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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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과 함께 GP는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 버리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내 몸이 부서져 허공에서 분해되는 그런 비통한 심정이었다. 아, 혈기 왕성했던 젊음이 혼신을 다해 열정을 쏟아 몰입했던 곳 250 GP.
오래되어 낡은 노트 속에는 젊었던 시절, 전쟁으로 사라져 흔적만 남은 아무도 없는 외가 마을을 가보고 느끼게 된 얘기들이 소상히 기록돼 있었다. 이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은 아버지의 묵은 일기록을 들춰보게 된 계기는 6·25 전쟁 당시의 노래를 듣게 됨으로 해서였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내 사춘기 시절 어느 봄, 아버지를 따라 아버지가 태어났다는 아버지의 고향 외가 동네를 가 본 적이 있다. 남북의 갈림선이 두 번 바뀐 경계선인 삼팔선과 휴전선. 전쟁 전에는 이북이었다가 전쟁 후 경계가 휴전선으로 변경되면서 지금은 이남이 된 중부 삼팔선 접경지인데 그때가 아마 중학교 2학년 때쯤인가 되는 봄이었다. 산골짜기 해 바로 드는 곳, 산등성이와 언덕마다에 진달래가 피었다가 막 지고 철쭉과 조팝꽃이 흐드러질 무렵이었다.
길게 파여 있는 교통호와 참호 등의 형태가 아직도 현재형이듯 전장의 흔적이 여실한 삼팔선 지역이었다. 골짜기 사이에 자리한 자그마한 분지형의 마을터. 치열한 전투와 포격으로 마을이 사라진 집자리의 터전들은 밭으로 변해 있었고 군데군데 남은 집터 자리의 복숭아, 살구나무들만 포탄에 찢기운 상처를 보듬은 채 그래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 모양을 보자 전쟁이 훑고 지나간 참경이, 전쟁 전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그런 산야의 모습이 아련하지만 왠지 애처롭게 내 가슴 한편에 은은하게 살아나 그려지는 것이었다. 사라지기 이전의 풍요로운 마을 풍경이 눈에 삼삼 어려 오는 아련함이 중학생이던 당시 나의 눈에 비친 심안(心眼)의 풍경이었다.
아버지의 일기록에도 폐허가 되어 버린 고향의 봄이 은은히 수채화처럼 짧지 않게 표현돼 그려져 있는 부분이 있었다. 사이사이 보이는 묘사성 짙은 표현에서 얼마나 으깨지듯 박살난 고향이 애틋하고 애처롭고 안타까운 심정인 건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버지를 따라가 느낀 아버지의 고향이 그러할진대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아버지는 진정 어떠했을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당시 삼팔선의 봄이 한눈에 좌악 과거와 현재가 펼쳐지듯 동시에 그려지는 것이었다.
38선으로 남북 경계가 그어진 것은 해방 직후 강대국의 손길로 남북이 갈리게 되면서부터였다. 미국이 대일전(對日戰)을 치열하게 치르면서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자국의 피해를 줄여보고자 소련에 대일전 참전을 요청하자 소련이 이를 수용했는데, 직바로 개입하지 않고 뭉그적거리다가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미국의 원폭이 투하되고 연이어 9일에 나가사키에 원폭이 두 번째로 투하한 그날 8월 9일에야 형식적인 막판 대일 선전이랍시고 포고한 후 만주와 한반도 방면으로 진격한 것이었다. 적지 않은 만주 땅의 주둔 일본군이라 하나 패색이 짙은 실정을 인지한 대군의 무리라도 기가 죽을 대로 죽어 진격이랄 것도 없는 거저먹기식 소련군의 진군이었다. 소련이 그렇게 8월 15일까지 일본 패망 직전까지 한반도로 남하하게 됨에 이에 다급해진 미국이 38선을 기준으로 이상 더 내려오지 말 것을 제안하게 된다. 소련이 한반도 전체를 장악할 것을 염려해서 내린 미국의 결정이 38도선. 이것이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면서 갈린 한반도의 분할선이었다.
결국 소련이 이를 수용하면서 38도선을 기준으로 한 한반도 분할 점령이 결정되어지게 되며 한반도 분단의 불행한 시작이 되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인 9월 9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남쪽에는 미군정, 북쪽에는 소련군정이 실시된 것이었다. 이렇듯 사소한 변화가 미치는 영향은 크다. 사소한 영향이 미치는 변화 또한 크다. 같은 말 같지만 이 말에는 미세하고 미묘한 차이가 있다.
대일전으로 심한 곤욕을 치르고 피해를 본 미국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소련이 막판에 거저먹기로 개입한 한반도의 운명이 남북 둘로 나뉘게 된 단초가 된 것이다. 당시 원폭을 했든 어쨌든 일본을 항복시킨 역할을 한 건 단연 미국이었고 소련이 당시 하나마나한 개입을 않았더라면 독재로 노예화한 북한의 인민들이 아사하는 지금의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테다.
그러나 당시 상승기로에 있던 공산 세력을 확산시키겠다는 스탈린과 모택동을 등에 업은 김일성의 속내는 그 여세를 몰아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겠다는 욕심으로 스탈린과 모택동을 부추긴 사심이 민족의 아비규환으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이 사라지듯 한반도의 현실이 바로 이러한 배경으로 6월 25일 기습 남침이 일어나게 된다.
오늘 오후 다섯 시, 군 생활 동료 선후배가 분기마다 한 번씩 모이는 날. 언제나 그랬다. 오늘 만남 역시도 나라의 현재 안위에 대해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얘기하는 우국지정의 자리가 될 것이었다. 분기별로 만나 모이는 우리 수색대대 GP(Guard Post) 요원들의 모임은 타 부대 출신들과는 다른 색깔의 짙은 끈끈함이 있다. 하나밖에 없는 달랑의 생명줄이 언제든 쉬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강박감을 늘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그런 생활의 연속이 우리끼리만 통할 수 있는 동병상련이었다. 그러면서 ‘혹 내가 잘못되더라도…’ 하고 자위할 수 있었던 마음 저부에는 내가 이런 초극적 생활을 함으로써 영위하고 존재할 수 있다는 내 부모 내 형제의 안녕이었다. 어느 군대 군인이고 애국과 가족 사랑에 마음이 없을 리 없지만 특수 환경에 있는 GP 수색대원들의 처지는 더 짙을 수밖에 없는 그런 특이함이 있다.
“우리 젊음의 근원지가 무참히 폭파되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이미 패배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뭣이냐?”
그랬다. 비유가 아니라 이 병장의 이 말에 우리 모두는 공감하면서 우리 대원 모두는 그렇게 동일한 생각이었다. 군 쫄병으로 복무하던 비무장지대의 감시초소인 판문점 인근 사단 GP. 저편 멀리 보이는 한쪽으로 마을 자리와 논밭 등 저수지의 흔적이 역력하고 하천과 개울이 있는 곳. 맞바로 보이는 산야와 계곡 건너 저편 산 능선 봉우리에 우리 GP와 같은 역할의 북의 민경초소가 마주 보듯 하고 있었다. 남쪽 GP도 북쪽 민경초소도 크기와 모양새만 차이가 있을 뿐 위치와 규모, 그 역할은 다 거기서 거기일 터였다.
수색대대로 차출, 배속 받고 적막하게 고적한, 그 무인지경의 곳으로 처음 투입되었을 때였다. ‘졸면 죽는다!’는 벽에 붙은 표어가 섬뜩하고 긴장되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첫 투입지임에도, <삼팔선의 봄>으로 하여 아버지의 어릴 적 고향이던 삼팔선 접경지 외가가 투입 지역 GP와 오버랩되어 휘돌아드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쩜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곳도 전쟁 전에는 푸근한 마을이고 이 사람들의 고향이었을 것이다. 넓지 않은 국토에 바투 붙어 있는 땅들이 비슷비슷할 수밖에 없는 지형. 여기가 저기, 저기가 여기, 그 땅이 그 땅이 아닐 것인가.
남쪽은 ‘민정경찰’, 북한은 ‘민경’이나 민경대란 이름으로 불리우며 우리는 ‘민정경찰’ ‘헌병’이라는 표식을 부착하고 있었다. 남방한계선을 담당하는 GOP(General Out Post) 통문을 통해 입문(入門)하게 되는 DMZ(Demilitarized Zone) 속 깊숙이 위치한 GP는 GOP에 비해 언론 등 민간에 노출이 거의 없는 2.5m의 높이 위에 원형 철조망이 얹힌 3중 철책으로 에워싸인 외딴 특정 생사초월의 관측소이다.
GP의 임무는 전체적인 DMZ 감시로 적 병력 움직임을 통해 도발 징후 감지와 수색 상황 지원 기타 사항 감지 등, 대원들의 임무는 산 정상에 GP가 위치하기 때문에 무게 나가는 방탄복과 각종 탄약 수류탄 대검 등을 착용하고 DMZ 수색과 GP를 오가는 일은 상당히 고된 편이다.
우리의 남쪽 GP는 60여 곳, 북의 민경초소는 160여 곳이 넘는다는 북측이 남측보다 세 배 정도는 된다는 비문의 전언이 공공연한 사실임에도 문 정권이 들어서면서 9·19 남북 군사합의로 비무장지대 감시초소를 남북 공히 똑같이 양쪽 초소를 없애기로 하였다. 1:1 철거로 계산하면 우리는 모두 없어진다고 가정하면 북쪽은 100여 곳이 그래도 남아 건재하는 수치가 된다. 겉으로야 평화 지향 운운이지만, 우리만 스스로 무장 해제하는 꼴. 지뢰 제거와 철조망 철거 등 늘려도 넉넉지 않을 일부의 전방 부대까지 해체되는 상태에서 이제 북한군이 바로 휴전선을 넘어와도 방비 없는 상황이 된 것이 아니냐는 GP 전우들의 이구동성이었다. 곳곳이 허점투성이인 9·19 군사합의. 치밀한 대남 공작에 말려 넘어간 것인지, 알고도 대남 공작에 스스로 숙어든 것인지. 유불리를 따지자면 어쨌거나 저쪽이 유리하고 우리 쪽이 불리한 것만은 삼척동자도 헤아릴 일인 것이다. 여기에 지켜지지 않는 약속. 한쪽은 지키지 않는데 한쪽만 지키는 약속이라면 그 어디 합의이고 약속인가. 양손 묶인 항복이지.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전방의 대북 방송 시설을 철거한 김대중 정부였다. 걸핏하면 일을 내는 북의 정전 협정 위반으로 박근혜 정부 때 다시 재설치해 실시했던 대북 방송을 다시 문 정권 때 없애 버린다. 속내와 실체를 그럴듯한 너울로 포장한 용공 정권이어서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아주 허물어뜨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은 영 찝찝할 수밖에 없었다. 북쪽은 핵무장으로 무력을 강화해 가는 판인데 남쪽만 무장 해제의 길로 들어선 꼴이 아니고 뭣이냐고 비분강개하는 전우들. 북이 주적이 아니라면? ○○사단 250 GP 출신 수색대 동료들은 우리의 주적이 북한이 아니면 누구냐고. 우리가 왜, 무슨 이유로 거기 있었던 것이며, 왜 우리의 선배들이 저들에 의해 다치고 죽어야 했느냐고….
“허울 좋은 궤변이야, 우리만 빗장을 풀어놓은 셈이지, 개새끼들!”
소대장이었던 김 중위가 말했다. 그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건건이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먼저 일을 벌이는 쪽은 늘 북측이었다. GP마다 괴담들이 전해지고 있는 이유는 그만하거나 그 비슷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인기뿐만이 아니라 미사일 도발을 포함하여 사실상 9·19 합의 위반이 일상화된 비정상적인 날의 지속이었다. 휴전 이래로 저들에 의해 우리 국민과 전우가 납치·살해당하고 피해당해 왔다는 건 국민 모두 인지하고들 있다.
9·19 군사합의도 명색만이었지 저쪽은 무시하는 판에 우리만 지키고 있는 일방적인 항복 같은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사실이 아닌가? 군사 지식이 없는 누구라도 전방 상태를 슬쩍 보기만 하여도 엄중한 실정임을 알 수 있는데 북쪽 요구를 들어주면서 저들에게 부족한 것들을 한껏 안기고 그쪽 말을 받아주고 달랜다고 평화가 유지된다고? 불량배에게 선심을 쓴다고 착한 존재가 되어 상대를 보살피고 보호한다고? 그렇게 유도해 국민의 인식을 바꾸려는 용공적 정부의 홍보가 대세를 이루는 판이라고 했다. 민주주의만 표기되면 자유가 살아 있는 것이라면, 북한도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데 왜 자유 없는 독재로 살벌한 노예생활이 지속되는가. 현실은 이와 같은데 여전히 종북으로 경도된 인사들은 북한 인권에는 아무런 이상 없다고 말한다. 저쪽의 요구가 있었는지 탈북해 온 젊은이들을 강제 북송으로 처형당하게도 하였다. 이것이 자유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가진 국격의 인도주의 태도인가. 같은 패거리 정신이 아니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수색대원의 동일감이었다.
일제강점기 마르크스의 학설이 대세를 이루던 시절, 그 저작물과 이론이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어 요원의 불길처럼 확산해 갈 즈음, 마르크시즘의 공산당 선언이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실현되고 레닌이 집권한 뒤 대다수 지식인들까지 이에 호응해 그 이슈에 동의 내지는 동참하는 분위기가 주류를 이루는 때였다.
레닌 사후, 스탈린으로 이어진 볼세비키 공산 혁명의 물결은 동구 유럽 등 모택동으로 연결되고 그 세력을 확대시키고자 김일성의 마수까지 더해져 한반도까지 뻗치게 된 것이었다.
모든 민중(인민 = 국민 - 프롤레타리아)이 주인이 되어 당당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데 찬성치 않을 사람 뉘 있으랴. 오로지 선전·선동만을 목적으로, ‘…모든 지배 계급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 떨게 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밖에 없으며 얻는 것은 온 세상이다. 전 세계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캐치프레이즈. 그러나 그것은 거짓 선동이었다. 또 다른 판 뒤집기일 뿐이었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강설(講說)’은 계급 투쟁의 필요성을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학설에 대해 적극 반대했다. 그들은 이러한 이론을 내세워 마르크스 일당의 이론은 단지 현존하는 계급들의 역할을 뒤바꿔 놓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일당의 이론은 단지 부르주아 계급을 파멸시키고 노예화하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이었다. 그들을 선동한 주도 그룹들. 선동당한 인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었으면 무엇을 얻었으며 과연 대접받는 세상이 되어졌는가. 아니었다. 또 다르게 변질되어 공고해진 더 강력한 판 뒤집기 계급 사회가 도래했을 뿐이었다. 격장의 북한이 보여주는 결과처럼 반대 세상은 가능할 수 있어도, 사람 각자마다 능력이 다른 터에 모두가 차등 없이 잘 살 수 있다는 절대 논리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 것인가.
마르크시즘이 유행처럼 확산돼 불일 듯할 때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와 시대적 환경, 할아버지 세대가 오류·왜곡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었음을 후대의 위치에 선 우리가 늦은 대로 이제는 납득할 수 있지만, 당시 볼세비키 혁명으로 확산일로의 공산화로 융성했던 동구 유럽의 공산 국가들을 봐도 그 상승 기류에 묻혀 갈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선대 조부들이었다. 심지어는 공산주의 운동이 일제까지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일 것으로도 보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융성으로 활기 있게 이어질 듯한 동구 유럽의 공산 국가들이 결국 멸망한 이유도 공산당 지배 계급의 지배 권력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공정하지 않고 부패함으로써 더 이상 절대적 지위를 누릴 수 없게 되어 붕괴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부르짖음은 성사될 수 없는 허황된 모순이고 왜곡이었다. 마르크스는 진정 이러한 이율배반적 모순을 정말 모르고 있었을까? 이들은 민중은 속기 쉬운 존재로 보았다. 속기 쉽다는 것은 속이기 또한 쉽다는 얘기가 아닌가. 바로 여기에 민중을 속여 업어치기한 데마고기의 요소가 있었음을 마르크스도 분명 인지하고 있었을 듯하다. 새로운 집단의 변질된 판 갈아엎기 권력의 장악일 것임을….
‘자기모순으로 절대 망할 수밖에 없다’던 자본주의는 자기모순에 의한 파국을 맞이하기는커녕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었으며, 공산주의 이념은 거꾸로 진부하기 짝이 없는 구시대의 유물로 역사의 뒤편으로 퇴장하고 만 것이다.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존속하는 법. 자본주의에도 모순이 있어 이를 꾸준히 개선해 나가야 할 과제를 안고 있지만, 자유가 전무하고 자유가 존속치 않는 곳에 절대 개선의 의지는 1도 존재하지 않는 법이며, 독재만이 군림하는 곳에는 개선의 여지가 절대 불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그만치의 자유라도 숨 쉴 수 있어야 개선과 변화의 여지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유지될 수 있는 자유 민주주의인 것이다.
저 사선을 걸터넘는 탈북자들을 보자. 저들의 말대로라면, 인민 민주주의 지상낙원, 부루주아가 타파된 공정하고 계층 없는 바람직한 공산 세계가 도래하였는데 왜 삼순구식(三旬九食)도 못하는 아사자가 속출하는 세상이 되어졌는가. 살기 좋고 자유로운데 왜 목숨을 저승 문턱에 걸어두고 탈출하는가. 백두 혈통이라는 한 일가의 존립만을 위한 노예로 전락한 인민들. 결론은 공정하지 못하고 더욱 강건한 계급 체계가 독재로 지속되어 부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인 것이다.
북한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적의 침투·매복 움직임을 찾아내 방지하는 임무를 맡으며 투입 기간 동안 GP권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 곳. 24시간 북한군 동태를 감시하는 최전방 경계 초소인 GP의 사계는 경외적인 아름다움과 신이함이 속경(俗境)을 초월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자연의 선경(仙境)으로 그렇게 경이로울 수 없는 곳. 살벌한 요소만 제외된다면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천혜의 무위자연이다.
산야의 화려한 꽃잔치가 시작되고 푸르름이 꿈틀거리는 봄엔 속세에서의 푸르름과는 또 다른 자연의 생동감이 넘치고 여기 빨려드는 강하고 짙은 초목의 향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여름, 모기들의 극성은 극히 지엽적이다. 성하의 철엔 매미들의 기세 찬 울음 또한 속세와 다르고 천둥, 번개, 비바람이 교차하는 변화무쌍하고도 위대한 자연의 경외감. 더할 수 없는 운치의 아름다운 천지 홍엽의 가을엔 상상을 뛰어넘는 신이함이 있고, 겨울엔 극지방의 한복판인 듯 고립된 속에서의 요람(搖籃)이 되어 눈앞이 안 보이게 몰아치는 눈보라가 존재처 초소와 초병들을 선경 속으로 몰입시킨다. 그렇게 아름답기 그지없는 무위자연 천혜의 도원인 것이다. DMZ 안의 사계는 고요하고 아름답고 무섭도록 신이하기만 하다. DMZ의 무한경(無限景)은 우주에 혼자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드넓은 우주를 유영(遊泳)한다. 태양과 달과 월광(月光)이 달리 보이고 창천의 무수한 별들이 바로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면 초병의 심신은 천국을 노닌다.
여름 철새가 어김없이 날아오는 4월, 겨울 철새와의 교대의식처럼 이른 여름 철새의 방문은 막 겨울 마지막 철새가 이동하면서 여름 철새와 바톤 터치를 하는 것이다. 이 색다른 바톤 터치의 광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 철새는 낮과 밤하늘을 그린다. 낮보다는 달이 휘영청한 밤, 하얗게 눈이 내린 설원 위를 그리듯 나는 철새들의 정경 역시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극과 극의 현장으로 변하기도 하는 DMZ의 숙명도 있다. MDL(Military Demarcation Line)을 경계로 오고 가며 벌어지는 상상 초월의 여러 사건들…. 추진 철책 등 수색로 탐지 점검 차 통문을 출입하면서 주변 탐색을 하다 보면 둥지를 튼 집에 알이나 새끼를 품고 있는 오색영롱한 새들도 발견하게 된다. 멧돼지, 고라니, 오소리, 너구리, 독수리 등 자연 야생의 생물들의 천국이기도 하지만, 들어갈 수 없는 지뢰 지역 안으로 보이는 녹슨 철모나 불발 수류탄과 총탄들이 보이고 인골의 일부인 듯 사체가 연상되는 장면에는 모골이 경련한다. 더러는 평온하게 자연 속에서 살아가던 노루나 멧돼지도 지뢰 폭발로 죽어간 사체도 보게 된다.
17시 30분. 열댓 명의 전우들이 모였다. 구국 성토의 장이 되어 갑론을박 정치인들을 메다치고 난도질하는 시간이라야만 그래도 그나마 카타르시스가 되는 것인가. 용공적인 정치꾼들이 왜 이리 많은 거냐고. 노골적인 친북 용공 발언이 입에 밴 존재들이라면 제 자식들을 그쪽으로 유학을 보내도 보내야지 죄다 자유주의 국가인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로 보내는 이유가 뭣이냐. 말 따로, 행동 따로 가면의 너울을 뒤집어쓴 모순이자 이율배반이 아니냐.
지놈들은 국민의 혈세로 자유 대한민국의 혜택을 실컷 누리면서 온갖 구실을 갖다 붙이고 휴머니즘을 포장하여 저쪽을 편드는 속내가 진정 무엇이냐? 친형제끼리도 남남이듯 쌈박질하는 세태에 같은 민족이니 겨레니 하며 미몽의 국민을 감성팔이로 선동하여 어떻게든 정권 탈취가 목적인 저들. 그래서 지배와 피지배 계급을 콘크리트화하여 영원세세 지들 세상을 만들어 유지하는 게 목적인 것이라고 토하듯 외치는 전우들이었다. 영원히 독재 권력을 행사하는 북한 공산체제의 권력 유지 백두혈통을 벤치마킹하려고 하는 것뿐이라고….
이런 와중에 주의를 환기하듯 한 전우가 당시의 대대장 현재 소식을 전했다. 당시 우리의 대대장이던 최 중령의 사망 소식이었다. 결국은 그 참사의 휴유로 세상과 하직한 것이었다. 꽤 오래전에 당시 사고의 후유로 절단한 부위를 다시 재절단해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당시의 사건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관심 화제로 변조된 적이 있었다.
당시의 대대장이 후임자인 대대장에게 DMZ에서 수색 정찰 임무를 인수인계하던 중 후임인 신임 대대장이 지뢰를 밟고 쓰러지자 부하 장병들을 물리친 후 대대장 혼자 구출차 접근했다가 다른 지뢰가 터져 두 다리가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사건이었다. 신임 대대장이 부임하므로 이제는 전임이 될 대대장과 임무 인계인수 차 가장 핵심이 되는 GP와 그 주변을 점검 파악 차 진입한 날이었다. GP 통문을 나서 수색로를 탐색하던 두 대대장을 보위하는 분대 단위 작전 대원들이 동행, 사주 경계에 들어가게 되고 8명으로 조직된 팀장인 지휘조 4인과 선두의 수색조로 나뉘어 20~30kg의 무거운 전투 장비와 휴대 장비를 착용하는데 선두 경계를 담당하는 수색조의 조장은 지뢰 탐지기를 휴대한다.
짬밥 찌꺼기 등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통문 밖 50여 미터 지점을 돌아갈 즈음, 짬밥 쓰레기터를 들쑤시던 멧돼지와 까막까치들이 냅다 흩어지는 지점을 돌아 통상 살피고 다닌 추진 철책 수색로를 재점검하듯 돌아볼 때였다. 여타 지역을 다 돌아 점검하고 전임 대대장이 주변과 전방 민경 초소를 가리키며 상황을 설명하며 몇 걸음을 옆으로 내디딜 때였다. 늘상의 수색조 순찰 코스였다. 지뢰 탐지가 그다지 필요치 않은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갑자기 폭발음이 일었다. 폭발음과 함께 두 대대장이 몸이 팽개쳐지듯 공중으로 뜨는 듯하더니 그냥 바닥으로 퍼더버리는 것이었다. 대형 사고였다. 무전병이 사고 발생 보고를 대대와 중대 본부 등 지피와 송수신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머지 대원들이 두 대대장을 수습기 위해 조금은 떨어져 있는 사건 지점으로 포복 접근 중이었고… 두 다리가 절단되어 살가죽만 붙어 덜렁거리는 전임 대대장은 고통을 악물은 채 피투성이 되어 있었고, 먼저 쓰러진 후임 대대장은 특별한 외상은 보이지 않으나 불성인사 혼절 상태였다. 담가를 든 대원들이 시급히 도착하고 의무병을 도와 응급 압박 손을 써 후송 절차에 들어가고. GP에 들어와 있던 스리쿼터가 급히 발동을 걸어 GOP로 향하고 GOP에서 헬기로 다시 이송되었었다.
후임 대대장은 인공호흡 등 제반 의료 기능으로 특별한 후유 없이 기적같이 소생하였으나 전임 대대장은 두 다리와 한쪽 눈을 실명하는 큰 참사를 당했다. 그 전임 대대장이 절단 부위가 의족의 사용으로 이상하게 짓물러 상처가 지고는 그 자리가 덧나 부패가 깊어져 다시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떠한 사고도 감내해야 할 정도로 지뢰 폭발 위험에 항상 노출돼 있으므로 한 발 한 발 걸음이 조심스럽다. 사고 지역은 언제 어느 사이에 북측이 감쪽같이 침투해 매설해 놓은 북측의 흉계였던 것이다.
GP 벽에 붙어 있는 ‘졸면 죽는다!’는 표어를 보게 된 GP 첫 투입 날, 신임들의 정신 교육상 강조하느라 한 측면도 있었겠지만 마음 깊이 실감되어지는 사실로 다가왔다. 목이 잘리고 귀가 잘리고… 통째로 GP가 폭파 사살되고 불탔다는 얘기가 허설만이 아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졸아서만 죽는 게 아니었다.
서부 전선 우리 지역에서 우리 장병들이 수색 작전을 하던 중 목함 지뢰에 의해 우리 군 서너 명이 크게 다치기도 하였다. 허설 같은 전설의 또 한 줄기는 한 아군 GP에서 일어난 사건. 한 신참 미적응 쫄병이 내무반 취침 중 대원들을 무차별 사격으로 GP가 졸지에 박살 난 사건 보도를 우리 대원들은 믿지 않았다. 북한 무장조의 습격 사건으로 우리는 종결지었다. 졸지 않아도 이런 비인간적인 악랄한 짓으로 다치고 죽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 DMZ 내 GP의 또 다른 참경인 것이다.
어느 날 희붐한 새벽이었다. 소하천 부근 시계에 수풀이 움직이며 꼬물거리는 물체가 감지되었다. 쌍안경으로도 세심히 관찰한 결과 짐승이 아닌 사람인 듯하였다. 초병은 겨냥한 K-2 총구와 함께 설치된 크레모아 격발기에 손이 가고 있었다. GP 전체에 비상이 걸리면서 전 초병에게도 전달되었다. 만약을 대비하여 비상 순찰조가 대기한 가운데 최초 발견 초소의 초병은 물체를 계속 예의 주시만 하고 있었다. 숨죽인 관측.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물체는 사람이 확실하였다. 귀순병으로도 짐작되었지만 선입견은 금물,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관측 지점에서 통문이 있는 뒤로 돌아가려는 그 물체의 동작이 새삼스러웠다. 드디어 비상 순찰조가 통문을 열었다.
비상 순찰조가 통문을 돌아 3선 철책 북방으로 돌아갈 즈음, 기진한 어린 병사 하나가 고꾸라지듯 엎어져 옷이 찢기고 가시덤불에 긁혀 피 묻힌 모습으로 초라하게 항복하는 자세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귀순병입니까?”
“……?”
겁에 질린 듯 멍한 눈망울이 처연하였다.
“북에서 왔습니까?”
“…네, 저쪽에서 왔시오!”
풀 죽고 겁먹은, 죽어가는 목소리였다. 그가 소지한 물품은 총 한 자루가 전부로, 총 끝에 매단, 때 묻어 검다시피 한 한 오라기 헝겊이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배고파 왔시오….”
희멀건 눈에 힘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깡말라 더 작아 보이는 소년병의 총구에 매달린 한 오라기 때 묻은 흰 헝겊이 소년병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애처롭게 비쳤다.
병원 영안실. 적지 않은 조문객들 속에 당시 폭발로 혼절했었던 신임 대대장의 모습도 있었다. 전역한 그와 주욱 연결되어 온 중대장과 소대장, 그리고 우리 대원들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준 사망 대대장이었다.
휴전선이나 삼팔선이나 금단의 선으로 볼 때 똑같은 그 선이 그 선, 영안실에는 영화의 배경 음악처럼 <삼팔선의 봄>이 은은하게 경음악으로 들릴 듯 말 듯 깔려 흐르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그리워하던 삼팔선의 봄이, 그 노래가 나의 심저(心底)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