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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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포장지에 싸여 조금은 설레게 하는 선물처럼 배달된 새로운 해가 순식간에 5개월이 지났다. 쉼 없이 흐르는 시간에 어찌 헌 해와 새 해가 있을까마는 흐르는 시간에 매듭을 묶어 놓고 시작이다 끝이다 하는 것은 지나간 실패를 인정하고 새롭게 정신 차려 살아 보자고 안간힘 쓰는 약한 인간의 가련한 노력일 것이다. 쌀쌀맞게 뒤돌아보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때 되면 성탄절 장식을 하고 봄맞이로 바쁜 정원의 새싹들을 돌보며 이제 겨울은 갔다고, 어느새 봄이라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희망 속에서 부활절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서 언제부턴가 나는 자주 생각하였다. 이번이 내가 꾸미는 마지막 성탄절 장식일지 모른다, 다음 해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부활절 장식을 할 수 있을까. 봄꽃을 기대하며 정원에 엎드려 잡초를 뽑고 비료를 주고 지지대를 세워 주며 남편이 명명한 로사의 정원(Le Jardin de Rosa)을 가꾸는 것이 어쩌면 이번 해가 마지막이 아닐까. 오래 전에 색연필로 손수 그리고 써서 붙여 준 정원의 이름표도 이젠 낡아서 찢어진 지 한참 되었다.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지나가면서 살아가려면 해내야 하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일조차도 나를 숨 가쁘게 한다. 꽃 못지않게 예뻤던 연한 연둣빛 나뭇잎이 압도할 듯한 거센 녹색으로 변해 가고 있다. 모든 에너지를 모아 피워 냈던 천지의 꽃들도 휘몰아치는 자신의 공연을 끝내고 시들어 가고 있다. 곧 가뭄도 장마도 오고 태풍도 몰아닥칠 것이다. 바람은 휘몰아치며 한사코 가지에 매달려 있는 파랗게 질린 아기 감을 거친 손으로 떨굴 것이다. 그리고 서늘한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나무는 새로운 생명을 위해 잎을 떨구고 철학자처럼 긴 침묵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윽고 해 기울고 서둘러 땅거미 지는 한 해의 끝과 함께 긴 밤이 오래 계속될 것이다.
나는 잠시 멈춰 서야겠다고 생각한다. 느려진 걸음걸이를 알면서도 속도를 줄이면 안 될 것 같아 숨 헐떡이며 걸어온 길에서 잠시 멈춰 서려 한다. 한숨 크게 쉬고 달라진 많은 것들을 받아들여 껴안으면서도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조금씩의 공간을 마련하려 한다. 돌 위에라도 앉아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아야겠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공존하는 법을 터득하고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나 척박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속삭이는 신의 뜻을 읽어 내며 살았던 아메리칸 인디언을 생각한다. 자신의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끝내 보호를 가장한 감옥 같은 인디언 보호 구역에서 바람결에도 느꼈던 신의 음성을 잃어버린 사람들. 문명의 이기가 아닌 문명의 무기 앞에서 존재를 부정당한 인디언은 세상 어느 종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더 신의 뜻을 살피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인디언들은 가끔 말을 채찍질하며 전속력으로 달리다 멈추어 서서 자기가 달려온 쪽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고른다고 한다. 그것은 미처 따라오지 못하고 뒤처진 자기의 영혼을 기다리기 위해서이다.
바득대며 고단하게 걸어온 나의 시간도 잠시 멈춰 서야 할 그 지점에 와 있는 듯하다. 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도 분명치 않은 채 좋은 모습으로 살아 보자고 세웠던 결심과 계획들은 시간과 함께 그 형체가 희미해졌다. 시간에 쫓기고 상황에 떠밀려 중심을 잃은 채 허둥대며 마음 밖으로 사라진 내 마음이 언제 나간 줄도 몰랐다. 그 마음을 찾아 한 번 찬찬히 들여다봐야겠다. 허우적거렸던 미숙하고 가련한 시간과 때로 유치하게 들떠서 의기양양했던 시간을 얼굴 붉히며 생각해 보겠다. 그리고 너그럽게 나를 용서하고 위로하면서 남아 있는 나의 시간 안에서 끈질기게 둥지를 틀고 숨죽이고 있는 소망과 기대도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 메마른 내 안 깊은 곳을 더듬어 남아 있는 진심과 순결한 소망을 마지막 하나까지 길어 올리며 기도해야겠다. 영원 같아 보였으나 순간이었던 나의 삶의 여정에 함께해 준 모든 존재와 영혼의 따뜻함을 소중히 간직하겠다. 지쳐 쓰러져 다시 일어서고 싶지도 않았던 순간들, 길 아닌 길을 따라 가버리고 싶었던 순간에 끝내 나를 붙잡고 포기하지 않으며 침묵 속에서 염려와 위로를 보냈던 신의 사랑을 기억하고 간직하겠다.
‘악한 세월 속에 나이만 먹은 당신(다니엘서 13:52)’이라는 말은 때로 나를 매섭게 후려친다.