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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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저녁때, 막 누나가 차려 준 밥을 먹고 있는데 식탁에 던져 둔 핸드폰이 울린다. 아니다. 핸드폰 벨소리처럼 귀에서 울리는 속삭임이다. 숟갈을 입에서 떼기 무섭게 지상은 얼른 귀를 쫑긋 세운다.
“오빠?”
“지하?”
“뭐 해, 빨랑 오잖고?”
“밥 먹고 있는 참이야.”
“밥이 급해? 나보다도?”
“아니, 그래.”
황급히 숟갈을 놓은 지상은 지하의 말대로 빨리 달려갈 양으로 거실로 나온다.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질겁한 누나의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당긴다.
“다 저녁때, 어딜 가려고?”
“전화가 왔어요. 지하가 불러요.”
“지하가?”
깜짝 놀란 누나가 말릴 새도 없이 지상은 현관문을 박차고 어둑한 한길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누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지하는 산 사람이 아니다. 죽은 지 달포가 지났다.
일주일 전이었을까. 한밤중 자다 말고 거실로 뛰어나온 동생 지상이 미친 듯 울부짖었다. 실성한 것처럼 죽은 지하를 마구 불러 대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 뒤부터인 듯했다. 누나는 한시도 동생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떻게 하면 동생의 그 깊은 응어리를 풀어 줄까, 자나 깨나 그 생각뿐이었다.
밖으로 뛰쳐나온 지상의 발길은 이상하리만치 훨훨 날았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새 지하가 기다리고 있는 지하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신들린 사람처럼, 마치 시간 여행¹을 즐기려는 순례자처럼.
지하의 집은 청와대 뒤쪽 스카이웨이를 돌아, 정릉으로 넘어오는 아리랑고개와 맞물린 지점의 가파른 산비탈 길가에 있다. 낮에는 사람이 살지 않은 터라 폐가처럼 을씨년스럽다. 하지만 일단 해가 지고 캄캄한 밤 속에 묻히면 폐가는 낮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활기가 넘친다. 적어도 지상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어둑한 밤, 엷은 구름 속에 가려진 하현달이 고즈넉하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기다리던 지하가 지상의 목에 와락 매달렸다.
“오빠!”
“그렇게 보고 싶었어?”
“꼭 내 입으로 말해야 해, 오빠?”
“날아왔잖아.”
“아냐, 넘 느려.”
“잠깐, 눈감았다 떠보니 여기던데!”
“더 빠르게 나는 법을 알아봐야겠어, 오빠. 하여간 얼른 방에 들어가자. 새벽닭이 울 때까지 그렇게 긴 밤은 아니잖아, 오빠.”
“성질 급하긴.”
지상은 망설이지 않고 번쩍, 지하를 안아 들고 열려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방 안에는 침대가 없다. 맨방바닥에 침구만 깔려 있다. 지상은 얼른 침구 위에 지하를 내려놓고 옷을 벗기 시작한다. 지하도 침구 위에 앉은 채 주섬주섬 걸친 옷들을 하나둘 벗어 던진다.
살아 있을 때처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알몸은 어느새 하나가 되어 뒹군다. 비발디의 사랑의 세레나데 리듬을 타듯 감미로운 숨소리가 방 안에 오롯이 번지고 있다.
한참을 씩씩대던 지하는 그날 밤처럼 지상의 배 위를 올라타려 한다.
“안 돼, 지하!”
깜짝 놀란 지상은 얼른 자기 배 위에 오르는 지하를 밀쳐 낸다. 그날 밤의 악몽을 두 번 다시 그는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달포 전 지하가 이승을 떠나던 날 밤을 지상은 잊을 수 없다. 지상과 찐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즐기다 지하가 숨을 거둔 때문이다. 바로 이 방, 이 침구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두 사람이 뜨겁게, 뜨겁게 몸을 달구다 갑자기 지하가 지상의 배 밑에서 배 위로 올라간 게 화근이었다. 맨날 배 밑에서 깔려 있다 보니 갑자기 오빠처럼 찍어 누르는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요, 오빠. 눈 깜짝할 새 배 밑을 빠져나온 지하는 그의 배 위를 날름 올라타지 않았던가.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지상의 배 위에서 격렬한 몸놀림을 하던 지하는 어느 순간 딱, 몸놀림을 멈추더니 가쁜 비명을 내질렀다.
“아, 내가, 내기 왜 이래, 오빠? 숨이, 숨이….”
미처 말끝도 채 못 맺은 지하는 지상의 배 위에서 그만 굳어 버렸다. 그길로 홀연히, 흔히 말하는 복상사(腹上死)로 지하는 영원히 이승을 등졌다.
지하를 갑작스럽게 잃은 충격 때문일까.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몸져 누운 지상은 몇 날 며칠을 일어나지 못했다. 영원히 일어나지 않고 그는 그 길로 그녀의 뒤를 따르고 싶었다.
지상이 일어나지 못하자 누나는 득달같이 무당을 찾아간다. 조실부모하고 아들처럼 애지중지 키운 동생이다. 잠자리 한 여자가 죽은 뒤 동생은 마냥 잠만 퍼 자는 게 불안하다. 처녀 귀신에 씌워 동생마저 어찌 되는 건 아닌지, 마음이 조여 견딜 재간이 없었다.
“계속 잠만 자는 동생 때문에 왔구먼.”
무당은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선 누나를 보자 댓바람에 정표를 찌른다. 누나와 무녀는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살았다. 나이 들어 어느 날 갑자기 친구가 신병(神病)에 걸려 방방 뛸 때도, 언제나 그 옆을 지켜 주리만치 살갑게 지낸 누나는 친구가 무녀가 된 뒤에도 변함없는 우정을 나눠 오고 있다.
“우리 동생, 그러다 영영 ….”
“아녀, 곧 일어날 거야.”
“참말로?”
“흠, 복상사한 고 기집애, 여간 맹랑한 기집년이 아니구먼.”
“복상사는 뭐고, 맹랑한 기집년은 또…?”
“고 기집년이 글씨 동생 배 위에 올라타고 그 짓을 하다가 죽었다는 말 일시.”
“동생 배 위에 올라타고 그 짓을? 고 기집년이?”
누나는 여전히 어리둥절 감을 못 잡는다. 도대체 그 복상사라는 말도 누나에게는 너무 생소하다.
하지만 누나는 복상사고, 나발이고 상관없다 싶다. 당장 몸져 누운 동생이 탈탈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길만이 답답하고 궁금할 뿐이다.
“고년, 기집 귀신을 당장 동생에게서 떼어내 줄 순 없을까?”
누나의 안달은 고함에 가까운 옥타브로 튀었다.
하지만 친구 무녀는 여전히 딴청이다. 핏발 선 눈빛으로 누군가와 줄다리기라도 하듯 낑낑대며 안간힘이지 않은가. 심상찮은 무녀의 모습에 누나는 오싹, 몸이 오그라든다.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변화무쌍한 무녀의 표정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얼마를 지났을까. 크게 숨을 몰아쉰 무녀는 서슬 퍼런 얼굴빛을 누그러뜨리며 겁에 질린 누나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비로소 입을 연다.
“헛, 고년, 기가 보통 센 기집이 아니네. 내가 모시는 장군님도 어찌할 수 없다지 뭐여. 더 이상 동생이 끌려 다니지 않게 굿이나 하고 기다려 보라구먼.”
“고년이 머간디 그리 기가 세단가?”
“튼실한 빽이 있는 것 같아야.”
“튼실한 빽?”
“옥황상제를 가까이서 모시는 혼령이 고년의 아비라지, 아마.”
“그럼, 우리 동생은?”
서슴없이 누나의 입은 대성통곡이 터져 나올 듯 부풀어 있다. 무당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멋쩍은 웃음만 날리며 우둑하니 누나를 건너볼 뿐이다.
꼼짝 않고 잠만 퍼 자던 지상은 열흘이 채 지나지 않은 날 다 저녁때, 언제 그랬냐는 듯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동생의 머리맡을 지키던 누나의 얼굴은 그제야 안도의 기쁨으로 화들짝 펴진다.
“뭐 좀 먹어야지? 안 먹고 일주일 넘게 잠만 퍼 잤으니 얼마나 배가 고플까.”
하지만 지상은 누나의 걱정일랑 전혀 반응을 안 보인 채 군말 없이 제 방에 들어가 옷을 챙겨 입고 나온다.
“어딜 가려고? 나가더래도 한 술 뜨고 가지, 응?”
“배 안 고파요.”
퉁명스러운 대꾸를 남긴 지상은 휭, 집을 빠져나간다.
무녀 친구한테 들은 얘기가 있는지라 누나의 심기는 여간 불편하지 않다. 저러다 동생을 영영 잃는 건 아닐지 털컥, 겁도 난다. 초조한 나머지 다시 무당 친구를 찾아갈까 말까, 엉덩이를 들썩대던 누나는 굿이나 하고 기다려 볼밖에, 무녀 친구의 말을 되새기며 땅이 꺼지는 한숨과 함께 그 자리에 풀썩, 퍼져 버리고 만다.
“일어나, 오빠.”
지하가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지상은 부스스 눈을 뜬다. 더 좀 자게 해줘, 돌아눕는데 그녀의 흔들어댐이 여간 거칠고 다급하지 않다.
“조금 더 자게 해달라니까.”
“안 돼, 오빠. 날이 밝아오잖아?”
“날이 밝아오는 게 어째서?”
“날이 밝으면 돌아갈 수 없게 된단 말이야, 난.”
“종일 여기서 나와 지내는 게 싫어, 지하는?”
“이 바보야. 내가 산 사람이야? 죽은 사람은 낮엔 안 돼. 밤에만 나다닐 수 있다고. 그리고 이 집도 낮엔 을씨년스런 폐가로 변한다는 거 모르고 있었어, 오빠!”
그제야 지상은 겨우 감을 잡는다. 부리나케 일어나 주섬주섬 알몸에 옷을 걸치며, 저승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지하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우리, 언제 또 만날 수 있지?”
“날이 어둑해지면 언제든지 나올 수 있어, 난. 그럼 나, 먼저 간다, 내 일 밤 올 거지, 오빠?”
그 말을 끝으로 어느샌가 지하는 눈앞에서 휭 사라져버렸다.
뒤미처 지상도 서둘러 집을 빠져나온다. 동이 트기 무섭게 음침한 폐가로 변해버릴 집을 지킬 이유가 있을까. 지상의 손길도 바빠진다. 어느새 옷을 다 입은 그는 어둠이 남아 있는 이른 새벽의 찬 공기를 가르며 발걸음을 재촉한다.
“밤새 어디 있다가 이제 들어오는 거여?”
지상이 현관에 들어서자 부엌에 있던 누나가 부리나케 뛰쳐나온다. 그 다급한 목소리로 보아 밤새 잠을 설치고 동생을 기다렸던 게 틀림없다.
“다녀올 때가 있어서요….”
“근데, 얼굴빛이 왜 그 모양이여?”
“내 얼굴이 어째서…요?”
지하는 까칠한 얼굴에 손을 갖다 대며 빤히 들여다보는 누나의 눈길을 후다닥 피해버린다.
“백지장 같단 말이여. 어디가 아픈 거여?”
“아프긴. 밤새 여기저기를 좀 쏘다녔더니만.”
말을 마치기 무섭게 지상은 쏜살같이 자기 방으로 숨어든다.
지상은 어디론가 숨고 싶다. 근방 쓰러질 듯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지고, 그대로 서 있다간 보나 마나 꽈당, 꼬꾸라질 거 같은 어지럼증이 등골을 기어오른다.
그걸 본 누나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살을 저미어 온다. 저러다 동생을 잃는 건 아닐까? 또 다급한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한 누나는 서둘러, 기다려 볼 수밖에 없다는 친구 무녀를 찾아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선다.
“달려올 줄 알았어. 동생이 이제야 좀 제정신을 찾는 것 같잖냐! 뭔가 달라지는 게 안 보이더냐고?”
친구 무당은 다급해진 누나의 모습을 보자 사태를 짐작한 듯 먼저 운을 띄운다.
“새벽에 다 죽어서 들어 왔지 뭐여. 저러다 영영 동생을 잃은 것만 같아야.”
“아녀, 그 반대여. 아마 며칠은 죽은 듯 잠만 잘 거거든. 깨우지 말고 일어나면 아무 소리 말고 영양 보충부터 시켜주라고. 그간 고 기집 귀신에 씌워 육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을지 몰라야.”
“진짜 우리 동생, 괜찮을까?”
“나만 믿어. 참말로.”
나쁜 기집애, 저번에는 나 몰라라 발뺌하더니만. 그래도 마음을 주고 받을 친구는 무녀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느낀 누나는 모처럼 얼굴은 펴고 무녀 친구를 정겨운 듯 바라본다.
무녀 친구의 말대로 정신없이 밤낮 가리지 않고 잠만 퍼 자던 지상은 꼬박 닷새 만에 부스스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잠을 깨니 제일 먼저 찾아온 건 허기다. 왜 그리 배가 고픈지 모른다. 문밖에 대고 누나를 부르고 싶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듯 맥이 없고 처진 기운으로 목소리가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한 지상은 엉금엉금 방문 가까이 다가가 들입다 열어젖힌다.
“왜, 배고픈 거여?”
득달같이 달려온 누나는 기진맥진한 동생의 얼굴을 안쓰러운 듯 살핀다. 그리고 무녀 친구의 점괘를 믿은 듯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미리 준비해 둔 밥상을 들고 나타난다. 밥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뚝배기와 소금 종지, 깍두기 그릇이 달랑 놓여 있다. 보나 마나 동생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푹 곤 닭백숙을 준비해 놓은 게 분명하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야.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 있잖여.”
누나의 얼굴은 엄마의 보살핌이 뚝뚝 흐른다.
따지고 보면 누나는 엄마나 다름없다. 겨우 열서너 살 때 누나는 돌림병으로 한꺼번에 어머니 아버지를 잃는다. 제 몸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나이인데도 두 살배기 늦둥이 동생을 제 몸처럼 알뜰하게 보살핀다. 동냥질도 마다하지 않고, 본인은 굶어도 어떻게든 어린 동생만은 끼니를 거르지 않게 했을뿐더러, 더러 간식도 챙겨줄 만큼 온 정성을 다해 거둔다. 그 바람에 동생을 대학원까지 다닐 수 있었지만.
그것도 누나가 좋은 짝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나는 이웃집 할머니 집에서 하숙한 남자를 그 집 할머니의 소개로 알게 된다.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피난 내려온 그는 생활력이 보통 강한 게 아니었다. 채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한몫 단단히 하는 미장이가 돼 있었으니 말이다.
“여간 알뜰한 젊은이가 아닌디, 홀몸으로 어린 동상을 고로콤 보살피는 색시가 마음에 쏙 들었던지 보통 성화가 아녔당게. 중매 좀 서달라고 말이여. 어뗘, 한번 안 만나 볼랑가?”
이웃 할머니의 간청에도 누나는 완강했다. 전혀 시집갈 의향이 없을 뿐더러 더구나 어린 동생이 딸린 몸이잖은가. 나만 잘 살겠다며 후딱 시집을 가버린다? 누나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용납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젊은이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듯 불쑥, 집까지 찾아온다. 그리고 동생의 장래도 책임지겠다며 물불 가리지 않은 적극적 구애를 체면 불문하고 해오잖은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지만, 솔직히 ‘동생의 장래도 책임지겠다’는 그 말과 더불어, 듬직하고 믿음직한 젊은이의 의지가 누나의 마음에, 봄날 얼어붙은 개울물 녹듯 솔깃하게 울려왔을 게 틀림없으리라.
누나도 어느새 슬하에 남매를 둔다. 그렇다고 동생에게 쏟아온 누나의 정성이 멀어진 건 아니다. 남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람 없이 동생을 알뜰히 거두고 보살핀다. 동생도 조카들을 친동생처럼, 조카들도 삼촌을 친형, 친오빠처럼 따랐다. 누구보다 처남에 대한 매부의 초심, 남다른 관심과 배려로 가정은 늘 온기로 가득 찼다. 그래서 누나는 늘 고마움으로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죽은 지하가 끼어드는 바람에 자나 깨나 동생 생각뿐이었고, 살얼음 위를 걷듯 조마조마한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지하 고년과는…?”
끝내 누나는 불쑥, 묻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낸다.
“지하? 걔는 죽은 지 오래야, 누나.”
“저녁만 되면 자꾸 만나자고 찝쩍댄 거 아녔어?”
순간, 지상은 힐끗 누나의 얼굴을 살핀다. 한참 뒤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한다.
“누나, 끝났어. 다신 지하 걔, 찝쩍대지 않을 거야. 참말이야, 두 번 다시 걔를 꿈에서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꿈에서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누나는 금세 입을 다문다. 귀신에 씌운 거지 무슨 놈의 꿈? 그리 심통을 부리고 싶었지만, 이제 겨우 제정신을 차린 동생이라 생각하니 누나는 더 이상 깐죽댈 마음이 싹 가신다.
지하는 밥상을 물리자 노곤해진 몸을 방금 일어난 이부자리 위에 도로 눕힌다. 피로할 대로 피로해진 심신이다. 꿈을 꾸듯 밤이면 밤마다 그는 죽은 지하의 혼령에 이끌려 시달려 온 게 파노라마처럼 눈앞을 스친다.
늦게나마 지상은 지하가 자기를 놔 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날 밤 그녀는 그를 만나자 다른 날밤 때와는 달리 잽싸게 매달리거나 안기지 않았다. 깔린 이부자리 위에서도 옷을 벗기는커녕 뭔가 다급한 듯 잔뜩 부르튼 얼굴로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밤, 마지막이 될 거 같아, 오빠.”
“그게 뭔 소리지?”
깜짝 놀란 지상이 반문했지만, 지하의 결심은 만만찮았다.
“야단맞았어.”
“야단맞아? 누구한테?”
“누군 누구야. 염라대왕님한테지.”
“허락받았다고 안 그랬어?”
“거짓부렁이야, 죄. 만나고픈 마음으로.”
“까짓거.”
“안 돼, 오빠! 저승 율법을 어길 재간은 없어. 개심할 때까지 이미 지옥살이를 명 받았단 말이야, 염라대왕님한테.”
“그럼?”
“뻔하잖아. 우린 다시 이승에선 못 만나.”
퍼뜩, 지상의 머리에 일장춘몽이란 글귀가 떠올랐다. 제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디까지나 허황한 꿈이었고. 몇 날 며칠 꿈속을 방황하며 지하의 흔적, 혼령과 뒤엉키다 잠을 깨고 보니 무섭게 찾아든 건 허기였다.
지상은 밤마다 죽은 지하를 만나러 다니면서 이상한 현상에 무척 놀랐던 일을 잊을 수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실도 옆에서 본 것처럼 느껴졌고, 뭐든 하려 들면 저절로 이뤄졌다. 필시 죽을병에 걸린 걸까, 크게 당황했지만, 정신분석학을 전공한 지상은 곧 동시성(疎却何)2) 현상이라는 걸 알았다. 느닷없이 귀에서 죽은 지하의 목소리가 들렸고, 어제가 오늘처럼, 오늘이 어제처럼 착각되는 시간여행에 빠져 있었다는 것도 짐작됐다.
평상시와는 사뭇 다른 그런 현상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죽은 지하와 살아 있을 때처럼 사랑놀이를 즐길 수 있었지만, 왜 갑자기 폭풍우에 휩쓸리듯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는 미지수다. 아니다. 어쩌면 잠시 잠깐 졸음처럼, 피로할 대로 피로하고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의 빈 틈새를 비집고 든 무의식의 흐름일지 모른다.
지상은 오랫동안 망설여온 연구논문 제목을 ‘지상과 지하의 무의식적 고찰’로 정했다. 이승의 지상과 저승의 지하가 벌이는 사랑놀이를 모티브로 접근해 본 무의식적 흐름을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좇아본 내용이다.
연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내친김에 무의식적 고찰로 드러난 ‘초능력의 허와 실’도 이어 탐색해 볼 참이다. 그 모든 게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은 아니지만 무한대한 무의식의 흐름에서는 충분히 짚어볼 수 있는 연구 과제가 아닌지 싶다.
1) 시간여행(time travel): 타임머신을 이용, 시간을 넘나드는 것.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관계 있음.
2) 동시성(疎却何) 현상(synchronicity): 칼 융이 제창한 개념. 개별적인 인과 관계를 가진 두 가지 사건이 동시에 연속적으로 발생했을 때 둘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없지만 있는 것처럼 나타나는 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