그땐.”
알아들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여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먹이고 있었다.
물에 젖은 옷을 보고 아내에게 뭐라 해야 할지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단지 여인이 남기고 간 몇 마디가 갑자기 선명한 색깔로 바로 눈앞에 떨어졌다.
‘이봐요, 그냥 놔 주세요, 당신이 뭔데!’
여지껏 그렇게 선명한 의미를 담고 들려온 말은 없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었다. 그 말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절망의 소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잠깐으로 족했다.

 

이후 여인들은 볼 수가 없었다. 자전거 도로에서 혹 마주치지 않을까, 시장에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가을로 접어들면서까지 한 번도 볼 수가 없었다. 어떨 땐 비슷한 이들이 있어 일부러 가까이 가 보았는데 언제나 아니었다.
여인들의 전세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기자회견은 효과를 좀 보았는지, 무엇보다 구조된 후 별일은 없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또 그날 왜 그랬던 것일까? 그지없이 다정하고 살가운 사이인 줄 알았는데 왜 그날은 동생이 뒤도 안 돌아보고 씽씽 달려만 가고 뒤따라가던 언니가 갑자기 다리 아래로 몸을 던졌던 것일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 몇 번이고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러던 중 10월이 시작되었을 때 일부러 시간을 내 그 동네로 찾아가 보았다. 오피스텔 창문에 나붙었던 구호들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여인들이 산다는 건물을 올려다보자 멀쩡하게 보여도 찬바람이 이는 듯했다. 그 오피스텔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으로 들어가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 창가에 있는 간이 의자에 앉았다. 편의점 업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이 한가로이 팔짱을 낀 채 앉아 있길래 말을 걸어보았다.
“동네가 어수선하더니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괜찮아지긴요. 억울한 사람들 피눈물은 그대로예요.”
“전단지도 돌리던데… 그때 보니까 여자분들이 피해를 많이 본 것 같아요?”
“맞아요. 참 성실한 사람들이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가만 놔두나요. 집값 떨어진다고 창문에 붙어 있던 구호는 물론 동네 입구에 걸려 있던 현수막들도 모두 철거해 버렸죠.”
“집값요?”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으려는데 여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극성스럽다 할 정도로 사방으로 다니면서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고 다니던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고 말았어요.”
“지난번 사거리에서 보니까 자매처럼 보이던데, 한 여자는 안경 끼고, 언니 되는 분은 키가 크고.”
“아, 그분들, 선생들요? 친자매는 아니고, 여기 삼백일 호하고 이호에 살던 사람들이었어요.”
“교원들이었습니까?”
“네. 언니 되시는 분은 어느 여중 선생님이었고요, 동생은 입시 학원 강사였어요. 이사 오면서부터 유난히 친했죠. 다들 친자매가 아니냐고 했으니까요. 그런데 사건이 터지고 나서 직장을 그만두고 계약한 사람을 찾으러 다니기 시작했는데 제가 곁에서 보니까 꼭 실성한 사람들 같더라구요.”
비로소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보니까 계약한 사흘 후에 집주인이 바뀌어졌더라는 것이었다. 삼백일 호와 이호의 집주인은 한 사람이었다. 계약 전에 등기부 등본을 열람하고 아무 이상이 없는 걸로 알았는데 그로부터 사흘 후에 타인에게 넘어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집주인이 이번에는 각각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졌는데도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사 오면서부터 죽이 잘 맞았던 두 여인은 백방으로 원래 주인을 찾아다녔지만 매번 허탕만 치고 말았다. 그때 언니라는 여인이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나같이 멍청한 여자는 당해도 싸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다. 알고 보니 그렇게 당한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언니, 너무 자책하지 마.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 언젠가는 찾을 수 있어. 고발 조치를 단단히 해 두었으니 좋은 소식 올 거야. 힘내, 언니!”
동생의 위로는 눈물겨울 정도였다. 자기 속도 문드러지면서 언니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써 주는 걸 보고 동네 사람들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고 했다.
전세금은 언니가 일 억, 동생이 일 억 이천만 원이었다고 한다. 모두 부모님 손을 빌리지 않고 차근히 모은 돈에 융자금을 더한 것이라는데 특히 언니는 그런저런 어떤 면보다도 세입자로서 멍청하기 그지없는 짓을 했다는 사실에 한없이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나 같은 년은 죽어야 해. 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 눈 멀쩡하게 뜨고 당하다니! 이런 바보, 멍충이! 내가 왜 여지껏 살아 있는 거지? 살아서 뭘 해. 죽는 게 백 번 낫지!”
술 마시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때마다 자학하면서 울부짖곤 했다. 동생은 술을 못 마셨지만 언니를 말리다 같이 마시게 되면서부터 차츰 주량이 늘어났다. 급기야는 낮부터 마실 때가 있었고, 밤이 되면 이웃 동네 빌라촌 옥상으로 가 보는 사람 없어 좋다면서 소줏잔을 기울이곤 했다.
술에 취하면 언니는 또 죽는다는 말을 반복했다. 갈수록 절망감에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술을 마시지 않을 때는 멀쩡하다가도 술만 입에 댔다 하면 내가 왜 여지껏 살아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동생은 그런 언니를 위해 자전거 하이킹을 권유했어요. 보기에 좋았죠. 그런데 하루는 같이 해변으로 나갔다가 언니가 또 죽는다는 말을 하자 동생이 이번에는 지쳤는지 신경질을 부리면서 다투다 돌아오는 도중 언니가 정말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기도했어요. 운 좋게 어떤 남자가 보고 구조해 주었으니 망정이지 큰일 날 뻔했죠. 그날 이후 동생은 백 번 사죄하고 언니네 집으로 이사를 했답니다. 그리고는 이십사 시간 언니 곁에 있었어요. 그런데…”
여인은 말을 뚝 끊더니 눈앞의 허공을 잠시 내려다보고만 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운명은 정말 어쩔 수 없는 건가요?”
“왜요?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죠.”
하루는 한밤중인데 바깥이 시끌짝하길래 나가 봤더니 구급차가 오고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고 했다. 언니 되는 여인이 옥상에서 투신했다는 것이다.
“얼마 되지도 않았어요. 그날은 집에서 둘이 술을 마신 모양입디다. 그리고는 잘 잤는데 언니가 혼자 자다 깨 옥상으로 갔더래요. 작정했던 것 같아요. 기가 막혀. 글쎄, 뛰어내렸는데 거기 엉켜 있던 인터넷 통신선에 걸려 버렸다는 거예요.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동생이 헐레벌떡 오더니 언니를 구출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는 거예요. 그런데 참 기가 막힌 노릇이죠.”
동생은 언니를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언니를 옥상으로 올려놓았을 때 동생은 균형을 잃고 추락하고 말았다고 했다.
“죽었나요?”
여인은 대답 대신 눈물 어린 얼굴을 들고 가만히 있었다. 화장을 하고 와서 언니는 말했다고 한다.
“이제 나 어떡하면 좋으니? 죽고 싶지 않은데 어떡하면 좋지? 동생 이름을 부르며 슬피 우는데 어찌나 안됐던지."
원래 주인은 지난달에 찾았는데 이름을 바꾸고 감옥에 있더라고 했다. 다행히 절반 정도는 되돌려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법원의 결정이 난 후 언니는 고향 부모님 집으로 돌아간다면서 떠나고 말았다. 그녀가 그렇게 떠나고 난 이후에도 동네엔 두 명의 자살자가 나왔다.
자전거 도로는 어느 때보다 주변 풍광이 좋았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바람은 상쾌했고, 숲도 바다도, 살아 있는 듯이 보였다. 그 안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가 못내 아쉬워 하루는 네 식구가 함께 타고 갈 수 있도록 자전거를 개조했다. 부부는 앞뒤에서 페달을 밟고 아이들은 가운데에 태웠다. 그리고는 속도를 줄여 다리도 건너고, 해변도 달렸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누구보다 애들이 즐거워해서 기분이 좋았다.
빌라 옥상에는 오랜만에 올라가 보았다. 달은 더 크고 밝게 떠올랐다. 하늘을 지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도시가 보이는데 어쩐지 어제의 도시가 아닌 듯이 보였다.
이사 오고 나서 처음으로 올라와 봤던 그 자리에 다시 섰다. 문득 아래를 보니 여인들이 남기고 간 흔적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리고 도시는 저만치 아래에서 달빛을 받아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어딘가 생소한 느낌이 들어 정신을 가다듬고 시야를 정리해 보았다. 저 멀리 근무지인 시장도 보이고, 여인들이 살았던 오피스텔도 보였다. 달은 높이 떠 하늘 위를 지나고 있었다. 그 아래에서 자신은 예전보다 더 잘 보이는 것만 같았다. 지난번 도시가 수묵담채화처럼 보일 때보다 조금은 더 잘 보이는 듯했다.
그래도 어딘가 이상해서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자 그래, 바로 이것이로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의 모습이 어딘가 예전과 다르게 보인다 했는데 비로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도시는 수묵담채화가 아니라 추상화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한 폭의 추상화를 바라보고 서 있는데 그곳에 어렴풋이 보이는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아니 어딘가로 가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옥상에서 떨어졌을 때 안경 낀 여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거 놔달라던 여인은 지금쯤 어딜 가고 있을까. 달은 흐르듯이 하늘을 지나고 있었고, 달빛은 오늘도 묻어날 듯이 도시를 덮어 가고 있었다. 추상화는 점차 정체를 드러내듯이 색깔을 바꾸어 가고 있었고, 그럴 때마다 그 모습은 달빛 속에서 숨기지 못하는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였다.
오래도록 빌라의 옥상에 머물러 있다 내려왔다. 추상화를 보여 주고 빌라의 달밤은 조용히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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